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유화의 추억

농부들은 최저 가격을 보장받았다. 석탄, 전기, 가스, 수도가 국유화되었다. 운송 위원회가 설립되어 이미 국유화된 철도를 4,000개의 트럭사업체를 포함한 도로교통 서비스와 연계했다. 노동당 좌파는 노동자의 경영 참여 논의가 전혀 없다는 데 분개했다. [중략] 이제 대규모 제조업을 진두지휘하는 것은 공무원들의 몫이 되었다. [중략] 국유화 – 애틀리는 ‘사회주의화’라는 용어를 더 선호했다 – 는 비용도 많이 들고 까다로운 사업이었다. 전쟁 동안 소홀한 경영과 투자 부족으로 부실해진 기업을 매입하려면 주식 보유자들에게 배당금을 지급해야 했다. 철도와 함께 도시의 쓰레기 처리장, 사우스햄튼과 헐 지역의 대규모 항구들, 허물어질 듯한 기차역 주변의 호텔들과 그 옛날 제국주의 시대부터 있었던 토머스 쿡 같은 여행사들도 모두 국유화되었다. [중략] 개혁 프로그램의 재정을 충당하기 위한 세금 인상은 주로 부자들에게 피해를 입혔다. 상위 10만 명의 실질소득은 1938년과 1949년 사이에 65퍼센트 하락했고, 상위 50만 명의 실질소득도 3분의 1이상 하락했다. 부자들은 살아생전에 1파운드당 10펜스만을 남겨놓고 모두 빼앗아가는 높은 세율에 시달렸고, 죽어서는 그 후손들이 상속세를 내기 위해 부동산과 소장 예술품을 매각해야 했다. 중간계급 역시 타격을 입었다. 세금을 공제한 이들의 실질소득은 전후 초기 몇 년간 7퍼센트 감소했지만, 노동계급의 실질소득은 오히려 9퍼센트 상승했다.[20세기 포토 다큐 세계사 2 : 영국의 세기, 브라이언 모이나한 지금, 김상수 옮김, 북폴리오, 2006년, pp212~213]

1979년 집권한 “鐵의 여인” 마가렛 대처가 “민영화(Privatization)”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민간에게 그 소유권을 넘기기 전까지 상당기간 지속되었던 영국의 주요산업 국유화가 처음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잘 설명해주는 대목이라 옮겨 적어보았다. 주요하게는 사회기반시설을 위주로 하여 국유화가 진행되었고 이에 대한 재원은 높은 비율의 누진세 등을 통해 충당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45년, 영국에서 치러진 선거는 “전쟁영웅” 조지 윈스턴 처칠과 “콧수염과 매너 모두 깔끔한” 온건한 사회주의자 클레멘트 애틀리와의 싸움이었다. 처칠은 토지, 대형건물, 은행 등을 공유화해야 한다는 노동당의 결의를 보고 볼셰비즘을 떠올리며 영국에 게슈타포가 등장할 것이라 경고하는 등 노동당의 공포정치를 주장했지만, 그의 희망사항과 달리 선거결과는 애틀리의 노동당의 압승이었다.

이러한 선거결과는 처칠의 정세인식과 당시의 사회분위기가 달랐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전쟁과 이로 인한 가난에 지친 사람들은 좀 더 나은 의료 서비스와 교육 등 사회개혁을 요구하고 있었고, 젊은 보수당 의원들조차 이러한 분위기에 동조했다. 노동당의 선동가 어나이어린 베번이 관철한 국민의료보험(NHS)이 이후 영국인의 큰 사랑을 받게 된 것은 이런 사회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다.

혁명을 선언한다면 기껏해야 “기차 시간표를 변경하는” 정도일 것이란 평가를 받던 애틀리가 이런 급진적인 조치를 취한 배경에는, 또한 영국이 전쟁을 치르면서 입은 처참한 피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전쟁기간 동안 영국에서는 주택 400만 채가 손상을 입었고 50만 채가 파괴되었다. 전쟁수행비용은 280조 파운드였다. 전체 금 보유량의 3분의 2와 40조 파운드의 해외자산이 사라졌다.

1917년 볼셰비키가 겨울궁전을 접수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한 사건은, 후에 에이젠슈타인이 그의 영화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것처럼 묘사한 것과 달리 사상자도 그리 많지 않은 싱거운 접수였다고 한다. 당시 러시아의 상황은 이미 무정부상태에 가깝고 권력의 핵이었던 겨울궁전은 공백상태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애틀리 내각 역시 어쩌면 영국의 이런 공백상태를 접수한 것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세계 최강의 자본주의 국가에서 진행되었던 이 사상초유의 실험이 이후 체제 발전에 미친 영향은 심대한 것이었다. 자본주의 시민들은 사상 처음 국유화를 통한 서비스의 공급을 경험하였고, 이 경험은 이후 경제정책 입안과 경제이론의 논쟁에 있어 중요한 시금석이 되었다. 대처가 민영화란 단어를 유행시키고 신자유주의가 득세하고 있는 지금까지도 국유화의 추억은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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