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위기 단상

결국은 시스템적인 모순이지만 이번 사태는 또한 윤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번 구제금융 법안의 부결도 상당부분 월스트리트의 그간의 비도덕적 행태에 대한 유권자들의 분노를 반영한 것이다. 막스 베버가 월스트리트에 한 2박3일 머물렀다면 어떤 말을 했을까? 이래서 금융자본은 유태인의 천민자본주의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자신의 주장이 옳았음을 기뻐 소리쳤을까?

월街에서 잘나간다는 CFA라는 자격증 공부는 윤리학(ethics)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만큼 금융인들의 윤리의식이 애당초 마비되었다는 반증일까? –; 중요하다는 이야기겠지. 그럼에도 언제부터인가 – 아마 처음부터겠지만 – 자본주의, 특히 월스트리트의 자본주의에서는 윤리는 교과과목일 뿐 실제업무와는 별 관계없는 것으로 치부되어 왔다. 승자독식과 한탕주의가 숭배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들은 경영진만 되면 천문학적인 보수를 받아 챙겼다. ‘황금낙하산’이라는 어이없는 제도는(주1) 경영진에게 회사를 말아먹어도 한 몫 챙길 기회를 주었다. 경영진이 되지 않더라도 남들이 원리를 이해할 수 없는 첨단금융상품을 만들어 한 몫 크게 챙길 기회는 곳곳에 널려 있었다. 그래서 계속 신상품을 만들어 팔았다. 언제까지? 시장이 폭발할 때까지.

그런데 자꾸 윤리의 문제로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려 하면 매듭이 지어지지 않는다. 결국은 인간은 탐욕의 동물이라는 환원론적인 철학논쟁밖에 안된다. 인간의 탐욕이 시너지 효과로 승화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 자본주의의 운영철학이었다면 그것이 선순환적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했어야 하는 것은 시스템이었다. 지금 보다 비판받아야 할 것은 그 탐욕을 악순환의 고리로 내몬 시스템일 것이다.

‘만리장성(Chinese Wall)’이 있다. 갑자기 웬 중국이야기냐고? 그게 아니고 투자은행에 관한 용어다. 원래 투자은행은 기초자산의 증권매도자와 그 증권의 매수자를 중개해주는 기능이 본연의 역할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고유계정(prop trading)으로 직접 매수자가 되기 시작하면서 이해상충의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중개도 하는 것이 매수도 하면 곤란하지 않은가. 그래서 나온 것이 이해상충의 여지가 있는 부서는 사내에서도 정보공유가 금지되도록 하겠다는 취지의 제도다. 좀 웃기긴 하다. 그만큼 탐욕을 통제할 수 있는 제도가 허술하다.

보다 거시적으로 접근하면 칼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국가기구는 처음부터 불편부당한 기구가 아닌 계급차별적인 기구였다. 다수결에 의한 대의제의 도입은 이러한 정치의 본질을 – 정치와 경제가 자웅동체라는 – 희석시켰다. 극우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노동계급은 변화를 두려워했고, 결과적으로는 소비에트의 일당독재를 비웃는 이들이 양당독재와 시장독재는 용인하는 아이러니한 세상이 되었다. 자본가와 정치가가 구별이 안 되는 워싱턴정가가 그 하이라이트다. 이런 상태에서 시스템의 근본적인 수술은 요원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구제금융은 죽어가는 시스템의 일시적인 연장에 불과하다.

이번 사태를 자본주의의 종말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텐데 그렇게 될 것 같지는 않다. 신자유주의, 금융자본주의라는 이름조차도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잘해야 앵글로-색슨 자본주의, 즉 미국과 기축통화로서의 US달러 이니셔티브가 ‘다소’ 약화될 것이다. 결국에는 노동계급, 넓게 보아 유권자들의 ‘혁명적’ 각성이 없이는 도돌이표일 것 같다. 월스트리트의 더러운 자본가들을 욕하고는 선거 때 다시 그들에게 돈을 받아먹은 매케인과 공화당을 찍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메케인의 절반만(!) 받아먹었다는 오바마를 대안이랍시고 찍는 것도 난감하긴 마찬가지다.

(주1) 이 제도는 회사가 장기적인 발전을 위해 M&A당하는 것이 바람직함에도 피인수 기업의 경영진이 이를 반대할 수 있기에 그에게 어느 정도 회유성의 보수를 준다는 의미로 생겨났다. 웃긴다.

