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사회주의

박정희의 ‘중도 실용주의’ 노선?

박 대통령이 3개월마다 정기적으로 주재하는 회의 중의 하나가 내각 기획조정실의 국가기본운영회계에 대한 분기별 심사분석회의이다. 내각 기획조정실은 국무총리 직속기관으로 행정부 또는 국무총리 소속 여러 기관의 장기, 중기, 단기 기획의 조정 및 예산편성의 기준인 행정부기본운영계획의 목표와 방침을 결정하고 조정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중략]
3개월마다 하는 심사분석 보고에는 국영기업체도 심사분석 대상에 포함되었으며 배석하고 있는 평가교수들의 평가비평도 받았다. 한국 경제는 민간 사기업체제이지만 민간자본이 약하여 1960~1970년대를 통해 볼 때, 의회민주주의이면서도 사회주의적 경제체제를 가지고 있던 인도만큼 산업자산 중 공공기업체가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중략]
경제학에서나 경영학에서 비능률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공기업, 즉 국영기업이 우리나라의 경우 ‘정부 주요사업의 분기별 심사분석’의 엄격한 심사분석 덕분으로 능률을 올릴 수밖에 없었고, 다른 나라의 경우에 비해서도 비교적 효율적으로 운영되었다.[아 박정희, 김정렴 지음, 중앙M&B, 1997년, p102]

반공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박정희 정권이 실상은 소위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지향하던 현실 사회주의까지는 아니더라도 국가주도의 자원동원 체제에 경도해있었음을 알려주는 증언이다. 저자 김정렴은 박 정권 시절 재무부 장관과 비서실장을 역임한 인물이니 서술내용이나 당시 상황에 대한 그의 분석의 신뢰도는 매우 높다.

인용문을 간단히 요약해보면 박 정권은 ‘약한 민간자본 ->  국영기업 설립 -> 엄격한 심사분석 -> 효율성 증대’라는 실질적으로 사회주의 계획경제나 다름없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현실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이, 특히 트로츠키 진영의 경우 과거 사회주의 블록을 “국가자본주의 체제”나 다름없다고 비아냥거렸는데 박 정권에게도 해당되는 소리다.

실제로 그는 대한민국이라는 주식회사를 운영하는 CEO나 다름없다. 인용한 행태는 일반 사기업에서와 똑같은 모습이다. 주류 경제학자들은 시장을 저해하는 계획경제를 혐오하지만 사실은 사기업 단위에서는 완연한 ‘계획경제’ 체제다. 그리고 박정희는 그러한 계획경제를 사기업이 약한 시절 스스로 계획경제를 주도하는 CEO역할을 한 것이다.

한편 이러한 유사 사회주의적 성향을 보였던 – 그것도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면서 –  나라가 우리나라 뿐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전후 신생 자본주의 국가는 앞서 인용문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민간자본이 약했기 때문에 – 즉 본원적 축적이 없었기에 – 상당수 국가 동원 체제를 통하여 산업을 육성하는 전략을 구사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러한 행태가 그 행동주체들이 ‘현실 사회주의’나 ‘계획경제’ 체제를 궁극적 지향점으로 상정하고 취한 행동은 아니다. 장하준 교수의 말마따나 자본주의 체제의 “공기업은 자본주의의 폐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발전의 시동을 걸기 위해 사용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요즘 누가 유행시키려 하는 ‘중도 실용주의’ 노선 쯤 되겠다.

여하튼 신자유주의 시대에 접어들며 이른바 ‘민간의 창의와 효율’을 도모한다는 취지하에 수많은 공기업이 민영화되었다. 공기업은 비효율과 낭비의 온상으로 낙인찍혔다. 그러나 그런 마타도어도 금융위기를 맞아 별로 호소력 있게 들리지는 않는다. 완전한 사기업 AIG나 RBS가 상상을 초월한 ‘낭비’를 일삼다가 국유화된 세상이 왔으니까.

