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억압

경기침체가 끝났다느니 출구전략을 가동해야 하지 않겠냐느니 슬슬 배부른 소리들을 하고 있다. 사실관계를 따져보자면 현재의 다소 해동된 것처럼 보이는 세계경제는 실은 착시현상이다. 각국의 정부는 ‘최종대부자’와 ‘최종소비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원맨쇼를 펼쳐보이고 있고, GDP를 기반으로 측정하는 경제성장률은 그 경제활동의 질적 차이와 상관없이 우리의 긴장된 근육을 이완시키고 있다. 어느 블로그에서 현재의 상황을 – 닷컴버블에 빗대어 – 닷거브(dot gov)버블이라고들 한다던데 딱 들어맞는 말이다.

각국정부가 쓰고 있는 정책수단은 매우 단순하다. 우선 ‘최종대부자’로서 각 금융기관에게 초저금리의 자금을 빌려준다. 심지어 비소구(non-recourse), 즉 눈먼 대출조건의 금융조건으로도 빌려준다. 그리고 ‘최종소비자’로서 막대한 규모의 정부사업을 발주한다. 우리나라의 ‘4대강 정비사업’이 대표적이고, 미국은 철도 등 노후화된 인프라스트럭처를 이 기회에 재정비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정부가 북 치고 장구 치면서 실물경제가 춤을 춰주길 기대하고 있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다.

거기에다 우리나라에는 극히 예외적으로 국지적인 부동산 가격 앙등까지 있다. 이는 부동산 자산 가격 하락으로 인한 소비위축을 두려워 한 정부의 ‘퍼주기’식 규제해체와 양적완화에 – ‘부동산 불패’라는 심리적 기대감이 맞물린 – 힘입은 바 큰데, 결국 제조업 등 실물부문이 아닌 헛것으로 경기부양에 대한 착시현상만 가져온 꼴이다. 결국 얼마 전 이성태 한국은행장이 금통위에서 금리인상에 대한 의중을 비쳤고, 윤증현은 이에 반발하였지만 이후 CD금리가 치솟는 등 시장은 예민하게 반응하였다. 이는 일단 정부의 DTI규제와 맞물려 부동산의 이상급등에 제동을 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부동산 가격이 몇 년 연속으로 폭락한 미국은 이제 자산 거품이 어느 정도 진정되어 적어도 소비부문의 불황이 바닥을 쳤을까? 월스트리트저널의 최근 기사를 보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Delayed Foreclosures Stalk Market’이란 기사는 “3백만에서 4백만에 이르는 유실 처분된 주택들이 향후 몇 년 동안 경매에 붙여질 것(three million to four million foreclosed homes will be put up for sale in the next few years)”으로 보인다고 예상하고 있다. 기사는 이것들이 또 한 번 부동산시장을 뒤흔들 수 있는 “그림자 재고(shadow inventory)”라 일컫고 있다. 미국의 부동산 지옥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이다.

전술한 부동산 가격 추이가 경제운용에 중요한 이유는 어찌되었든 그것이 주가 등과 함께 소비심리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일장춘몽일지 몰라도 사람들은 4억에 산 집이 5억, 6억씩 하게 되면 재산이 늘어났다고 생각되어 소비를 늘이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부동산 자산이 전체 자산의 80%를 넘게 차지하기 때문에 부동산 시장의 변동은 심지어 선거에 큰 영향을 미칠 만큼 중대한 고려사항이다. 심지어 분양을 노려 아이를 허위로 입양하는 사기집단이 등장할 정도니 부동산 망국론이 허언이 아니다.

하지만 실제로 소비심리의 기본 축은 가처분소득이다. 이는 대부분 사회안전망, 고용안정, 근로소득을 통해 창출된다. 하지만 현실은 거꾸로 가고 있다. 미국은 왜곡된 수치라는 주장임에도 실업률이 9%를 뚫고 올라섰다. 우리나라의 수치는 그보다 아래라고 주장되고 있지만, 어쨌든 고용은 갈수록 불안해지고 있다. 정부는 노동유연성의 제고만이 살길이라며 고용안정을 발 벗고 나서서 해치고 있고, 반발하는 노동자는 폭압적으로 탄압하고, 공기업 노동자의 임금을 깎아내려 사회전체의 임금수준을 하향평준화하려는 속셈을 내비치고 있다. 바닥을 기는 사회안전망은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러면 결국 가처분소득의 감소, 소비위축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노동억압은 한편으로 ‘소비억압’이라 부를 만하다. 건강한 노동자들은 노동을 통해 임금을 받고, 그 돈으로 소비를 할 터인데 이를 정부가 나서서 못하게 막기 때문이다. 더불어 감세와 부동산 가격의 현상유지는 극소수 고소득층과 자산가들에게만 혜택이 돌아가고 있고,(주1) 서민들은 이에 맞물린 현상인 전세가격 상승으로 향후 가처분소득이 더 줄어들 처지가 되었다. 소비자, 즉 노동자의 소비가 살아나지 않는 경제는 지탱할 수가 없는 것은 지극히 단순한 이치다.

