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미첼(Charles E. Mitchell)

연준을 그렇게 멋지게 한방 먹인 찰스 미첼은 호황을 계기로, 은행의 전통적인 이미지 즉 사람들의 재산과 전통적인 가치를 지켜주는 파수꾼이라는 이미지를 파괴하는 데 큰 공헌을 한 사람이었다. [중략] 미국에서 가장 큰 상업은행을 경영하던 사람이었지만, 그가 보기에 은행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대출이나 예금 업무가 아니라, 주식을 포함한 유가증권을 매매하는 일이었다. 은행가라면 채권은 몰라도 주식은 아무리 좋은 회사의 것이라도 조심스럽게 봐야 하는 게 원칙이던 시절, 이런 그의 발상 자체부터가 전통과는 거리가 멀었다. 미첼은 이런 이단적인 행동에서 한 걸음 내지 두 걸음 더 나아가, 흔히들 하듯 가만히 앉아 손님이 유가증권에 대해 문의하러 오기를 기다린 게 아니라, 상품을 팔러 다니기까지 했다. [중략] 물론 은행은 법적으로 유가증권 거래를 할 수 없게 되어 있었으나, 미첼의 은행은 당시 다른 은행들과 마찬가지로 유가증권 전문 계열회사(security affiliate)를 세우는 방식으로 쉽게 이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때로는 그 직원들을 전부 은행직원으로 메우기도 했고, 비은행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마음대로 유가증권 시장에 뛰어들어 장사를 했다. 따라서 누군가가 이런 유가증권 계열회사를 ‘법률상의 웃음거리’라고 비웃자, 많은 사람들이 이에 동감했다. [중략] 미첼은 자신의 영업방식에 대해 너무도 솔직했으며, 유가증권 거래를 제조업의 다른 상품 거래와 하나도 다를 바가 없는 것처럼 얘기하곤 했다.[골콘다, 존 브룩스 지음, 이동진 옮김, 그린비, 2001년, pp146~147]

현재의 시티은행의 전신인 내셔널시티(National City) 은행의 행장이었던 찰스 미첼(Charles Mitchell)은 인용한바와 같이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은행의 역할에서 벗어나 오늘날의 투자은행과 유사한 영업행위를 통해 막대한 이윤을 창출했다. 그리고 잘 알다시피 이러한 은행의 무분별한 영업행위, 그리고 다양한 다른 원인들이 결합되어 1929년 대공황이 발발하였다. 이후 한동안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은 글래스-스티걸 법 등 관련제도를 통하여 그 영업범위가 엄격히 규제되었다.

찰스 미첼의 유가증권 영업행위가 옳은 것이냐의 여부를 떠나서 그가 시대를 앞서간 혁신가 중 하나라는 것은 인정하여야 할 것 같다. 그는 증권 거래를 다른 상품 거래와 마찬가지로 보고 스스로를 그 상품의 거래자로 자리매김하였다는 점에서 가만히 앉아 고객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며, 고객의 돈을 맡아두는 것에 만족하던 은행가들과는 많이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은행가(banker)이기도 하지만 채권 영업인(bond salesman)이기도 하였고, 스스로도 그러한 역할에 솔직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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