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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탐크루즈의 적?

비가 참 지저분하게 오네요. 이런 날은 그저 방구들에 몸을 파묻고 만화책 스무 권 쌓아놓고 노는 것이 최고죠. 여기저기 예전 발자국을 뒤지다보니 2002년에 썼던 글이 있어서 퍼다 나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정말 글발 후지네요.

요즘 매주 일요일 저녁이면 MBC스페셜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연속기획으로 “미국”에 대한 관찰기를 방영하고 있다. 찾아서 보진 않았어도 채널을 돌려 나오면 찬찬히 보는 편이었는데 의외로 내 자신이 미국에 대해 아는게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만큼 신선한 기획이 돋보였다. 미국을 “절대악”이나 “절대선” 어느 한쪽으로 몰지 않으면서도 우리와 다르다는 다양성의 원칙에 기초한 객관적 시각이 돋보이는 프로그램이다. 사실 절대악이라는 시각으로는 절대 다룰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동안의 “선진국 컴플렉스”로 일관하던 구미선진국에 대한 겉핧기식 프로그램과는 다르다는 면에서 높이 사줄만하다.

특히 어제 방영했던 ‘헐리웃의 신화’는 영화라는 대중문화를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 특히 흥미로웠는데 제작진이 파고들고자 했던 핵심주제는 헐리웃과 펜타곤과의 밀월관계이다. 카메라는 진주만 공습에서부터 시작된 미군부의 ‘프로패간다’로서의 영화의 역할에 주목하게 되었고 – 구소련은 건국부터 인지하고 있었던 – 이후 촬영협조를 미끼로 어떻게 헐리웃 영화의 의식형성에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이미 사상이 좀 삐딱한 사람이라면 의례 짐작할 수 있듯이 이 프로그램에서는 미국식 ‘배달의 기수’ 영화의 제작에 시나리오 작업부터 펜타곤이 깊이 관여하고 있음이 최근 공개된 국방부 문서나 현 펜타곤의 헐리웃 담당관의 인터뷰를 통해서 밝혀냈는데 특히나 흥미로운 사실은 우리가 추억의 80년대 영화로 기억하고 있는 Top Gun의 주적은 원래 ‘북한’이었다는 사실이다.

펜타곤은 70년대의 반전분위기 이후 악화일로를 걷고 있던 군에 대한 일반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한 수단으로 영화 탑건을 선택하였고 희대의 섹시남 탐크루즈와 베를린의 멋진 테마곡으로 무장한 이 전형적인 ‘미국판 배달의 기수’는 그야말로 대히트를 기록하며 당초 펜타곤의 의도를 150% 달성하는 수확을 거두었다(다음해 사관학교 입학자가 전년 대비 5배 증가하였다 한다 -_-;). 그런데 시나리오 작업부터 밀착개입하였던 펜타곤은 시나리오 팀이 당시 화해 분위기에 있던 북한을 주적으로 설정한 사실을 알고 이를 지적 소련으로 바꾸었다는 사실이 탑건의 시나리오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밝혀진 것이다.

참 재미있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한 사실이다. 우리가 아무런 생각없이 웃으며 즐기는 영화, 음악 등의 대중문화 – 특히나 구미의 대중문화 – 의 뒷면에 숨겨져 있는 그 문화적 오만함, 인본주의에 대한 무신경이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는 장면이다. Take My Breath Away의 뮤직비디오에 삽입된 우리의 주인공 탐크루즈의 멋진 기관총 난사에 의해 폭파된 전투기에 탑승한 조종사가 북한군일 수 있다는 사실은 ‘악의 축’이면서도 ‘대중문화의 축’인 미국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굴욕감과 무력감을 느끼게 한다.

얼마전 새 007 시리즈에 북한군 장교로 출연을 제의받은 차인표의 행동은 그런 면에서 소극적인 저항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메이저 레코드사의 상업적 의도나 헐리웃 영화의 친미적인 프로파간다에 저항하면서 – 적어도 물들지 않으면서 – 서구 대중문화의 단맛만을 향유할 수 있을까?

그러한 시도는 영화계에서나 음악계에서 주로 ‘인디’라는 형용사가 붙은 생산자들에 의해 주도되기는 하였다. 영화에는 Michael Moore 와 같은 반골이 있고 음악계에서도 The Clash 등 소위 좌파 밴드들이 예술적 성취와 사상적 성취를 동시에 이룬 케이스가 있지만 이 역시도 소위 메인스트림이라는 거대한 괴물과 상대하기에는 너무 왜소한 다윗일 뿐이다. 또한 사실 나 자신도 매사에 그렇게 심각하게 문화를 즐기고 싶은 것도 아니다. 다만 일상을 자연스럽고 꾸밈없이, 그러면서도 “정치적으로 올바른(!)” 그런 영화와 음악을 즐기고 싶을 따름이다.

