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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 후보는 ‘성장’을 이야기하여야 한다

왕따 당하고 있는 좌파 후보

실질적으로 이번 대선에서 소위 ‘좌파’ 후보로 자임하는 후보는 두 명이다. 하나는 비교적 잘 알려진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 다른 하나는 언론으로부터 철저히 따돌림 당하고 있는 한국사회당의 금민 후보다. 두 후보 간의 지지율의 차이는 있으나 둘 다 대선의 메인스트림에서 소외받기는 매한가지다. 권 후보의 지지율은 대략 2~3%대로 민주노동당에 대한 지지도보다도 떨어져 당의 역대 최저 지지율이 될 가능성이 크다. 금민 후보의 지지율은 1%대 미만으로 1%대의 벽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 확실해 보인다.

이러한 지독한 우편향의 정치지형은 이념적 포지셔닝에 대한 일천한 역사적 경험도 한 몫 하겠지만 내부적인 역량의 한계도 있음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두 후보는 다른 어떤 후보들보다 현재의 경제, 정치, 사회를 통렬히 비판하고는 있지만 국민들에게 그 비판이 전달되지도 않고 있고, 비판을 넘어서는 대안이 유권자의 마음을 효율적으로 파고들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다보니 비정규직 노동자가 이명박 후보에게서 희망을 찾는 어처구니없는 희극적 상황까지 벌어지고 있는 것이 현재의 정치지형이다.

선거판이 X판이어서 그런가 후보의 잘못인가

이 두 좌파 후보가 선거판에서 돌풍을 일으키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선거판이 BBK 등으로 진흙탕이 되고 있는 탓이겠지만, 또 하나 지적해야 할 점은 선거판의 천박함을 뛰어 넘을 ‘경제적 대안과 희망’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예를 들어 이명박 후보의 ‘경부대운하’ 공약은 터무니없는 공약이긴 하지만 적어도 유권자들에게 확실히 각인되는 ‘경제적’ 약속으로 느껴진다. 박정희 식 개발독재의 냄새도 진하게 배어 있다. 유권자들은 박정희의 독재가 그리운 것이 아니라 그때의 경제적 활력이 그리운 것일지도 모른다.

우파 후보들은 바로 그 지점을 파고들고 있다. 일자리가 없으면 건설경기를 살려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주장한다. 이런 약속에서 ‘토건국가’ 비판은 파고들 자리가 없다. 정확히 말해 현재의 ‘고용 없는 성장’은 자본집약적 산업구조화, 주주자본주의 강화, 제조업 공동화 등으로 말미암은 노동유연성 강화와 고용불안에 기인하고 있음에도 유권자 대다수는 삽질이라도 해야 일거리가 생긴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한편 문국현 후보는 이 틈새시장을 ‘일자리 나누기’라는 상품으로 교묘히 파고들고 있다.

좌파가 오히려 성장을 부르짖어야 한다

경제적 대안에 있어 ‘대운하’ 공약과 같은 단순무식하고 개발주의적인 공약을 좌파 후보들이 낼 수 없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탓에(?) 좌파 후보들은 늘 ‘성장 없는 분배’만 외치는 이들이라는 비난에 시달려야 하고 이에 대해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과연 좌파 후보들은 ‘성장’은 제켜두고 ‘보전’과 ‘분배’에만 몰두하는 것이 사실인가. 어찌 보면 좌파 후보들마저 ‘성장과 분배의 이분법’의 도그마에 빠져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두 후보는 ‘그렇지 않다’라고 자신 있게 말해야 한다. 사회총체적으로 볼 때 성장은 필요불가결하다. 국민의 수가 늘어나고 이들의 삶의 질에 대한 수요가 계속 늘어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것이 사회공공성이나 환경보전(주1), 그리고 지속가능한 삶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 나가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그 성장에 대한 적정한 통제와 정당한 분배를 주장하는 좌파적인 대안이 ‘분배 -> 소비 -> 생산 -> 성장’ 으로 이어지는 경제 선순환적인 진정한 성장 대안임을 주장하여야 한다.

