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가와 연쇄살인범이 만난다면, Time After Time

이 영화는 대단히 흥미로운 실험을 시도하고 있다. 즉 이 작품은 역사상 실재 존재했던, 그러나 서로 만난 적이 없는 H.G. Wells 와 Jack The Ripper 라는 두 인물을 만나게 함으로써 그들이 어떻게 상호작용 하는가를 가상으로 그려보고 있다. H.G. Wells 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SF소설가이자 사회주의적 신념을 가지고 있던 사상가이다. Jack The Ripper 는 19세기 말 영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그러나 여전히 정체가 알려지지 않은 연쇄살인범이다. 영화에서는 John Leslie Stevenson 이라는 이름의 의사인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들은 영국의 빅토리아 왕조라는 동시대를 살았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지만 그보다는 차이점이 더욱 극명하다. 즉, 이 영화의 선악(善惡)구도에서 H.G. Wells 는 선한 쪽을, Jack The Ripper 는 악한 쪽을 맡고 있는 동시에, 폭력을 인류의 역사에서 몰아낼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 H.G. Wells 는 몰아낼 수 있다는 이를테면 성선설(性善說)을, Jack The Ripper 는 당연하게도 몰아낼 수 없다는 성악설(性惡說)을 대표하고 있다.

1893년의 어느 저녁 H.G. Wells 는 친한 친구 John Leslie Stevenson를 비롯한 가까운 지인을 불러다놓고 놀라운 사실을 발표한다. 그것은 그가 타임머쉰을 발명하였으며 그것을 타고 미래로 날아갈 것이라는 것이었다. 신념강한 사회주의자였던 Wells 는 3세대 이후 미래로 가서 전 세계가 차별과 전쟁이 없는 사회주의 국가가 구현된 것을 직접 목격하고 오겠다는 결심이었다. 일단 모든 이들이 타임머쉰이 실제 가동할 것이냐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 특히 연쇄살인범으로 폭력적 본능을 내재하고 있는 John 은 정치체제에 의해 인류의 역사에서 폭력이 제거될 수 있으리라는 Wells 의 생각을 순진한 생각이라며 비웃는다. 그런데 때마침 근처에서 John 이 저지른 살인 때문에 경찰이 가택수색을 하기 위해 Wells 의 집을 방문하였다. 이에 놀란 John 은 모두가 경황이 없는 와중을 틈타 타임머쉰을 타고 미래로 가버린다. 이를 알아챈 Wells 는 그를 쫓아 미래로 향하는데 그 곳은 바로 1979년의 샌프란시스코였다. 이곳에서 John 을 뒤쫓는 과정에서 Wells 는 미래사회가 그가 꿈꾸었듯이 폭력이 제거된 사회가 아니라 오히려 개인과 국가의 폭력이 대규모화된 사회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Wells 와 마주치게 된 John 은 Wells 에게 자신의 생각이 옳았음을, 그리고 이 거대한 폭력사회에서 자신은 아마추어에 불과하다고 조롱한다. 결국 John 은 미래사회에서조차 연쇄살인을 저지르고 Wells 와 사랑에 빠진 여인 Amy 마저 죽이려 하나 Wells 의 손에 의해 제거된다.

이 영화가 데뷔작이었던 감독 Nicholas Meyer가 직접 시나리오를 담당하였고 Malcolm McDowell, David Warner 등 지극히 영국적인 색채의 두 배우가 각각 Wells와 Jack The Ripper 를 연기하고 있다. 감독은 극명히 대비되는 두 실존인물을 한 시공간에서 충돌시키면서 어떻게 둘이 상호작용을 하는지 관찰하고 있는데 결국 기승전결 상에서 악(惡)은 제거되지만 인류의 역사에서 폭력을 제거될 수 없다는, 오히려 더욱 구조화되고 대규모화되었다는 회의적인 실험결과를 내놓고 있다. 이는 Jack The Ripper 의 생각이 옳다는, 그럼으로써 그가 실은 이 영화의 승자는 Jack The Ripper 라는 역설로 귀결되고 있다. ‘제5원소’의 Leeloo 처럼 Wells 역시 TV와 영화 속에서 펼쳐지는 폭력장면에 몸서리친다. 개인적으로 ‘폭력의 대규모화’라는 측면에서 감독의 관점에 동의하지만 적어도 현대사회가 이전 시대에 비하여 개인과 국가의 무제한적 폭력을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제어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반드시 비관적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Wells 가 샌프란시스코에서 겪게 되는 사회담론의 변화에 대해 문화적 충격을 받는 에피소드에서도 그러하다.

