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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저격수의 고백’을 읽고

경제 저격수란 전 세계의 수많은 나라들을 속여서 수조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돈을 털어 내고, 그 대가로 고액 연봉을 받는 전문가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들은 세계은행과 미국 국제 개발처, 또는 다른 해외 ‘원조’ 기관들로부터 돈을 받아 내어 거대 기업의 금고나 전 세계의 자연 자원을 손아귀에 쥔 몇몇 부유한 가문의 주머니 속으로 그 돈이 흘러가도록 조종한다.[경제 저격수의 고백, 존 퍼킨스, 김현정 옮김, 황금가지, 2005년, p9]

존 퍼킨스의 회고록 ‘경제 저격수의 고백’의 서문에 나오는 “경제 저격수”의 정의다. 저자는 1971년부터 ‘메인(Chas. T. Main)’이라는 엔지니어링 회사에 근무하였는데 그가 한 일은 기술자들이나 세계은행의 은행가들과 함께 사업계획을 구상하고 자금을 조달하여 사업을 시행하는 것이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경제 저격수라 칭한 것이다.

언뜻 정상적으로 보이는 일이다. 하지만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그는 자본, 특히 메인과 여타 미국자본이 최대한의 이익을 얻게끔 도모하고 사회간접자본시설을 지은 나라가 과도한 빚을 져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로 만드는 일을 수행했다고 한다. 경제성장률을 과도하게 추정하여 공사규모를 부풀리는 것이 그 전형적인 방식이었다.

퍼킨스의 행동반경은 중동, 아시아, 남미 등 이제 막 산업화의 길로 접어드는 제3세계 곳곳을 아우르고 있었다. 거기에서 그는 세계은행 관계자, 현지 기업인, 반정부 인사, 또는 최고 권력자 등 다양한 이들을 만나 상부상조하거나 반목하면서 임무를 수행한다. 하지만 이란에서는 회교혁명으로 인해 사업을 중도에 접어야 하는 고초를 겪기도 한다.

솔직히 이 책에서 묘사되고 있는 그의 고백은 삐딱한 시선으로 보면 앞서 말한 것처럼 정상적인 기업 활동에 대한 저자의 지나치게 도덕주의적인 과잉반응일 뿐이라고 몰아붙일 수도 있는 상황이다. 어차피 정상적인 자본주의 시스템에서는 경쟁원리가 작동하여야 하는 것이고, 메인은 그에게 그런 역할을 주문한 것에 불과한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이런 의문에 대한 대답이 담긴 에피소드는 메인 입사 초기 저자와 그의 상사 클로딘과의 만남이다. 매력적인 갈색 머리의 여인 클로딘은 메인의 수석컨설턴트로 어느 날 홀연히 저자 앞에 나타나 그가 맡은 일이 ‘경제 저격수’라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이야기하고 그를 조련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언뜻 스파이 스릴러에서 스파이 조련과정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클로딘은 존 퍼킨스를 남몰래 자기 아파트에서 만나며 그에게 그의 임무가 1) 대형 토목 공사 프로젝트가 메인을 비롯한 미국기업에게 돌아오게끔 하는 것 2) 차관을 받은 나라의 파산을 유도하여 자원 등의 수탈이 용이하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 과정에서의 그의 임무는 경제성장률을 예측하여 프로젝트가 미칠 영향을 분석하는 컨설팅 업무였다.

클로딘은 “인도네시아는 베트남 다음에 쓰러뜨릴 나라죠.”라고 말하곤 했다. 또 “반드시 인도네시아 국민들을 설득해야 해요. 만일 인도네시아가 공산주의 국가가 된다면…….”이라고 말하면서 손가락으로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냥 쉽게 얘기할게요. 인도네시아의 경제 전망 보고서를 작성할 때 매우 긍정적인 결과를 이끌어내야 해요. 새로 발전소를 짓고 전력 공급 시스템을 건설하면 인도네시아 경제가 얼마나 발전하게 될지 잘 포장해야 하죠. 그 수치가 충분히 높으면 국제 개발처와 여러 은행들이 차관을 빌려 주는 거예요. 일을 성사시키면 당신도 충분한 보상을 받을 거고 이국적인 매력을 가진 또 다른 나라에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수도 있죠. 세상이 당신의 쇼핑 바구니인 셈이에요.”[같은 책, p57]