건강보험개혁안(Health Care Bill)이 파놓은 또 하나의 함정

이미 국내외 언론에 보도된바 크리스마스이브에 미국 상원에서 건강보험개혁안(Health Care Bill)이 통과되었다. 미 하원이 지난달 건강보험개혁안을 통과시킨 데 이어 상원도 24일 60대 39로 건보개혁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로써 10년간 8천710억 달러를 투입, 현재 건강보험이 없는 미국인들 중 3,100만~3,600만 명이 보험 혜택을 받아 실질적으로 전 국민의 94%가 보험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이번 크리스마스이브 상원통과는 여러 재밌는 기록을 낳았다. 대표적으로 1912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처음 건보 개혁을 주창한 이후 7명의 미국 대통령들이 건보개혁 추진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던 안을 통과시켰다는 점을 들 수 있고, 상원이 크리스마스이브에 표결을 실시한 것은 114년 만으로 1895년 이후 처음이라는 기록도 작성했다. 물론 가장 큰 기록은 이 놀랄만한 일을 흑인 대통령이 집권 1년 만에 해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앞으로도 갈 길은 그리 만만치 않다. 우선 상원의 법안은 지난달 하원에서 통과된 건보개혁안과는 달리 정부 주도의 공공보험(public option) 도입 방안이 포함되지 않았다.(주1) 양원제이다보니 같은 주제로 다른 법안을 통과시키는 희한한 꼴이 연출되었는데 어쨌거나 상하원은 절충법안을 만들어야 한다고 한다. 상원과 하원이 동의하는 법안이 표결을 거쳐 가결되면 오바마 대통령의 서명으로 법안이 입법화된다.

이번 상원 통과에서 공화당 의원은 39명 전원 반대표를 던졌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난 세기 건강보험개혁안을 무력화시켰던 대표논리인데 개혁안이 반(反)시장주의적, 좀더 직설적으로 사회주의적 조치라는 주장이다. 그들이 자체적으로 5천억 달러로 추산하고 있는 증세 예상액도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공화당의 생리에 맞지 않다. 또한 이렇게 하더라도 현재의 천문학적인 재정적자를 심화시킬 것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철저한 보수주의에 입각한 ‘반대를 위한 반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반(反)시장주의에 대한 본질적인 혐오는 별도로 하고라도 증세와 재정적자 심화는 현대 자본주의 국가의 국책사업의 공통적인 근본모순이다. 좌우를 가리지 않는 재정지출에의 유혹이 바로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데, 바로 4대강 살리기(?) 사업이다. 알다시피 한나라당은 4대강 떡칠에 쓸 돈이 포함된 새해 예산안을 기습 처리했다.

미국의 민주당은 국민건강을 위해 불가피하다는 논리를 펴고 있고, 한국의 한나라당은 녹색성장을 위해 불가피하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정치적, 기술적 관점에 따라 어느 것에는 손을 들어주고 어느 것은 비판할 수 있지만 두 사업 모두 생산적인 분야와 직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 전후방 연계효과가 있다는 주장은 많지만 – 분명하다. 새로운 성장 동력이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정치성향이 다른 두 정부는 어쩌면 공히 사회 인프라에 대한 공공재원 투입을 통한 경제위기 돌파를 염두에 두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무슨 말인고 하니 건강보험개혁안 통과에 대한 또 다른 시각을 말하는 것이다. Naked Capitalism에 따르면 건강보험개혁안을 반대하는 이들이 보수주의자들만은 아니라고 한다. 소위 리버럴이나 진보주의자들 중 일부도 반대자가 있는데, 그들은 주장에 따르면 통과된 새 법안이 월스트리트에 대한 또 하나의 구제금융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이전에 시장에 진입할 수 없었던 새로운 수요자들을 국가가 강제로 시장에 편입시켰다는 주장이다.

Here’s the opportunity, Wall Street’s newest and bestest gamble: there is a huge untapped market of some 50 million people who are not paying insurance premiums—and the number grows every year because employers drop coverage and people can’t afford premiums. Solution? Health insurance “reform” that requires everyone to turn over their pay to Wall Street. Can’t afford the premiums? That is OK—Uncle Sam will kick in a few hundred billion to help out the insurers.[전문보기]

물론 이러한 주장에 대해 현행 법안이 보조금 지급 등 보완책을 마련하고 있고, 절충안에서 더 좋은 안을 찾을 수 있다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우선 보조금만 보면 미국은 보조금 지급에 있어 세계에서 가장 비효율적인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보조금 지급이 수혜자의 부담은 덜지언정 민간보험회사의 이윤을 덜지는 않을 것이다. 더 급진적인 안에 대해 비관적인 것이 공공과 민간이 시장에서 경쟁하는 지극히 시장주의적인 ‘공공보험’조차 상원 안에는 포함되지 않았으면서 어떻게 더 급진적인 조치를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염려가 있다.