너무 거대한 소망일까?

결국은 ‘미국만세’, ‘자본주의 만세’라는 자가당착식 지뢰를 피해 가는 소극적인 소비행태를 취할 수 밖에 없는게 나의 한계인듯 하다. 🙂 

살파랑 (殺破狼 SPL, 2005)

피비린내와 살 냄새 진하게 나는 ‘싸’나이들의 홍콩 느와르 액션영화다.

영화는 처절한 교통사고현장을 비추면서 시작된다. 암흑계의 거두 왕보(홍금보)를 평생 감옥에서 썩게 할 재판의 중요한 증인이 탄 차였다. 증인과 그의 부인은 즉사하였고 함께 타고 있던 형사 진국충(임달화)과 증인의 딸은 살아남는다. 왕보는 결국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고 진국충은 뼈를 깎는 분노에 떨며 복수를 다짐한다. 그로부터 3년후, 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진국충의 공직생활도 얼마 남지 않고 팀장 직도 새로 부임한 마장관(견자단)에게 건네줄 판이다. 그 와중에 그들이 왕보의 조직에 심어두었던 형사가 살해당한 채 발견되고 이를 몰래 찍은 필름을 손에 얻게 된다. 하지만 불행히도 왕보의 폭행 장면에 이어 결정적인 한 방은 다른 하수인의 짓임을 알게 된다. 왕보를 살인죄로 잡아넣기 위해 진국충 팀은 증거를 조작하려 시도하고 이를 안 마장관은 그들과 충돌한다.

이 작품은 확실히 보다 진보한 홍콩 느와르 액션의 현 주소를 말해주고 있다. 많은 영화에서 조연과 조감독으로 잔뼈가 굵은 엽위신 감독은 블루톤의 현란한 영상, 유려한 선의 호쾌한 무술, 군더더기를 배제한 명확한 갈등구조(그래서 어설픈 면도 있지만), 이를 받쳐주는 다소 과장되고 연극적이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극의 호소력을 불어넣는 연기 등을 총지휘하며 탐미주의적인 액션 영화의 가능성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특히 견자단의 박력 넘치면서도 물 흐르듯 유연한 무술연기는 정말 오랜만에 브르스리의 포쓰가 느껴질 정도로 매력만점이다. 프라이드, UFC 등 신종 격투기의 세계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그와 홍금보, 오경 등이 벌이는 이종격투기를 결합한 현란한 무술연기에 환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막판에 상상을 초월하는 반전은 다소 작위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지만, 그럼에도 잠시 멍해질 정도로 충격적이고 감독의 삶에 대한 철학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는 장면이다. 2005년 개봉되어 흥행과 비평 모두 성공을 거두었고 2편까지 제작되었다.

The Bourne Ultimatum(2007)

The Bourne Ultimatum (2007 film poster).jpg
The Bourne Ultimatum (2007 film poster)” by International Movie Poster Awards (Direct link). Licensed under Wikipedia.

아마도 개인적으로 시리즈로 개봉된 영화중에서 유일하게 모든 작품들을 개봉관에서 감상한 케이스가 아닌가 싶다. 제목도 ‘본 : 최후통첩(The Bourne Ultimatum)’인데다가 이제 그 없이 다른 Jason Bourne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확실히 팬들의 뇌리에 자리 잡은 Matt Damon이 더 이상의 Bourne은 없다고 선언했으니 더더욱 그러하다.

