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는 현재가 규정한다

바로 얼마 전 2월에 풍요부는 1984년 중에는 초콜릿 배급량을 줄이지 않겠다고 약속(공식 용어로는 이를 ‘절대 서약’이라고 한다.) 했었다. 그러나 윈스턴이 알고 있듯 실제로는 초콜릿 배급량이 이번 주말부터 30그램에서 20그램으로 줄어드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처음에 약속했던 내용을 4월 언제쯤 배급량이 감소될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바꿔놓기만 하면 되었다.[1984,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민음사, pp58~59]

“민주적 사회주의자”를 자처한 조지 오웰이 스탈린이 통치하고 있던 소비에트 사회주의를 풍자하여 쓴 SF소설이다. 주인공 윈스턴 스미쓰는 진리부(Ministry of Truth)에 근무하며 이렇듯 역사에 대한 오류들을 바로(?) 잡는다. 이 경우처럼 그는 정부가 어떤 약속을 했고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을 때 그 이전의 약속을 고쳐놓는다. 이런 묘사는 실지로 스탈린이 통치 기간에 저질렀던 – 심지어 사진 속의 인물을 지워가면서까지 – 역사 왜곡을 비판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스탈린이 극적이고 잔인한 사례지만 이렇게 과거를 고쳐서 미래를 지배하려 했던 정부는 꽤 많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NLL대화록을 둘러싼 우리의 정치권 논쟁도 비슷한 사례다. 노무현 前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과 어떤 대화를 했는가 하는 것이 대화록만 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을 문제로 보였는데, 그 뒤 수많은 배우가 등장하면서 판을 흔들고, 대화록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슈로딩거의 대화록’이 되어 현재를 뒤흔드는 과거가 되었다.

다행히 우리의 현실은 1984년에서의 현실처럼 윈스턴의 간단한 업무처리를 통해 과거가 바뀌는 정도로 폐쇄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과정이 덜 폐쇄적이 되었다는 것이 과거를 흔들어대는 행태를 쳐다보는 우리의 시선을 덜 고통스럽게 하지는 않는 것 같다. 오히려 그 “현폐(現弊)”가 “적폐(積弊)” 탓을 하는 부조리한 과정을 육안으로 확인하며 – 사실은 통념과 다르다며 끊임없이 과거를 흔들어대는 수구매체에 시달리면서 – 우리의 인식은 한층 혼란스러워진다.

과거는 현재가 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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