장기적으로, 그리고 지구적으로 보면 건강보험이나 국민연금과 같은 공적 부조가 갖고 있는 모순에 대한 해법이 근본적인 접근법을 통해 해결을 모색해야겠지만, 단기적으로 미국의 상황에서 그들의 건강보험개혁안은 시장주의자들이 반대하는 시장주의 개혁안으로 전락해버릴 개연성이 큰 것도 사실인 것 같다. 새로이 수혜를 받는 3천만 명의 미국인들이 영화 Sicko에서처럼 비용 때문에 잘린 손가락들 중 어떤 손가락만 붙여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면 무엇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일까?

 

(주1) 이 옵션은 우리나라의 건강보험 지급방식과 다르다. 이를테면 정부가 별도로 공영 건강보험회사를 하나 만드는 걸 말한다. 공영건강보험회사는 민간 보험회사와 경쟁한다. 보험료 인하를 유도해 서민층의 무보험 사태를 구제하자는 계획이다.

‘소비의 사회화’를 넘어서 ‘투자의 사회화’로

[상략]집권 초기 4년 동안 모랄레스는 원주민에게 더 많은 권리를 부여하고 천연자원과 경제에 대한 국가의 더 많은 통제권을 부여하는 것을 내용으로, 제헌의회가 제정한 새 헌법에서 예고하였듯이 볼리비아의 거대한 가스전을 부분적으로 국유화하였다. 새로운 국영 산업에서 발생하는 부의 대부분이 사회의 빈곤한 부문에 혜택이 돌아가는 다양한 사회적 개발 프로그램에 직접 투입되었다. 

예를 들어 Inez Mamani 는 그녀의 갓난아기를 돌보는데 도움이 되는 정부 연금을 받고 있다. 이 자금은 국영 가스 회사 덕분이다. 다섯 아이를 낳은 Mamani는 이 프로그램에 대해 국영 공공라디오의 Annie Murphy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 다른 아이들에게는 이러한 프로그램이 없었어요. 우리가 그들을 키운 방식은 매우 슬퍼요. 이제 그들에게는 우유, 옷, 기저귀가 있고, 정부가 우리를 돕는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에요. 전에 천연자원은 개인 소유였고 이러한 종류의 지원이 없었어요.”

어머니들에 대한 지원과 더불어 정부는 또한 젊은 학생들과 노인들에게도 연금을 제공한다. 연금수령자는 2009년 기준으로 2백만에 달한다. “저는 교사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희망을 가지고 학교에 오는 것을 지켜봐요. 왜냐하면 그들은 거기서 아침밥과 보조금을 받기 때문이죠. 그들에게 돈을 어떻게 쓰는지 물어보면 일부를 신발을 사는데 쓴다고 말해요. 몇몇은 전에 신발도 없었지요.” 엘알토에서 투표를 마친 뒤 Irene Paz가 로이터에 한 말이다.

워싱턴의 ‘경제정치 리서치 센터(Center for Economic and Policy Research : CEPR)’에 따르면 그러한 원대한 정부 프로그램과 사회주의 정책 덕분으로 모랄레스 치하의 4년 동안의 볼리비아의 경제성장은 지난 30년의 그 어느 때의 경제성장보다 더 높았다.

“국가의 천연자원에 대한 정부의 소유 통제가 없었더라면 이러한 일이 불가능했을 거예요.” CEPR 공동 책임자 Mark Weisbrot의 말이다. “지난 시기 볼리비아의 재정적 경기부양은 그 경제를 비교할 때에 미국에서의 우리 경기부양보다 더 엄청나게 많은 것이었습니다.”

