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보수(Le Salaire De La Peur, 1953)

옛날 영화를 볼 적마다 항상 엉뚱한 생각을 하곤 한다. ‘저 사람들은 이제 모두 죽었는데 저렇게들 아등바등 사는구나’라는 생각이다. 극으로의 몰입을 방해하는 잡념이지만 옛날 영화, 특히 흑백영화를 감상하다보면 어느 샌가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런데 바로 그 늘 뇌리에서 떠나지 않던 ‘죽음’을 이야기한 흑백영화를 얼마 전에 봤다.

누가 당신의 손가락을 자르는 대가로 돈을 주겠다고 하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일단 손가락을 자를 용의가 있는지? 그렇다면 얼마를 받을 요량인지? 정말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여기 그 질문에 대답한 이들이 있다. 손가락이 아닌 목숨을 대가로 돈을 벌겠다는 네 사나이가 있다.

베네수엘라의 어느 가상의 도시에는 할 일도 없이 하루를 때우는 무직자들이 널려있다. 도시에서의 탈출을 꿈꾸지만 그곳은 마치 바다 한 가운데의 무인도처럼 탈출할 길이 요원하다. 그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은 그들의 손으로 벌 수 없을 정도의 많은 돈을 버는 것 정도뿐이다.

그 창살 없는 감옥에는 석유회사가 하나 있었다. 바로 ‘남부석유회사(Southern Oil Company)’, 이른바 SOC. 얼핏 실존하는 석유메이저 SoCal을 연상시키는 이름을 가진 이 회사의 유정에 엄청난 화재가 발생했다. 불을 끌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더 큰 불을 일으키는 것, 즉 폭발을 통해 산소를 흡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지에는 폭탄이 없었고 바로 SOC 본사에 충격에 극도로 민감한 폭약인 니트로글리세린만이 있었다. 회사는 그것들을 운반하기로 하고 도시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폭약을 운반할 운전사를 모집한다. 그들은 죽음의 공포를 대가로 2천 달러라는 거액을 제시한다. 몰려든 사람들 중에서 마리오(이브몽땅)를 포함한 네 명이 선발된다.

새벽의 여명을 뚫고 각자 두 명 씩 두 대의 트럭에 나눠 출발하는 이들. 들쑥날쑥 패인 시골도로를 덜컹거리며 달리니 긴장감이 이만저만 아니다. 급회전 길에서 낭떠러지 옆에 세워진 낡은 나무발판을 길 삼아 차를 돌리는 장면은 보는 이들마저 가슴을 졸이게 한다. 가는 길에 떨어진 큰 바위의 폭파장면 역시 볼거리.

이 영화를 진정 명작으로 만드는 요소는 그러한 극한상황에서 사람들이 제각각 보이는 희생정신, 비겁함, 광기(狂氣), 나약함, 용기 등이 어떻게 상호반응하며 어떠한 결과를 낳는가를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각 때문이다. 영화는 마치 이 네 사람을 실험실 유리관에 넣어놓고 이리저리 움직이며 관찰하는 듯한 영상을 제공하고 있다.

결국 주인공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죽음을 맞이한다. 내가 강박관념처럼 갖고 있던 흑백영화 배우들의 현실이 그 영화에서는 그대로 실현되는 영화인 셈이다. 덕분에(?) 난 이 영화를 보면서는 적어도 배우들의 실제 죽음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단 한명 이브몽땅의 예전 죽음 소식이 잠깐 뇌리에 스쳤을 뿐이다.

공산당 당원으로 활동하는 등 정치적으로 급진적이었던 이브몽땅이었고 석유메이저 SOC가 주요 모티브로 등장하지만 이 영화는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영화는 아니다. 그보다는 ‘인간이 공포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라는 어쩌면 보다 근본적인, 인간성에 관한 질문을 성찰해보는 영화다. 그러한 대처방식은 때로 정치적인 분쟁의 극한상황에서 그 정치적 대의와 상관없이 개인별로 다양하다는 점에서, 오히려 세계관을 앞서는 그 무엇일지도 모르겠다.

이번 충무로 국제영화제 상영작으로 8월 31일 저녁 8시 프로로 중앙시네마에서 봤다.

2 thoughts on “공포의 보수(Le Salaire De La Peur, 1953)

  1. 힘찬

    저도 석유회사가 배경이고 몽땅 오빠가 주인공이라 하여 분명 정치적 메시지가 깔린 영화일 거라고 기대했었는데, 그게 아니군요. 보다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인간의 내면에 관한 영화라 이해해도 되겠는지요? 이 리뷰를 읽으니, 언젠가 DVD로 라도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근데 엄청 스펙타클 할 것 같아! 이런 건 큰 화면으로 봐야 제맛인데… ㅠㅠ 부럽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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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oog

      뭐 DVD로 봐도 웬만한 원작의 감동은 느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아닌 것도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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