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화, 두 가지 접근법

한겨레신문에서 새로이 창간한 경제 월간지 이코노미인사이트 Economy Insight 에 글을 기고하게 되었습니다. 아래 글은 2010년 6월호에 실린 글이며, 편집진의 양해를 얻어 이 블로그에 올립니다. 제목은 제가 다시 바꿨고(해당 잡지에는 ‘교도소의 민영화’입니다) 내용도 해당 잡지에 올린 내용은 약간 편집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래 글은 제가 보낸 원고입니다. 참고하십시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공기업은 본래 그 체제가 내포하고 있는 자유기업 정신과 맞지 않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 좌익정당이 집권했던 유럽 등지에서는, 공기업을 전면적인 사회주의 노선을 취하지 않고서도 체제 안에서 점진적인 사회주의의 길로 나아가는데 유효한 수단으로 간주한 듯하다. 예를 들어 전후 영국의 국유화 프로그램에 영향을 미친 허버트 모리슨(Herbert Morrison)은 “공기업의 이사와 직원들은 자신들을 공적 이익의 보호자라고 생각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한다.

공기업이라도 이윤창출 없이는 움직일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소득계층에 따른 가격차등화랄지 공익적 사업의 시행을 통해 소득재분배의 효과를 얻는 것도 사실이다. 이에 따라 건강보험이나 연금과 같은 몇몇 필수 공공서비스는 – 아직까지도 갑론을박이 있긴 하지만 – 대부분의 나라에서 당연히 국가가 제공하여야 하는 서비스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알다시피 전통적으로 국가가 제공하는 것으로 여겨지던 많은 서비스들이 민영화되고 있다. 1980년대 영국의 대처주의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던 민영화 프로그램이 보편화된 결과다.

대처주의자들 – 예를 들면 키스 조셉과 같은 열렬한 자유주의자 – 눈으로 민영화의 정당성을 바라보자면, 민영화는 무엇보다 보통사람에게로의 소유권 확대를 통해 사람들에게 사유 재산에 대한 이해관계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만성적으로 적자에 시달리면서도 노동귀족 등 보수적인 수혜자에게만 이익이 돌아가는 관료적인” 공기업에 생기를 불어넣겠다는 생각이었다. 실제로 그 당시 많은 민영화 프로그램은 지금처럼 소수의 자본가들이 아닌 국민주 매각, 또는 임대인들에게로의 직접매각 형식으로 민영화되었다.

이후 통신사, 에너지기업, 교통시설, 환경시설 등 많은 공공서비스가 민영화되었는데, 그 효과에 대해서는 공익성, 효율성, 창의성, 국가재정 등을 잣대로 하여 수많은 논쟁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최근 접한 재밌는 주장으로는 민영화한 NHS 의 병원이 그렇지 않은 병원보다 더 깨끗하다는 연구결과가 있다는 주장도 있는 형편이다. 이러한 다양한 갑론을박의 한 단면을 잘라 민영화 논쟁 또는 시도의 현재 상황을 한번 들여다보기로 하자. 여러 아이템 중에 미국이나 영국 등에서 성행하고 있는 교도소 민영화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교도소의 민영화는 다른 민간투자사업과 유사한, 수요증가(?)와 정부의 자금부족, 운영효율 등을 이유로 도입되었다. 최초사례는 1984년 미국이민국이 <미국 교정회사, Corrections Corporation of America : CCA>라는 민간사업자와 계약을 체결하여 민간 교도소를 설립한 프로젝트라 한다. 오늘날 미국의 교도소 시장(?)은 이 <미국 교정회사>와 <웨클허트 교정회사, Wackenhut Corrections Corporation>가 거의 양분하고 있고, 미국 전체 수감자의 10% 이상이 이들 민간이 운영하는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민간의 자금으로 건설되고 운영되는 교도소는 통상 민간 사업자에게 침대 개수마다 일정금액을 수수료로 지불하고 있다. 인권운동가나 민영화 반대론자 등 비판자들은 이들 민간 기업들이 정부에 로비를 하면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해나가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특히 민간 사업자는 정부가 교도소의 운영을 독점(!)하고 있는 상황이니 더 많은 교도소를 민간에 이양할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심지어 입법로비 등을 통해 인종차별적인 판결과 수감, 불필요한 수감기간 연장 등의 부작용을 낳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마이클 무어 감독의 신작 <Capitalism : A Love Story>에 보면 이 민간 교도소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감독이 찾아간 곳은 펜실베이니아 주의 윌크스배러라는 도시였다. 이 도시의 소년원 <PA차일드케어>가 바로 민간 교도소다. 무어는 파티에서 마리화나를 피운 소녀, 저녁식사 자리에서 엄마의 남자친구에게 고기를 집어던진 소년, 마이스페이스에서 교감을 놀린 소녀 등을 소개하는데 이들은 각각의 죄목(?)으로 교도소 사장(!)의 친구인 판사에 의해 소년원에 수감되었다. 심지어 부당하게 형기가 연장되기도 했다고 한다.