모랄레스가 새 임기를 맡고 의회 양원의 3분의 2를 장악한 동안 ‘사회주의 운동(The Movement for Socialism ; Movimiento al Socialismo, MAS)’ 정부는 금년 1월 국민투표를 거쳐 통과된 새 헌법에서 규정된 더 많은 변화를 시도할 수 있어야 한다. MAS는 토지개혁, 공공서비스에 대한 더 광범위한 접근, 개발 프로젝트를 목말라 한다. 그리고 많은 이들은 그들의 정부가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거대한 변화에 대한 청원과 요구가 이제 그 어느 때보다 더 격렬하다.[후략]

The Speed of Change: Bolivian President Morales Empowered by Re-Election 中에서

 
확실히 낯선 방식이다. 천연자원 개발과 그 이용을 통해 이윤을 창출하는 회사의 수입이 ‘곧바로’ – 적어도 기사내용으로 짐작컨대 – 빈곤층의 보조금으로 지급되는 상황은 결코 ‘자본주의’적이지 않다. 물론 자본주의 기업도 각종 기부 등을 통해 사회적 기여 프로그램을 가동하지만 그것은 사업목적에 맞는 여유자금의 운용을 통해 기업을 성장시켜 사회에 기여한다는 기업의 본래 목적과 거리가 멀다.

국가가 천연자원 내지는 주요부문에 대한 소유권 또는/그리고 통제권을 쥐고 고유한 정부 프로그램을 통해 운용하는 것은 전통적인 사회주의 블록에서나, 또는 자본주의 내에서의 공기업 등에서 그리 낯선 풍경은 아니었다. 또한 철도, 주택, 체신 공기업 등은 요금차별화를 통해 상대적인 경제약자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운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볼리비아의 경우처럼 직접적 관련이 없는 양쪽을 – 천연자원과 빈곤층 지원금 – 직접 연결하는 프로그램은 이와는 다른 방식이다. 어떻게 보자면 변칙적인 전용(轉用)처럼 느껴진다.

또한 기사에 상술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러한 빈곤구제 프로그램 등의 가동이 경제성장에 도움을 주었다는 면도 쉽게 와 닿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경제성장기에 있는 국가는 부의 평등한 분배보다는 보통 요소투입을 통하여 산업부문을 무리하게 보일 정도로 성장시키는 것이 성장을 지속시키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박정희 정권 시절 일본의 배상금을 직접적 수혜자였던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주지 않고 포항제철을 설립하는 데 쓴 사례가 있다. 하지만 이 경우는 정 반대로 자원개발을 통한 부를 빈곤층에게 나눠준 것이다.

미루어 짐작하자면 현 시점, 볼리비아의 경제성장은 그간 독재정권과 사기업이 절대적으로 독점하던 사회적 부를 평등하게 분배하면서 발생하는 내수 진작 효과에 기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극소수의 부유층에게 극단적으로 부가 집중되는 사회에서라면 당연히 나머지 절대다수의 계층이 빈곤층이어서 소비여력이 없을 것이고, 당연히 각종 산업이 미발전 상태로 남아있을 것이다. 모랄레스 사회주의 정부는 지금 그 전(前)자본주의적인 경제시스템을 해체하고, 그것이 경기부양책으로써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감히 짐작하자면 그것은 지속가능한 사회주의가 아닐 것이다. 현재 막대한 양적완화를 통해 경제를 지탱하고 있는 세계경제가 지속가능한 자본주의가 아니듯이 말이다. 위 기사에도 나와 있듯이 “토지개혁, 공공서비스에 대한 더 광범위한 접근, 개발 프로젝트”들이 병행되어야 내수가 진작되고 독립적인 경제시스템을 갖추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 바로 지난번 소개한 자원개발 프로젝트다. 이제 모랄레스 정부에게는 ‘소비의 사회화’를 넘어선 ‘투자의 사회화’의 과제가 주어진 셈이다.

볼리바리안 사회주의 단상

12월 6일 실시된 볼리비아 대통령 선거에서 에보 모랄레스 현 대통령이 압승을 거둘 것으로 예상된다고 한다. 이로써 볼리비아 역시 맹방 베네수엘라와 함께 사회주의 노선을 더욱 강화할 것이 확실하다.

그간 볼리비아 정부 역시 베네수엘라처럼 꾸준하게 에너지 시설 등의 국유화를 통하여 정부 재산을 늘려왔다. 덕분에 미대륙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분류되는 이 나라의 경제상태도 많이 호전된 것으로 나타났다.

