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불카드의 새로운 실험

“그것은 매우 단순한 일이오. 셀 수 없이 많은 상이하고 독립적인 사람들이 사람들의 생계와 편의를 위해 필요한 많은 물건을 생산했을 때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스스로 공급하기 위해 개인들 사이에 끊임없는 교환이 필요하지요. 이런 교환이 거래를 만들고 그 매개체로서 화폐는 필수적이지요. 하지만 국가가 모든 상품의 유일한 생산자가 되자마자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얻기 위해 이루어지는 개인들 사이의 교환이 필요 없어졌소. 모든 것은 한 곳에서 구할 수 있고, 그 밖에 다른 곳에서 조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요. 국영 창고에서 직접 분배하는 제도가 상거래를 대신했고 이런 까닭에 화폐는 필요 없어진 것이오.”
“이러한 상품 분배는 어떤 방식으로 관리됩니까?” 내가 다시 물었다.
“가능한 한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이루어지지요.”리트 박사가 대답했다. “국가의 연간 생산 범위에서 개인의 몫에 해당하는 신용이 매해 초에 공공 장부 형태로 모든 시민에게 주어지고 있소. 그러면 그 사람에게 발급된 신용카드(credit card)로 모든 동네에 있는 공공 창고에서 사고 싶은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그리고 무엇이든지 구입할 수 있지요. 당신도 곧 알게 될 이 제도는 개인과 소비자들 사이에 어떤 종류의 사업상 거래의 필요성도 완전히 없애버렸소. 아마도 당신은 신용카드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을 거요.”[뒤를 돌아보면서:2000-1887, 에드워드 벨러미 Edward Bellamy 지음, 손세호 옮김, 지만지 고전천줄, 2008년, pp 93~94]

모든 위대한 예술작품에는 위대한 통찰력이 있게 마련이다. 사회주의 체제가 된 2000년의 미래세계를 그려 최초의 SF소설로 분류되기도 하는 이 작품 역시 그러한데, 작품이 발표된 1888년에는 싹조차 없었던 신용카드와 – 개념상으로는 직불카드(debit card)에 더 가까운 개념이지만 – 대형할인점을 근사하게 예언하고 있다는 점이 놀랍다. 물론 뒤에 살펴보겠지만 구체적인 사용방법 상으로는 몇 가지 차이가 있다. 근본적인 차이라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자본주의 체제인 반면에 작가가 그리고 있는 세상은 사회주의 체제라는 점일 것이다.

벨러미의 구상은 사적소유와 개인들 간의 교환이 사라져 화폐의 축장기능과 교환기능이 필요 없게 되자 자연히 화폐가 사라지고, 대신 국가라는 단일한 공급자로부터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 카드가 화폐의 결제기능을 대신하는 상황이다. 이에 반해 현대 자본주의에서 발전해온 신용카드나 직불카드와 같은 지불카드(charge card)는 1920년대 특정업소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일종의 멤버십 카드로 시작하여 다이너스클럽이 여러 소매점에서 공통으로 쓸 수 있는 카드를 내놓으면서 발전해왔다는 점에서, 공급자를 단일화한 것이 아니라 지불카드를 단일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자본주의 시장에서의 경쟁은 지불카드가 마냥 단일화되어 있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아메리카익스프레스, 마스터카드 등 몇몇 거대 카드회사가 시장의 강자로 등장하였지만 이후에도 수많은 카드발급회사가 저마다의 지불카드를 내놓았고, 그래서 자본주의의 시민은 기능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디자인은 다양한 지불카드를 여러 개 소유하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미국의 1인당 신용카드 발급수는 4.64 장으로 파악되고 있다. 또한 화폐가 사라졌기 때문에 은행도 사라지리라는 벨러미의 예언과 달리 신용카드는 돈까지 빌려준다. 미국의 소비자들은 현재 가구당 약 1만6천 달러 수준의 신용카드 부채를 지고 있다 한다.

이렇듯 카드가 화폐의 효용이 사라진 곳에서의 결제기능을 담당하리라는 예언자의 바람과는 달리, 자본주의의 지불카드는 오히려 소지하기 부담스러운 화폐의 단점을 보완해주는 동시에 금융의 기능까지 추가되었다. 이에 따라 카드는 체제의 한 축으로 체제를 보완하는 한편으로 체제를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 사례는 가깝게 김대중 정부에서의 이른바 “카드 대란”을 들 수 있다. 신용사회에서 신용을 바탕으로 발급되어야 하는 신용카드가 무자격자에게 발급이 남발되면서 연체가 급증하며 수많은 신용불량자를 양산하고, 종내에는 여러 카드회사가 문을 닫는 신용위기로까지 이어졌던 사건이다.

한편 자본주의와는 다른 길을 걷겠다고 선언한 베네수엘라에서는 이와는 다른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우고 차베스 대통령은 지난 9월 1일 “좋은 생활 카드”라 칭한 지불카드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선언했는데, 이 카드는 국영 또는 지역공동체 슈퍼마켓에서 채소 등 생필품을 “합당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는 카드다. 지불계좌는 국영은행과 연계된 공동체은행에 개설한다. 사용할 수 있는 곳이 한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멤버십 카드를 닮았다. 차베스는 이 카드가 “소비지상주의가 아닌 필요에 의한 소비”를 독려하는데 쓰일 것이라고 말했지만, 비판자들은 이 카드가 쿠바가 빈곤한 경제를 통제하기 위해 만든 배급카드의 베네수엘라 판에 불과하며 국가가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공산주의적 야망”일 뿐이라고 폄하하고 있다.