무어의 주장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이 “교도소의 이윤을 위해서” 이루어진 일이다. 수감자가 많을수록, 그들이 더 오래 교도소에 머물수록 더 많은 이윤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창출된 이윤으로 변호사 출신의 교도소 사장은 자가용 비행기와 “Reel Justice”라 이름붙인 요트를 구입했다고 한다. 확실히 모든 민간 교도소가 부패를 이윤창출의 기본 모델로 삼고 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수감자들의 선도를 통해 재범을 방지하는 교도소 본연의 목적이 이윤과 연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똑같이 교도소를 대상으로 민간이 비즈니스(!)를 영위하면서도 이와는 또 다른 모델을 취하려는 시도가 바다 건너 영국에서 진행되고 있다. 영국의 사회적 투자은행인 <소셜파이낸스, Social Finance>에서 시도하고 있는 프로젝트인데, 이들은 소위 “사회영향채권(social-impact bonds)”을 발행하여 모인 자금으로 정부와의 계약을 통해 교정 서비스를 제공하고 이를 통해 얻은 이윤을 투자자들과 나눈다는 계획이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지난 2007년 당시 고든 브라운 수상이 설치한 한 위원회에서 다듬어져 채택된 것이다.

그런데 얼핏 수익모델이 저 악명 높은 <미국 교정회사>나 <PA차일드케어>의 그것과 다른 것이 무엇일까 궁금하다.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그들이 달성하여야 하는 서비스의 목표다. 즉 앞서의 미국 민간 기업들이 더 많은 수감자들로부터 이윤을 창출하였다면 사회영향채권의 투자자들과 사업시행자들은 수감자들이 출소한 후 다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아 재범률이 낮아질 경우에 단계적으로 높아지는 수익률에 따라 성공보수를 받게 된다. 확실히 이윤동기가 이전 교도소와 달리 제공하는 서비스의 본래 목적에 상당 부분 부합하는 면이 있다.

사회영향채권은 전통적인 아웃소싱과 민관합동 프로그램의 두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 리스크를 정부에서 민간투자자에게 이전시켰다는 것이다. 만약 원하던 목표가 달성되지 못하면 투자자는 돈의 일부를 날리지만 정부는 비용을 절약한다. 둘째, 목표가 달성되면 당연히 정부와 투자자 모두 이긴 게임이다. 물론 해결하여야 할 과제도 많다. 과연 그것이 다른 시장의 채권을 압도할만한 매력이 있느냐 하는 것이 주요한 고민거리다. 성공보수는 사실 채권이라기보다는 주식에 가깝다. 정확한 목표측정 여부도 한 과제다.

이와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민영화는 여전히 수많은 비판에 직면해 있다. 우리나라의 의료서비스 민영화 추진 의혹, 미국의 군대 민영화에 따른 전쟁의 비즈니스화, 영국의 철도민영화에 따른 대형사고 등은 민영화의 어두운 그림자다. 또한 여전히 주요기간산업에 대한 국가의 지배권 확보는 진보세력의 주요한 요구사항이다. 하지만 점점 더 많은 국가주도의 공공서비스가 한계에 도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각국의 재정여력은 금융위기를 거치며 더 열악해져 신규시설이나 기존시설의 운영이 한계상황에 놓이는 경우도 많다.

좌익진영에서는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민영화가 사실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사유화(社有化)에 가깝다는 주장도 있는데, 독점자본에 헐값 분양된 몇몇 사례를 보면 타당한 지적이다. 또 한편 그러한 부작용의 반발로 기존의 국영서비스만을 고집하는 것도 적절치 않아 보인다. 어차피 급진이론에 따르면 자본주의 국가는 자본의 또 다른 모습 아닌가? 국가가 시도하는 많은 사업들이 공익성을 내세우면서도 소수 위정자들이나 결국은 계급역차별적인 이익을 향유하는 경우도 적지 않거니와, 엄청난 돈만 날린 정부 주도 사업도 꽤 된다.

결국 현 상황에서 고민해야 할 주제는 과연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 국가가 제공하여 왔던 공공서비스의 본질, 그리고 그것이 추구하는 ‘공익성(public interest)’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아닐까 싶다. 그러한 원초적인 질문을 다시 고민하고 사회적으로 합의될 때라야만 비로소 우리가 원하는 서비스를 가장 잘 제공할 수 있는 주체로부터 타당한 가격으로 제공받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이번에 권좌에서 밀려나긴 했지만 사회영향채권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며 고든 브라운이 그래도 옳은 소리 한번 했기에 옮겨본다.

“이제 문제의 증상이 아니라 원인의 근본을 다루는데 지불될 돈이다.(money paid out now to deal at root with the causes, not the symptoms of a problem)”

Economy Insight 해당 글 바로 가기

7 thoughts on “민영화, 두 가지 접근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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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아거

    실명제에 반기를 들고 잡지에도 계속 필명 글쓰기를 하고 계시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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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이코노미 2.0

    확실히 민영화는 양면성이 있는것 같네요. 교도소의 경우는 사회의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다른 민영화 사업들과는 달리 보이지 않는 장벽안에서 일어나는 인권 침해나 부정에 대한 대책이 있지 않으면 어느쪽으로 운영되든지 부작용은 불가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코노미 2.0 (http://www.economy2.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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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oog

      네. 그러한 부분을 세세하게 체크해야겠죠. 사실 국영 교도소도 그러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진 못하지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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