Since 2005 GDP in Bolivia, one of South America’s poorest countries, has jumped from $9bn to $19bn, pushing up per capita income to $1,671. Foreign currency reserves have soared thanks partly to revenue from the nationalised energy and mining sectors. The IMF expects economy to grow 2.8% next year, stellar by regional standards.[Evo Morales routs rivals to win second term in Bolivian elections]

하지만 단순히 기존 자산의 국유화 등을 통한 국부 증대는 한계가 있다. 코카 재배농이 인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이 가난한 농업국도(모랄레스 자신도 코카 재배농 출신이다.) 제조업 기반을 다져놓아야 한다. 관건은 역시 경제를 살릴 수 있는 성장 동력을 찾는 것, 그리고 그 성장 동력에 투자할 자금을 확보하는 것이다.

모랄레스 정부는 현재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석유자원 개발 등 에너지 분야를 설정해놓은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 볼리비아의 多민족 사회주의 헌법에 규정한 볼리비아석유개발공사(Empresa Boliviana de Industrializacion de Hidrocarburos: EBIH)를 설립, 2010년부터 가동할 계획이라 한다.

문제는 앞서 언급한 바 투자자금의 확보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석유자원 개발 프로젝트 등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약 십억 불 이상의 자금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국유자산을 매각하지 않을 심산이라면 투자자, 특히 해외투자자의 투자가 절실하다.

이 나라는 현재 천연가스, 석유, 리듐 등 자원개발이 매우 유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일본, 캐나다, 프랑스, 러시아, 브라질, 이란 등이 이들 자원개발 프로젝트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고 한다. 볼리비아 광업국장 프레디벨트란 씨는 “現 볼리비아 정부는 이념 성향에 관계 없이 외국기업의 투자를 항상 환영하며 이윤추구 및 취득을 보장한다”며 투자자를 유혹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지난 세기 철저한 불모지였던 중동에서의 석유개발의 영광과 오욕의 역사가 연상된다. 대형유전의 가능성을 보고 뛰어든 부나방과 같은 서구인, 엄청난 이권, 자원민족주의의 대두, OPEC의 설립, 주요 석유기업의 국유화 등 석유를 둘러싼 역사는 현대 경제사의 큰 흐름을 차지하고 있다. 그 역사가 볼리비아에서 작게나마 재현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차이점도 있다. 민주주의를 지고의 가치로 여긴다는 서구열강이 석유자원을 위해 중동에서 절대왕정이라는 퇴행적 정치체제를 용인하고, 수구정치와 수탈적 자원분배 체제에 저항하는 이들을 착취하였던 것이 기존 자원개발의 역사였다면 이번에는 좀더 호혜 평등한 개발 파트너십을 구성할 개연성도 있기 때문이다.

그 개발방식은 역시 유전개발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 금융조달 기법인 프로젝트파이낸싱이 될 것이다. 즉, 차주(借主)의 – 볼리비아의 – 부채상환 능력보다는 그 부존자원 내지는 프로젝트의 현금흐름을 담보로 하여 투자자와 대주(貸主)도 일정 부분 위험을 부담하는 금융기법이다. 일종의 벤처캐피탈인 셈이다.

성공의 관건은 일차적으로 부존자원의 예상 공급량이 되겠지만 그 외에도 투자수익의 분배방식, 해외송금의 보장, 해외투자자의 법적지위 보장 장치, 분쟁시 해소방안 등 각종 계약관계가 될 것이다. 투자계약, 넓게 보면 FTA, WTO 등에서 이러한 계약관계가 널리 다뤄지고 있고, 많은 이들이 국제계약을 비판하지만 역시 그 비판의 키포인트는 계약관계 자체의 거부가 아니라 상호공평한 관계의 여부와 공익성의 저해 여부다. 잘 맺어진 계약관계는 상생의 길로 나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즉, 볼리비아 정부 입장에서 볼리바리안 사회주의의 향후 진로는 이러한 개발 프로젝트에서 투자자본을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전략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계속하여 석유 부국 베네수엘라의 특혜에 의존하는 사회주의 노선은 ‘지속불가능한 사회주의’가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참고 글 : 볼리비아, 석유개발공사설립[KOTRA]

09.29.09: Seattle — 성난 이의 아침식사

David Byrne of Talking Heads.jpg
David Byrne of Talking Heads” by Jean-Luc – originally posted to Flickr as Talking Heads.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여기 시애틀에서 아침 신문을 읽으면서, 내게는 선전선동으로 보이는 듯한 기운을 느꼈다. 입에 거품을 물거나 내 요거트를 호텔 다이닝룸에 뿌리는 등 격노하지는 않았다.