6 thoughts on “신용위기 단상

  1. 포카라

    탐욕과 제도에 관해 생각해 봅니다.

    탐욕은 인간의 본성이라서 언제든지 히드라처럼 머리를 내밀 것입니다. 인간 개인의 탐욕, 집단의 탐욕 모두 제어하기가 힘듭니다. 이를 제도적 감시장치를 둬서 규제하겠다는 것은 과연 큰 성공을 거둘까요? 거칠게 비유하자면 공산주의는 자본가의 탐욕을 규제하는데 최우선적인 목표를 뒀지만 결국 실패했습니다. 자본주의는 사실 탐욕 (이기심)이 만발하게 놔두면 경제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잘도 굴러갈 것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했습니다. 아담 스미스 주장에서 많이 수정된 자본주의지만 탐욕을 시장이라는 벌판에 풀어 놓는게 좋다는 의견이 득세해 왔습니다. 그 결과 만들어진 신세계가 바로 우리 눈 앞에 있지요?

    결국 탐욕의 규제도, 방목도 모두 실패했지 않았나요? 여하튼 탐욕은 여전히 남습니다. 문제는 이걸 적당히 제도적 관점에서 규제한다는 발상인데 이것마져 큰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규제는 결국 힘 센 자들을 규제하는 것인데 기득권자들 스스로가 규제의 올가미를 뒤집어쓸 것 같지 않습니다. 여론이 비등하면 쓴 척 하다가 나중에 다시 벗어버릴 것입니다. 역사는 항상 힘있는 자의 편이 아닌가요? 역사가 민중의 편이라는 시각을 갖는 분들에게 돌팔매 맞을 수 있는 말이지만 역사는 철저히 민중을 유린하고 약탈해 온 기득권자들이 복락을 다 누리고, 민중이 극렬히 저항하면 아주 일부만 민중 몫으로 떼어주는 역사였던 것 같아요. 저 역시 민중의 세상을 희망하지만 항상 민중은 당하고 밟히면서 사는 것이 일반적인 것 같습니다.

    규제문제는 시장자본주의와 배치되기 때문에 받아들이는데 상당한 논란이 일 것입니다. 그러나 기득권자들은 세가 불리한지라 일단 수긍하는 척은 하겠지요. 나중에 규제를 무화시킬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요.

    제가 장하준 교수(그분은 스스로 제도주의학파라고 하신걸로 기억합니다.) 가 미국, 유럽 등 선진국과 후발국간에 공정한 경쟁을 위해서 제도적 장치를 후진국에 유리하게 (기울게 )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 맞는 말이지만 공허하다고 생각이 들었지요. 선진국은 절대로 스스로 후진국에 기운 제도를 만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세계는 평평하다고 보지요. 국가 내에서든 국가간 이든 제도를 통한 규제는 기득권을 가진 측에서 쉽게 양보하지 않기 때문에 제도에 너무 기대지 않는 것이 실망을 줄이는 것 아닐까요?

    글을 쓰다보니 탐욕을 제어할 방도인 제도에 회의적인 관점에 서게 되었네요 ^^* 그렇다고 자본주의를 뒤집어 버리고 다른 대안 체제를 말할 수도 없습니다. 대안없는 비판이군요. 글이 답답하기는 시장의 폭락 이상이군요.

    길게 주절거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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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oog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좋은 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주신 글에 대해서는 따로 별도의 글로 올려야 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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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Ikarus

    포스팅과는 동떨어진 엉뚱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미국 공대 졸업자들이 보는 -한국으로 보면 기사자격시험- FE(Fundamentals of Engineering)시험에도 수학,역학,화학같은 일반적인 공대과목들과 기초 경제학 이외에 윤리과목이 필수로 들어 있습니다. 시험의 수준은 차지하고라도 공대과목을 제대로 이수했는지 확인하는 자격시험에 윤리과목이 들어간다는 것은 옛말처럼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비록 오늘날에 와서는 많은 경우 윤리시험을 본다는 것이 윤리이 의식 마비된 사람들에 대한 무의미한 확인절차로 비춰지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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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oog

      하튼 윤리는 고딩때부터 100점 안 맞으면 쪽팔리는 과목이었잖아요. 근데 세상이 왜 이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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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beagle2

    아랫글과 더불어, 비슷한 맥락의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변화가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변화를 위한 조건들은 조금씩 쌓여 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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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oog

      변화의 기미는 보이긴 하나 그 변화가 언제 이루어질지는 알 수 없죠. 우리 세대일 수도 있고 더 오래 갈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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