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평범성’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단초

아이히만은 다르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학교에 다닐 때부터 그를 분명히 괴롭혔을 결점(경미한 실어증 증세)을 희미하게 깨닫고 있던 그는 사과하면서, “관청용어(Amtssprache)만이 나의 언어입니다”라고 말했다. [중략] 그의 말을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하는 데 무능력함(inability to speak)은 그의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inability to think),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그가 말(the words)과 다른 사람들의 현존(the presence of others)을 막는, 따라서 현실 자체(reality as such)를 막는 튼튼한 벽으로 에워싸여 있었기 때문이다.[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정화열 해제, 한길사, 2014년, pp105~106]

이 서술은 수백만의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내는 과정의 주요한 기여자 중 하나였던 유명한 전범(戰犯)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의 특징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묘사다. 이스라엘에서의 그에 대한 재판 과정에서 그의 정신을 감정한 여섯 명의 정신과 의사가 그를 지극히 정상적인 인간으로 판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나 아렌트는 그가 수많은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내는 일을 하고도 정상적인 업무처리였을 뿐이라고 강변하던 이 충실한 조직형 인간에게서 결여되어 있는 무언가를 짚어내 이렇게 묘사한 것이다. 즉, 사람들의 말하는데 있어서의 무능력과 생각하는데 있어서의 무능력함이 깊이 관련되어 있고, 아이히만이 말을 함에 있어 “관청용어”이외에 여타의 다른 표현을 생각해낼 수 없다면 그에게 있어 “유대인 가족들의 끔찍한 죽음”은 단지 “유대인의 수송 및 처리”에 불과할 것이다. 현실의 조직에서도 이러한 “정상적인”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1 thought on “‘악의 평범성’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단초

  1. 약간의 여유

    댓글 달기가 매우 불편하게 되어 있군요.
    에리히 프롬과 같은 사람은 대중이 권위에 맹목적으로 복종하게 된 것을 사회의 정신병리학으로 설명하더군요. 매조키즘과 새디즘이 뒤섞여 권력자와 대중은 서로 서로 의존적이게 된다고 합니다.
    또한 사람이 뭉쳐 “군중”으로 변하면 갑자기 무섭게 돌변하기도 하지요. 인간의 본성에는 아마도 무서운 공격성이 잠재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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