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마패

포철 1기 설비구매는 대금지불과 설비선정의 절차에 비능률과 잡음을 부르는 혼선이 깔려 있었다. [중략] 포철은 정부기관은 ‘주일구매소’를 통해 설비구매를 계약할 수밖에 없었다. 주일구매소는 포철이 면밀한 검토를 거쳐 선정한 설비공급업체를 성능이나 가격에서 트집 잡았다. 그러면서 포철이 2류로 돌린 업체와 계약하겠다고 주장했다. 공급업체에서 상납과 리베이트를 받아내려는 정치인들의 협잡까지 개입했다. [중략] 단단히 준비하고 있는 그에게 기회가 왔다. 1970년 2월 3일, 대통령이 포철의 공사진척 상황을 보고받고 싶어 한다고 청와대 비서실에서 전화했다. [중략] 설비구매에서 포철이 부닥친 난관을 설명하고 개선방안을 건의했다. 심각하게 듣고 있던 박정희가 말했다. “지금까지 건의한 내용을 여기에 간략히 적어봐.” 박정희가 메모지를 내밀자, 경제장관회의에서 지시할 자료로 쓰려나 싶어 건의사항을 간략히 정리했다. [중략] 박태준이 박정희에게 메모지를 넘겼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내용을 야무지게 훑어본 박정희가 메모지의 좌측 상단 모서리에 친필서명을 하여 도로 내밀지 않는가. [중략] 박정희의 친필서명이 든 메모지는 포철 역사에서 ‘종이마패’로 불린다. [세계최고의 철강인 박태준, 이대환, 2004년, 현암사, pp309~312]

개발독재시대의 두 거물 박정희와 박태준이 한국경제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잘 보여주는 한 사례다. 경제성장을 일구어낸 개발도상국에서 볼 수 있는, 강직한 기업인, 비효율적인 국가기관, 떡고물을 챙기려는 정치인, 신념을 가진 독재자 등 그럴듯한 캐릭터들이 잘 포진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적어도 포항제철과 관해서는 ‘종이마패’적 기업운영이 성공을 거두긴 했다. 하지만 박태준이라는 CEO의 일방적인 말만을 믿고 통치자가 기존의 주일구매소와 같은 객관적 검증절차를 배제시켜버린 행태는 매우 위험할 수도 있다. 그 위험성은 사실 역사를 돌아볼 때 지루하게 반복되어 왔다.

실제로 이후 수많은 경제행위에서는 상호검증을 통한 의사결정의 합리성을 도모하기 위해 법적으로나 제도적으로 여러 기관과 행정절차를 두어왔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도 결국은 운용하기 나름이어서 오늘날에도 국가는 제도와 기관의 검증절차를 갖은 편법을 동원하여 피해나가기도 한다.

대표적인 회피행위로는 민영화를 들 수 있다. 공공서비스를 민영화하는 것은 부채에서나 행정기관의 감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에서 행정력의 범위에서 배제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개별사업으로는 사업을 쪼갬으로써 일정규모 이상 사업에 필요한 타당성 검토에서 배제시키는 방법이 있다.

요컨대 권력분산형 국가 모델은 – 예를 들자면 독립적인 중앙은행과 같은 – 그것이 반드시 경제성장 등에 있어서 성공적 이어서라기보다는 그렇지 않을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위험성이 너무 크기에 보강된 것이다. 어쩌면 그것들이 행정 권력의 아전인수 격 행동에 의해 지금도 무력화되고 있는 상황이 그 반증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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