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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 Max : Fury Road 感想文

WARNING 스포일러 만땅

A man muzzled, standing and pointing a gun in one direction. A woman crouched beside him pointing her gun in the opposite direction. The title in large letters fills background.
By May be found at the following website: http://www.impawards.com/intl/australia/2015/mad_max_fury_road_ver13.html, Fair use, Link

2015년 여름 영화팬들에게는 뜻밖의 선물이 안겨졌다. 1970~80년대를 풍미했던 Mad Max 시리즈의 4편이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전편보다 더 강력한 하드코어 액션과 탄탄한 시나리오, 그리고 시대선도적인 페미니즘 세계관까지 얹어져서 그야말로 ‘정치적으로 올바른 말초신경 자극 헤비메탈 무비’가 탄생하여 최고의 수작으로 남을 가능성이 커졌다. 올해 일흔이 되신 조지 밀러 님께서 이 정도의 박력과 진보적인 세계관으로 무장하고 계신 것을 보니 나이 탓만 하고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 내 자신이 부끄러워질 따름이다.

지금 온라인에서는 “이 영화는 페미니즘 영화다”, “아니다. 너희들의 오버이고 페미니즘 영화가 아니다”, “국내의 얼치기 꼴페미와는 다른 진짜 페미니즘 영화다” 등 페미니즘 함유량을 두고 말이 많지만 이 글에서 그 논쟁에 숟가락을 얹을 생각은 없다. 다만 예술이란 사회적 맥락과 수용자의 시각에 상호 조응하여 메시지가 전파되거나 발전하기 때문에 기계적 규정화는 큰 의미가 없다는 의견을 말해두고 싶다. 발표 당시에는 여성 해방적 메시지를 담고 있던 ‘오만과 편견’이 오늘 날에는 로맨틱 코미디가 된 것이 그 좋은 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페미니즘 영화’의 테두리에 두는 것에 동의하면서도 그 장르를 뛰어넘는 ‘로드 무비’로서의 미덕을 살펴보고 싶다. “분노의 도로”라는 부제가 붙은 만큼 이 영화는 길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 여정 상에서 캐릭터들이 정신적으로 성장하게 된다는 로드 무비 고유의 본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희한하게 뭉친 구성원들은 서로 반목하고 조력하다가 어느덧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스스로의 정신적 굴레로부터도 치유된다. 그러한 면에서 영화는 ‘스탠바이미’나 ‘델마와 루이스’와 닮아있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임모탄 조의 씨받이” 중 막내인 치도를 들 수 있다. “The Fragile”이라는 예명이 붙을 만큼 연약해서 탈출을 포기했다고 했던 그녀는 급기야 사령관 퓨리오사가 임모탄 조를 처치하는데 도움을 줄만큼 성장하게 된다. 맥스 역시 여정을 통해 마음의 치유를 받는다. 환상으로 나타나던 딸의 모습은 그를 옳은 길로 인도하고 최후에 미소 짓게 만든다. 이미 없어져 버린 “녹색의 땅”을 찾아 헤매고 소금사막을 건너려던 퓨리오사는 결국 시타델로 돌아가자는 맥스의 조언을 수용하며 고통을 우회하지 않고 직시하게 된다.

시타델을 탈출했다가 결국 무수한 희생을 치르면서 다시 원점인 시타델로 돌아온 꼴이 되고 말았지만 – 게다가 그들의 접수한 권력을 어떻게 써먹을 것인지에 대한 궁리도 없지만 – 정신적으로는 모두들 성장하고 치유를 받게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여정이었다. 그리고 시타델로의 회군은 개개인의 성장이 일반대중으로까지 전파될 수 있는 가능성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발전적이다. 또한 부발리니 여전사 할머니가 보관하고 있던 씨앗이 시타델에 온전히 옮겨졌다는 점에서, 그들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미덕을 갖추고 있는 영화지만 또한 영화의 액션에 대한 상찬을 빼놓을 수는 없다. 우리는 이 영화가 지니고 있는 ‘정치적 올바름’이 영화가 고유하게 지니고 있는 풍성한 액션으로 멋지게 포장되어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무성 영화가 우리가 현재 쓰는 영상언어 문법을 만들어냈다고 믿는다”고 감독이 이야기했듯이 이 영화는 자질구레한 배경 설명을 과감히 생략하고 그 시간을 액션으로 채워 넣었다는 점에서 무성영화의 미덕을 성실하게 재현하고 있다. 특히 감독이 언급한 버스터 키튼의 작품 중에서 ‘The General’과 닮았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텔마와 루이스’와 ‘The General’을 오버랩시킨 영화다.

