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좌빨”의 경제분석 보고서가 아닙니다

대한민국은 질이 높고 결과물도 굉장히 공평한, 매우 튼튼하고 포괄적인 교육 체제를 지니고 있다. – 이곳에서는 서로 다른 소득수준의 학생들 사이에서의 독해와 수학의 격차가 매우 낮다. 그러나 고용 상황은 복합적이다. 실업은 매우 적지만, 노동력 참여 수준은 그저 그렇고 여성의 참여는 선진경제 중에서 가장 낮다. 남녀 간 임금차이 또한 예외적으로 높은데, 이는 여성이 노동시장에 참여하려는 동기를 저해하는 요소다. 부패는 또 다른 염려사항인데, 힘 있는 이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지대(地代)를 우려내는 것을 용납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지대는 소수의 대가족 경영 기업들에게 높은 정도로 집중되어 있고, 이는 규제 시스템을 통해 보호받고 있다. 부동산과 금융자산 소유는 매우 낮은 반면, 건강보험을 포함한 사회 보장은 매우 제한적이다. 이 지레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바람에 한국은 다른 선진 경제와 비교할 때 이전(移轉) 이전에는 가장 평등한 소득수준을 가지고 있다(“移轉前 지니”는 두 번째) 세후에는 보다 불공평하게 바뀐다(“移轉後 지니”는 18위).[The Inclusive Growth and Development Report 2015, World Economic Forum, September 2015, 41p]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 : WEF)이 이번 달에 발간한 보고서 중에서 한국에 관해 언급한 부분이다. WEF는 각국의 정치나 경제, 그리고 학계를 좌지우지하는 이들이 1년에 한 번씩 스위스의 다보스에 모여서 립서비스를 하는 행사를 여는 것으로 유명한 스위스의 비영리 법인이다. 사상적으로 좌우를 따질 계제는 아닌 것 같지만 굳이 따지자면 “비즈니스프렌들리”한 단체인 것은 분명하다. 인용문을 읽어보면 한국에 관한 비판이 이런 성격의 단체가 낸 보고서치고는 꽤 강경하다는 것을 금세 느낄 수 있다.

  • 교육은 공평하며 포괄적으로 학습수준이 높음
  • 노동시장에서의 여성의 참여 및 임금불평등이 열악함
  • 부패로 인해 각 분야 유력자의 지대 착취가 발생함
  • 재벌의 치대 착취는 매우 집중돼있고 제도적으로 보호받음
  • 평등한 소득수준이 재분배 과정을 통해 불평등한 수준이 됨

지적한 내용으로만 보면 WEF는 현 정부의 공약이나 현재의 경제정책 전반이 실패했거나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비판하는 것만 같다. 재벌의 지대 착취를 근절하겠다는 것은 애초 이 정부가 선거과정에서 “경제민주화”라는 이름으로 전면에 내걸었던 공약사항이다. 하지만 집권 후 이 슬로건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삼성 등 재벌의 변칙적 후계과정은 “애국”이란 명분으로 정당화되었다. 재벌의 부패와 범죄에 대해서는 일과성 처벌이 있어왔지만 곧 “경제를 살리자”는 명분으로 면죄부를 주는 봉건적 상황이 재연됐다.

이를 위해 박 후보는 ▲경제적 약자에 도움되는 경제민주화 ▲국민경제 부작용의 최소화와 효과의 극대화 ▲대기업 집단의 장점은 살리되 잘못된 점은 반드시 바로잡기 등을 3대 추진원칙으로 제시했다. 이와 함께 ▲경제적 약자 권익 보호 ▲공정거래 관련법 집행체계의 획기적 개선 ▲대기업집단 불법행위 및 총수일가 사익편취 엄중 대처 ▲기업지배구조 개선 ▲금산분리 강화 등을 5대 분야로 내세웠다.[박근혜, ‘경제민주화 5대 공약’ 공식발표]

“경제민주화” 슬로건은 최경환 경제부총리 취임 초기 잠시 ‘대기업의 사내유보금에 대한 과세’ 주장으로 다시 표면에 오르는 듯한 적이 있다. 하지만 재계와 보수언론의 거센 반발 속에 정책은 용두사미가 되었고, 활시위는 엉뚱하게 노동계로 향해져 소위 “노동개혁”이 없기 때문에 나라가 이 모양 이 꼴 인양 난리법석을 떨고 있다. 고령의 고임금노동자의 임금을 깎아 청년실업자를 채용하자는 주장은 언뜻 수긍이 가는 듯한 주장이지만, 결국 이는 해묵은 임금기금설에 불과하며, 자본가는 손해 볼 것이 없는 정치적 선동이다.

여성노동의 불평등한 상황은 이른바 “경단녀” 이벤트로 해결하려 했지만 이마저도 일회성 대증요법에 불과할 뿐으로 이것이외에 현 정부가 親노동적 행보를 취한 적이 없는 상황에서 기존 노동자들의 임금을 깎아 취업자를 늘리자는 발상은 그나마 WEF가 긍정적으로 평가한 평등한 소득수준을 더 악화시킬 가능성만 높다. 가장 극적인 WEF의 비판은 우리나라가 열악한 재분배 과정으로 인해 선진경제에서 가장 불평등한 나라가 되었다는 비판이다. 하지만 “증세(增稅)”는 이 정부에서 일종의 금기어다. 철저한 현실부정이다.

MagrittePipe.jpg
MagrittePipe” by Image taken from a University of Alabama site, “Approaches to Modernism”: [1]. Licensed under Fair use via Wikipedia.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현 정부가 경제를 정상으로 만들려면 WEF가 지적한 내용만 제대로 이행해도 될 것 같다. ▲ 재벌의 변칙적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순환출자 등 해소 ▲ 높은 지대를 통한 자영업 착취 방지를 위한 임대차 보호제도 ▲ 여성 등 소수자의 고용/임금 차별 방지를 위한 제도 정비 ▲ 재분배과정이 정상화하는 증세 및 복지증대 방안 강구 등. 한꺼번에 다 하자면 어려운 일이겠지만 문제는 마인드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 재벌을 “특별사면”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를 살리기 위해 노동자를 복직시켜야겠다는 마인드를 가져본 적이 있는가?

댓글을 남겨주세요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