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액션

Mad Max : Fury Road 感想文

WARNING 스포일러 만땅

A man muzzled, standing and pointing a gun in one direction. A woman crouched beside him pointing her gun in the opposite direction. The title in large letters fills background.
By May be found at the following website: http://www.impawards.com/intl/australia/2015/mad_max_fury_road_ver13.html, Fair use, Link

2015년 여름 영화팬들에게는 뜻밖의 선물이 안겨졌다. 1970~80년대를 풍미했던 Mad Max 시리즈의 4편이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전편보다 더 강력한 하드코어 액션과 탄탄한 시나리오, 그리고 시대선도적인 페미니즘 세계관까지 얹어져서 그야말로 ‘정치적으로 올바른 말초신경 자극 헤비메탈 무비’가 탄생하여 최고의 수작으로 남을 가능성이 커졌다. 올해 일흔이 되신 조지 밀러 님께서 이 정도의 박력과 진보적인 세계관으로 무장하고 계신 것을 보니 나이 탓만 하고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 내 자신이 부끄러워질 따름이다.

지금 온라인에서는 “이 영화는 페미니즘 영화다”, “아니다. 너희들의 오버이고 페미니즘 영화가 아니다”, “국내의 얼치기 꼴페미와는 다른 진짜 페미니즘 영화다” 등 페미니즘 함유량을 두고 말이 많지만 이 글에서 그 논쟁에 숟가락을 얹을 생각은 없다. 다만 예술이란 사회적 맥락과 수용자의 시각에 상호 조응하여 메시지가 전파되거나 발전하기 때문에 기계적 규정화는 큰 의미가 없다는 의견을 말해두고 싶다. 발표 당시에는 여성 해방적 메시지를 담고 있던 ‘오만과 편견’이 오늘 날에는 로맨틱 코미디가 된 것이 그 좋은 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페미니즘 영화’의 테두리에 두는 것에 동의하면서도 그 장르를 뛰어넘는 ‘로드 무비’로서의 미덕을 살펴보고 싶다. “분노의 도로”라는 부제가 붙은 만큼 이 영화는 길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 여정 상에서 캐릭터들이 정신적으로 성장하게 된다는 로드 무비 고유의 본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희한하게 뭉친 구성원들은 서로 반목하고 조력하다가 어느덧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스스로의 정신적 굴레로부터도 치유된다. 그러한 면에서 영화는 ‘스탠바이미’나 ‘델마와 루이스’와 닮아있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임모탄 조의 씨받이” 중 막내인 치도를 들 수 있다. “The Fragile”이라는 예명이 붙을 만큼 연약해서 탈출을 포기했다고 했던 그녀는 급기야 사령관 퓨리오사가 임모탄 조를 처치하는데 도움을 줄만큼 성장하게 된다. 맥스 역시 여정을 통해 마음의 치유를 받는다. 환상으로 나타나던 딸의 모습은 그를 옳은 길로 인도하고 최후에 미소 짓게 만든다. 이미 없어져 버린 “녹색의 땅”을 찾아 헤매고 소금사막을 건너려던 퓨리오사는 결국 시타델로 돌아가자는 맥스의 조언을 수용하며 고통을 우회하지 않고 직시하게 된다.

시타델을 탈출했다가 결국 무수한 희생을 치르면서 다시 원점인 시타델로 돌아온 꼴이 되고 말았지만 – 게다가 그들의 접수한 권력을 어떻게 써먹을 것인지에 대한 궁리도 없지만 – 정신적으로는 모두들 성장하고 치유를 받게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여정이었다. 그리고 시타델로의 회군은 개개인의 성장이 일반대중으로까지 전파될 수 있는 가능성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발전적이다. 또한 부발리니 여전사 할머니가 보관하고 있던 씨앗이 시타델에 온전히 옮겨졌다는 점에서, 그들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미덕을 갖추고 있는 영화지만 또한 영화의 액션에 대한 상찬을 빼놓을 수는 없다. 우리는 이 영화가 지니고 있는 ‘정치적 올바름’이 영화가 고유하게 지니고 있는 풍성한 액션으로 멋지게 포장되어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무성 영화가 우리가 현재 쓰는 영상언어 문법을 만들어냈다고 믿는다”고 감독이 이야기했듯이 이 영화는 자질구레한 배경 설명을 과감히 생략하고 그 시간을 액션으로 채워 넣었다는 점에서 무성영화의 미덕을 성실하게 재현하고 있다. 특히 감독이 언급한 버스터 키튼의 작품 중에서 ‘The General’과 닮았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텔마와 루이스’와 ‘The General’을 오버랩시킨 영화다.