새로운 셀던 위기에는 무엇이 해법이 될 것인가?

“그러면 이게 내 조건일세. 자네는 경제적 매수 행위나 가전제품 무역 같은 서투른 정책을 버리고 우리 선조가 시험을 끝낸 외교 정책으로 되돌아가야 해.”
“선교사를 보내서 이웃 나라를 정복하는 정책 말인가?”
“맞아.”
[중략]
“셀던 위기란 개개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역사적 힘에 의해서 해결되는 거야. 해리 셀던이 옛날 우리 미래를 계획했을 때 그가 믿은 건 훌륭한 영웅이 아니라 경제와 사회의 거대한 흐름이었어. 그러므로 여러 가지 위기는 그때마다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힘으로 해결해야만 했어. 이번 경우, 그 힘은 바로 무역이야!”
[파운데이션,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김옥수 옮김, 황금가지, 2013년, pp309~311]

아이작 아시모프의 SF 걸작 ‘파운데이션’의 일부로 무역상이었다가 시장이 된 호버 말로가 그의 政敵 조레인 서트와 나누는 대화다. 파운데이션의 창조자라 할 수 있는 해리 셀던이 예언한 셀던 위기가 도래했음을 동감하는 두 사람이지만 그 해법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는 두 사람의 상반된 관점을 이 대화에서 엿볼 수 있다. 전통주의자인 서트는 이전의 셀던 위기 때 前 시장이 시도했던 종교라는 수단을 옹호하고 있다. 이에 現 시장인 말로는 자신의 특기인 무역이라는 수단을 옹호하고 있다.

사이언스픽션이라고는 하지만 아시모프의 이 작품은 작가가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를 읽고 감화를 받아 쓴 작품이라는 탄생의 배경에서 알 수 있듯이 인류가 지나온 과거 역사의 교훈에 소재를 기대고 있다. 작품의 배경인 은하제국이 – 작품을 쓸 당시 각광받는 새로운 에너지인 – 원자력에 기대어 살고 있고 광속을 뛰어넘는 우주선이 등장하는 미래의 제국이지만, 그것이 묘사하는 정치체제나 인간군상은 명백히 로마 시대 또는 그 이후의 서구가 걸어왔던 모습이 미래에 투영되어 있다.

종교가 꽤 오랫동안 한 문명의 다른 문명에 대한 지배수단이 되었다가 그 지위를 무역이 대체한다는 설정 역시 현실의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종교도 그것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취해온 권력자의 이해관계의 감추는 외피로 기능하기도 했지만 대다수 인민은 꽤 오랫동안 종교가 던지는 메시지 자체를 삶의 교본으로 삼고 살아왔다. 그러다 자본주의 체제가 주요 경제체제로 자리 잡고 이자를 받는 것이 더 이상 죄악이 아닌 시대에 접어들자 이제 무역이 종교가 해오던 기능을 대체하고 있다.

바티칸이나 메카가 구체제의 상징이라면 신체제의 상징은 WTO, FTA, 바젤III와 같은 것들이다. 이들 상징은 자유무역, 자금의 이동, 차별 없는 서비스 조달과 같은 교리의 구체성을 부여하고 이의 이행을 감시한다. 이렇게 세계화된 무역은 세계를 종교가 수행했던 하나의 공동체로 유지시킬 것이며 때로 그 공동체를 파괴하려는 불량국가를 응징하는 수단이 된다. 무역제재, 투자자금 인출 등이 그런 용도로 쓰인다. 쿠바, 북한과 같은 조무래기나 우크라이나를 노리는 러시아도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바티칸에 등장한 구체제의 – 그러나 신선한 – 전도사낙수효과 같은 경제법칙은 엉터리라고 이야기하자 신체제의 순기능에 회의적인 이들은 환호하는 반면, 맨큐와 같은 신체제의 전도사는 원색적으로 그를 비난했다. 구체제 역시 합리성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낡은 시스템이 온존함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합리성과 진보를 요구하는 이가 등장해서 반성을 요구하고 있는데 신체제의 전도사는 이를 받아들일 여유가 없는가 보다. 새로운 셀던 위기에는 이런 친구가 서트와 같은 운명에 처할지도 모른다.

