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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제가 체제위기를 해결하지 못하는 현실, 월스트리트의 경우

최근 뉴욕의 연방지방법원 판사인 Jed S. Rakoff는 미국증권거래위원회(SEC ; Securities and Exchange Commission)와 시티그룹 간의 2억8,500만 달러에 달하는 법원外 합의를 거부하였다. 그 대신 이 판사는 당사자들이 내년 7월 있을 재판을 준비하도록 명령하였다. Rakoff 판사는 해당 명령을 내리며 당사자 간의 합의가 “(공정하지도, 이성적이지도, 적절하지도 않으며, 공익에도 부합하지 않는다고(is neither fair, nor reasonable, nor adequate, nor in the public interest)” 말했다.

SEC는 시티그룹이 지난 2007년 몰락해가는 주택시장과 연계된 금융상품을 투자자들에게 10억 달러 어치 팔면서, 정작 자신들은 그 시장의 반대매매를 활용했다는 혐의를 두고 있었다. 이 사건은 여러모로 5억5천만 달러의 법원外 합의에 도달한 골드만삭스의 케이스를 연상시킨다.(당시 사건에 깊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 John Paulson 의 기이한 행태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으면 여기를 클릭) 어쨌든 시티그룹은 혐의에 대해서 긍정도 부정도 안한 채 이 엄청난 돈을 내기로 합의했다.

한편 Tim Fernholz라는 칼럼리스트는 The New Republic이라는 매체에 기고한 칼럼에서 Rakoff 판사의 행동이 어떤 “상징적인 승리(a symbolic victory)”이상의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회의적인 의견을 표명하였다. 그가 이런 의견을 내놓는 근거로는 1) 화이트칼라의 범죄는 성공적으로 죄를 밝혀내기가 쉽지 않은 문제이며 2) SEC가 그 많은 금융권의 범죄를 법정에서 증명해낼 수 있을만한 역량이 되지 않는다는 등이 있다. 대의는 동의하지만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는 논지다.

SEC 의장 Mary Shapiro는 의회에 위기 이후 이어지는 새로운 의무와 케이스를 다룰 수 있도록 예산을 증액해주도록 반복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2010년 하원에서 공화당이 다수를 차지한 이후, 그들은 규제자에게 더 많은 돈을 주기를 거부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 기관의 신뢰도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SEC의 비판자는 이 기관이 케이스들을 법정에서 다루지 않으려는 것은 순전히 의지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월스트리트에서의 시각은 이 기관이 순전히 주요은행들을 법정에 세울 수 있는 자원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대부분의 케이스는 두 명의 변호사와 한 명의 준법률가가 다루고 있어요.” 이 규제자에 친숙한 한 월스트리트 변호사의 이야기다. “그들이 케이스를 가지고 한 판 붙으려고 하면 돈질을 하는 누군가에 의해 파묻혀버릴 겁니다.”[Why the SEC Will Soon Be Prosecuting More Cases Against Big Banks—And Losing]

그의 이야기는 판사의 행동은 이상주의적 행동일 뿐, SEC가 하는 대로 여론을 등에 업고 협상력을 키워나가 법정 밖에서 합의를 하는 것이 실용적이라는 이야기다. 비록 그 합의금이 은행들이 벌어들인 돈에 비하면 푼돈에 불과할지라도 말이다. 그의 말에 일부 공감하는 바이지만, 바로 이러한 현실은 역으로 현재의 사법체계와 감독체계의 근본적 한계를 잘 설명해주고 있고, 이에 대한 근본적인 수술이 필요한 시점임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그 한 돌파구로 대중이 찾은 것이 거리에서의 행동이다.