영어로 쓴 The Dark Knight Rises 감상문

그저께 “The Dark Knight Rises”를 아이맥스로 감상했다. 전작보다 실망스러운 작품이라 특별히 리뷰를 쓰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영작 연습 사이트에 글 쓸 주제를 찾다보니 결국 리뷰를 쓰게 됐다.(그것도 영어로!) 원어민의 도움으로 수정된 글을 여기에 (귀찮아서) 재번역 없이 올려둔다. 

I saw “The Dark Knight Rises” the day before yesterday. I concluded that the movie has been somewhat overvalued. The film surely is a great movie for entertainment purposes. Once you, however, try to read some metaphors being reflected from the real world, you would have difficulties with the work because the points of view of the director are not so profound and are shallow. Although Christopher Nolan currently is one of the hottest movie directors in the industry around the world and has made some great films like “The Dark Knight” and “Inception”, his latest work failed to reach the level that his previous works archived in my humble opinion. The weakest point of the film is the disappointing character of the enemy of Batman. Without Heath Ledger, Nolan had to give up on the ‘Joker’ character and create a new character. The result is ‘Bane’, who came from an underground prison and argued that he tried to liberate the people of Gotham City. This character looks like a heroic revolutionary leader of the 3rd world or ‘Occupy Wall Street’ movement. Bane’s purpose is surely different from that of ‘Joker’ because Joker only wanted to create chaos in Gotham City for fun. But Bane’s actions and intentions are getting confused as he obsesses about a neutron bomb to blow up the city. His contradictory actions resulted from the director’s obsession with giving the movie a unique twist. As a result, a character which could have been a fantastic one in the trilogy of Batman became an ordinary character. Also, the movie became just a normal action film just like ‘Die Hard’ revoking an old-fashioned patriotism.

Lebanon(2009)

Buried 란 영화가 있다. 카메라는 지독하게도 처음부터 끝까지 산채로 관속에 묻힌 한 사나이의 모습만을 앵글에 담고 있다. 주인공이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한 미국회사의 직원으로 이라크에서 일하다가 이라크 저항세력에 납치당해 관속에 묻혔다는 설정이었다. 이 집요하리만치 극단적인 폐소공포증을 자극하는 영화의 주인공은 어쩌면 우리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굳이 관속이 아니더라도 탈출하지 못하는 어떠한 가혹한 현실에 놓인 우리. 그 원인은 자기 자신 때문일 수도, 가족 때문일 수도, 국가 때문일 수도 있다. 사실 이 사회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이상으로 어떠한 거대한 시스템에 의해 강제되고 그에 따라 개인이 행동하는 사회라는 점에서, 우리는 어쩌면 이 세상에 “묻혀” 지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1982년 6월 6일 이스라엘 방위군은 레바논 남부를 침공한다. 영화는, 뿌리 깊은 중동 및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의 갈등에서 배태된 이 전쟁에 배치된 이스라엘 탱크 병들의 시선을 담고 있다. 탱크 속에 들어앉아 보병들의 전투를 뒤에서 지원해주는 역할을 하는 네 명의 군인들. Buried 의 주인공이 느끼는 것만큼은 아니지만 탱크라는 좁은 공간에서의 폐쇄적이고 답답한 분위기는 서로의 존재가 귀찮으리만큼 눅진하고 짜증스럽다. 카메라의 앵글은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제외하고는, 시종일관 조준병 슈물릭이 바라보는 조그만 조준망원경을 통해서만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시야는 무척 좁지만 그러한 때문에 관찰대상이 주는 인상은 더욱 강렬해진다. 죽어가는 당나귀의 눈물이 선명히 보일만큼 말이다.

출발 후 얼마 되지 않아 비행기 공습이 지나간 곳이므로 소풍이나 다름없으리라는 소대장의 말은 허풍이었음이 곧 드러난다. 저항세력은 여기저기서 튀어나오고, 탱크는 시리아 군인으로부터 미사일 공격까지 받는다. 그럼에도 탱크병들은 오물과 담배꽁초가 뒤섞여 있는 탱크 안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오히려 시체의 보관소로, 시리아 군인의 감옥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결국 자신들의 위치가 시리아군의 수중에 놓여있음을 알고 한밤중에 탈출을 기도하면서 이 시작도 모르고 끝도 모르는 전쟁에서의 단순기능공들의 공포는 극에 달한다. 왜 그곳에 갔어야 하는지, 왜 민간인까지도 공격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 가해자임에도 불구하고 –  “탱크 속에 묻힌” 시스템의 희생자에 불과한 것이었다.

마지막 장면의 넓은 해바라기 밭이 인상적이다.