정부가 앞으로 쭉 ‘최종소비자’의 역할을 떠맡지 않을 셈이라면 말이다.

(주1) 엊그제 정운찬 청문회에서 이정희 민주노동당 의원이 잘 설명해주었고 이에 대한 의견을 정운찬씨에게 물었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나라 톱클래스의 경제학자이신 분은 경험연구를 게을리 하셔서 사실관계를 잘 모르시고 계셨다.(그런데 케인즈 주의자라 자처하신다)

14 thoughts on “소비억압

  1. 키다링

    우와 뭔가 정말로 어려운 글이네요.
    전 잘 모르지만, 주가가 1700을 넘어가니마니 그런 뉴스를 보면서 ‘아 경기가 좋아지는걸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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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oog

      글을 어렵게 써서 죄송합니다. ^^;
      물론 이렇게 경제가 점차 호전되어 소비심리도 살아날 수도 있고 꼭 매사에 비관적일 필요는 없겠지만, 제 의견으로는 소비자의 실질적인 구매력 유지 또는 증가 없는 경제호전은 있을 수 없다는 취지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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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pg1313

    미국부동산과 우리부동산의 환경이 전혀 다르지만 서로 어느 정도 영향은 있기 때문에 서로 참고 할만 합니다.
    대신 우리나라의 서울은 아직도 집이 부족한 것은 사실입니다.
    1년 신혼부부 수와 멸실가구수를 더하면, 최소 필요 신규 주택이 나오지 않나 생각도 드네요.
    또한 미분양도 40평대 이상이 대부분이고, 20/30평대는 거의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감당 못 할 대출로 집 사는 무리수는 지금 누구도 행하기 어렵고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니 지나친 폭락은 힘들어 보이기도 하지만, 실업률과 임금 동결/하락은 확실히 소비시장과 부동산 시장을 점점 하락시키는 것은 또한 맞는듯 합니다. 어느 정도가 적정 선 일지는 모르겠지만, 양극화는 진행되고 있고, 노력하고 행하는 분들에게 어려운 환경에서도 이익이 돌아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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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oog

      좋은 지적감사합니다. 수도권 중소형평수 주택들의 가격 상승 등은 달라져 가는 가족구성의 변화에 발맞추지 못한 주택공급에 힘입은 바 크다는 점 공감합니다. 더불어 비록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뒤덮는다 해도 이만큼 인구가 집중된 수도권 지역 – 또는 더 좁은 지역 – 의 모든 집값이 거품이라는 것도 어폐가 있겠죠. 말씀하신 바 “노력하고 행하는 분들”은 시세차익이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감안하여야 할 점은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각종 기능이 집중되어 있는 수도권은 점점 그 부의 외부효과가 커진다는 점, 그러한 결과로 소득 대비 주택가격 비율은 비이상적으로 높다는 점, 그리고 그로 인해 빈부격차는 동시대인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세대간에도 차이가 날 것이라는 점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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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다시다

    글 잘 읽었습니다. 소득대비 주택가격 비율이 비이성적으로 높다 하심은, 서울 (혹은 수도권)이 타국 도심보다 그렇다는 건가요, 아니면 우리나라 전반이 타국 전반보다 높다는 건가요?
    대도시끼리 비교해보면 서울 집값이 소득대비 유난히 높은 편은 아니라는 얘기를 요새 몇 군데서 들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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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oog

      미국에서는 중간층(median)의 연간소득 대비 주택가격이 8이상을 넘으면 거품이 매우 심각하다고 여기고 있었고 실제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직전 캘리포니아와 마이애미의 수치가 그 정도 되었다 하고, 서울은 예전에 이미 10을 넘은 상태였던 것으로 나타났다고 하는 글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고 레퍼런스로 쓰려고 체크해놓은 것으로 기억하는데 오늘 바쁘기도 했고, 찾질 못 했네요. 나중에라도 찾으면 알려드리도록 하죠. 아니면 다른 수치라도요.