그에 대해 다시

오늘자 뉴욕타임스 1면의 사진을 보면 이란의 핵시설이라고 소문이 난 어떤 종류의 것들을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단지 그러한 것들의 그래픽 스타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확히 이라크 침공 전에 범람했던 다양한 종류의 사진들을 닮았다. 대량살상무기들이 저장되고, 감춰져 있고, 또는 제조되고 있는 건물들의 사진들… 이 모든 것들은 단지 우리를 우리가 현재 놓여져 있는 곤경으로 현혹시켜 이끌었던 소문들이었을 뿐임이 증명되었다. 사람들은 당시 그것에 몰두해 있었다. 그리고 모두들의 단편적인 기억력을 감안할 때에 그들은 두 번째 그것에 몰두할지도 모르겠다.

이번에 난 이것이 절대 핵시설이 아니라고 말하진 않겠다. — 다만 추측성 사실관계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의 방식이 똑같다는 점은 지적한다.

전망

같은 면에서는 유럽에서 많은 나라들이 중도우익 정치가를 선출하면서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의견을 달리 해줄 것을 간청한다. 기사가 말하는 바, 중도우익은 기존의 “일반적인 복지 혜택, 국유화된 헬스케어, [그리고] 탄소배출에 관한 엄격한 제한”을 수용하였다. 이 세 가지 아이디어라면 미국에서 그들은 좌익으로 분류될 것이다. 비록 작가가 말하길 – 아마도 맞겠지만 – 유럽에서의 좌익은 전통적으로 이보다 더 나아가지만 말이다. 그러한 것들이 아직도 미국에서는 일반적으로 허용되지 않고 있는 것, 그리고 현재 정치인들이 “사회주의자”이라는 (그리고 그래서 미국인이 아니라는) 고함치며 소란을 떠는 지적들은 전망의 예정된 “붕괴”에 이르게 하고 있다.

부활

다른 면의 기사에서는 경제가 바닥을 치고 다시 호조를 띄고 있다는 좋은 소식을 전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이 놀랍지 않은 한편 (경제 붕괴의 재발을 막기 위한, 또는 은행가들의 오만과 탐욕을 제한하기 위한 어떠한 심각한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이는 일종의 좋은 소식을 위한 좋은 소식일 뿐인 것 같다. — 일종의 기분 좋은(feel-good) 것. 경제는 하도 오랫동안 상태가 안 좋아서 필연적으로 잘못 인도하는 고장 난 시스템의 그 어떤 것의 “재림”이나 회귀를 도모하는 것은 아마도 현재로서는 최선의 아이디어가 아닐 것이다. 이 나라의 많은 것들이 지속 불가능한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골드만삭스와 다른 이들이 경기침체로부터 수익을 얻는 등 갈퀴로 부를 그러모으는 동안, 다른 이들은 불평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 that isn’t the real world.

이글을 쓴 David Byrne은 전설적인 펑크/뉴웨이브 밴드 Talking Heads의 리더였으며 현재 솔로로 독립하여 음악가, 프로듀서, 화가, 설치 아티스트, 자전거 애호가 등 다양한 사회활동을 펼치고 있는 인물이다.

그의 블로그에 올린 원문 보기 / Talking Heads 팬사이트 / 한국어 팬사이트

크록스 사회주의

크록스(Crocs)가 파산신청을 할 것 같다는 소식을 얼마 전에 접했다. 우선 크록스가 뭔지 모르는 분들을 위해 잠깐 설명.

1999년 캐나다의 한 연구소에서 경량의 항균성 고무소재가 개발됐다. 이름은 크로슬라이트(Croslite). 수상스포츠 전용신발을 겨냥해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2002년 미국에서 이 소재 이름을 따 ‘크록스’라는 제품이 일반 신발로 출시되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투박하지만 일단 신어보면 신은 듯 안신은 듯 가볍고 편한 느낌 덕에 소비자 마음을 사로잡았다.[출처]

이 설명처럼 크록스는 가볍고 굉장히 질겨서 나도 여태 몇 년 동안을 캐주얼을 입을 때면 주로 이 크록스로 – 물론 다른 운동화도 있지만 – 버티고 있다. 2002년 첫 출시된 이 제품은 현재까지 전 세계적으로 1억 켤레 이상이 팔린 것으로 추산된다니 엄청난 히트상품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이런 좋은 제품을 만드는 회사가 왜 파산신청을 할 정도로 경영이 어려워졌을까? 그 여러 이유 중 주된 것 하나는 역설적이게도 너무 튼튼한 재질 탓에 두 번째 구입하는 고객 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 역시 앞서 말했듯이 크록스 하나로 몇 년을 버티고 있다. 오래되었다는 느낌도 별로 나지 않을 정도다.

