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의 취사선택

대처는 이른바 보수주의자들이 영국병이라 지칭한 정체되어 있는 영국을 치유하기 위해 각종 혁신적 조치를 들고 나온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그 유명한 ‘민영화(privatization)’다. 대처를 비롯한 보수당 정권은 이 말이 가지는 부정적인 뉘앙스 때문에 ‘비국유화(denationalization)’ 등 다른 대체할만한 표현을 생각해보았으나 결국 자신들의 의지를 이만큼 잘 표현해주는 단어가 없었기에 그것을 채택하였다고 한다.[출처]

위와 같은 사연은 다니엘 예르긴(Daniel Yergin)의 ‘시장對국가(원제 The Commanding Heights)’라는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사연이다. 부연하자면 대처와 보수당은 그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이전의 집권당이었던 노동당의 ‘국유화(nationalization)’된 시설뿐만 아니라 신규 시설이나 서비스를 시장을 통해 공급하는 조치 일반을 개념에 포함시키기 위해 ‘민영화’라는 단어를 선택하였다. 이렇듯 세상사에 있어 단어의 선택은 – 특히 정치권에서 – 그것이 가질 뉘앙스와 편견, 그리고 거부감 등을 고려하여 신중하게 취사선택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나라의 예를 들자면 ‘노동자’와 ‘근로자’, 두 단어의 사용을 들 수 있다. 오랜 독재시절 ‘노동자’라는 표현은 과격한 진보세력, 그 당시 표현으로 빨갱이들이나 쓰는 표현으로 터부시되었고 ‘근로자’라는 표현이 쓰였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둘 사이에 이념적 뉘앙스의 차이는 전혀 없는데도 말이다. 더 나아가 정권은 5월 1일 노동절(Mayday)을 다분히 고의적으로 3월 10일 ‘근로자의 날’로 대체해버렸다. 그렇게 함으로써 노동절을 노동자들이 자신의 힘으로 쟁취한 권리의 기념일이 아닌 ‘근로자’의 노고를 치하하는 어르신들의 체육관 잔치로 변질시켰다.

위에 예로 든 ‘민영화’라는 단어 역시 어떻게 보면 영어 표현의 부정적 의미를 더욱 탈색시키기 위해 선택된 단어라 할 수 있다. privatization의 동사형인 privatize의 영어해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to transfer from public or government control or ownership to private enterprise: a campaign promise to privatize some of the public lands.[출처]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control과 ownership이다. 실제로는 ownership, 적어도 그에 상당하는 권리가 민간, 그 중에서도 민간자본에 이양되어야 함을 의미한다면 privatization은 운영에 초점을 둔 민영화(民營化)보다는 소유권에 초점을 둔 사유화(私有化)가 더 합당하다 할 것이다. 그럼에도 사유화가 가지는 부정적 뉘앙스 때문에 그 단어는 선택되지 못하였다 할 수 있다.

어쨌든 신자유주의 사조의 상징인 privatization은 그 신중한 단어선택의 덕이었는지 전 세계를 휩쓸며 하나의 시대적 대세로 자리잡아왔다는 점에서는 성공적인 단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그 실천이 시급함에도 불구하고 단어 그 자체 때문에 실천이 보류, 또는 거부되고 있는 경제행위가 있는데 ‘국유화(nationalization)’가 바로 그것이다. 특히 그 조치가 시급하다고 전문가들이 지적하고 있는 미국에서 국유화는 단어의 불온함으로 인해 거부당하고 있다.

“And we also have different traditions in this country. Obviously, Sweden has a different set of cultures in terms of how the government relates to markets and America’s different.”[출처]

ABC뉴스와 최근 인터뷰를 가진 오바마 대통령이 왜 은행들을 국유화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경제규모의 차이와 함께 이유로 거론한 내용이다. 여태 약간은 문화적 차이가 그렇게 큰 장벽일까 하고 생각되기도 했지만 오바마의 저 발언을 보면 국유화는 분명 미국인에게 있어, 특히 정치인에게 있어 하나의 확고한 금칙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국유화는 미국식의 경제 자유주의의 상극이라는 편견은 매우 견고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미국의 한 경제 블로그의 주인장이 이러한 문화적 거부감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Calcurated Risk의 주인장이 바로 그 분인데 그 분이 신중하게 취사선택한 단어는 바로 ‘preprivatization’이다. 우리말로 굳이 해석하자면 ‘전(前)민영화’ 또는 ‘예비민영화’ 쯤으로 해석할 수 있겠는데 어차피 나중에 다시 민영화할 은행들의 부실자산 정리를 위해 국유화를 시키는 행위를 저렇게 부름으로써 이념적 트라우마를 피해가자는 소리 같다. 왠지 ‘노동절’ 대신 ‘근로자의 날’을 신설한 그 옛날의 관료의 발상이 저 블로거와 같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단어의 취사선택은 그 자체로 정치적 행위다.