학생시절 반전(反戰)운동을 했던 이혼녀 Amy 의 리버럴한 사고방식은 자유연애를 주장하며 빅토리아 시대에 가장 급진적이었던 Wells 를 일순간에 고답적인 사고방식으로 만들고 만다. 인류 진보의 이데올로기가 여성해방, 인종차별철폐 등의 다양한 신좌파적 운동으로 진화해나가는 과정을 겪지 못한 19세기 사회주의자의 문화충격인 셈이다. 다만 이러한 모든 차별에 대한 철폐 과정 역시 앞서 폭력이 그러한 것처럼 제도는 그렇게 바뀌되 현실은 그에 못 미치는 혼돈의 과정을 겪고 있을 따름인 것이다. 인류의 역사가 진보의 방향을 운명 지워져 있다는 종교적 신념은 아니더라도 아직은 희망을 버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역시 Malcolm McDowell 이 출연했던 A Clockwork Orange 처럼 폭력이 인간의 본성에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관찰기인 이 영화에서의 승자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보는 관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범죄의 세계사’의 저자 콜린윌슨의 말마따나 폭력은 제거될 수 있다는 희망은 사회생물학적인 관점에서 지극히 순진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은 통제되고 억제되어야 한다는 – 또는 될 수 있다는 – 당위에 있어서는 개인적으로 오히려 체제화된 통제가 또 다른 폭력을 낳을 것이라는 무정부주의적인 입장의 A Clockwork Orange 의 입장보다는 극중 H.G. Wells 의 입장을 지지하고 싶다.

* 60년대와 70년대 샌프란시스코는 제1세계에서 가장 리버럴하고 좌익적인 도시였다는 점에서 감독의 로케이션은 의도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만약에 Wells 를 스스로를 사회주의라 칭한 소련 땅에 떨어뜨려 놨으면 어땠을까? Wells 가 볼쉐비키 혁명 이후 실제로 소련을 방문한 적이 있긴 하지만 이 영화에서 그랬다면 스토리가 너무 복잡해졌을 것이다.  

** 이 영화에서 Jack The Ripper 의 첫 살인은 1893년인 것으로 나와 있지만 실제로 그가 다섯 건의 살인을 저지른 시기는 1888년이다.

*** 감독은 셜록홈즈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쓰기도 했는데 이는 코난도일 이외에 다른 사람이 쓴 중 가장 훌륭한 셜록홈즈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한다.

8 thoughts on “혁명가와 연쇄살인범이 만난다면, Time After Time

  1. egoing

    체제화된 통제가 또 다른 폭력을 낳는 사례로 전쟁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통제 아래의 개인은 순한 양처럼 순응적이 되지만, 개인을 통제하는 집단은 또 다른 자아가 되어, 그 폭력성을 스팩타클한 형식으로 해소하는 것은 아닐런지….

    한번 챙겨봐야겠습니다. 귀한 글 잘 봤습니다.

    Reply
    1. foog

      하나의 구조화된 폭력인 전쟁에 양같이 순한 국민들이 열광하는 모습에서 소름이 돋을 수밖에 없죠. 한번 챙겨보십시오. 사실 제가 끼적거린 심각한 주제의식이 아니더라도 재미있는 오락영화입니다.

      Reply
    2. egoing

      길들여진 폭력성은 밀리터리한 욕망으로 표출되나 봅니다. 일종의 변태적 도착같이 느껴질 때가 많아요.

      Reply
    3. foog

      대리만족이지요. 반듯하게 정렬한 나찌즘의 군상앞에서 감격스러워하지 않을 인민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

      Reply
  2. 류동협

    앞부분만 읽어봤는데 흥미로운 영화같네요. 비디오 빌려보고나서 다시 블로그글로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

    Reply
  3. 류동협

    드디어 이 영화를 봤습니다. Foog님 덕분에 좋은 영화 아주 잘 봤습니다. H G Wells의 소설도 한번 읽어보고 싶게 만들더군요. 폭력에 대한 성찰은 탁월하더군요. 호텔방에서 잭 더 리퍼가 웰스에게 텔레비전을 틀어주는 장면이 아주 인상적이더군요. 통제된 폭력이라면 사형제가 아주 좋은 예겠죠. 문명화된 사회 속의 폭력은 보다 교묘하게 발전되며 더욱 잔인하게 전개되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폭력에 대한 정당화가 교묘하게 재생산되는 21세기죠. 저는 희망을 믿는 비관론자죠. 폭력이 사라지는 사회가 왔으면 좋겠네요 ^^

    Reply
    1. foog

      그 장면이 더 발전된 모습이 제6원소에서의 그 장면.. 이랄 수 있죠.. 더 나아가면 그래픽노블에서의 엥키빌랄 시리즈라 할 수 있고요.

      희망을 믿는 비관론자화 비관적인 희망론자와 …. 누가 행복한 걸까요?

      Reply

댓글을 남겨주세요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