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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맑스는 옳은 게 하나도 없을까?

요즘 이러저러한 주제로 영양가 있는 대화를 나누느라 자주 가는 블로그에서 어떤 분이 “맑스가 옳은 것도 있다고 외치는 정신못차린 공산당 잔당들이 있다”고 하시기에 – 물론 그 분은 다른 맥락에서 이야기하셨지만 – 나는 나대로 ‘정말 맑스가 옳은 것은 하나도 없나?’라는 의문이 들어 또 책꽂이에서 책 한권을 꺼내 일부를 발췌해보기로 했다. 옮긴 글은 Karl Marx 의 공산당선언.

이것은 물론 처음에는 소유권과 부르주아적 생산관계를 전제적(專制的)으로 침해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 이 전제적 침해는 경제적으로는 불충분하고 불안정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운동이 경과하면서 스스로를 극복해 갈 것이다. 전제적 침해는 생산양식을 전면적으로 변혁시키는 피할 수 없는 방책이다. 나라마다 그 방책은 다를 것이다. 그러나 가장 선진적인 나라에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아주 일반적으로 적용될 것이다.

1. 토지 소유의 폐지와 모든 지대를 국가 경비로 전용
2. 소득에 대한 고율의 누진세
3. 모든 상속권의 폐지
4. 모든 망명자와 반역자의 재산 몰수
5. 국가자본 및 배타적인 독점권을 가진 국립은행을 통하여 신용을 국가의 수중으로 집중
6. 운송수단을 국가 수중으로 집중
7. 국가가 소유하는 공장 및 생산도구의 증대. 공동계획에 의거한 토지의 개간 및 개량
8. 모두에게 동등한 노동의 의무 부과. 농업을 위한 산업군대의 육성
9. 농업과 공업의 결합. 도농간의 격차 점진적 해소. 인구 분포의 전국적 균일화
10. 공립학교에서 모든 어린이에 대한 무상교육 실시. 오늘날과 같은 아동들의 공장노동 폐지. 교육과 생산활동의 결합 등등.

[레즈를 위하여 中 제2부 다시 번역한 공산당선언, Karl Marx, 장석준 번역, pp 312~313]

과연 이중에서 오늘날 몇 가지나 현실사회에서 실현되고 있을까 한번 짚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또한 자기가 위에 나열된 주장 중 몇 가지나 동의하는지 세어보는 것도 재밌을 것이다. 다섯 개가 넘으면 당신도 유사 빨갱이? ^^

미쳐가는 이라크에서의 민간군사기업

최근 재밌게 본 미드 중에 Dexter 라는 시리즈가 있다. 주인공은 마이애미 경찰서에 근무하는 형사(보다 정확하게는 형사(detective)가 아니라 감식반(forensics)이다.) Dexter Morgan 인데 특이하게도 형사인 동시에 연쇄살인자다. 어린 시절 범죄현장에 방치되었다가 그 현장을 발견한 형사 Harry 에게 입양된 그는 따뜻한 사랑과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으나 몸속에 내재해있는 폭력성향을 잠재우지 못한다. 이런 그의 본능을 알아챈 Harry는 결국 그의 살인본능을 인정하지만 그 분출구를 또 다른 연쇄살인자들에게만 향하게 하는 일종의 ‘Harry의 원칙’을 Dexter에게 가르친다. 결국 Dexter는 연쇄살인범을 죽이는 연쇄살인범이라는 희한한 캐릭터로 탄생한다.

피에 굶주린 뱀파이어의 현대판 해석으로 볼 수도 있고 공권력에 의한 살인이나 공권력을 배경으로 한 사적(私的)살인이나 뭐가 다르냐는 냉소로 읽힐 수도 있는 이 시리즈는 뭐니 뭐니 해도 사실 형사가 바로 연쇄살인범이라는 사실이 가져다주는 묘한 일탈감과 해방감을 관객들에게 안겨준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여하튼 개인적으로는 알량한 지적허영의 소유자답게 소위 ‘Harry의 원칙’이 자본주의의 법률과 제도와의 공통점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본주의는 그 비판자들, 특히 Karl Marx로부터 태생부터 살인자임을 들켜버렸다. Karl Marx는 자본주의의 살인무기는 바로 잉여노동의 착취임을 자본론에서 밝혀냈다. 그리하여 자본주의 체재 내에서의 기업은 그가 연쇄살인범을 죽이는 연쇄살인범이건 불특정 다수를 죽이는 연쇄살인범이건 간에 살인범은 살인범일 뿐이라는 원죄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본인이 신경 쓰건 말건) 그런데 자본주의 시스템이 이 살인범에게 부여한 원칙이 있다. ‘자본주의 판 Harry의 원칙’