      한국, 특히 서울의 비정상적인 부동산 상황에 대한 뉴욕타임즈 기사가 있던데 참고하시고요.
      http://www.nytimes.com/2007/12/18/business/worldbusiness/18frozen.html?_r=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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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ryuhda

    버블의 붕괴를 더 큰 버블로 덮어보려는 시도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요?
    재정과 통화 정책을 보면 효율적 시장이론은 아예 팽개쳐버리고, (잊혀진 자들을 위한) 뉴딜이 아닌 그들만의 잔치일텐데. 본원통화의 공급은 금융권 안에서만 맴돌고 신용창조는 가계쪽 거품대출로만 약간 증가, 부동산은 마침내 그 끝을 정말 보여줄 수 있을까요? 답답한 현실입니다. 조순교수가 칭찬하던 그 제자의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수준이 저정도라니, 참 우리나라의 상류층이나 식자층의 진면목이 약여하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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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oog

      결국은 사람이 할 몫이라는 명제가 가슴에 와닿는 요즘입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진심을 가지고 했더라면, 그리고 앞으로 그렇게 하면 더 나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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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leopord

    거시경제분석 잘 읽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내년도 경기가 상승할 거라는 기대(예상)가 곳곳에서 나타나는데, 이게 또 다른 거품이 아닐까 하는 불안이 듭니다. 내년도 기준금리 인상을 경기과열을 막기 위한 사전조치로 해석하는 분도 있었구요. 또 다른 버블이 터질 때 어떤 증상이 나타날지 불안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분석력과 직관을 키워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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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oog

      어떤 이는 자본주의에서 거품은 당연한 것이다..라고 떳떳하게 주장하더군요. 오히려 신선했습니다. 문제는 그 거품을 어떻게 콘트롤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다른 거품으로 대체하는 것이냐 하는 것일텐데 여태의 거품은 민간부문의 다른 분야로부터의 거품으로 대체하여 왔다면, 이제 거품의 끝인 닷거브버블의 상황인데 과연 어떤 거품으로 대체할 수 있을런지 우매한 저로서는 터널 앞이 보이지 않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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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쉐아르

    (언제나 그렇지만) 탁월한 분석에 감사드립니다 ^^ 한국의 상황은 갈수록 안좋아지네요. 문제는 대다수의 국민이 그걸 모른다는 거고… (극소수의) 남들이 잘 살게 되니 나도 그렇게 되겠지 하는 착각에 즐거워하고 있다는 거지요.

    미국도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적어도 소비심리의 위축은 많이 없어진듯 합니다. 많은 미국인들이 돈없으면 안쓰는 성격인데 요즘은 전보다 많은 이들이 쇼핑을 하는 것을 보면 바닥은 치고 상승하는 중이라는 느낌입니다. 물론 이것도 정부의 쇼에 사람들이 믿고 따라주는 것일 수도 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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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oog

      오바마가 글로벌불균형을 이야기하면서 중국의 전향적 자세를 호소하였고 중국은 미국 월가의 탐욕으로 인한 위기를 왜 자기들한테 뭐라느냐는 투의 반응을 보였다고 하는군요. 근원적인 문제로 따지고 들어가면 오바마의 말이 맞죠. 미국 소비자들의 소비를 중국 생산자들이 대주고 그 돈을 환류시키지 않고 싸놓으니 미국 제조업의 경쟁력은 떨어지고 금융업이 강세일 수밖에 없고…

      하지만 결국 월마트의 값싼 상품에 익숙해진, 그리고 분에 넘친 소비를 빚으로 지탱한 미국 소비자들의 입맛도 문제이긴 하죠. 빚도 자산이라는 생각을 고쳐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어요. 미국인들의 저축률 상승추이는 그런 반성을 반영한 현상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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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서울만 비싼 게 아니라는 얘기는 허구죠.
    뉴욕 맨해튼 한복판 콘도 가격이랑 비교해도 한국 강남의 아파트값은 장난 아니죠. 용적률 같은 걸 생각해 보면 어이 상실.

    그리고 우리나라 고용 통계는 실업률을 보면 안 됩니다. 고용률을 봐야져. 비경제활동인구에 웬만한 백수는 다 집어 넣기 때문에 실업률은 OECD 4번째로 낮지만(좋지만) 고용률은 OECD 30개국 중 22위. 이 격차는 OECD 30개국 중 최고라고 하네요. 사실상 실업률 통계는 엉터리라는.. (한은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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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oog

      실업률가지고 장난치는 것이 비단 우리나라만은 아니겠지만 확실히 우리나라의 통계수치 조정(작?)은 장난이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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