그 엄청난 내구성이 오히려 비즈니스의 걸림돌이 되었다는 것이 어이없어보일지 몰라도, 조금만 달리 생각해보면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신발과 같은 소비재는 일정기간 지나면 마모되어 새 제품이 팔려야 상품의 사이클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게끔 되어있다. 그런데 몇 년을 지나도 신발이 멀쩡하다면 이제 회사가 멀쩡하지 못한 것이 당연한 일인 셈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본가가 상품을 생산하는 주된 이유는 교환가치 실현을 통한 이윤창출이다. 소비자는 그 목적으로 생산된 상품의 소비를 통해 사용가치를 실현한다. 소비자가 특정 상품의 사용가치에 만족하고 있는 동안은 새 상품을 소비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자본가는 부단히 여러 경영전략을 쓴다.

이를테면 자본가는 기존 상품을 업데이트하면서 새로운 소비욕구를 자극한다. 어릴 적 치약을 잘 쓰고 있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불소치약이니 줄무늬치약이니 하는 것들이 출시되었던 일이 기억나는지? 예전 치약은 더 이상 치약도 아닌 것 같다. 패션 사이클을 타는 의류가 그렇고, 버전을 업데이트하는 소프트웨어가 그렇고 자본주의 거의 모든 상품은 새로운 소비욕구를 자극한다.

보다 교묘한 방법이어서 어느 경영학 교과서에도 이러한 전략을 공유하거나 권장하지 않겠지만 또 하나의 경영전략은 바로 상품의 주기적인 마모다. 어떤 이가 말하길 사실 전구의 필라멘트는 거의 반영구적으로 쓸 정도의 품질이지만 기업생존을 위해 일정시간이 지나면 뚝 끊어진다고 한다. 사실 여부야 알 수 없지만 일정한 진실은 담고 있다. 상품이 마모되지 않으면 생산이 필요 없고, 생산이 없으면 자본주의는 망한다.

그렇다면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소비자들은 광고를 통한 소비자극이나 일정기간이 지나면 닳아버리는 상품의 교체에 익숙하니 계속 그렇게 살면 되지 않겠는가? 생산이 늘고 소비가 늘어야 경제도 순환되고 GDP도 올라가고 고용도 창출되는 것 아닌가 말이다. 케인즈는 아무것도 하지 않느니 낭비로 보일지라도 구덩이라도 팠다가 다시 묻는 것이 경제에 도움이 된다고 했는데 이보다 훨씬 생산적이지 않은가 말이다.

경제 시스템이란 희소자원을 어떻게 분배하느냐가 관건인 시스템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무턱대고 찬성할 일만은 아니다. 결국 우리 지구는 ‘희소자원’으로 먹고 살아야 한다. 자본주의의 엄청난 상품생산력으로 지구의 자원은 기하급수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자원의 사이클링이 오랜 기간이 걸린다는 점을 감안하면 어찌 되었든 자원절약은 생존의 테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크록스는 정말 효자상품이다. 소비자의 사용가치도 충족시키면서 – 물론 투박한 디자인은 오래 보면 싫증이 나긴 하지만 – 내구성이 좋아 자원절약형이다. 문제는 그것을 생산한 자본가는 망할지도 모르게 되었다는 점이다. 소비자와 지구를 위해 좋은 일을 한 이들이 곤경에 처했다는 것은 안타깝고 모순된 일이다. 인민영웅이지 않은가?