즉 이 원칙은 ‘너희가 잉여노동을 착취하는 것은 내 관심사가 아니다. 나는 다만 (나에게 또는 불특정 다수에게) 물적 풍요를 가져다주는 자본주의가 잘 굴러가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러나 그것도 한도가 있으니 그 한도는 지켜달라.’라는 자본주의의 법률과 제도를 말한다. 이러한 것들에는 예를 들면 독점금지, 아동노동금지, 8시간 노동, 노동3권 과 같은 것들이 있다. 이러한 것들은 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하나하나 차곡차곡 쌓여갔다.(물론 그것은 지역적 편차가 있으며 때로 역행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나마 제1세계에선 사회구성원의 상호감시 속에서 나름대로 제법 꾸준히 지켜져 오고 있다.

그런데 Common Dreams 의 Contractors Gone Wild라는 글을 읽어보면 ‘자본주의 판 Harry의 원칙’이 적어도 이라크 전쟁에 뛰어든 민간군사기업에게만큼은 개 짖는 소리임을 알 수가 있다. 그간 민간군사기업의 과다청구, 전투병 기능에의 개입, 민간인 학살 등의 범죄행위에 대해서는 여러 고발이 있어왔다. 그런데 최근 ‘의회 민주적 정책 위원회(the Senate’s Democratic Policy Committee)’에서 열린 청문회에서 세 명의 내부고발자가 전하는 내용은 이에 한발 더 나아가고 있다.

KBR의 직원이었던 Frank Cassaday는 회사가 배달하여야 할 (사막 지방에서 특히 귀중품인) 얼음들이 다른 직원들에 의해 중간에서 가로채어져 다른 물품들과 교환되었다는 사실을 고발하고 있다. 또한 KBR 직원들은 수시로 군용품을 훔쳐냈는데 이중에는 중화기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한다. 역시 KBR 직원이었던 Linda Warren에 따르면 궁전이나 각종 청사의 재건축을 담당하는 직원들은 각종 문화재 및 귀중품을 훔쳐 eBay 에 팔곤 했다 한다.

한층 놀라운 증언은 DynCorp 의 하청업체에서 일했던 Barry Halley의 입에서 나왔다. 그에 따르면 이라크의 업체직원들은 일종의 ‘매춘 조직’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매춘부들은 쿠웨이트에서 바그다드로 장갑자동차로 수송되었다고 한다. 충격적인 사실은 이렇게 매춘부 수송을 위해 장갑자동차가 이용되는 바람에 다른 미션에 있는 이들이 이 차를 사용하지 못해 죽음을 당하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위의 범죄들은 어쩌면 부도덕한 개인직원들의 범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청문회에서의 세 내부고발자들이 그들의 상관에게 위와 같은 사실을 보고했을 때에 다른 곳으로 발령 나거나 심지어는 억류되기도 하고 종국에는 해고되었다는 사실은 최소한 회사가 그 사실을 방조하였고 더 나아가서는 그 범죄들을 조장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말해주고 있다.

결국 아무리 최신 운영기법인 민영화를 통해 전쟁수행을 한층 업그레이드시킨(?) 이라크 전쟁일지라도 그 주체들의 행태에는 유사 이전의 야만적인 살육전에 비해 업그레이드 된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서 나는 그것의 원인이 무엇인가가 궁금할 따름이다. ‘Harry의 원칙’은 도대체 어디 간 것일까? 우리는 그 원인을 자본주의가 아닌 인간 그 자체에서 찾아야 할까? 우리는 과연 살인범의 살인본능 치유는 고사하고 그것을 통제할 수는 있는 것일까?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교수 채용을 호소합니다”

서구 지성사에서 가장 걸출한 지식인이자 실천가였던 카알 마르크스. 여전히 그의 주장이 유효함에도 이 땅의 최고학부라는 서울대학교에서 김수행 교수의 퇴임으로 말미암아 그 학문적 전통이 씨가 마를 위기라고 한다. 대학의 직업양성소화 경향에 비추어 볼 때 당연한 일인가? 어쨌든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교수의 채용을 호소하는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대학원생들의 호소문을 전재한다.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교수 채용을 호소합니다!