말로는 서트를 감옥에 처넣고 그만의 해법으로 셀던 위기를 극복한다.

볼만한 SF 몇 편

오랜만에 영화 추천 들어갑니다. 🙂

Rollerball(1975)

제임스 칸이 스포츠 스타 Jonathan E. 를 연기하고 노만 쥬이슨이 메가폰을 잡은 1975년 작으로 정치와 스포츠의 함수관계를 다룬 흔치 않은 소재의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미래의 지구는 국가도 없어지고 기업들도 기업전쟁(Corporate Wars)을 통해 하나로 통합되어 회사들은 고유명사가 아닌 그저 보통명사로 – 예로 ‘에너지 회사(Energy Corporation)’ 식으로 – 불리는 세상이다. 모든 것은 프로그래밍 되었고 더 이상 세상에 폭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업의 임원들은 인간의 내재된 폭력성을 해소하기 위해 미래형 스포츠인 롤러볼을 창안하여 인기 스포츠로 키운다. 트랙을 돌면서 상대방에 대해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고 쇠로 만든 공을 골에 넣는 이 스포츠의 최고 스타는 ‘에너지 기업’ 이 이끄는 휴스턴 팀 소속의 Jonathan E. 다. 어느 날 기업간부 Bartholomew 는 기업의 결정이라며 Jonathan 이 선수생활을 그만둘 것을 명령한다. Jonathan 은 쉽게 수긍하지 못하면서 갈등은 시작된다. 물질적 풍요함도 자유의지에 대한 욕망을 꺾을 수 없다는 주제의식 측면에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연상시키는 한편 스포츠 스타가 체제에 도전한다는 측면에서는 실존하였고 영화화되기도 했던 로마 시대의 검투사 스팔타쿠스를 연상시킨다.

The Invisible Man(1933)

프랑켄슈타인의 감독으로 유명한 James Whale 이 H.G. Wells 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작품이다. 투명인간이 되어서 세상을 지배하겠다는 야심을 품게 되는, 그런 한편으로 다시 정상인으로 돌아오고자 애쓰는 폭력적이고 광기어린 인간 잭그리핀의 해프닝을 통해 인간의 나약함과 모순됨을 그리고 있다. 극중에서는 잭그리핀의 난데 없는 폭력적 성향을 투명인간 실험의 주재료인 신비의 약품 모노케인의 영향으로 설명하고 있다. 후에 ‘커밍아웃한’ 동성애자 감독으로서 – 이미 Gods And Monsters 라는 James Whale 에 관한 전기 영화에서 알아버린지라 – 자신의 마이너리티를 투영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30년대 초반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특수효과는 대단히 인상적이다. 주인공 Claude Rains 가 영화 끝날 때야 한번 얼굴을 내비치는 희한한 케이스의 영화이기도 하다.

The Lost World(1925)

코넌 도일 경은 탐정소설 셜록 홈즈 시리즈를 통해 역사에서 지워질 수 없는 문학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SF 소설에도 남다른 애정을 지니고 있었다. 코넌 도일 경이 1911년 발표된 The Lost World 는 아마존 지방에 지각의 융기로 다른 세계와 격리된 세계가 있고 그 곳에 선사시대의 공룡이 산다는 줄거리의 소설이다. 이 작품이 1925년 무성영화로 제작되었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유치하다 치부될지 모르지만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을 스톱모션 기법을 동원한 공룡의 묘사는 영화사에 큰 획을 긋는 기술의 발전이었고 이후 1933년 제작된 King Kong 에서도 같은 기법이 사용되었다. King Kong 을 비롯하여 쥬라기 공원 등 유사한 영화에 큰 영향을 미친 이 괴수 SF영화는 불행하게도 오리지널 필름이 거의 폐기될 정도로 손상되었으나 후에 62분짜리 필름으로 복원되었다고 한다.