저자가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로 이 에피소드는 좌익들이 주장하던 소위 선진 자본주의 국가가 제3세계에 취하던 경제공세의 보편적인(?) 행태에 대한 진실을 매력적인 갈색 머리 여자로부터 직설적으로 강의를 들은 과정이다. 그런데 원래 그가 면접을 치룬 곳은 국가 안정보장국이었으니 기업가정치(Coporatocracy)와 국가주의의 결합인 셈이다.

저자가 자신의 행위를 “정상적인 기업 활동”이 아닌 범죄행위로 간주하며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다가 끝내 이 책을 내놓으며 고백성사를 한 것은 어쩌면 클로딘과의 만남에서 들었던 직설적인 진실을 소화해내지 못해서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자신의 행동을 기업의 정상적인 이윤논리로 받아들여 자연스럽게 익혔더라면 좀 더 이겨내기 쉬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그의 태생적인 유약함과 원주민과의 만남 속에서 깨달은 기업가정치의 폐해, 그리고 민족주의적인 지도자들의 의문의 죽음을 접하면서 그는 그 모든 것들이 하나로 통한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이 책에서 그 사실을 고백한다. 바로 미국이 그들의 건국정신을 저버린 채 다른 나라의 자주성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하인 나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이다.

모든 책이 그렇듯 책의 내용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는 – 또는 저자의 편견을 통해 잘못 전달된 사실인지 – 독자들이 판단할 일이다. 결국 그 작업은 책이 증언하고 있는 여러 사실을 다른 시각에서 본 다른 매체들을 통해 판단하고 걸러내는 작업이 유효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적어도 이 책은 그런 수고를 덜어주는 책에 속한다고 본다.

그런 객관적 사실과 더불어 이 책을 읽는 내내 나의 마음속에 침잠해 있던 감정은 그 오랜 세월을 자신이 하는 일 때문에 스스로를 자학했던 저자에 대한 연민이었다. 어쨌든 그 일을 처음 선택한 것은 그 자신이었기에 상당부분 그의 잘못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그것은 남을 괴롭히는 나라에서 태어나 하필 그 자리를 맡게 된 그의 ‘업(業)’이란 생각도 들었다.

사실은 나 역시도 그만큼은 아니지만 현재 하고 있는 일과 소신과의 부조화 때문에 때때로 고민이 되기도 하고 자학하기도 하니만큼 더욱 그의 처지가 안타깝기도 했다. 결국 상당부분 일 자체가 선악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떤 마음으로 그 일을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으로 스스로 다잡고 있고 퍼킨스 역시 그렇게 행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 상당수가 일을 즐기면서 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심지어는 고통스러워하면서 한다면 그 사회는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요하다고 하여도 건강하지 못한 사회일 것이다. 대기업 부사장도 일 때문에 자살하고, 노동자는 산재로 목숨을 잃고, 경제 분석가가 다른 나라를 착취하기 위해 숫자를 조작하고 괴로워하는 그런 사회는 하루빨리 사라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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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국내 자본가의 자서전을 읽다 흥미로운 대목을 발견했다.

소위 선진국의 후진국 원조란 원래 ‘원조’라는 미명하에 그런 식으로 바가지 씌우고 그 위에 이자다 뭐다 하여 후진국의 껍데기까지 벗겨먹는 짓에 지나지 않는다.[이 땅에 태어나서, 정주영, 솔, 1998년, p105]

‘시골의사’님의 글을 읽고

오랜만에 유명한 경제 논객이신 시골의사님이 블로그에 글을 올리셨다. 반가운 마음에 읽었다. 제목이 “하반기 경기회복 가능할까…? (1)” 인 것을 보니 제법 야심에 찬 기획시리즈로 보여 기대된다. 다만 옥에 티 하나만 지적하자면