Blood Simple

블러드심플(1984)은 코엔 형제의 초기 필르모그래피 중 한 작품으로 조엘 코엔의 감독 데뷔작이다. 저예산의 기발한 코믹 공포 영화 이블데드의 제작진에 참여해서 닦은 실력으로 시나리오도 쓰고 감독도 했는데 첫 작품이 저예산 느와르의 걸작으로 남게 되었다.

못된 남편이 무서운 아내가 그 남편의 고용인과 바람이 났는데 남편에게 고용된 사설탐정이 정사 장면을 찍어 남편에게 넘겨준다. 분노로 마음을 가누지 못하는 남편이 급기야 사설탐정에게 청부살인을 의뢰하는데 탐정이 엉뚱한 플롯을 구상하면서 사태가 꼬인다.

어떻게 보면 평범한 영화로 전락할 수 있는 상황인데 그 진부한 스토리에 이것저것 기발한 아이디어를 채워 넣고 이블데드에서도 볼 수 있었던 명랑한 카메라워크도 선보이고 명장면으로 남을만한 몇 가지 공간적 상황설정이 합쳐지며 화학적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특히 사설탐정이 여인을 쫓아 욕실에 들어왔다가 여인에게 칼부림 당하는 장면은 말로 표현하면 별거 아닌 상황이 너무나 리얼하고 엉뚱하게 서스펜스를 유발하는 이 영화의 백미라 할 수 있다. 그 고통어린 연기를 해낸 탐정 역의 배우에게 경의를 표한다.

영화를 보면서 생각났던 작품은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이 1992년 만든 엘마리아치였다. 저예산 영화라는 공통점도 있고 – 총제작비 7천 달러였다고 – 진부할 수도 있는 시나리오가 재기발랄함으로 걸작으로 거듭난다는 점에서 그렇다. 추천작이다.

영화 속 명장면 : Deliverance

Deliverance(존 부어맨 감독, 1972년)는 자연과 시골의 낭만을 찾아 카누 모험에 나선 네 명의 도시인들이 낭만은커녕 거친 시골 범죄자들의 손에 능욕당하고 살해당하게 되는 모험담을 다룬 영화다. 낯선 곳에서 만나는 악인들에 대처하는 임기응변식 액션의 본보기로 남을만한 이 걸작의 주요한 장면이 아래 동영상에서 볼 수 있는 도시 남자와 시골 소년의 밴조 합주다. 남자의 기타 연주를 시골 소년이 밴조로 따라하고 급기야 멋진 연주곡을 함께 소화해내면서 서로 즐겁게 웃는 모습이 훈훈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하지만 어설픈 시골 할아버지의 춤을 도시인들이 비웃는 장면과 밴조 연주가 끝나고서 차갑게 악수를 외면해버리는 소년의 모습은 도시인과 시골인의 화해가 그리 만만치 않음을 상징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어쨌든 멋진 밴조 연주만으로도 즐길 가치가 있는 영화 속 명장면이다.

영화 장면 보기

공포의 보수(Le Salaire De La Peur, 1953)

옛날 영화를 볼 적마다 항상 엉뚱한 생각을 하곤 한다. ‘저 사람들은 이제 모두 죽었는데 저렇게들 아등바등 사는구나’라는 생각이다. 극으로의 몰입을 방해하는 잡념이지만 옛날 영화, 특히 흑백영화를 감상하다보면 어느 샌가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런데 바로 그 늘 뇌리에서 떠나지 않던 ‘죽음’을 이야기한 흑백영화를 얼마 전에 봤다.

누가 당신의 손가락을 자르는 대가로 돈을 주겠다고 하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일단 손가락을 자를 용의가 있는지? 그렇다면 얼마를 받을 요량인지? 정말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여기 그 질문에 대답한 이들이 있다. 손가락이 아닌 목숨을 대가로 돈을 벌겠다는 네 사나이가 있다.

베네수엘라의 어느 가상의 도시에는 할 일도 없이 하루를 때우는 무직자들이 널려있다. 도시에서의 탈출을 꿈꾸지만 그곳은 마치 바다 한 가운데의 무인도처럼 탈출할 길이 요원하다. 그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은 그들의 손으로 벌 수 없을 정도의 많은 돈을 버는 것 정도뿐이다.

그 창살 없는 감옥에는 석유회사가 하나 있었다. 바로 ‘남부석유회사(Southern Oil Company)’, 이른바 SOC. 얼핏 실존하는 석유메이저 SoCal을 연상시키는 이름을 가진 이 회사의 유정에 엄청난 화재가 발생했다. 불을 끌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더 큰 불을 일으키는 것, 즉 폭발을 통해 산소를 흡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지에는 폭탄이 없었고 바로 SOC 본사에 충격에 극도로 민감한 폭약인 니트로글리세린만이 있었다. 회사는 그것들을 운반하기로 하고 도시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폭약을 운반할 운전사를 모집한다. 그들은 죽음의 공포를 대가로 2천 달러라는 거액을 제시한다. 몰려든 사람들 중에서 마리오(이브몽땅)를 포함한 네 명이 선발된다.

