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에 관한 잡념

주식의 ‘소유자’인 주주로서의 지위를 기꺼이 포기한다는 오바마의 발언을 접하니 문득 예전에 끼적거렸던 소유의 의미에 관한 글이 생각나 퍼온다. 2005년 쯤 어느 게시판에 올렸던 글이다. 지금 다시 읽어보니 개똥철학인데 이런 잡생각도 있다는 것을 공유하는 차원에서….

국토의 80% 이상을 국민의 5%가 소유하고 있다는 신문보도를 접하고, 또 그것을 비판한 ‘꿈꾸는 사람’님의 글을 읽고 ‘과연 소유란 우리 인간에 어떤 의미인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본다. 인간은 왜 소유하려 하고 왜 소유권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일까?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것은 욕망이자 불안함이다. 인간이라는 동물만이 독특하게 지니고 있는 소유에 대한 욕망은 소유함으로써 느끼는 현재의 쾌감과 그 소유를 통해 미래의 불안을 해소시키려는 필요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봉건제까지만 하더라도 소유는 왕족 등 축복받은 극히 일부의 권리였다. 봉건시대의 왕들은 곧 국가 그 자체였고 그는 모든 토지 및 각종 물질들을 소유하고 관리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소유권을 신하들에게 자신의 소유권을 빌려주는 일종의 봉토(封土, Lehen)의 형태로 권력을 유지하여 왔다. 그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수익을 낳을 각종 권리 및 금전급여로까지, 그리고 세습으로까지 확대되었지만 그것은 여전히 왕의 재산을 빌리는 형태였다.

이후 자본주의에 접어들고 시민권이 확대되면서 시민은 천부적으로 무엇인가를 소유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인식을 하게 된다. 철학자 존 로크는 그의 저서를 통해 자연에서 난 모든 것들을 선점하는 이가 정당한 소유권이 있다는 주장을 하여 이러한 소유권의 개념을 정당화하였고 이후 프로테스탄트 학자 등 여러 근대학자들은 인공생산물과, 심지어 자연의 소유를 정당화하였다. 그와 함께 근대 기독교는 돈을 빌려주는 것에서 이윤을 취하지 말라는 종래의 주장을 철회하면서 소유를 통한 이윤의 획득의 이론적 기반을 만들어주었다.

이에 철학자 존 로크를 알던 모르던 간에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은 누구나 적자생존의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소유의 권리를 최대한 행사하여 자신의 쾌락을 증진시키고 나아가 미래의 불안을 잠식시키려 노력했고 그 중 상당수는 이전 시대에 얻지 못했던 강렬한 소유의 쾌락을 맛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최선이었던가? 그리고 그것이 공정한 게임이었던가?

사실 시작부터가 공정하지 못한 게임이었다. 이른바 본원적 축적으로 알려진 불공정한 분배에서부터의 시작은 기득권이야말로 그 어떠한 철학적 정당성을 부여한다 하더라도 도덕적으로 온당치 못한 권리임을 반증하였고, 소유에 일상적으로 동반되는(특히 생산수단의 소유에) 타인의 착취는 사람 사는 곳이 야수들이 사는 정글만큼, 오히려 정글보다 더 혹독하고 잔인함을 알게 해주었다. 사자는 사슴을 잡아먹기는 할지언정 착취는 하지 않는다. 대개의 사람은 사람을 잡아먹지는 않지만 착취하는 방법은 잘 알고 있다.

국토의 대다수를 차지해서 과연 얻게 되는 효용을 얼마큼이나 될까? 잘 알지는 못하지만 주류경제학에서도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한계효용의 이론에 따르자면 막대한 토지를 차지하고 있는 지주가 토지의 증가에 따라 느끼는 효용은 점차 감소할 것이다. 나중에는 땅 평수 계산하기도 귀찮을 것이다. 즉 쾌락이 수확체감의 법칙을 따라 둔감해질 것이라는 가정이 가능하다. 그런데도 그는 계속 땅을 더 늘리려고 한다. 왜? 그냥 그러고 싶으니까? 소유라는 개념에 중독된 것은 아닐까?

인간은 돈버는 방법을 배우기 이전에 욕망을 절제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하지만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그런 류의 교육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유교의 ‘안빈낙도’ 정신 같은 케케묵은 훈계는 해당과목의 시험점수 딸 때나 써먹는 것이 된지 오래다. 오히려 경제신문에서는 아이들에게 금융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다그치고 있다. 돈버는 방법을 일찍부터 배워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이제 승용차도 단순히 승용차가 아니라 마티즈냐 SM5냐가 중요하고, 집도 강북의 20평 단독주택이냐 강남의 래미안 34평형이냐가 중요한 세상이 되었다.

한번은 좀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다. 소유란 무엇인가? 아무리 인간이 소유했다고 우겨도 결국 그것은 자연으로부터 빌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죽을 때 단돈 1원이라도 가져갈 수 있어야만 ‘진정한’ 소유가 아닐까? 제 몸뚱이도 못 가져가는 주제에 무슨 소유? 코란에 따르면 모든 부는 신으로부터 빌린 것이기에 돈을 빌려줘도 절대 이자를 받지 말라는 게 이슬람의 교리이고 내 잡념이 언뜻 그런 교리와 일맥상통하는 듯도 하지만 무신론자인 내가 신을 자연으로 대체시킨다 해도 과히 틀린 말도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더 많은 소유를 꿈꾼다. 그리고 자신의 계좌에 돈의 액수가 찍히고 어느 곳 몇 평이 자신의 소유라고 적힌 서류 한 장을 보면서 그것들을 자신이 소유했다고 ‘착각’한다. 자본주의에서는 그 ‘착각’이 극대화되어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이상을 소유하기 위해 남을 착취한다. 그것이 남에게는 고통인줄도 모른다. 이거야말로 정신적 착각이 물질의 세계를 난도질하는 또 하나의 매트릭스가 아닐까?

쉽게 결론내릴 수도 없는 물음이었다. 소로우가 ‘월든’에서 주장한 것처럼 극도의 검소함을 요구함도 무리가 있고 ‘소유는 착각 일뿐이라고’ 지하철마다 돌아다니면서 떠드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결국 착각을 현실로 인정한 채 시스템으로 소유를 ‘시대정신에 부합하도록 정당하게’ 통제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법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현재의 시대정신은 분명 무한(無限)의 소유는 자유주의적이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타인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측면에서 반(反)자유주의적이라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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