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tropolis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역시 사악한 – 한편으로 연민을 자아내게 하는 – 과학자 로트왕 Rotwang 이 자신의 창조물인 로봇을 살아있는 여인 마리아로 변신시키는 과정일 것이다. 1920년대 작품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인간으로 변해가는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한편으로 감독 프리쯔랑 스스로가 이 영화를 통해 자신의 능력이 신의 능력에 버금가고자 하는 그 무엇이라고 – 영화를 통한 바벨탑? – 뽐내고자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해본다.

어쨌거나 이 장면은 이 영화가 전체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야기 틀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즉 인공적인 로봇이 인간 – 물론 가짜 인간이긴 하지만 – 으로 변해가는 과정은 사람이 만든 사회구조를 신이 창조한 자연의 질서와 비유함으로써 서로 그럴듯하게 맞아떨어지는 상황을 그럴듯하게 암시하고 – 또는 정당화시키고 – 있다.

영화는 노골적으로 성경의 신화를 차용하고 있다. 마리아라는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여자주인공인 마리아 Maria 의 이미지는 성모 마리아로부터 – 또는 막달라 마리아와의 혼합? – 빌려 왔다. 이른바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프레데어 Freder 는 명백히 예수를 상징하고 있다. 마리아로 변신한 로봇은 일종의 적(敵)그리스도라 할 수 있다. 모든 인물들이 그렇게 성경에 적절하게 부합하고 있다.

한편으로 이 영화는 산업사회의 자본가와 노동자의 적대적인 관계를 뛰어난 영상 이미지로 전개시켜 후대 영화인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도 유명하다. 과연 그 음습한 표현주의적 영상은 과연 내가 저런 사회에서 (노동자로) 살면 얼마나 끔찍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를 소름끼치게 한다.

이제 문제는 이 영화가 이 두 가지 이야기를 – 신(神)의 이야기와 인간의 이야기 – 어떻게 조화시켰는지의 여부인데 불행하게도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그리 썩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즉 영화는 결국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듯이 자본가를 대표하는 프레데슨 Frederson 은 성경의 신(神)으로, 폭동을 일으킨 노동자들을 인간으로 비유하면서 프레데슨의 아들인 프레데어를 중재자로 내세워 둘이 악수를 하게 만든다. 결국 자본가는 타도의 대상이 아니라 너무나 손쉽게 화해의 대상 – 또는 복종의 대상 – 으로 바뀐다. 폭력혁명을 부추기던 가짜 마리아는 노동자들에 의해 화형 당한다. 가짜 마리아에 동조했던 노동자들은 무분별했던 러다이트에 불과했다.

결국 이 영화는 산업사회의 계급관계에 대해 영상에 있어서만큼은 더 이상 불만을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이미지로 형상화한 측면은 있지만 그것의 해법에 있어서만큼은 너무나 순진하게도 – 또는 의도적이게도 – 그 관계맺음을 자연의 질서로 환원시켜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로봇이 마리아로 변화하는 과정은 인간이 만든 질서가 신이 만든 질서와 동일시되어가는 영화 전체의 맥락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고로 노동자들은 자본가의 손 한번 잡아보고 계속 암흑이 짙게 깔린 지하 노동자 도시에서 살아가면 될 것이다.

1 thought on “Metropolis

  1. foog

    어느 블로그의 글을 읽어봤는데 이 영화의 팬으로 꽤 유명한 사람이 한명 있다고… 아돌프 히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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