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변 냉각탑의 폭파는 20세기형 냉전의 폭파?

북한의 영변 핵시설은 그동안 한국전쟁 이후의 북미관계의 미묘함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조형물이었다. 그런데 그 조형물이 이제 북한의 핵신고에 즈음하여 폭파되었다고 한다. 이 이벤트를 계기로 하여 북미관계, 나아가 동북아의 정치지리학 지형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될 것으로 보인다.

The Bush administration’s policy towards North Korea – isolating it and threatening it with military force, in order to break up a potential realignment in Northeast Asia unfavorable to US strategic and commercial interests – is in shambles. With the US military absorbed by bloody and unpopular occupations of Iraq and Afghanistan, US geopolitical influence is receding, even as the region’s strategic importance grows rapidly.

북한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정책은 – 미국의 전략적이고 경제적인 이해관계를 저해할 북한과 동북아 사이의 잠재적인 재편성을 분쇄하기 위해 북한을 고립시키고 군사적으로 위협하는 것 –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미군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피를 부르지만 인기 없는 점령 때문에 이 지역에서의 전략적 중요성이 빠르게 증대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정치지리학적 영향력은 감소하고 있다.(North Korea makes initial nuclear disarmament gestures, 28 June 2008, Wold Socialist Web Site)

World Socialist Web Site 도 지적하고 있듯이 이미 미국의 동북아에서의 군사적 입지는 그 중요성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눈에 띠게 약화되어 왔다. 특히 꽤나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미국의 대중국 포위 전략이(주1) 동북아에 와서는 바로 그 골치 아픈 북한 때문에 아작 나고 있다는 상황은 미국에게 있어서는 더할 나위없는 굴욕적인 상황일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부시 행정부가 처음 들어섰을 때의 대북정책은 ‘없었다’. 한국에 방영될 광고를 찍은 맥라이언이 TV쇼에 나와서 어느 나라 광고를 찍었는지 기억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가장 섹시한 장관으로까지 거론된 도널드 럼즈펠드는 취임 당시 한국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북한 뿐 아니라 한반도 자체가 존재감이 없었다는 증거다.

그러던 것이 대중국 전략이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힌 다음에야, 그리고 중동을 기어코 쳐들어가야겠다는 부시의 의지가 단순히 석유 때문만은 아니라고 우기기 위해 “악의 축”에 서둘러 북한을 추가시키고 나서야 북한이 가시권에 들어왔다. 그리고 설설 길 것으로 알았던 북한이 핵무기가 있다고 개꼬장을 부릴 때쯤 북한은 가장 댄디한 007 피어스 브론스난의 상대가 될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그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기간은 양국관계에 있어서, 그리고 여타 동북아 국가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북한에게도 그렇지만 미국 역시 굴욕의 시대였다. 정말 가진 것 달랑 방울 두 쪽인 나라에게 온갖 험한 소리 다 듣고 6자 회담에서 중국한테 형님 자리 뺏기는 수모를 겪었던 것이다. 되는 것도 하나 없던 부시 행정부의 지난 8년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 이제 겨우 자신들의 압력이 아닌 북한의 의지로 영변 냉각탑을 폭파하여 겨우 제대하는 부시 병장의 추억록에 넣을 사진하나 얻었으니 이런 개쪽이 또 있을까 싶다.

그렇다고 북한으로서도 여태 개기고 있어서 득이 된 것은 없다. 그 기간 동안 본인이야 억울할지 몰라도 적어도 서방에게는 ‘자기 몸 난도질 하는 부랑자 국가’로 인식되었고 내부적으로는 거의 재앙적인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상황이 호전될 기미는 별로 보이지 않는데 경제적으로는 현재의 테러지원국 해제 등의 조치가 사실상 다분히 상징적일 뿐 그 효과는 장기적이고, 정치적으로도 부시가 물러나고 설령 오바마가 대통령이 된다하더라도 북미관계가 급진전될 가능성은 희박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판단해 보건데 미국은 민주당이 정권을 잡든 공화당이 정권을 잡든 대외정책이나 경제정책의 큰 차이를 보이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대북정책에 있어 그러할 것이다. 그 이유는 현재의 미국이 어느 한 정파의 이해에 따라 정책을 시험해볼 국력의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즉 달러는 휴지조각이 되어가고 있고 유가는 치솟아 국민들이 바깥출입을 삼가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도 천문학적인 비용을 쏟아 붓고 있는 중동에 박아놓은 미군을 철수시키면 본전생각에 땅을 치고 후회할 것이 뻔하다.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지들이 여유가 있어야 북한도 눈에 들어오고 도와줄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북미관계는 한동안 정체상태, 즉 부시의 유산이 한동안 방치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북미관계는 북미관계 그 자체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중미관계, 더 나아가 미국과 동북아와의 관계의 틀 안에서 해석될 것이다. 그런데 군사적으로 미국과 동맹을 형성하고 있는 남한과 일본은 지금 중국의 가장 긴밀한 무역 파트너다. 이를 이제 와서 과거로 되돌리기에는 너무나 경제적으로 얽혀있다. 곤돌리자 라이스가 온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군사문제는 또한 경제문제이기도 하다.