어떻게 성장의 재원을 마련할 것인가

즉 좌파 후보들은 현재의 우파들의 성장론은 명백하게 주주 자본주의와 금융 자본주의의 특성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는 주주와 투기적 금융자본의 약탈적인 자원독점을 정당화시키고 있으며 이의 확대재생산을 목적으로 하고 있음을 비판하여야 한다. 또한 이러한 시스템은 자원분배에서 소외된 노동자들은 모기지론이나 신용카드 빚으로 소비를 해야 하는 구조를 온존시켰고 이것이 현재 직면한 전 세계적인 신용경색의 원인이 되고 있음을 폭로해야 한다. 한마디로 시장맹신의 무정부성이 우파 성장론의 핵심이다.

한편 성장을 이야기함에 있어 일차적으로 제기되는 물음은 역시 투자재원이다. 자본은 자본주의를 싫어하는 이들에게도 필요한 것이다. 이명박 후보는 대운하 건설재원을 민영화를 통해 마련하겠다고 했다. 민영화가 철밥통을 깨는 개혁으로 치장되고 있는 요즘 같은 세상에 참 하기 편한 발언이다. 미래세대의 부담일진데 그들은 유권자들도 아니다. 그러니 좌파들은 이런 무책임한 소리를 하면 안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올바른 성장’을 위해 좌파는 어떤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가.

현재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는 대표적인 재원이 바로 국민연금이다. 국민연금은 지난 4월 적립금 규모가 200조원을 돌파하여 8월말 현재 213조원으로 세계 5위의 거대 기금으로 성장했다. 국민연금의 주인은 국민이다. ‘투자의 사회화’를 이야기할 때에 이보다 더 명분 있고 현실성 있는 재원은 사실상 없다. 따라서 향후 선거에서 ‘성장에 대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좌파 후보라면 이 부분에 대해 언급하여야 하는 일종의 당위성이 부여된다고 할 수 있다.(주2)

두 후보의 공약 비교

사실 이 부분이 권영길 후보의 공약과 금민 후보의 공약의 주요한 차이점 중 하나다.

먼저 권 후보의 공약을 들여다보자. 결론적으로 말해 국민연금의 활용방안에 대한 언급, 더 나아가 경제체제 정비의 재원조달 방안이 없다. 그의 경제 관련 공약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재벌과 외국자본 중심의 수출주도형 경제를 중소기업과 노동대중 중심의 내수주도형 경제로 전환할 것이다. 주요 기간산업과 은행을 재국유화할 것이다. 한미FTA를 무효화하고 외국투기자본을 강력하게 규제할 것이다.”(원문 보기)

이 문장으로만 본다면 권 후보의 공약은 사회주의적인 대안 – 또는 反자본주의적 대안 – 이라기보다는 민족주의 내지는 폐쇄형의 자본주의 경제를 지향하는 것으로 보인다. 수출주도형 경제를 내수주도형 경제로 전환하고 외국투기자본을 규제한다는 발상은 사실 비판할 부분이 많지만 논지에 벗어나므로 언급하지 않겠다. 문제는 “주요 기간산업과 은행을 재국유화”하는 부분에 대한 ‘어떻게‘라는 부분을 이 공약이 나와 있는 장이나 다른 공약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주3)

금민 후보는 이에 반해 ‘연기금으로 거대기업 국민통제’를 타이틀로 하여 국민연금을 통한 투자의 사회화를 주요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는 “이 기금으로 주식에 투자하거나 회사채 시장이 형성될 경우 회사채에 투자하면, 국민이 대주주 역할을 할 수”(원문 보기)있다는 로드맵을 제시하며 이를 통해 투자우선순위, 금융공공성, 사회책임성(주4)을 담보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더불어 실현가능성에 대해서는 2000년 7월 발효된 영국의 수정연금법의 사례를 들고 있다.

