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이 자연과학과 다른 점, 혹은 인간이 균류와 다른 점

생태학자 토비 커스와 그의 동료들이 <사이언스>에 발표한 연구가 이를 증명했다. 이 연구진은 실험실에서 균류를 각각의 용기에서 인의 양을 달리해 배양한 후 클로버 풀과 인연을 맺어주었다. 그랬더니 식물 파트너에게 인을 덜 나눠준 균류는 넉넉히 나눠준 균류에 비해 식물로부터 당분을 10분의 1밖에 받지 못했다. 그런데 무슨 조화 속인지, 식물은 이 기록을 기억하고 있다가 심지어 여러 가지 균류를 섞어서 뿌리에 넣어주어도 사기꾼 균류와는 거래를 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균류에게 당분 보상을 적게 준 식물도 인을 조금밖에 얻지 못했다.[원자 인간을 완성하다, 커트 스테이저 지음, 김학영 옮김, 반니, 2014년, pp241~242]

인(燐)은 질소족 원소의 하나로 동물의 뼈, DNA 등 생체에 중요한 화합물의 구성 성분이다. 따라서 식물이든 효모, 버섯, 곰팡이 등의 균류(菌類)든 생물이라면 이 원소가 꼭 필요하다. 하지만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많은 식물들은 선입견과 달리 인을 스스로 채취하지 않고 인용한 글에서처럼 균류와 거래를 통해 인용한 글에서 언급된 인과 함께 칼슘과 물 등을 얻는다. 균류는 지표면 아래에 있는 인회석 등으로부터 칼슘과 인 등의 필수 무기물을 섭취한 후 남는 무기물을 식물과 거래하는데 그 반대급부로 당분 등을 공급받는다.

재밌는 것은 특정 당사자는 거래당사자가 그 과정에서 상대방이 적정한 거래상대가 아니라고 판단될 경우 인용한 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불공정거래에 대해 적절하게 응징한다는 점이다. 그러한 면에서 식물과 균류의 거래는 시장경제를 매우 유사하다. 서로의 사용가치가 아닌 교환가치의 측면에서 거래가 성사될 만 하면 거래를 하고 이 거래가 공정하지 못하다고 판단될 경우 거래상대방에게 벌칙을 준다는 아름다운 거래의 원칙이 적용되고 있다. 이러한 거래가 서로의 능력 차이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점에서도 시장의 법칙을 따르고 있다.

저자는 이렇듯 식물이 인간세상의 시장경제와 비슷한 법칙을 따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지하세계의 채굴과 무역 시스템이 없다면, 더딘 풍화작용으로 낙숫물 떨어지듯 감질나게 똑똑 떨어지는 무기물 원자에만 의지해서는 대부분의 식물이 생존할 수 없을 것”(p242)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식물과 균류의 거래는 어쩌면 데이빗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을 닮았다. 일례로 포르투갈이 포도주와 옷감을 모두 잉글랜드보다 적은 비용으로 생산할 수 있다면 잉글랜드가 포도주 생산을 포기하는 것이 합당하고 식물이 바로 그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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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lf Lotys (Sicherlich) – 자작, CC BY 3.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377219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식물과 균류의 거래관계에서 보듯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이 과연 – 인간의 과도한 개입만 제외한다면 – 조화로운 균형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다. 지질학자 필립 앨런이 2008년 <네이처>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대륙이 놀라운 속도로 마모되고 있는데, 이로 인해 지각의 이동이 유발될 수도 있다고 한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식물의 뿌리와 균류의 섬유들이 대륙을 부수고 있고 이로 인해 맨틀이 더 격렬하게 교반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 면에서 자연의 균형은 인간의 편견일 수도 있다.

즉, 인용문의 저자는 그런 관점에서 자연은 인간이 개입하지 않으면 생태학적 균형을 유지할 것이라 여겨질 수 있지만, 때로 “불균형도 지구상의 생명의 정상적인 신호가 될 수도 있다”(p247)고 말하고 있다. 지구를 가이아 –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대지의 여신 – 로 보는 이들의 눈으로 보자면 만물은 조화로운 상태를 유지할 것으로 예정되어 있을지 몰라도, 그것조차 인간의 편견일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고 나도 동의하는 편이다. 지구도 전 우주의 역사에서 보자면 스쳐가는 한시적 균형상태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저자는 자연에서의 인간의 개입이 어쩌면 그 자체로도 불균형한 자연에 편향이 조금 더 가감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예를 들면 저자는 “비료를 생산하기 위해 상업적으로 인산염 광물을 채굴하는 것이 허버드브룩에서 균류가 인회석을 채굴하는 것과 얼마나 다를까?”(p247)라는 질문을 던진다. 물론 자본주의의 가공할만한 생산성으로 말미암아 때가 되면 채굴량이 비료생산을 균류의 인회석의 채굴량을 훨씬 초과하겠지만, 어쨌든 요는 본래 자연조차도 불균형의 상태가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다는 가정이다.

그렇다면 자연이 불균형상태일수도 있다는 사실이 주는 시사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사회과학”이라고 부르는 학문분야의 대전제가 사상누각일수도 있다는 판단과 상관있다는 점이라 생각한다. 사회과학이란 용어는 19~20세기 자연과학의 놀라운 발달과 그 발달로 밝혀진 자연의 “합목적적 법칙”이 경제학 등 사회과학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시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관점은 좌우의 입장을 가리지 않고 적용되었다고 여겨지는데, 일례로 시장의 합목적적 합리성은 시장근본주의자들이 즐겨 차용하는 개념이 되었다.

시장근본주의자들은 시장의 법칙 하에 경제주체들의 행동과 가격을 시장에 맡겨두기만 하면 조화롭게도 적자생존의 법칙 등에 따라 우월한 경제주체가 돈을 버는 와중에 잉여인력을 퇴출당하고, 가격은 자연가격으로 수렴될 것이라 전제한다. 이런 아름다운 시장의 작동원리는 인간의 삶에서의 시장이 자연과학에서의 생태적 균형과 비슷하다는 사회과학적 시각을 차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저자가 말했듯 자연조차도 그러한 합목적적 조화 상태와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란 점이다. 이점이 사회과학자를 당혹하게 하는 점일 것이다.

그럼 어쩌란 말인가? 자연과학의 관찰 결과 여태 우리가 선입견으로 알고 있던 것처럼 자연이 조화로운 균형 상태가 아니라면 사회과학에서도 그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불균형 상태가 “자연스러운” 것임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일까? 경제가 언젠가 파국으로 치닫는 것이란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저자는 이에 대해 지혜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저자는 인간은 식물과 달리 “인간이 하는 일을 이해”(p247)하고 있기에 “우리의 행동에 윤리적 차원을 추가”(p247)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이 점이 인간세계를 자연과 구분 짓는 한 특징이다.

인간은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행동의 윤리적 차원을 추가해왔다. 적자생존의 법칙만이 존재하던 시기에 종교와 法윤리를 추가해서 무자비한 살육을 중단했다. 노예제에 따른 윤리적 폐해가 파국으로 치닫는 시점에서는 노예해방을 통해 그 모순을 해결하였다. 자본주의의 노동착취가 혁명적인 위기를 초래할 시점에는 노동3권 보장을 통해 위기를 돌파했다. 따라서 이런 윤리적인 보정은 경제발전의 자연적 법칙만을 믿는 이들의 편견보다 더 우월하게 인간세상을 치유해 왔다. 인간이 균류보다 우월한 게 있다면 그러한 반추의 능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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