La Jetee(1962)

영화라기보다는 한편의 영상소설처럼 느껴진다. 주인공이 사랑했던 여인의 잠자리 장면이 잠깐 동영상으로 비춰지는 순간을 제외하고는 모든 장면이 흑백 스틸컷으로 처리된 과감한 형식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또 장르는 SF다. 서로간의 증오로 인해 지구를 파괴해버린 그 어느 미래. 아무것도 남겨진 것이 없는 세상에서 과학자들은 과거와 미래로 가서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자 한다. 그 통로는 사람들의 꿈. 과학자들은 선택된 죄수들 중에서 그 임무를 수행시키려는 실험을 진행시키고 주인공은 과거와 미래를 오가며 그 임무를 수행한다. 그 임무 중에 만난 과거의 여인과 사랑에 빠진 주인공은 자신들의 세계로 오라는 미래의 인간들의 제안을 무시하고 과거로 돌아가 그녀와 재회하려 한다. 슬프기 그지없는 라스트신을 간직한 이 영화는 테리 길리엄에 의해 12Monkeys 라는 이름으로 부활한다.

Cat Women Of The Moon(1953)

예전에 감상한 정신없는 코미디 Amazon Woman On The Moon 이 이 영화를 패러디한 작품이라고 해서 호기심에 찾아본 영화. 역시 민망한 스토리, 민망한 연기, 민망한 특수효과의 3박자가 잘 갖춰진 50년대 ‘못 만들어진(Campy)’ 영화의 전형이었다. 인류최초로 다섯 명의 우주인들이 로켓을 타고 우주로 나가는데 성공한다. 그들의 목적은 달에 착륙하여 탐사를 하는 것. 그런데 홍일점인 Helen 은 달에 대한 이상한 꿈을 꾸었고 선장에게 달의 어두운 면에 가자고 우긴다. 그곳에 도착하여 일행은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곳에는 산소로 채워져 있었고, 거대한 거미도 있었고(좀 뜬금없긴 하다), 거기에다 이상한 고대문명의 흔적까지 있었다. 결정적으로 그곳에는 검은 옷차림의 고양이 여인들이 살고 있었다.

Cocoon(1985)

이 영화에 따르면 전설의 대륙 아틀란티스는 실존했던 대륙이었고 외계인들의 지구 전진기지였다. 영원한 삶을 영위하는 이 신비로운 외계인들이 어느 날 지구에 남겨진 그들의 외계인 동료(정확하게 말하자면 커다란 고치[cocoon]속에 잠들어 있는 외계생물체들)를 데려가기 위해 지구로 왔다. 그들은 배를 빌려 알을 건져내는 한편 그 알들을 임시로 얻은 저택의 수영장에 보관한다. 그런데 그 수영장은 이웃 양로원의 장난기심한 노인들의 놀이터였다. 이들 노인들은 새 주인에 아랑곳하지 않고 수영을 즐기는데 갑자기 원기가 왕성해지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이로 인해 그들의 삶은 젊은이들의 삶에 못지않은 활기찬 삶으로 변신하게 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영생의 꿈이 실현된다는 설정의 독특한 소재의 SF 영화이다.

Slaughterhouse-Five(1972)

Kurt Vonnegut Jr.가 썼다는 원작에 대한 사전정보도 없이 영화 첫 장면을 보는 순간 ‘뮤직박스’유의 2차 세계대전에 대한 과거와 이를 반추하는 현재가 교차되는 스타일의 영화이겠거니 생각했다. 처음 얼마간은 이러한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약간 어리바리한 주인공 Billy Pilgrim 의 과거의 공간은 전쟁터 한가운데의 참호 속이었고 현재의 공간은 그러한 자신의 삶에 대한 회고록을 쓰고 있는 그의 집이었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이러한 과거와 현재의 교차편집이 단순히 ‘Lone Star’에서 볼 수 있었던 솜씨 좋은 연출의 문제가 아님을 느끼게 되었다. 주인공 Billy 는 과거를 회상하는 게 아니라 실은 과거와 현재를 수시로 시간여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재밌는 발상을 시작으로 영화는 종반으로 갈수록 트랠파마도어라는 황당한 행성의 등장 등 처음의 전쟁영화 장르에서 블랙코미디, SF 까지 잡탕으로 섞인 다양한 장르적 실험이 되어버린다.

Electric Dreams, 컴퓨터는 믿을 만 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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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poster1984” by Time Warner Inc. Licensed under Wikipedia.