뉘른베르크의 재판 (Judgment At Nuremberg, 1961)

영화는 한 건물 위에 장식되어 있는 스와스티카가 파괴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절대권력 나찌의 종말을 표현하는 이 장면을 통해 영화는 이후 펼쳐질 승자의 역사에 대한 기록일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뉘른베르그에서는 연합국 4개국이 제3제국의 전범을 단죄하는 법정이 열리고 있었다. 이제는 은퇴한 판사인 Dan Haywood(Spencer Tracy) 는 제3제국의 부역한 4명의 판사의 유죄 여부를 가리는 재판의 재판장을 맡게 된다. 이 재판에서 열혈검사 Ted Lawson(Richard Widmark)은 피고들의 나찌에 대한 적극적인 충성을 주장하는 한편, 오스트리아 출신의 변호사 Hans Rolfe(Maximilian Schell)는 법관은 정해진 법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하는 수동적인 집행관일 뿐이라는 논리를 펼친다.

이후 법정은 공산주의자 집안이라는 이유로 거세수술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Rudolph Peterson(Montgomery Clift)와 유태인과 성관계를 가졌다는 죄목으로 유태인은 사형당하고 상대여인은 감옥살이를 했던 펠렌스타인 사건의 당사자였던 Irene Hoffman(Judy Garland) 등이 주요증인으로 등장하며 치열한 법정공방을 펼치게 된다. 위의 두 사례는 검찰이 나찌가 인간을 사상과 인종으로 차별하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질렀다는 증거로 제시되었던 것인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 재판이 진행되던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소위 선진화된 서구에서조차 나찌의 인종차별적인 행위내지는 이론적 주장이 그리 드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영화에서도 변호사에게 지적당하는바 재판장인 Dan Haywood 자신이 버지니아 법원관할에서 지능과 능력이 현저하게 뒤떨어지는 사람들에게 거세수술을 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린바 있었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 케이스인 펠렌스타인 사건은 – 실제 사건을 기초로 하였는데 독일여인과 성관계를 가졌다는 죄목으로 사형당한 카첸버그 사건에 기초하였다 한다 – 좀 더 극단적인 케이스이긴 하지만 이 당시만 하더라도 미국에서 여전히 교육, 직업, 공공서비스 등에서의 인종분리 정책이 유효했고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처럼 이미 어떤 의미에서는 문명의 별종으로 인식되는 나찌의 정책이 자본주의 문명 일반 – 게다가 스탈린 치하의 사회주의 정권까지 – 의 위선적인 자화상과 닮아있다는 점이 극중 재판관들을 헷갈리게 하고 관객들을 헷갈리게 하는 점이다. 그러한 지루한 국면을 전환하는 결정적인 계기는 검찰이 제시한 유태인수용소에 대한 필름이다.

실제 아이젠하워 시절 정권의 독려 하에 촬영되었던 단편 다큐멘터리였던 이 필름은 재판정을 위해, 그리고 영화관객을 위해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여 상영되는데 당시 관객들에게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임은 – 이 당시엔 아직 홀로코스트라는 단어조차 생경한 단어였다 한다 – 불문가지이다. 그 어떤 궤변을 떠나서라도 정당화될 수 없었던 인종청소는 이 재판을 종결짓게 하는 결정적인 단서로 작용하고 결국 네 명의 전직 판사는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하지만 영화는 Haywood 의 그 결단력 있는 판결이 약간은 순진한 판결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바 재판 와중에 소련은 독일의 동부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고 볼쉐비즘의 저지를 새로운 목표로 설정한 서구는 독일인의 환심을 사기위해 그들의 전직 지도자들을 평생 감옥에서 썩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다. 엔딩크레딧의 자막에서 그들이 바로 얼마 뒤 가석방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중에 죄 없는 자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라고 어느 성현이 말하셨다는데 법률 전공하는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법과 법정의 존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결국 영화는 나찌의 부역자로 4명의 판사를 지목하여 단죄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으나 변호사의 주장처럼 나찌의 득세에는 독일 산업을 후원하였던 미국의 자본가, 독일의 정치구조를 찬양했던 영국의 처칠 등도 (외부적인) 부역자에서 면죄될 수는 없을지도 모르기에 이 영화는 다른 법정 영화는 다른 법정 영화와는 다른 좀 더 묵직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 포스터가 영화 자체보다는 호화배역을 좀 더 강조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