우리가 일상적인 농,공업을 통해 잉여가치를 창출 할 때 이것은 과거에는 지주에게, 현재는 자본가에게 집중된다. 막시스트들은 바로 이점을 가리켜 ‘착취’라고 규정하고 자본주의를 죄악시한다. 하지만 사실상 이런 주장은 노동자가 곧 소비자인, 다시말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노동자의 대부분이 곧 부르조아인(얼마간의 잉여를 가진) 자유시장경제 질서를 놓고 생각한다면 아무래도 막스가 무덤 속에서 부활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워 보인다.
(중략)
저개발국으로 이전한 기업이 수익이 증가하면 그 수익의 증가가 고스란히 한 국가 사회적 자산의 증가로 잡히기 때문이다. 자국기업의 글로벌 진출이 곧 국가의 발전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부의 분배구조다. 이 경우 전자와 달리 이익은 기업의 주주들에게 돌아간다. 즉 총량은 같지만 배분은 점점 기울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현상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부풀려진 부는 사실상 총량적 부의 증가라기 보다는 생산활동에서 초래된 잉여가치가 한곳으로 쏠리면서 부풀려지는 현상에 불과하다.[원문 읽기]

전체 본문 중에서 위 두 문단의 상호모순이다. 첫 번째 문단은 글의 도입부에 두 번째 문단은 글의 결론부에 위치해있다. 두 문단은 모두 자본주의 시스템에서의 부의 분배구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 문단은 생산과정에서의 잉여가치에 따른 노동착취에 대한 설명인데, 시골의사님은 (주식회사, 펀드 등을 통해 : foog주) “착취”받는 노동자 대부분이 스스로 부르주아이기 때문에 (즉 설사 잉여가치가 있어도 다시 주주배당으로 분배되어 분배의 평등이 어느 정도 달성될 것이기 때문에 : foog주) “막스가 무덤 속에서 부활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계신 것 같다. 아니면 잉여가치가 원천무효라는 주장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적어도 부가 (소수의) “자본가에게 집중”된다는 주장은 아니다.

그런데 두 번째 문단에서는 이와는 다소 다른 주장을 하신다. 1,2차 산업에서 산출되는 기업수익의 증가가 국가 사회적 자산의 증가로 이어지기에 바람직하지만 이익이 기업의 주주에게 돌아가기에 “총량은 같지만 배분은 점점 기울”어지고 “생산활동에서 초래된 잉여가치가 한곳으로 쏠리”는 현상이 일어난다고 말씀하신다. 첫 번째 문단에서의 “노동자의 대부분이 곧 부르조아”라는 설명이 그들이 노동자이자 동시에 주주이므로, 마르크스의 착취론은 설득력이 없다는 설명이라 이해한 내 생각이 맞는다면 두 문단은 서로 모순된다.
 
실제로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주식회사를 통한 주식의 사회적 분산, 펀드의 발전을 통한 노동계급의 투자사업 참여 활성화 등은 전통적인 계급론의 이분법적인 틀에서의 노자(勞資) 구도를 많이 희석시켜온 것이 사실이다. 문제는 그 활동이 결과론적으로 부의 재분배를 촉진시켜 여하한의 자본주의의 모순을 완화시켜왔는가가 관건인데, 적어도 현 시점에서 그 대답은 그 주원인이 금융자본주의의 융성이든 아니면 주주배당의 불공평성이든 아니면 잉여가치의 착취든 ‘아니다’쪽으로 기우는 것 같다.

내 글이 괜한 딴죽이랄 수도 있겠으나 앞서 지적했듯이 시골의사님도 그 결과부분에서는 분배의 불평등을 지적하고 있고 향후 진행될 이야기도 내 짐작에 현재의 자본주의가 왜 이러한 결과를 초래하였는가, 그리고 그 전망은 어떻게 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으로 짐작되는바, 지적할 것은 지적하여야겠기에 토 다는 것이다. 어쨌든 적어도 지금 시점은 마르크스가 무덤 속에서 부활할 정도는 아니지만, 헌 책방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그의 책이 다시 읽혀지는 시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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