지금은 겨울방학 중입니다. 그러나 ‘경제학 연구자’로서 자신의 사명을 소중히 생각하며 자신의 배움을 사회에 바람직하게 기여코자 고뇌하는 많은 대학원생들이 밤늦도록 연구실들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 저희들의 연구를 헌신적으로 지도해주실 뿐만 아니라 인생의 선배이자 스승으로서 늘 소중한 가르침을 주시는 경제학부 교수님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런데 그 스승 중 한 분으로서 마르크스경제학을 지난 20여 년 동안 가르쳐 오신 김수행 교수께서 올해 2월 정년퇴임을 하십니다. 그와 더불어 서울대 경제학부에서 마르크스경제학의 존폐 여부를 놓고 많은 이들이 설왕설래하고 있습니다. 설마 마르크스경제학이 서울대에서 없어지겠냐면서도, 후임 교수에 대한 논의조차 교수님들 사이에서 거론되지 않거나 언급을 애써 삼가시는 상황을 보며 저희들은 우려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마르크스경제학은 경제학부 뿐만 아니라 서울대 전체의 학문 발전과 다양성 유지에 큰 기여를 했으며 수많은 연구자들을 양성하여 한국사회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경제학 전공 교수가 사라질지도 모르는 오늘의 상황에 저희는 무척 안타깝습니다. 더 나아가 저희는 마르크스경제학이 사라질 위기에 놓인 상황 자체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단순히 서울대 경제학부에서 전공 영역 하나가 사라진다는 의미를 넘어 우리 학부, 나아가 서울대와 한국사회에도 큰 손실을 야기할 사안이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마르크스경제학 전공 교수가 채용되지 않고 마르크스경제학이 서울대에서 사라진다면, 경제학부는 스스로 학문의 다양성을 포기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다양한 학문의 섭렵은 진정한 학문적 발전의 기본 조건입니다. 마르크스경제학은 주류경제학의 이론과 논리와는 다른 관점에서 경제현상을 이해하고 분석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 이는 신고전학파 중심의 주류경제학 이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류경제학에서 다루고 있지 않거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문제들을 자본주의 비판과 사회적 평등이라는 시각에서 분석하면서 한국사회의 변화에 기여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마르크스경제학 전공 교수가 사라지게 되면, 주류경제학만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경제학부에서 학문적 다양성은 점점 더 위축될 것이며, 이에 따라 학문의 창의적 발전은 크게 저해될 것입니다.

둘째, 마르크스경제학이 사라진다면 관련 석·박사 연구자들에게 매우 심각한 영향을 줄 것입니다. 평생 자신의 업적이자 연구자로서의 삶의 길잡이가 될 학위 논문을 지도해 줄 마르크스경제학 전공 후임 교수가 없다는 것 자체가 그들 자신의 삶에서 매우 큰 시련이 될 것이며, 사실상 학문적인 ‘사망선고’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지도교수를 잃어 대학원생들의 연구가 인위적으로 단절되는 이런 상황을 경제학부에서 방관한다면, 대학원 사회는 앞으로도 이와 유사한 일로 매우 심각한 고통을 겪게 될 것 입니다.

