자본주의에 대한 그린스펀의 숭고한 신념

파이낸셜타임스가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라는 기획으로 여러 유명인들의 칼럼을 싣고 있다. 사실 매스미디어는 ‘자본주의’라는 직설적인 표현을 그리 자주 쓰지 않는다. 대신 ‘시장경제’ – 또는 우리나라 같은 경우 ‘자유민주주의’ – 라는 에두른 표현을 쓰곤 한다. 하지만 현재 진행되고 있는 ‘시장의 실패’가 단순히 특정단계의 경제적 국면에 의한 실패가 아닌 체제의 근간을 삼고 있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실패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주류사회에서조차 제기되면서, 마침내 매스미디어는 ‘자본주의’란 단어 그 자체를 호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反자본주의자들의 신랄함은 “정실 자본주의”와 자유 시장을 혼동하는 이들에게서 가장 두드러진 것 같다. 정실 자본주의는 정치적 지도자가 – 대개 정치적 지지를 위해서 – 통상적으로 민간부문의 개인이나 기업에게 특혜를 부여할 때 자주 일어나곤 한다. 그건 자본주의가 아니다. 그건 부패라 불린다. 자본주의와 관련하여 종종 비난을 받는 탐욕은 사실 시장 자본주의의 특징이 아닌 인간성의 특징이고 모든 경제체제에 영향을 미친다. 점증하는 소득의 불평등에 관한 합당한 우려는 자본주의가 아닌 세계화와 혁신을 반영하고 있다.[Meddle with the market at your peril]

설명이 필요 없는 유명인사 알란 그린스펀의 글이다. 글의 전체적인 내용은 자본주의의 우월성에 관한 내용이다. 그는 체제의 우월성을, 사라진 사회주의 실험과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고루한 체제비교가 다소 위안을 될지언정 당면문제를 푸는데 그리 도움은 되지 않는다. 어떤 종양이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하기 위해 다른 종양의 문제점을 거론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인용문은 그린스펀이 ‘자본주의’라는 종양의 부작용에 대해서 그나마 언급한 부분이지만 그마저도 자본주의가 원인은 아니라고 말하는 대목이다.

정실주의, 부패, 탐욕, 불평등이 그린스펀이 내뱉은 부정적인 단어들이다. 그에 따르면 이런 것들은 인간성 자체의 문제거나, 정부라는 존재의 문제거나, 세계화 등의 국면에서 특정하게 나타나는 부작용일 뿐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자체는 이런 것들과는 관련이 없다는 것이 그린스펀의 주장이다. 칼 맑스는 생산수단의 사적소유가 언급한 모든 것들의 원인이라 분석했고, 아담 스미스는 이기심이 자본주의를 발전시킨다며 면죄부를 부여했지만 그린스펀은 이 모두를 부정한 셈이다. 상관관계에 대한 이런 전면적인 부정은 오히려 신선해 보인다.

그린스펀 말처럼 봉건제 등 다른 체제에서도 – 심지어 舊사회주의에서도 – 언급한 부작용들은 존재해왔다. 그것이 인간성에 내재된 특징이란 설명도 일리 있다. 하지만 어떤 현상의 원인을 따질 때 이런 근본주의적 주장은 그리 실용적이지 않다. 환경오염의 원인이 ‘인간의 존재’ 자체라고 말하면 딴에는 옳은 소리지만 무책임한 소리다. 자본주의가 시장의 확장을 위해 세계화를 가속화했고, 사적소유가 탐욕을 부추겼고, 그 결과가 불평등의 심화라는 이론적으로 개연성 있는 주장을 그린스펀은 ‘인간이 원래 그래’라고 맞받아치고 있는 셈이다.

자본주의의 놀라운 생산력은 다른 체제를 압도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반체제의 이념을 체제 안으로 흡수하는 신축성으로 한때 선순환이 가능한 체제가 아닌가 하는 자부심까지 위정자들에게 불어넣어주었다. 하지만 그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 여전히 설득력 있는 이론 하나는 칼 맑스의 ‘이윤율 저하 경향의 법칙’이다 – 과거와 같은 관성으로 체제가 발전하기 어렵다는 개연성이 높아지고 있다. 이런 체제 내의 부작용에 대해 주류학자까지 동의하는 와중에, 그린스펀의 숭고한 신념을 학문적이라고 받아들이기는 매우 어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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