점점 더 패권을 잃어가는 미국, 21세기 신흥강국으로 부상할 중국과 러시아,… 이러한 것들을 고려해 볼 때 북한의 핵포기 의지는 어쩌면 미국과의 화해 제스처를 위해서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북한은 이미 21세기의 새로운 정치지형도를 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안타까운 것은 현재 이 상황에서 가장 개념 없는 정부가 8년 전의 부시 행정부가 그랬던 것처럼 아예 대북정책이 존재하지 않는 식물정부 이명박 정부라는 사실이다.

(주1) 21세기 군사강국으로 성장할 중국에 대한 미국의 견제정책으로 간주되고 있다. 현황을 보고 싶으면 세계지도를 펴놓고 중국을 둘러싼 인접국에서의 미국의 영향력 확대정도를 가늠해보라.

11 thoughts on “영변 냉각탑의 폭파는 20세기형 냉전의 폭파?

  1. foog

    다급해지다보니, 당내에선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 기조를 근본적으로 전환시켜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김성회 제2정조부위원장은 “지금은 북한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개선해 나가야할 시점”이라며 “이전 정부에서 만든 남북채널도 최대한 가동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명박계’에 속하는 한 초선 의원도 “한나라당이 대선 공약으로 내세운 ‘비핵·개방·3000’은 언제부터 얼마나 북한에 지원을 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다듬어지지 않았다”며 “당시 이 공약을 만들 때는 북한 관련 정보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 변화된 상황에 따라 정책 기조와 수단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view.html?cateid=1020&newsid=20080629203103773&cp=ha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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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beagle2

    “군사문제는 또한 경제문제이기도 하다. ” <- 최근 이것과 관련된 이 생각 저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암튼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나저나 "4년을 이렇게 지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 이명박 반대자나 mb 정권세력이나 마찬가지 일텐데 만에 하나 지금의 위기에 정부측이 밀리게 되거나 한다면 독재정권들이 흔히 그러했듯이 내부의 위기를 외부의 위기로 무마하기 위해 곁에 있는 좋은 핑계거리인 북한과의 긴장국면을 조성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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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oog

      제 생각에 이 정부가 혼자서 긴장국면을 조성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어찌 되었든 미국의 새 정부는 북한과 불필요한 갈등을 조성하고 싶은 생각은 없을 겁니다. 경제에 쪼들리다보니 실질적으로 win-win전략, 이른바 2개의 분쟁지역에서 동시에 우위를 점하겠다는 전략은 자동적으로 폐기될 수밖에 없을 듯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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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beagle2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foog님 말씀이 분명히 맞는데 이 정권이 워낙 몰상식적이잖습니까. 입으로는 실용을 떠들어대지만 미국 일각에서 조차 당황스러워하고 마뜩찮아 할 정도로 이념에 매몰되어 있고요. ‘통일은 없다’ 따위의 말을 쏟아내는 작자를 통일부 장관에 앉힌 것도 그렇고요.

      NLL 문제 따위를 통해 국지적 긴장감을 조성할 순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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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foog

      이 정권이 ‘몰상식’하다는 말씀의 취지는 이해합니다. 다만 저는 개인적으로는 어느 집단이든 내부논리에 의해 계산된 행동을 한다는 점에서 그들을 ‘비이성적’, ‘몰상식’하다고 상정하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관점은 심지어 부시 행정부나 김정일 정권에도 동일하게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렇기에 이명박 정권 역시 국제 정치역학과 체제의 틀 안에서 행동할 것입니다. 그 기조는 저같은 경우엔 노골적인 대북강경책이라고 보지는 않고 있는 편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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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길손

    명바기는 남북긴장쪽으로 일단 시도는 할 겁니다.

    타개책은 일본바지가랭이 붙잡는 쪽으로 갈 겁니다.

    해저터널 먼저 찍고 대운하 찍고 등등….

    물론 결론은 쪽바리한테 오지게 뒤통수 맞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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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oog

      길손님의 시나리오대로 진행된다면 꽤 흥미로운(?) 시나리오가 되겠네요. 한번 추이를 살펴보도록 하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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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들쿠달스

    북한이 냉각로 폭파하는걸 보면서 왠지 씁씁하더군요.
    명왕성이 퇴출 당할 땐 노무현이 무얼 했는지 모르겠지만,
    냉각로가 뽀개질때 2MB는 어디서 무엇을 했을까요???

    앞에서 거듭 말하신 것처럼, 대북문제는 이미 북한만의 문제를 넘어 동북아 판도를 변화시킬 중요한 변수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거기다 북한은 촌놈제국주의 대한민국의 유일한 식민지 후보이기도 하죠. 정치적 경제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줄 수 있는 북한. 그에 대한 2MB의 정책은 과연 무엇이길레, 이렇게 기대만 품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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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foog

    북한의 남한 민간인 사살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명박 정부는 그나마의 유화 제스처마저 꼬여버리는 최악의 상황으로 몰리고 있다. 철학없는 정부의 고육지책마저 벽에 부닥치는 ..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재수없는 정부가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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