연기금을 통한 기업통제, 과연 가능한가

물론 ‘연기금을 통한 기업통제’라는 공약은 좌파 입장에서는 여전히 우편향적인 공약일터이고 우파 입장에서는 지극히 혁명적인 불온한 발상이라는 애매한 지점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그 논의도 이제 막 시작된 시점이다.(관련 기사 보기) 미국의 진보진영에서 독특한 포지션을 점하고 있는 마르크스 이론가 더그 헨우드 Doug Henwood 는 그의 저서에서 공공연금이 기업의 대주주로 나섰음에도 실제로 다른 주주들보다 보다 급진적인 주장을 하지 않았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결국 이는 공공재원의 의사결정구조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

여하튼 기업을 군대를 동원하여 통째로 접수할 생각이 아니라면 대안 경제 체제를 고민하는 데에 있어 연금 활용론은 앞으로 심각하게 고려되어야 할 로드맵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상태에서 지금 진보 진영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재벌과의 사회적 타협이라는 이슈가 실현가능할 것이다. 힘도 없고 돈도 없는데 재벌이 뭐하러 진보진영과 타협을 하겠는가.

소비의 사회화에서 투자의 사회화로

지난 대선에 민주노동당은 ‘무상교육 무상의료’라는 ‘소비의 사회화’를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이러한 공약 역시 아직 실현이 요원한 현실에서 폐기되어서는 안 되는 공약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우파 후보들마저 서민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각종 환심성 복지공약을 남발하는 상황에서는, 그리고 좌파의 근본적 존재의의를 놓고 보자면 이제는 ‘투자의 사회화’를 슬로건으로 내세워야 한다. 투자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소비재원도 마련될 턱이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경제는 ‘투자 -> 생산 -> 유통 -> 소비 -> 재투자’의 흐름이 연속되는 유기체적인 시스템이다. 그 생산력의 중추는 역시 ‘노동’이지만 노동은 돈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서 돈을 쥐고 있는 자가 노동을 쥐고 있는 자들을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장래의 대안 체제는 돈을 생산주체에게 귀속시키는 것이 핵심이다. 그렇지 않았을 때에 나타나는 부작용이 현재 벌어진 삼성의 부정부패일 터이고, 더 나아가서는 시장파괴와 환경파괴인 것이다. 그 악순환이 이제는 선순환으로 전환되어야 할 시점이다.

참고글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id=41758

 

(주1) 성장은 당연히 환경을 파괴한다는 생각이 꽤 설득력 있게 맹목적인 일부 환경보호론자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주2) 이미 박근혜 씨가 연기금의 주식투자를 연기금 사회주의라고 비판한 적이 있는데 적절한 지적이었다

(주3) 사실 민주노동당에서 연기금을 통한 투자사회화를 공약으로 내걸은 후보는 심상정 후보 하나다

(주4) 현재 삼성 사태를 근본적 해결로써 바로 삼성에 대한 사회적 투자를 통해 사회적 기업으로 바꾸는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국민연금의 또 다른 문제, 어떻게 투자할 것인가?

몇 해 전 국민연금 등 연기금의 주식투자 문제가 불거지자 박근혜씨를 비롯한 한나라당 수뇌부들은 이러한 시도가 소위 ‘연기금 사회주의’적인 조치라며 반발하였던 적이 있다. 당시 연기금의 자금동원이 연기금 자체의 수익성 개선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증권시장의 부양 쪽에 무게가 실려 있다는 추측이 강하게 일었고 결과론적으로 연기금의 전면적인 주식투자는 유야무야 되었지만, 이는 연기금이 한 나라에서 차지하는 꽤나 독특한 지위를 잘 말해주는 에피소드였다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국가가 노동자의 노후를 보장해주는 이른바 퇴직금 성격의 각종 연기금은 독일을 통일한 비스마르크의 작품이다. 또한 기업연금은 다른 선진국에 비해 사회안전망이 적었던 미국을 중심으로 1차 대전 이후 발전해왔다. 이러한 제도는 날로 성장해가는 노동계급의 강성기조를 누그러트리기 위한 기회주의적인 조치라는 설이 가장 설득력 있지만 어쨌든 이후 자본주의가 발전해감에 따라 연기금은 각국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할 국가 또는 기업의 공적 부조의 기본으로 인식되어 왔다.

