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약을 까먹지 말자

오늘은 2232년 2월 22일. 나는 서른다섯 살의 김병선이다. 이 사실들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미리 말해두는 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친절한’ 1인칭 시점 소설의 화자(話者)다. 앗 실수! ‘친절한’은 ‘화자’ 앞에 두어야 한다.

내 아내 ‘이성은’은 지금 한창 몸치장중이다. 오늘은 우리의 결혼기념일 10주년이다. 그래서 나가서 외식을 할 예정이다. 목적지(目的地)는, 아니 정확하게 목적시지(目的時地)는 2222년 2월 22일 우리가 결혼식을 올렸던 레스토랑 ‘치엘구스또’다. 근데 이 글을 읽는 독자 중 어떤 이는 10주년이라고 뭔가 거창한 선물을 해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는 않다. 우리의 시대는 이미 십진법이 폐지되었기 때문에 굳이 10주년이라고 여인네들이 부산을 떨지는 않는다.((괄호를 두개 닫고 아내 몰래 하는 이야기인데 사실 십진법을 폐지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10주년, 20주년 등을 기념하여 거창한 선물을 주기가 아까운 남자들의 속셈도 있다)) 헴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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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시에 도착한 레스토랑은 제법 붐볐다. 2222년의 하객들이 물론 대부분이었다. 2222년의 나는 하객들에게 인사하느라 정신이 없다. 나를 보자 반갑게 다가와 인사를 나눴다. 대뜸 한다는 소리가 ‘이게 뭐야 살 좀 빼라.’다. 아닌 게 아니라 1년 만에 부쩍 살이 붙었다. 요즘 당국으로부터 할당된 성형 쿠폰을 지방제거대신 피부 관리에 써서 그렇다고 변명했다.

‘미래의 손님들’에게 할당된 특별석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아내는 저쪽에서 3년 전의 아내와 수다를 떠느라고 정신이 없다. 주요화제는 3년 전의 아내가 고른 마루 벽지의 색깔이 이제 와서 맘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반대편을 보니 작년의 나와 아내가 있었다. 살짝 손을 흔들어주었다. 작년의 내가 싱긋 눈인사를 보냈다. 살찐 늙은이와는 별로 어울리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다. 아내는 지금보다 살이 조금 더 찐 것 같아보였고 왠지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담배를 펴대고 있었다. 어렴풋이 그때 레스토랑에 오기 전에 사소한 문제로 다퉜던 기억이 났다. 

제일 어린 나는 결혼식의 나를 제외하고는 5년 전의 나였다. 왜냐하면 타임머신이 상용화되어 출시된 것은 2225년이었고, 우리는 그 후 가격이 상당히 내려간 후에야 구입할 여력이 생겼기 때문이다. 처음에 방 하나를 가득 차지하는 육중한 철제 캐비닛 같았던 타임머신은 이제는 원통형 세탁기와 일체형으로 출시되고 있다. 물론 그 때문에 가끔 깜빡 잊고 세탁기능으로 버튼을 해놓은 채 통속에 들어갔다가 세제와 물세례를 당하는 일도 있다.(어떤 제품은 냉장고와도 일체형이어서 가끔 세탁물이 얼기도 한다) 그런데 제일 나이 많은 나는 서른다섯의 나였다. 그 이후의 우리 부부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결혼기념일을 다른 곳과 시간에서 보내기로 하였든지 아니면 아내와 헤어지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했다. 후자라면 별로 유쾌한 일은 아니다.

웨이터가 다가왔다.

‘손님 예약은 하셨습니까?’
‘아차~’

수다를 마치고 자리에 돌아온 아내가 가시눈을 뜬다. 이 레스토랑은 철저한 예약제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매년 그렇게 까먹니?’

2년 연속이다. 예약을 까먹은 것도 아내에게 똑같은 구박을 듣는 것도. 바로 작년의 우리 부부가 싸운 이유였다.

‘저.. 예약을 할 테니 가능한 시간대를 말해주실래요?’

웨이터에게 말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 예약을 할 셈이었다.

‘2222년 2월 18일 오후 4시가 가능하군요. 그때 예약 부탁합니다.’

이골이 난 듯 웨이터는 사무적인 목소리로 예약가능시간을 말하고는 사라졌다.

결혼식은 늘 그렇듯이 여전히 지겨웠다. 졸음을 유발하는 주례사, 결혼 후 한번도 꺼내보지 않은 홀로그래픽 촬영, 레퍼토리가 바뀌지 않는 예전 친구들의 짓궂은 피로연. 수를 세기 귀찮은 아내‘들’은 수다로 정신이 없고,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나‘들’의 피로한 표정. 그 와중에 아직 담배를 배우지 않은 서른 살의 나는 여기는 왜 금연석을 제공하지 않느냐고 웨이터에게 투덜댔다. 그렇게 2222년 2월 22일 저녁은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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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내 잘못도 있었지만 레스토랑이 너무 고지식한 것이었다. 식사한 날로부터 10년 2개월 3일까지 예약을 하지 않으면 그 이후는 예약이 불가능하다는 규정은 뭐냔 말이다. 그 예약가능 기간이 정확히 어제 날짜로 지나버렸다.(이론 상으로 예약 가능 기간의 어느 날짜로 돌아가서 또 다시 예약일인 2월 18일로 가면 되지만 이렇게 두 번 연속 과거로 가는 기술은 아직 개발이 안 되었다) 여러 사연이 있었다. 주말이면 방을 굴러다녀야 했고, 주중엔 사무실을 굴러다녀야 했고, 그 사이에 세탁기가 – 정확하게는 세탁기+타임머신 일체형 – 고장 나서 수리를 맡겨야 했고 … 그리고 세탁물로 잔뜩 밀려있었다.

레스토랑의 엄격한 규정에 따라 결국 나와 아내는 기억국(記憶局)에 출석하여 결혼기념일, 아니 정확하게는 결혼일의 기억을 지워야 했다. 결국 우리는 그날 레스토랑에 가지 않은 것이고 그들로부터 서비스를 받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지불한 비용은 세금과 수수료를 제외하고 50% 환불된다. 아내에게 엄청난 구박을 들어야 했다. 기억국 가는 내내 구박은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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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국 직원 김태우는 김병선씨와 함께 온 여자에게 홀딱 반했다. 그녀의 앙칼져 보이는 눈매와 깨끗한 살결, 간간히 들리는 여성스러운 웃음소리 모두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아주 멋진 범죄를 저지르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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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233년 2월 22일. 나는 서른여섯 살의 김병선이다. 이 사실들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미리 말해두는 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1인칭 시점 소설의 ‘친절한’ 화자(話者)다. 나는 여전히 처량한 싱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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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233년 2월 22일. 나는 서른일곱 살의 김태우다. 나도 ‘친절한’ 화자(話者)다.

‘여보 성은씨. 오늘 결혼 11주년인데 우리 근사한 홀로그래픽 영화나 한편 볼까?’

샤워 중이던 아내에게 말했다.

‘좋아요. 예약하는 것 잊지 말아요!’

‘두말하면 잔소리지. 절대 예약은 까먹지 않아!~’

3 thoughts on “예약을 까먹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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