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보험시장에서는 개나 줘야 할 pacta sunt servanda

그동안 보험사는 “자살은 재해가 아니고 이 약관은 실수”라며 일반사망보험금만 지급했다. [중략] 이번 판결로 대법원은 약관 해석에 관한 하급심의 혼선을 정리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문제가 된 약관을 쓴 재해사망특약은 2001~2010년 17개 생보사에서 282만 건이 팔렸다. 2001년 동아생명(현 KDB생명)이 처음 만든 약관을 다른 회사가 그대로 베껴 쓴 탓이다.[그냥 베껴 쓴 약관 한 줄 때문에…잠재 부담 1조에 떠는 생보 업계]

그동안 자신들이 만든 약관에 엄연히 지급하기로 되어 있던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고 있던 보험사에게 보험금을 지급하라는, 지극히 당연한 대법원 판결이 내려졌다. 이 약관을 처음 만든 때가 2001년이었다고 하니 이 정상적인 판결 하나 받는데 15년 이상이 걸린 셈이다. 보험사가 그 동안 “약관이 실수”였다는 논리(?) 하나 깨는데 그 시간이 걸렸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보험약관 계약당사자의 힘이 얼마나 비대칭적인지를 잘 알 수 있다.

의사가 암이라고 판정한 진단서가 있음에도, 보험사는 ‘경계성 종양’이지 암이 아니라고 주장한 겁니다. 암이라면 8천만 원을 보상받게 되지만 경계성 종양일 경우엔 10분의 1 수준밖에 받지 못합니다. 전문의의 암 진단서를 반박하기 위해 보험사가 내민 근거는 7년 전 발행된 대한병리학회의 학술지. “크기가 1cm미만일 경우 암이 아닌 경계성 종양으로 본다”는 부분을 근거로 들었습니다.[암 수술했는데 암 아니다? 보험사 황당 횡포]

힘의 비대칭을 실감할 수 있는 다른 사례다. 보장성 보험 중 국민이 가장 많이 가입했을 암보험이 암을 진단받은 환자조차도 보호해주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편하게 암이라고 부르는 여러 질병의 정식 명칭은 암이 아닌 경우가 많다. 국가암정보센터는 “가성점액종”, “수막종” 등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없는 질병들을 암의 종류로 분류하고 있다. 그런데 보험사는 의사의 암 진단에도 불구하고 “종양”이기 때문에 암이 아니라는 기막힌 주장이다.

Algemeene Verzeekering-Maatschappij Providentia.jpg
By nl:Albert Hahn (1877 – 1918) – www.geheugenvannederland.nl (Reclamearsenaal),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5952833

자신이 엄연히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하겠다고 약관에 적어 넣은 것은 “실수”고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암에 대해서는 암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보험사의 태도에서 계약충실원칙의 본질인 “팍타 순트 세르반다(pacta sunt servanda)”를 기대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발상인가? 가장 불행한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도움을 줘야 할 보험이 너무나 어이없는 사유로 보험금 지급을 거절한다면 보험의 존재의의 그 자체를 의심해봐야 한다.

한국의 보험사들이 이렇게 안하무인격으로 약관을 멋대로 해석하여 소비자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사견으로는 그간 지인을 통한 품앗이식의 보험판매에 익숙한 “한국형” 보험시장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거기에 보험을 일종의 저축으로 여기는 소비자의 마인드도 보장성 보험 상품의 안일한 지급관행에 한몫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저금리 상황에서 간신히 연명하는 보험사가 정신 차려야 할 또 하나의 엄중한 상황이다.

다시 자살보험금 이야기로 돌아가서 인용기사에 있는 그래프를 보자. 이번 판결로 가장 많은 보험금을 지급하여야 할 보험사는 ING생명과 삼성이다. 국내 4위권과 수위권 보험사다. 이들이 이 “우발채무”를 막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ING는 게다가 한 사모펀드가 매입하여 곧 매물로 나올 기업이다. IFRS등 규정 변경 등으로 많은 준비금을 쌓아야 할 보험사의 앞날은 갈수록 험난해지고 있다. 자승자박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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