이 연기금에 관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미국에서는 1930년대부터 증권시장에 연기금을 재원으로 하는 펀드가 등장하였고 1940년대에 본격적으로 확대되기 시작하였는데 바로 제네럴 모터스(General Motors : GM)의 찰스 윌슨(Charles E. Wilson) 회장이 기업 연금 도입에 앞장섰던 인물이라고 한다. 한편 경영 전문가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는 이에 대해 “연기금 펀드가 주식에 투자하면 몇 년 안에 미국 내 주요기업의 소유주가 노동자가 될 것”이라고 엄살을 떨었고, 한때 미국의 전설적인 노동 투사 유진 뎁스(Eugene V. Debs)를 위해 선거운동을 했었던 윌슨 회장은 “바로 그렇게 돼야한다”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세계 최대기업의 우두머리가 실은 사회주의자였을지도 모른다는 낭만적인 추측도 해볼 수 있는 이 에피소드에서 우리는 이미 미국의 경우 1930년대에 우리나라에서 최근에야 일어났던 논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것의 사회적 함의는 차치하고서라도 연기금의 규모는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한 나라의 전체 부(富)에서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고 – 우리의 경우도 국민연금은 자산규모가 100조 원을 훨씬 넘어서 한 해 예산을 넘어서고 있을 정도다 – 그것이 그 나라의 증권시장 또는 기타 자금시장에 본격적으로 투입될 때는 무시 못 할 주요 투자세력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1960년대 들어서면서 미국의 증권시장에서는 탄광노조가 1,600만 달러의 주식에 투자하였고 연방정부의 예산이 1천억 달러에도 미치지 못했던 1961년 미국 전체 무보장 연기금 펀드가 174억 달러 어치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등 연기금 펀드는 시장에서 막강한 플레이어로 활약했다고 한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의 미국이 사회주의 국가인 것은 아니다. 보다 교묘해진 기업의 지배구조는 실질적으로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의 예언이 엄살이었음을 말해줄 따름이다. 오히려 노동자의 돈이 펀드에 투임 됨에 따른 예기치 못한(?) 부작용의 개연성만 늘어났다.

그와 관련해서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주요한 시사점 하나는 각종 자금들이 갈수록 서로 얽히게 됨에 따른 연쇄금융공황의 가능성이다.

신자유주의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전 세계의 미국화이다. 그렇다면 증권시장 역시 미국의 예를 따라가는 것이 순서이다. 뮤추얼 펀드는 1924년 처음 월스트리트에 등장하였다. 우리는 최근 몇 년간 크게 유행하였다. 앞서 말했듯이 미국은 1930년대에 연기금을 펀드에 투입하였다.

우리 역시 일부나마 연기금의 주식투자가 진행되고 있다. 변액보험 등 이른바 간접투자 상품도 크게 유행하고 있다. 알다시피 우리의 퇴직금도 확정급여형(DB)이다 확정기여형(DC)이다 하면서 증권에 투자되는 방안이 꾸준히 논의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는 날이 갈수록 많은 나라의 연기금이 증권투자, 그것도 고위험 고수익 위주의 헤지펀드에 돈이 맡겨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이전의 일반인 주식투자와 다른 점은 소위 간접투자라는 명목 하에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투기자본의 탄알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얼마 전 NHK에서 제작하고 방영한 ‘투기금융자본의 실체’라는 다큐멘터리에는 한 씁쓸한 에피소드가 소개되고 있다. 일본의 문구점 상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 연금은 연금의 운용수익률이 저조하자 이 돈을 헤지 펀드에게 위임하였다. 헤지 펀드는 이 돈을 일본 증권시장에 투자하여 모처럼 문구점 연금에게 좋은 수익률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 헤지 펀드의 투자방법이 주가가 떨어질수록 돈을 버는 ‘공(空)매도’라는 방식이었다는 점이다.