결국 그 모순의 여러 원인 중 하나는 생산의 자유, 다른 표현으로 하면 무정부성 때문이다. 고전적인 자본주의 시스템에서는 어느 누가 어떤 제품을 생산하라고 지시하지 않는다고들 이야기한다. 현실의 많은 생산자들이 사실 법적요건만 충족하면 어느 상품을 개발하고 판매하여 흥하거나 망하거나 한다. 크록스와 같은 코끼리나 신을 신발을 생산자 자유의사로 생산하여 판매했고, 흥하다가 망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개별기업인 크록스는 자유의사로 사업을 다각화하거나 크록스의 내구성을 포기하지 않으면 – 물론 눈에 띄게 이랬다가는 더 빨리 망하겠지만 – 자유의사로 망하게 될 것이다. 그 노동자들은 망한 기업에서 같이 망한다. 경제적 자유주의를 선호하는 이들이 지극히 선호하는 기업 생존 사이클이다. 흥할 놈은 흥할 짓을 한 거고 망할 놈은 망할 짓을 한 거다. 그러니 Let it be.

예를 들어 생산의 무정부성이 어느 정도 통제되는 사회에서 크록스가 생산되고 있었다고 가정하자. 생산통제기구는 크록스의 개발자들에게 기술혁신의 일정대가를 치르고 그 권리를 취득한 후 소비자들에게 크록스를 제공한다. 어느 순간 그 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르러 크록스의 소비가 예전만 못하게 된다. 생산통제기구는 크록스의 생산인력을 다른 내구재의 생산라인으로 재배치한다. 회사가 망한 것이 아니라 재배치한 것이다.

GM이 망할 위기였다가 구제 금융을 받고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향후 기술혁신이나 새로운 제품이 히트하여 다시 해 뜰 날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개인용 승용차의 지구적 시장은, 그리고 그것이 소비하는 석유의 공급은 어느 임계점을 넘어섰지 않은가 하는 판단도 고려되어야 하는 생산 분야다. 그것을 한 기업의 생존경영의 차원으로만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 시스템에서조차 필수불가결한 산업분야는 직간접적인 통제수단을 통해 재배치하게 마련이다. 바로 GM이 그랬고 월스트리트가 그랬다. 앞서 꾸며본 소리인 크록스 재배치와 GM 및 월스트리트의 재배치가 다른 점은, 전자는 모두가 만족한 경우고 후자는 대부분 수혜기업에게만 – 특히 경영층에게만 – 좋은 재배치라는 점이다. 앞서의 경우가 소비자를 위한 크록스 ‘사회주의’라면 후자는 자본가를 위한 ‘사회주의’라고나 할까?

물론 크록스 사회주의가 정상적으로 돌아가느냐 하는 문제는 또 다른 문제다. 예전 구 사회주의 블록에서도 이러한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허다한 사례가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역시 끊임없이 시스템의 실패를 겪고 있으며, 사실 그것들은 이런저런 변태적인 노력에 의해 극복되고 있음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또 다른 변태적인 노력이 보다 강화된 생산재배치 – 실질적으로 만인이 만족하는 – 일수도 있다는 상상을 굳이 꺾을 필요가 있을까?

괴벨스

젊은 괴벨스에게 매력을 느끼게 한 것은 쉬트라서의 급진주의와 국가사회주의의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이었다. 이 두사람은 모두 프롤레타리아를 기반으로 하여 당을 조직하려고 했다. 괴벨스가 어떤 공산당 지도자에게 공개장을 써서 나치즘과 공산주의는 실질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이때의 일이다. 히틀러에게는 이것이 이단적인 것이 되었다. 그는 쉬트라서 형제와 괴벨스가 북부에서 강력하고 급진적인 프롤레타리아적인 당을 건립하고 있는 것을 불안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쉬트라서와 괴벨스는 나치스 당도 공산당이나 사회당과 공동전선을 펴서 귀족의 재산을 몰수하는 운동을 지지하자고 제안했다. 괴벨스는 (그 자리에 있던 오토 쉬트라서의 말에 의하면) ‘프티 부르주아인 그 히틀러를 나치스 당으로부터 제명할 것을 요구한다’고 외쳤다고 한다.[제3제국의 흥망1 히틀러의 등장, 윌리엄.L.사이러 지음, 유승근 옮김, 에디터, 1993년, pp188~200에서 발췌]

이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나치스 입당 초기 괴벨스는 나치스 당의 ‘사회주의’적인 요소를 강화시키기 위해 노력하였고 급기야 히틀러를 축출하려고까지 했었다. 그는 당의 입이었을 뿐 아니라 사실상 당의 머리이기도 했었다. 남한의 어떤 듣보잡이 이런 괴력의 소유자와 비교된다는 것은 어쩌면 그 듣보잡에게는 영광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