셋째, 마르크스경제학 전공 교수를 뽑지 않는다면, 이는 학문의 수요자인 학생의 권리를 철저하게 무시하는 일입니다. 마르크스경제학은 지난 20여 년 동안 많은 수강생들이 배우고 고민해온, 경제학부의 공식 교과목입니다. 그런데도 이 과목을 담당할 교수가 없다면, 정작 수업의 가장 큰 당사자인 학생들은 부실한 수업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시간강사를 활용하는 방안은 장기적인 처방이 될 수 없습니다. 강의와 논문지도를 담당할 교수가 없다는 것은 곧 마르크스경제학 연구 및 교육의 실질적인 폐지를 의미합니다. 결국 마르크스경제학을 비롯한 더 다양한 시각을 접하고 탐구하고자 하는 수많은 학생들의 기본적인 권리조차 박탈하는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기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다음과 같이 정중하게 부탁드립니다. 마르크스경제학을 강의하고, 학문적 재생산을 보장할 마르크스경제학 전공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부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학문의 다양성과 경제학부 학문 재생산의 안정성, 학생들의 기본적 권리를 위해 서울대 경제학부는 마르크스경제학 교수를 반드시 채용해야 합니다. 저희 경제학부 대학원생들은 존경하는 교수님들께 마르크스경제학 전공 교수 채용을 간곡히 호소합니다.

2008년 2월 18일

마르크스경제학 전공 교수 채용을 바라는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대학원생 일동

관련기사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id=42485

헐리웃 파업, 새로운 미디어의 탄생을 촉발할 것인가

미드팬들을 따분하게 만들고 있는 헐리웃 작가조합의 파업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주1)

워너브로스(Warner Brothers), 유니버셜(Universal), 디즈니(Disney) 등의 냉대때문에 가슴에 대못이 박힌 작가조합이 전혀 새로운 우회로를 개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전통적인 헐리웃 스튜디오 방식이 완전히 혁신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즉 명망 있는 영화와 TV 작가들, 몇몇 배우들, 감독, 그리고 실리콘밸리의 투자가들이 함께 모였는데 이들은 스튜디오 제작방식이 아닌 새로운 벤처의 탄생을 선언한 것이다. 영화작가 Aaron Mendelsohn은 대중에게 콘텐츠를 직접 전하는 전혀 새로운 모델이라고 천명하였다.

간단하게 말하면 이들은 각종 프로그램과 영화를 인터넷을 통하여 배포함으로써 스튜디오의 지배에 도전한다는 구상이다. 이번 구상은 어쩌면 파업 그 자체로부터 배양되었을지도 모른다. 파업을 지지하는 단편을 만든 George Hickenlooper는 바로 파업 비디오 덕분에 인터넷을 통해 시청자에게 콘텐츠를 직접 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Woody Allen이나 Jay Leno 같은 유명 연예인이 출연한 실험적인 작품 Speechless는 벌써 인터넷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Speechless 감상하기
http://www.mcnblogs.com/mcindie/archives/2007/12/woody_allen_spe.html
http://www.deadlinehollywooddaily.com/speechless-21/

이제 어쩌면 우리는 헐리웃 작가들의 신작을 스크린이 아닌 Google이나 YouTube를 통해 처음 접하게 될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Jay Leno나 David Letterman과 같은 유명 토크쇼 사회자들은 벌써부터 이런 방식으로의 접근을 신중히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한편 이번 파업의 빅이슈 중 하나가 바로 인터넷을 통한 수입을 스튜디오가 작가들과 공유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 돌파구가 또한 인터넷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대중문화의 새로운 돌파구로써의 인터넷의 중요성과 가능성이 새삼 확인되는 장면이다.

또한 작가와 스튜디오의 배후에 또 다른 이질적인 세력이 존재하는 것처럼 구도가 형성되었다는 점도 흥미롭다. 작가들은 스튜디오가 자신들에게는 인터넷을 통한 수입이 불확실하다고 떠들면서도 월스트리트에 가서는 투자를 끌어오기 위해 온갖 감언이설로 인터넷의 가능성을 떠들어댔다고 비난하였다. 한편으로는 작가조합은 그들 뒤에 있는 실리콘밸리의 투자자들은 ‘자유로운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운동(free and open source software movement)’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으며 평등주의적 시스템을 신뢰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오호~ 월스트리트 대 오픈소스 운동! 이거 재밌겠는데?

Hickenlooper는 Jordan Mechner(주2)와 짝이 되어 프로젝트를 개시했는데 하루 단위로 발표되는 필름을 만들고 있다. 저예산으로 하루 단위로 배포되는 이 영화는 George Clooney가(!)… 출연하지는 않지만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배우들이 출연하고 30일에서 50일 정도까지 연재되다가 최종적으로 DVD로 출시될 예정이라고 한다.