Robert Ludlum의 베스트셀러에 기초하긴 했지만 기억을 잃은 스파이라는 기본줄기만을 남겨두고 새롭게 각색되어 2002년 개봉되었던 The Bourne Identity는 나름 신선한 매력이 있긴 했지만 그저 이전의 007유의 블록버스터형의 스파이 물과는 다른 안티히어로형의 스파이물이 등장했다는 – 선배 Harry Palmer가 있긴 하지만 – 사실만 인지시키는 수준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어떤 면에서는 Geena Davis가 호쾌한 액션을 선보였던 1997년작 The Long Kiss Goodnight의 남성 버전 정도가 아닌가 생각도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2004년 개봉된 The Bourne Supremacy는 이러한 ‘짝퉁’ 의혹을 일소한 청출어람의 속편이었다. 전편이 고뇌하는 Jason Bourne이 자신의 정체도 몰라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이제 이 작품에서는 악이 오른 Bourne의 액션이 제대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특히 느닷없는 연인 Marie의 초반의 비명횡사는 Bourne뿐만 아니라 관객들까지 황당했을만한 과감한 시도였고, 이 뼈아픈 분노가 Bourne의 전투력을 몇배 증가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2007년 개봉된 The Bourne Ultimatum은 이전의 두 작품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강렬한 액션씬을 선보이며 Bourne 시리즈의 종결을 자축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킬러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한편으로 이를 후회하는 Bourne의 방어적인, 그럼에도 전광석화 같은 무술솜씨가 관객들에게 묘한 쾌감을 불러일으킨다. 화장실에서 한때 동료였을 암살자를 목 졸라 죽이고 나서 순간적으로 비치는 그의 자괴감 섞인 표정은 ‘살인면허’가 있다고 자랑하던 007시리즈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Bourne 시리즈만의 장점이기도 하다. 또 한편으로 이전 작품과 같이 첨단무기와는 거리가 먼 Bourne의 임기응변적인 무기를 보는 것도 매력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매력적인 요소는 바로 마치 현장에 있는 것같은 착각이 느껴질 만큼 긴박감 넘치는 핸드헬드 영상으로 잡아낸 각종 추격장면이다. 런던의 워털루역, 모르코의 탕헤르, 그리고 뉴욕 한복판에서 펼쳐지는 추격신은 완급의 조절이 완벽하게 이루어진 명장면들이다. 사실 거의 모든 장면들이 핸드헬드로 찍은 것들인데 출연진들의 대화장면에서 흔들거리는 숄더샷 너머로 비춰지는 반쯤 가린 얼굴과 같은 장면들은 숨 가쁜 액션씬에 감추어진 또 다른 감칠맛 나는 볼거리이기도 하다.

‘궁극적으로’ 이 영화가 스파이물의 걸작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미덕은 아이러니칼하게도 스파이물 자체에 대한 ‘수정주의적인 자기성찰’이다. 냉전이 끝나 자본주의가 전 세계를 지배하는 작금의 현실에서 북한이나 이란 같은 몇몇 잔챙이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현존하고 분명한 위험’을 찾기 어려운 이 시점만큼 Bourne과 같은 캐릭터가 어울리는 시점이 있을까싶을 정도다. 그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외부의 적이 아닌 내부의 적을 향해 이빨을 드러냈고 그 결과 자신의 전 직장 CIA의 불법적인 암살 작전의 거대한 음모를 밝혀내고 만다.

한때 드러내놓고 자랑삼아 사람을 죽이던 스파이물들이 모두 이 작품에서 까발려지는 불법적인 블랙브라이어 작전의 일환이거나 짝퉁임이 밝혀졌으니 이건 흡사 마술사의 영업상의 기밀인 마술 속임수를 공개한 거나 진배없다. 그리고는 Bourne은 깨끗이 양심선언 해버렸으니 어찌 보면 이 작품은 Bourne 시리즈의 종결뿐 아니라 스파이물의 종결까지도 선언해버린 것이다. Clint Eastwood가 서부영화 가게 문을 닫게 한 장본이라면 Matt Damon은 스파이물의 가게 문을 닫게 하는 장본인이 될 확률이 농후해졌다. 지난번 Syriana까지 연타석 홈런이다.

결국 Sunday Bloody Sunday 등 사회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해오던 영국 감독 Paul Greengrass가 헐리웃에 건너와서 맡은 장르가 흥미롭게도 스파이물이었는데 그 작품이 오히려 장르의 해체를 주장하는 꼴이니 딴에는 그가 트로이의 목마일지도 모를 일이다. 헐리웃 스파이물을 무력화시키라는 특명을 받고 온 영국 ‘스파이’ 감독. -_-;; 비록 본인은 상업적 장르니만큼 정치적인 의미는 부여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 멘트 또한 정치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정도로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적어도 장르적으로는 심각하다는 생각이다.

어쨌든 이번 Bourne 시리즈는 역대 Bourne 시리즈 중에서도 최고의 흥행성적을 세웠으니 당연히 제작사 입장에서야 당연히 다음 편 욕심이 날 터인데 그게 그리 쉬울지는 잘 모르겠다. Jason Bourne 이 다른 누군가의 얼굴로 성형수술을 하고서 활동한다는 The Bourne Surgery 정도가 나오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렇게 되면 시리즈 모두를 극장에서 본 개인적인 기록은 깨지겠지만….

* 엔딩타이틀에 흐르는 Moby의 Extreme Ways는 최고의 엔딩곡 중 하나이다. 마치 화룡점정과 같은 곡이었다. 한편으로 Moby의 곡이 주제곡이라는 사실은 좀 비틀어 생각하면 의미심장하기도 하다. Moby는 사회비판적인 메시지의 곡을 자주 선보여 한때 그의 곡들은 ‘사회비판적인 이들이 죄책감 없이 클럽에서 춤출 수 있는 춤곡’이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그러니 ‘사회비판적인 이들이 죄책감 없이 극장에서 스파이물을 감상할 수 있는 영화’에 이 이상 딱 어울리는 아티스트가 있겠느냐 말이다.(비틀어도 너무 비틀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