이에 연금의 한 임원은 ‘우리가 일본의 주가가 떨어진다고 좋아해야할 상황이라 기분이 묘하다’는 발언을 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원소유주로부터 멀어진 자산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회에 작용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해관계는 좀 더 복잡해진다. 어느 개인 스스로야 증권시장이 활황이어서 경제도 활성화되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 그의 돈은 주식폭락에 베팅되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문제는 앞서 말했듯이 점점 더 많은 노동자의 연기금 또는 보험금이 이렇듯 더 높은 수익률을 쫒아 헤지 펀드를 통해 유가증권 시장에 투입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것이 전통적이고 단순하게 우량주를 중심으로 지수를 선도하며 투입된다면 별무 상관없겠지만 문제는 만일 펀드의 자금운용책임자가 돈을 헤지펀드에 맡겼을 경우 고위험 고수익을 전략으로 삼는 헤지펀드는 그 돈을 공매도, 환율변동에 대한 베팅, 적대적 M&A 등 사회전체의 부의 증가나 건전한 기업의 자금조달과는 별반 상관없는, 오히려 금융시장을 교란시키는 전략을 택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점점 더 많은 소위 정상적인(?) 펀드들마저 이러한 머니게임에 동참할 수밖에 없게끔 채권시장 등의 수익률도 악화되어가고 있다.

얼마 전 흥미로운 외신 기사가 있었는데 앞서 언급했던 GM에 관한 뉴스이다. 최근 GM은 퇴직연금의 지급이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고 한다. 확정급여형(DB) 방식을 취한 이 회사의 보수적인 투자운용으로 말미암은 수익성 악화 탓이라는 게 관계자의 설명이다. 사실 이러한 문제가 동일하게 우리의 국민연금에게도 고민거리인 셈이다. 전 세계의 실질적인 경제성장이 저성장 또는 정체인 상태에서 연금을 지급할 수혜대상을 늘어가는 상황이고, 그것은 곧 각국의 주요 연기금마저 헤지 펀드에 돈을 맡기고 싶을 유혹이 커질 수 있는 개연성을 높여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시 미국의 증권시장으로 돌아가 보자. 1929년 미국의 대공황은 허다한 이유가 있겠으나 마진론을 기반으로 한 일반인들의 봇물 같은 주식투자도 한 몫 하였다. 이후 몇 번의 대공황과 같은 위기가 미국에 있었으며 그것이 비록 1929년의 그것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자본주의 금융시장의 무정부성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제 이것이 금융자유화로 인해 전 세계가 동일한 원리에서 움직여갈 때에, 그리고 어느 한 나라에서 금융공황이 발생하였을 때에 과연 그 폭발력은 어떠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분명하게도 그 폭발력은 연기금 등 노동자들의 자산에 의해 더욱 증폭될 것이다. 물론 연기금은 그 폭발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될 것이다.

노동자들이 미래를 위해 쌓아놓고 있는 연금, 보험과 같은 미래의 자산이 오히려 현재의 다른 노동자들을 해고시키는 M&A의 자산으로 쓰일 수 있다는 사실, 한 나라의 환율을 혼란에 빠트리는 환율조작의 자산으로 쓰일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행여 있을지 모를 금융공황에 무방비로 노출되고 있다는 사실은 씁쓸한 뒷맛을 남기고 있다. 실제로 그것이 전체 투기자본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히 파악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겠지만 비중이 늘어가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개인투자자의 증권게임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우리가 의도하지 않은 연기금이나 변액보험의 높은 수익률로 기뻐하고 있을 즈음 어느 누군가는 아파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오늘날 세계화된 금융시장의 고통스러운 자화상이다.

연기금 주식투자 옳은 일인가?

‘연기금 주식투자 옳은 일인가’ 라는 질문에 우선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다. 누구를 위한 연기금 주식투자인가 하는 문제이다. 즉 Orientation 과 Destination 이 확실하게 자리매김 되어야 한다. Orientation 은 국민의 돈이고 Destination은 연기금이 고갈되지 않고 실질적인 노후보장 방안으로 자리매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연기금 주식투자라는 의제 역시 지난번 행정수도 이전처럼 이러한 당연한 수순이 배제된 채 정치논리에 의해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지난번 행정수도 이전 논쟁에서의 문제점은 정부와 여당이 충청권 득표 전략으로 행정수도 이전을 상정해놓고 뒤에 가서야 타당성 분석을 끼워 맞추는 식으로 진행되었고 이로 인해 사회적 반발과 국론분열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에 있다. 이번 연기금 주식투자도 마찬가지이다. 주식투자의 논리는 연기금의 고갈위험에 대한 대비책의 차원에서가 아닌 시장 활성화라는 부수효과에 관심이 맞춰져 있다는 이야기다.