어떻게 보자면 이미 인터넷이 대중화되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하드웨어의 성능이 일취월장하면서 이러한 생산방식의 혁신은 예고되어 왔다. 그러나 여전히 거대 스튜디오의 힘은 막강하였기에 그리고 그에 소속되어 있는 작가들은 여전히 법적으로 어디까지나 고용인이었기에 이러한 시도는 그리 많은 호응이나 동기를 부여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구석으로 내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듯 작가조합은 스스로의 능력을 다른 수단을 통해 배출할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생산방식의 서막을 알리고 있다는 점이 무척 인상적이다. 개인적으로는 특히 이러한 양상들이 Karl Marx가 분석하였던 생산력에 조응하지 못하는 생산관계의 타파의 한 사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즉 거대 스튜디오들은 여태껏 생산수단을 소유한 전통적인 공장장의 위치였다. 그들은 제작 공간, 배우, 제작 장비, 배포망 등 모든 것을 소유하였다. 작가들은 공장의 노동자였다. 그들에겐 생산수단과 배포망이 없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하였다시피 인터넷, PC의 발달 등 하드웨어/소프트웨어는 괄목상대할 만큼 발전하였다. 어느덧 이미 노동자들은 그들이 원하기만 한다면 생산수단을 소유할 수 있게끔 된 것이다. 새로운 Punk Rock 의 시대, DIY(Do It Yourself)의 시대가 왔음에도 작가들은 눈치를 못 채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공장장이 정당한 이윤을 공유하지 않으려 욕심을 부리자 – 개과천선하기 이전의 스크루우지처럼 – 노동자들은 파업으로 응수하였고, 피켓을 들고 돌아다니면서 궁리를 하다 보니 그들의 손에는 생산수단과 약간의 투자를 지지해줄 오픈소스 운동가들이 있었던 것이다. 유레카!

하지만 여전히 장벽은 곳곳에 존재한다. 우선 실리콘밸리의 투자자들이 월스트리트와 완전히 다른 종자라고 믿을만한 구석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들이라고 투자수익률의 개념이 없는 것이 아닐 텐데 말이다. 그들 모두에게 Richard Stallman과 같은 정신적 지도자 이미지를 기대할 수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적정수익 없는 작가주의 영화는 그들을 지치게 할지도 모른다.

두 번째는 커다란 스크린이 아닌 YouTube의 화면으로 블록버스터의 감동을 느끼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싶다. 몇몇 실험적인 작품들은 나름대로 호응을 얻을 것이지만 최신식 전투기가 360도 회전하면서 창공에서 해면으로 수직으로 비행하면서 적군에게 포화를 퍼붓는 장면을 소화해내지는 못할 것이다. 영화는 진실의 전달체인 동시에 꿈의 공장이기도 하다.

뭐 이외에도 내가 또는 그들조차 알지 못하는 갖가지 장벽이 존재할 것이다. 혁명은 고달픈 것이다.(주3)

지난번에 David Byrne 이 Wired.com 에 올린 기고문을 번역하여 전달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음악이나 영화 등 대중문화는 이미 생산력의 혁명기에 접어들었음이 분명하다. 70년대 Punk Rock 운동에도 DIY정신이 있었고 덕분에 언더그라운드의 중흥기도 마련되었지만 그랬음에도 여전히 좌익 밴드 The Clash 조차 대형 레이블과 계약을 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생산관계는 여전히 강고하였다. 하지만 기술의 발달은 문화노동자들에게 이 강고한 벽마저도 부술 정도의 힘을 갖게끔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실험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 솔직히 밑질 것도 별로 없지 않은가.

 

(주1) 작가조합의 파업의 실마리는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는 가운데 LA 시의회는 파업으로 인한 LA의 피해액이 3억8천만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주2) 이 양반 누구냐면 그 위대한 게임 the Prince of Persia 의 개발자다! 한마디 더 하자면 노래 ‘마법의 성’이 바로 이 게임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지.

(주3) 차베스에게 펀딩을 부탁하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