觀光弗

먼저 다울링 대사가 환율의 현실화를 미국식의 접근방식으로 설명했고, 이어서 데커 장군이 한국에 와 있는 수많은 미국 장병들이 500대 1의 고정환율에 따라 봉급을 환화로 바꾸어 한국시장에서 물건을 사려고 하면, 실제로는 그 가치의 절반도 안되기 때문에 사령관의 입장으로서도 고충이 많다고 거듭 설명드렸다. 그 자리에서 李대통령은 해방 후 1달러당 15환부터 시작된 환율이 500환까지 치솟게 된 아픈 역사를 되새기고 “우리 돈의 가치가 이토록 떨어진 것은 아마도 당신네들이 정책을 잘못 세운 것 때문이 분명하다.” [중략] 라고 결론지었다. 이러한 한미양측의 입장을 조정하기 위해 「觀光弗」이라는 이름을 붙여 1달러 대 900~1,000환 정도의 범위 안에서 여행자나 미국병사들의 봉급의 일부를 환화로 바꾸어주는 제도가 제시되기도 했다. 李대통령은 이같은 안에 대해 그 취지는 충분히 납득하면서도 “우리 입장이 한번 무너지면 그 다음의 평가절하가 가져오는 악순환을 어떻게 막으려고 하느냐”며 이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부흥과 성장, 송인상 저, 21세기북스, 1994년, pp276~277]

이승만 집권 시절 경제관료를 지냈던 송인상 씨의 회고록 중 일부다. 이승만 씨가 외환관리에 유난히 신경을 많이 썼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진바 있고, 이러한 상황에 갑의 위치에 있던 미국 정부조차도 곤혹스러워했던 일화다. 모든 후진국이 그렇듯 한국 역시 공식 환율이 있었고 실제 이와는 괴리가 큰 시장가로 움직이는 별도의 환시장이 있었다. 이에 따라 미국 병사 혹은 종교단체 등은 한국의 고평가된 환율로 불이익을 받고 있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 정부 측에서 “관광불(觀光弗)”이라는 별도의 환율 제도를 만들자고 했다는 장면이다. 비록 이 일화에서는 미국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1955년 11월 협정을 통해 한미 양국은 서울도매물가지수가 6개월 동안 125%를 넘거나 떨어지면 환율을 개정하도록 합의하게 된다. 그 뒤로 완강하게 환율 방어에 매진하던 이승만 정부는 대통령 선거 직전인 1960년 2월 650대 1로 환율을 변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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