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의 발명’에 대한 두 이론가의 사유

1848년에 존 스튜아트 밀(J.S. Mill)은 다음과 같이 썼다. “모든 기계의 발명이 인간의 일을 경감시켜 주는지도 아직 의문스럽다. 그것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똑같이 단조롭고 감옥에 있는 것과 같은 생활을 해야 했다. 그리고 제조업자나 돈을 번 사람들의 숫자는 증가했다. 그것이 중산계층의 생활을 안락하게 했을지는 모르나 인간의 운명에는 큰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그것이 가진 속성으로 미루어 보아 장차 그러한 변화가 틀림없이 일어날 것이라 생각한다.”
오늘날에는 그 누구도 이런 식으로 얘기할 수 없을 것이다. 세계의 구석구석까지 여행할 수 있으며, 매우 힘드는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그 대부분이 운동삼아 하는 사람일 것이다. 기계의 발명으로 자기의 일이 쉬워지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소련이나 인도, 방글라데시와 같은 비자본주의 국가나 아프리카, 중동, 남아프리카 같은 자본주의 후진국가로 가야할 것이다.[선택의 자유, 밀턴 프리드먼, 박우희譯, 1980년, 주식회사 중앙일보, p134]

존 스튜어트 밀이 지적했던 내용은 미루어 짐작컨대, 칼 마르크스 등 수많은 경제학자가 지적한 ‘기계의 발달에 따른 공장 내 분업, 그리고 그로 인한 노동으로부터의 소외’ 현상에 대한 고찰이 아닌가 싶다. 즉, 밀의 발언은 매뉴팩처나 공장의 노동자들이 기계를 통해 실질적인 생산성은 증가하였으되, 이전의 수공업노동자들과 달리 생산 공정의 극히 일부분만의 노동을 반복적으로 수행하게 되고, 이윤의 증대를 위해 오히려 그 노동량은 증가하게 되었던 현상을 지적하고 있는 내용인 것이다.

밀턴 프리드먼의 확언과 달리 오늘날에도 제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누구라도 그런 식으로 얘기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닌가 싶다. 즉, 아무리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 사회라 할지라도 제조업이 존재하는 사회라면 초기 자본주의적 공장 형태가 도입된 이래 정형화된 군대식 규율로 다져진 분업화된 공장 형태는 존재할 것이고, 그렇다면 아무리 노력한다손 치더라도 “단조로운” 생활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싶다. 심지어 일부 노동자는 “감옥 같은” 분위기를 느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밀턴 프리드먼의 발언으로 돌아가면, 그는 설사 그런 사람이 있다 해도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운동 삼아” 하는 것이고, “비자본주의국가나 자본주의 후진국가”에서나 그런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부분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두 가지 입장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첫째, 서구 자본주의 중심적인 편견을 가진 입장이거나, 둘째, 자본주의 제조업 수직계열화에 대한 당연시하는 입장이 그것이다. 또는 두 입장이 혼재하고 있는 것이거나.

전자의 입장은 어릴 적 접했던 자본주의 프로파간다에서 흔히 접했던 내용이다. 대충 “이윤을 보장해주는 자본주의에서의 노동은 즐겁고 공산당을 위한 사회주의에서의 노동은 괴롭다”는 그런 논리말이다. 이 문장에서 전제하고 있는 자본주의 기업 활동의 창발적인 부분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밀이 언급한 “중산계층의 생활을 안락하게 했을지는 모르나” 라는 반성은 남는다. 인민 대다수는 여전히 노동의 소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주장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두 번째 입장은 ‘주변부 자본주의론’이나 ‘종속이론’ 등에서 주장했던 내용과 겹친다. 밀턴이 주장한 바가 선진 자본주의는 비제조업 화되고 – 즉, 그 나름대로의 선진화 – 자본주의 후진국가가 제조업을 – 더불어 제조업에서의 노동의 소외를 – 떠안게 된다는 것이라면 말이다. 딴에는 일리 있는 소리이지만 이번 금융위기에서 극명하게 드러난 바, 그것의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자명하다. 선진 자본주의에서의 산업고도화(?)는 제조업 위주 도시의 황폐화, 고용 없는 성장, 금융업의 고도화에 따른 금융위기 가속화 등의 부작용을 낳았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본주의 초입단계에서 목격한 자본주의의 여러 부작용에 대해서 인간적인 연민을 느꼈을 테고, 밀턴 프리드먼은 케인스 주의적 복지모델이 삐걱거리며 자신이 주장하던 신자유주의적 모델이 채택되는 승리의 과정에서 승리감을 느꼈을 터이니 누구의 주장이 옳고 그르다는 식으로 재단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다만 개인적으로 이 선현들의 비교되는 사유로부터 배워야 할 점을 굳이 들자면, 그것은 극단의 절대적 사고가 가지는 시대적 한계는 어쩔 수 없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싶다.

언젠가 한번은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로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5 thoughts on “‘기계의 발명’에 대한 두 이론가의 사유

  1. easybird

    밀턴 프리드먼은 방글라데시 빈민가에 환생 해보는 것도 좋겠네요.. 운동 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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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sonospace

    얼마전에 도시철도공사에서 모든 직원들에게 ‘아이폰’을 주며 그걸로 업무를 보라고 했다는군요. 덕분에 나이 많으신 노동자들도 스마트폰 사용법을 진땀 빼며 익히고 있다 합니다. 핸드폰이 보급화되면서 일터를 떠나서도 일에 매어 있게 되었다는 주장을 본 적이 있는데, 기술의 발달이 인간을 자유롭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옥죄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역시 기술은 나쁜 것이 아니지만 기술이 ‘어떤’ 사회에서 ‘어떻게’ 사용되느냐가 문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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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oog

      첨에 미국에서 블랙베리 나왔을 때 그런 이야기가 많이 있었다고 하죠. 업무가 복분자 땜시 연장되는 그런 부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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