오늘자 언론보도에 따르면 노 대통령이 “현재 1백조 정도 연금기금이 있는데 이 돈이 묶여 있으면 결국 경제법칙에 의하면 수요를 줄이는 것”이라며 “정부에서 쓰자는 게 아니고 우선 주식투자를 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이거 풀지 않으면 경제가 상당히 어려워질 수 있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 발언에서도 이미 그의 생각은 연기금의 효율적 운용은 뒷전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분명 연기금이 쌓이게 되면 시장에서 돈의 흐름이 왜곡될 여지는 있다. 즉 연기금에 돈이 쌓이지 않았더라면 돈이 보다 고위험 고수익의 투자처로 흐를 개연성이 있을 텐데 연기금의 고유한 특성으로 말미암아 저위험 저수익의 투자처로 돈이 몰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주식시장 등 살벌한 전쟁터에서의 총알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정책운용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논지다.

그러나 그러한 논지는 연기금의 존재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전제로 할 수밖에 없다. 연기금이 시장을 왜곡시키리라는 것은 이미 연기금 제도 수립 당시부터 불문가지의 사항이었다. 정부는 시장의 실패로 말미암은 사회안전망의 부재를 보완하고자 연기금을 설치한 것이고 그로 인해 시장의 왜곡은 불가피한 문제였다는 것이다. 이제 와서 경제법칙 운운하는 것은 노 대통령이 시장 무한자유주의에 경도되었다는 사실만을 확인해주는 꼴이다.

한편으로 연기금을 주식투자하자고 주장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논리는 주식시장이 장기적으로 반드시 우상향할 것이며, 주식수익률이 채권수익률을 상회한다는 경험적 수치를 근거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장기적(?)인 상승경향이 보여주는 모습의 근본한계는 그 ‘장기’의 정확한 기간 산정이다. 물론 우리나라 역시 80년대에 비해서는 주식수익률이 높다 하겠으나 그 중 외환위기 기간의 하락폭은 국가의 존망을 좌지우지하지는 않았어도 연기금의 존망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파괴력은 있는 정도이다. 그 와중에 만약 연기금이 그 이전부터 주식투자를 했더라면 연기금 투자결정 단위는 주식이 2004년에는 분명히 오를 것이므로 손절매 하지 않겠다고 하는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까?

또 하나 외국에서는 연기금의 주식투자 비율이 우리나라에 비해 현저하게 높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백번양보해서 그러한 추세에 맞춰 주식투자 비율을 높인다 할지라도 물러서지 못할 부분이 있다. 미국마저 우리나라의 국민연금에 해당하는 Social Security 는 전액 국공채에 투자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기타 주정부 차원에서의 퇴직연금, 공무원 연금이 기금활용에 주식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공무원 연금이 Social Security 보다 수익률이 높으므로 더 좋다는 주장도 있으나 Social Security 가 수익률 7%, 가장 수익률이 좋다는 캘리포니아 공무원 연금이 15%인 정도를 감안하면 주식시장의 폭락위험을 감수해가면서까지 8%의 추가수익을 바라본다는 것은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도박이다.

서두로 돌아가서 연기금의 활용방안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의가 있을 수 있다. 주식투자, 채권투자, 미국 채권 투자, SOC 투자 등 갖가지 방안이 논의될 수 있다. 요는 지금의 논의가 연기금을 납부한 국민의 안녕을 위해서가 아닌 시장의 탄알 보충을 위한 수단으로 논의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해찬이나 노무현이나 다 연기금을 자기 주머니인양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막말로 연기금의 투자운용 결정은 연기금 투자위원회에서 할 일이다. 총리나 대통령이 이래라 저래라 할 일이 아닌 것이다. 총리나 대통령이 연기금에 낸 돈이 한 40% 정도 되면 또 모를까 그 돈은 전 국민이 십시일반 노후를 대비해서 낸 돈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