사실 이 카드는 인플레이션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베네수엘라의 경제 상황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석유수출을 통한 경제부흥을 꾀했던 이 나라에서 유가하락 등 경제여건이 그리 녹록치 않게 되자 물가는 치솟았고 차베스 정부는 이런 상황이 이윤극대화만을 추구하는 사적자본의 매점매석에 의한 것이라 몰아붙였다. 그리고 급기야 “매점매석하지 않는” 국가가 공급하는 상품을 구입할 수 있는 지불카드를 대안으로 내놓은 것이다. 이런 점은 시장가격 그대로 값을 지불하는 자본주의에서의 카드와는 다르다. 문제는 과연 국영 또는 지역공동체 슈퍼마켓이 차베스 정부가 주장하는 “합당한” 가격에 상품을 공급할 수 있는지의 여부겠지만 말이다.

현재도 베네수엘라에서는 자본주의식 슈퍼마켓이 앞서 언급한 슈퍼마켓과 공존하고 있다. 이른바 “식량 주권” 확보를 목표로 하는 국영 또는 지역공동체 슈퍼마켓은 물건을 다른 곳보다 싼 값에 공급하고는 있지만 물품이 딸리고 겉보기도 화려하지 않다. 그래서 부자들은 자본주의식 슈퍼마켓을 선호한다. 인플레이션에 무관하게 합당한 가격에 물건을 구입할 수 있는 자격증이라 할 수 있는 “좋은 생활 카드”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해서 “시장성”을 확보할 수 있어야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차베스 정부는 쿠바를 흉내 내 도시근교 농업을 활성화시켜 공급을 원활하게 하려는 복안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베네수엘라 식량 사정에 관한 뉴스

요컨대 베네수엘라가 추진하고 있는 지불카드는 여태의 카드보다는 벨러미의 개념에 더 접근한 카드라 할 수 있다. 비록 아직 공급자가 국가로 단일화되지는 않았지만 인플레이션이라는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치유하기 위해 국가가 공급자로 나섰으니 만큼 말이다. 그런 면에서 이 카드는 지역민의 생산적 활동과 노동의 성과를 지역 외부로 뺏기지 않고 지역 내에 보존, 순환시킴으로써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키려는 지역화폐 운동의 국가주의 버전이랄 수도 있다. 다만 도시근교농업, 공동체은행, 지역공동체 운동 등 보다 광범위한 사회계획과 연계된다는 점에서 소비자 위주의 지역화폐 운동보다는 보다 확대된 형태이다.

서로 대조적인 길을 걸으려는 두 체제에서의 이러한 지불카드 실험은 특정한 제도나 도구가 어떠한 지향점을 갖느냐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발현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즉,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지불카드가 체제의 모순을 극복하기보다는 소비시장의 확대와 표준화, 궁극적으로 대량소비를 독려한 반면 베네수엘라의 지불카드는 “소비지상주의”적인 부정적 측면을 지양하려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체제를 보조하기보다는 기존 체제를 강화하면서, 예언자의 바람과는 다른 길을 걸어온 지불카드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발전할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7 thoughts on “지불카드의 새로운 실험

  1. 키다링

    제가 아직 학생이라 그런지 몰라도 사실 왜 신용카드가 필요한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직불카드도 무지무지 좋고 편해서 (전 처음에 신용카드 받는 곳도 일부분은 직불카드 받지 않는 줄 알았어요!) 아직까지는 직불카드도 잘 쓰고 있습니다.
    뭔가 나이가 들면 신용카드가 필요해지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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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oog

      전 직불카드를 써본 적이 없어서 “나이가 들면 신용카드가 필요해지는” 것인지는 모르겠는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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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내구름

    제목 보고는 기본소득을 떠올렸는데, 지역화폐나 카드화폐인가 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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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김기동

    그냥 긁는줄만 알았던 카드에 대해서 많은 고찰을 하게 되네요.
    어찌보면 현대금융의 발전이 우리삶에 가장 깊숙히 침투한 것이 신용카드가 아닌가 생각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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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danny

    평시 사용하는 물건 중에 가장 세균이 많은 물건이 화폐라는 점과,
    화폐를 찍는데 많은 국고를 사용하고, 심지어 액면가보다 높은 생산단가를 가진 화폐가 존재한다는 점을 생각 해 보았을 때 화폐의 대체수단이 필요한 건 공감합니다.

    현재의 카드사 들은 항상 그, 수수료 문제때문에…

    한국조폐공사가 한국전자조폐공사가 되는 날은 멀은 미래일까요?
    [이미 쓰고있는 기술들을 국유화 해서 비용절감 할 뿐이란 건 너무 무책임한 생각일까 의문을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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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oog

      “한국전자조폐공사” 그럴듯 합니다. 아마 이런 명칭을 쓰게 될 즈음에는 카드가 아닌 몸속의 칩으로 대체화폐가 등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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