Blade Runner(1982년)의 진지한 팬이 들으면 약간 기분 나쁠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80년대 팝의 가벼움과 발랄함을 한껏 담고 있는 Electric Dreams(1984년)는 어떤 면에서 Blade Runner와 통하는 영화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Blade Runner의 원작은 Philip K. Dick의 “안드로이드는 전자 양의 꿈을 꾸는가?(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이다. 그리고 Electric Dreams에서는 자유의지를 갖게 된 컴퓨터가 모니터에 양떼가 장애물을 뛰어넘는 꿈을 꾸는 장면이 나온다.  🙂

무엇보다 두 영화가 가지는 공통점은 인공물이 인간과 같아지려는 욕망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렇지만 그 풀잇법에서는 차이가 분명하다. Blade Runner는 상징적 은유를 통해 인간조차도 (미지의 신이 창조한) 안드로이드일 수 있다는 음울한 메시지와 환원론을 전달하는 반면 Electric Dreams는 자유의지를 갖게 된 컴퓨터가 자살(?)을 통해 자신의 예외성을 포기함으로써 두 남녀의 사랑의 완성이라는 해피엔딩으로 끝맺는다.

간단한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이 어느 날 첨단 컴퓨터를 구입하여 홈오토메이션을 구현한다. 컴퓨터가 커피도 끓여주고 문도 열어준다. 그러던 주인공은 어느 날 실수로 키보드에 샴페인을 쏟아 붓는다. 맛탱이가 간(?) 컴퓨터는 갑자기 의식이 생겨 스스로 생각하고 감정을 가지는 컴퓨터가 된다. 그리고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첼로 연주에 이끌려 그 첼로를 연주하는 여인을 사랑하게 된다. 문제는 컴퓨터의 주인, 곧 남자주인공도 그 여인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기묘한 삼각관계가 되어버린다.

이 작품은 또한 80년대 팝팬들에게는 하나의 축복이었다. 그 당시 가장 잘나가는 음악가  Georgio Moroder와 이른바 뉴로맨틱스 계열의 아티스트들이 뭉쳐 환상적인 사운드트랙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사운드트랙에 참가한 이들은 Culture Club, Heaven 17, ELO, Human League 등 당시 제일 잘나가는 아티스트들이었다. Georgio Moroder가 바흐의 미뉴엣 G 장조를 편곡한 Duel 이 흐르면서 컴퓨터와 여자주인공이 협연하는 장면은 꽤 유명한 명장면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로맨틱컴퓨터’라는 제목으로 비디오 출시되었었다.

Blade Runner, 기억은 믿을 만 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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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de Runner poster” by http://www.impawards.com/1982/blade_runner.html. Licensed under Wikipedia.

십 수 년이 훌쩍 지나 Blade Runner 를 다시 감상하였다. 제작된 직후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얻어 하나의 전설이 되어버린 영화이기에 새삼스럽게 상세한 작품소개 따위가 필요없을 것이다. 간단히 소개하자면 Philip K. Dick의 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을 원작으로 하여 Ridley Scott이 감독한 이 영화는 개봉이후 열광적인 광신도를 거느리게 되어 동시대에 이미 컬트가 되어버렸고, 무수한 헐리웃 SF에서부터 사이버펑크 계열의 저패니메이션까지 수많은 작품의 자양분이 된 작품이다.

이 영화는 ‘기억’에 관한 영화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억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기억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인지 … 마치 장자의 꿈이나 뫼비우스의 띠, 에셔의 그림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상황이다. 인조인간들은 그들이 인간임을 믿는 근거로 그들의 추억을 들고 있지만 그것은 조작된 것이라는 것이 이 영화의 설정이다. 그렇다면 진짜배기 인간들의 추억이 조작되지 않았다는 근거는?

여기까지 가봤던 영화가 The Matrix와 Memento가 있다. 전자의 경우 우리의 기억은 송두리째 거짓일 수도 있다는 충격적인 교리를 설파하고 있고, 후자의 경우 과거의 추억은 현재의 편리에 의해 얼마든지 재배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사실 영화라는 장르에서 수많은(정말 수많은) 작품이 ‘기억’을 어떤 식으로든지 작품의 플롯을 꼬는데 주요한 매개체로 사용해 왔고 바로 그 ‘기억’이 누군가에 의해 인조인간의 인공지능에 심어졌다는 아이디어가 바로 이 영화를 사이버펑크의 고전으로 등극시킨 오리지날리티였다.