13 thoughts on “단어의 취사선택

  1. login

    이런 글에 댓글을 달기 가끔 상당히 부담스럽습니다. 그냥 제 사견입니다만 어차피 미국도, 오바마도 그 뒤에 보이지 않는 금융권력에 꼭두각시가 아닌가 싶습니다. 금본위제를 폐지한것 부터 어쩌면 우리는 통화의 노예가 된듯.. 죄송 관련없는 댓글-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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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비트손

    안녕하세요. foog님. 2008 올블로그 어워드 후보에 최종 선정되셨다는 소식을 알려드리려고 댓글 남깁니다. 어떤 부문에 후보로 오르셨는지는 16일 오후 쯤에 어워드 페이지에(http://award.allblog.net)에서 공개예정이구요.

    각 부문별 투표를 진행하는 별도의 페이지 이외에 투표 위젯을 배포할 예정입니다. 투표는 16일부터 23일까지 진행됩니다. 기타 궁금하신 사항은 올블로그 운영팀메일(ace@blogcocktail.com)이나 운영팀블로그로(http://mindlog.kr/ace)로 문의해 주시면 안내해드리겠습니다.

    2008 올블로그 어워드에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리겠습니다. (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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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tomahawk28

    말장난 이라고 부르지만 말장난만큼 사람 정신 쏙빼놓는게 없네요 ㅋㅋ
    또하나의 pre어워드 미리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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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지혜의길

    민영화라는 단어 선택… 재미있네요. 생각해보니 민간 소유로부터 발생하는 부정적인 측면(사적독점)보다, 민간이 운영함으로써 발생하는 긍정적인 측면(효율성)을 부각시킨 절묘한 네이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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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beagle2

    ‘preprivatization’ 이라는 말, 저 개인적으로는 무척 마음에 안 드네요. 길고 복잡해서 저 단어를 사람들이 널리 쓸 것 같지도 않고요.

    ‘코끼리는 생각하지마’에 나온 ‘적의 언어 사용하지 않기, 적의 프레임에 사로 잡히지 않기’는 의미있고 유용한 제안이지만 뭐든 그렇듯이 그것에 지나치게 함몰되면 안 될 거 같아요. 상황과 목적을 잘 따져보고 때로는 정면으로 맞대응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고 봅니다.

    가령 빨갱이라는 말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욕설로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 나 빨갱이다, 그래서 뭐’ 라고 외치며 당당하게 정면으로 맞대응하는 사람이 차츰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공개석상에서 저런 말을 썼다가는 그런 말을 쓴 사람을 우습게 만들어 버리게 됐잖아요.

    그런데 (신)자유주의자들은 말장난 하나 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하죠. 공격을 받게 되었을 때 때로는 통념을 거꾸로 전복하며 정면으로 맞대응해 이겨내고 (이런 부분에서 네오콘의 사회주의 전력이 이렇게 쓰이는 구나 싶더군요) 때로는 교묘하게 물타기 해대면서 빠져나가는 걸 보면 찬탄이 터져 나올 지경입니다.

    아무튼 미국에서도 당당하게 사회화와 사회주의라는 말들이 사용되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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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oog

      프리프라이… 한글로 쓰려니 발음도 안되는군요. 말씀대로 거의 쓰이지 않고 폐기될 단어같습니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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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호박꽃

    과거 70, 80년대 3세계 국가들이 NIEO를 제시하면서, (자신들의 국가에 진출한 선진국들의 기업들을 국유화 하면서) 서방 선진국들의 반발을 피하기 위해 ‘국유화’라는 단어 대신, ‘경제에 대한 주권행사’라는 표현을 쓴 것을 떠올리게 하네요.

    아무래도 ‘국유화’라는 단어에 포함된 국가에 의한 강제적인 수용의 이미지를 지우고, 서방 선진국들이 강력하게 동의하는 국가주권 최고성의 원칙의 행사라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겠죠.

    국가들이나 국제기구들이 외교를 하면서 단어 하나하나에 신중을 기하고, 조약문의 단어 하나하나의 뉘앙스를 가지고 몇달을 씨름하는 것도 그런 언어 이미지의 힘 때문이겠죠.

    언어의 힘-_- 무섭습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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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oog

      요즘 선택하는 단어와 타이밍으로 좌절감을 안겨주는 이들이 몇몇 있죠. 기와가 푸른 곳에서도 서식한다는 소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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