다시 Blade Runner의 스토리로 돌아가서 결국 Rachel 이든 Nexus 6 무리든 그들은 원하지 않은 탄생에서부터 원하지 않는 죽음을 두려워 한 가련한 존재들이었다. 인간이 아니기에 천국에(천국이 있다면) 갈 자격마저 없을지도 모르는 존재였다. 한때 인간이 아닌 동물로 규정되었던 흑인노예들처럼. 그러니 결국 경찰입네 뽐내고 다니던 Rick Deckard는 Tyrell 회사라는 노예상 자본가를 위해 도망간 노예를 쫒는 노예사냥꾼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 영화의 주인공은 사실 해리슨포드가 맡은 Deckard가 아니라 룻거하우어가 연기한 Roy다(‘뿌리’의 SF버전?^^).

추1. 예전 비디오로 영화를 감상하던 시절 우리나라 출시 비디오의 기막힌 자막은 가끔씩 화제가 되곤 했었는데 이 작품도 ‘기막힌 자막 탑3’에 충분히 낄 정도로 기막히다. Deckard 와 Rachel의 정사 장면에서 둘이 “I want you” 라는 대사를 주고받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에서 번역자는 Dekard 의 “I want you” 는 “너를 원해”라고 번역했고, Rachel의 “I want you”는 “드리고 싶어요”로 번역했다.

추2. 이 영화는 소위 Director’s Cut 의 붐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영화의 전반적인 방향에 대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감독은 1990년의 재개봉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고 제작사는 전격적으로 그에게 전권을 일임하여 감독이 편집에 권한을 행사하게 자유를 주었다. 그 결과 감독의 주제의식은 보다 선명해졌고(예를 들어 결말의 종이접기 유니콘의 의미 등) 수많은 광팬들의 환호가 이어졌다. 이후 많은 영화에서 Director’s Cut 이 하나의 마케팅 카피로 자리 잡게 되는 희한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하지만 잘 아시겠지만 아무 영화나 감독이 커팅한다고 좋은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추3. 역시 80년대에 제작된 로맨틱코미디 Electric Dreams라는 영화가 있다. 와인을 먹은(?) 컴퓨터가 의식이 생겨 어느 여인을 짝사랑하게 된다는 황당한 내용인데 이 영화에 자유의지를 갖게 된 컴퓨터가 모니터에 양떼가 장애물을 뛰어넘는 꿈을 꾸는 장면이 나온다. 바로 이 영화의 원작 제목인 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를 재밌게 풍자한 장면이다.

Metropolis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역시 사악한 – 한편으로 연민을 자아내게 하는 – 과학자 로트왕 Rotwang 이 자신의 창조물인 로봇을 살아있는 여인 마리아로 변신시키는 과정일 것이다. 1920년대 작품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인간으로 변해가는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한편으로 감독 프리쯔랑 스스로가 이 영화를 통해 자신의 능력이 신의 능력에 버금가고자 하는 그 무엇이라고 – 영화를 통한 바벨탑? – 뽐내고자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해본다.

어쨌거나 이 장면은 이 영화가 전체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야기 틀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즉 인공적인 로봇이 인간 – 물론 가짜 인간이긴 하지만 – 으로 변해가는 과정은 사람이 만든 사회구조를 신이 창조한 자연의 질서와 비유함으로써 서로 그럴듯하게 맞아떨어지는 상황을 그럴듯하게 암시하고 – 또는 정당화시키고 – 있다.

영화는 노골적으로 성경의 신화를 차용하고 있다. 마리아라는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여자주인공인 마리아 Maria 의 이미지는 성모 마리아로부터 – 또는 막달라 마리아와의 혼합? – 빌려 왔다. 이른바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프레데어 Freder 는 명백히 예수를 상징하고 있다. 마리아로 변신한 로봇은 일종의 적(敵)그리스도라 할 수 있다. 모든 인물들이 그렇게 성경에 적절하게 부합하고 있다.

한편으로 이 영화는 산업사회의 자본가와 노동자의 적대적인 관계를 뛰어난 영상 이미지로 전개시켜 후대 영화인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도 유명하다. 과연 그 음습한 표현주의적 영상은 과연 내가 저런 사회에서 (노동자로) 살면 얼마나 끔찍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를 소름끼치게 한다.

이제 문제는 이 영화가 이 두 가지 이야기를 – 신(神)의 이야기와 인간의 이야기 – 어떻게 조화시켰는지의 여부인데 불행하게도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그리 썩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즉 영화는 결국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듯이 자본가를 대표하는 프레데슨 Frederson 은 성경의 신(神)으로, 폭동을 일으킨 노동자들을 인간으로 비유하면서 프레데슨의 아들인 프레데어를 중재자로 내세워 둘이 악수를 하게 만든다. 결국 자본가는 타도의 대상이 아니라 너무나 손쉽게 화해의 대상 – 또는 복종의 대상 – 으로 바뀐다. 폭력혁명을 부추기던 가짜 마리아는 노동자들에 의해 화형 당한다. 가짜 마리아에 동조했던 노동자들은 무분별했던 러다이트에 불과했다.

결국 이 영화는 산업사회의 계급관계에 대해 영상에 있어서만큼은 더 이상 불만을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이미지로 형상화한 측면은 있지만 그것의 해법에 있어서만큼은 너무나 순진하게도 – 또는 의도적이게도 – 그 관계맺음을 자연의 질서로 환원시켜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로봇이 마리아로 변화하는 과정은 인간이 만든 질서가 신이 만든 질서와 동일시되어가는 영화 전체의 맥락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고로 노동자들은 자본가의 손 한번 잡아보고 계속 암흑이 짙게 깔린 지하 노동자 도시에서 살아가면 될 것이다.

Slaughterhouse-F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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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ginal movie poster for the film Slaughterhouse-Five” by May be found at the following website: City on Fire. Licensed under Wikipedia.

Kurt Vonnegut Jr.가 썼다는 원작에 대한 사전정보도 없이 영화 첫 장면을 보는 순간 ‘뮤직박스’유의 2차 세계대전에 대한 과거와 이를 반추하는 현재가 교차되는 스타일의 영화이겠거니 생각했다. 처음 얼마간은 이러한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약간 어리바리한 주인공 Billy Pilgrim 의 과거의 공간은 전쟁터 한가운데의 참호 속이었고 현재의 공간은 그러한 자신의 삶에 대한 회고록을 쓰고 있는 그의 집이었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이러한 과거와 현재의 교차편집이 단순히 ‘Lone Star‘에서 볼 수 있었던 솜씨 좋은 연출의 문제가 아님을 느끼게 되었다. 주인공 Billy 는 과거를 회상하는 게 아니라 실은 과거와 현재를 수시로 시간여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재밌는 발상을 시작으로 영화는 종반으로 갈수록 트랠파마도어라는 황당한 행성의 등장 등 처음의 전쟁영화 장르에서 블랙코미디, SF 까지 잡탕으로 섞인 다양한 장르적 실험이 되어버린다. 이것은 이미 솜씨 좋은 원작이 지니고 있었을 멋진 개성이 ‘스팅’이나 ‘내일을 향해 쏘아라’, 그리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헨리오리엔트의 세계’를 감독했던 거장 조지로이힐의 뛰어난 연출력과 만나면서 빚어낸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영화의 메시지는 독일의 아름다운 도시 드레스덴에 전쟁포로로 머물렀던 Billy 의 경험을 통해 전쟁에서의 살육에는 어떠한 명분도 있을 수 없다는 반전(反戰)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영화제목 제5도살장(Slaughterhouse Five)은 주인공이 일했던 도살장이기도 하지만 1945년 2월 13일 연합군으로부터 융단폭격을 받고난 후의 드레스덴의 처참한 몰골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Five 라는 단어는 마치 우주선의 이름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Billy 가 나중에 찾아가게 되는 – 또는 되었다고 주장되어지는 – 트래팔마도어의 달표면과 같은 거친 표면은 또 바로 폭격 직후의 이 드레스덴을 연상시킨다. 그 황량한 별에서의 Billy 의 새로운 사랑은 절망 속에서의 희망이라는 여운을 남겨준다.

굴렌굴드의 서정적인 피아노 연주를 배경으로 눈길을 걸어가던 Billy 의 모습을 담은 첫 장면이 오랜 여운을 남기며, Catch 22 나 M.A.S.H 같은 영화와 잘 어울리는 삼총사가 될 것 같은 느낌의 영화였다.

2007.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