새벽의 여명을 뚫고 각자 두 명 씩 두 대의 트럭에 나눠 출발하는 이들. 들쑥날쑥 패인 시골도로를 덜컹거리며 달리니 긴장감이 이만저만 아니다. 급회전 길에서 낭떠러지 옆에 세워진 낡은 나무발판을 길 삼아 차를 돌리는 장면은 보는 이들마저 가슴을 졸이게 한다. 가는 길에 떨어진 큰 바위의 폭파장면 역시 볼거리.

이 영화를 진정 명작으로 만드는 요소는 그러한 극한상황에서 사람들이 제각각 보이는 희생정신, 비겁함, 광기(狂氣), 나약함, 용기 등이 어떻게 상호반응하며 어떠한 결과를 낳는가를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각 때문이다. 영화는 마치 이 네 사람을 실험실 유리관에 넣어놓고 이리저리 움직이며 관찰하는 듯한 영상을 제공하고 있다.

결국 주인공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죽음을 맞이한다. 내가 강박관념처럼 갖고 있던 흑백영화 배우들의 현실이 그 영화에서는 그대로 실현되는 영화인 셈이다. 덕분에(?) 난 이 영화를 보면서는 적어도 배우들의 실제 죽음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단 한명 이브몽땅의 예전 죽음 소식이 잠깐 뇌리에 스쳤을 뿐이다.

공산당 당원으로 활동하는 등 정치적으로 급진적이었던 이브몽땅이었고 석유메이저 SOC가 주요 모티브로 등장하지만 이 영화는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영화는 아니다. 그보다는 ‘인간이 공포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라는 어쩌면 보다 근본적인, 인간성에 관한 질문을 성찰해보는 영화다. 그러한 대처방식은 때로 정치적인 분쟁의 극한상황에서 그 정치적 대의와 상관없이 개인별로 다양하다는 점에서, 오히려 세계관을 앞서는 그 무엇일지도 모르겠다.

이번 충무로 국제영화제 상영작으로 8월 31일 저녁 8시 프로로 중앙시네마에서 봤다.

Death Race 2000

자동차, 폭력, 전체주의 사회, 스포츠 등의 요소가 잘 배합되어 감상시간이 지루하지 않은, 잘 만들어진 B급 영화. 빠듯한 예산으로 ‘나름’ 괜찮은 영화를 만드는데 신통한 재주가 있는 Roger Corman 이 제작자로 나섰고 TV시리즈 Kung Fu 로 한창 주가를 높이고 있던 David Carradine 이 안티히어로적인 주인공 프랑켄스타인 역을 맡고 있다. 흥미롭게도 아직까지 무명에 불과했던 Sylvester Stallone 이 프랑켄스타인과 대결을 벌이는 Machine Gun Joe로 출연한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가까운 미래 – 2000년이 배경이므로 어쩌면 가까운 과거 – SF 영화가 의례 그렇듯이 배경이 되는 미국의 정치체제는 지금과 사뭇 다른 – 사실 생각해보면 그리 다르지 않을지도 – 전체주의 사회가 되어 있다. 성조기는 수십 개의 별 대신에 불끈 쥔 주먹모양의 로고 하나만 그려져 있고 대통령은 TV에 출연하여 정치적 프로파간다를 끊임없이 대중에게 주입한다. 그리고 대중에게 이 정치가가 선사한 당의정은 바로 사람을 치어 죽이면 포인트가 올라가는 국토종단 레이스, 이른바 “죽음의 경주(Death Race)” 다.

자동차 레이스를 위해 몸 자체가 튜닝된 프랑켄스타인을 비롯한 다섯 팀이 레이스에 참가하여 사람들을 죽이지만 – 첫 희생자의 가족에게는 상품도 주어진다 – 그들 스스로도 거리의 악동들의 속임수에 넘어가 죽음을 당하기도 한다. 한편 민주주의를 회복하고자 하는 정치집단의 우두머리 Thomasina Paine 은 자신의 딸 Annie 를 프랑켄스타인의 길 안내인으로 잠입시켜 그의 레이싱을 방해하고 종국에는 Death Race를 무산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정작 프랑켄스타인이 레이싱을 하려는 이유는 따로 있었고 그의 뜻을 안 Annie 는 그에게 협조한다.

이 영화에서는 정치적 프로파간다로써 스포츠의 활용이라는 비판적 메시지가 주제를 이루고 있지만 – 같은 해(1975) 나온 Rollerball 과 비교하면 흥미로울 듯 – 보다 흥미로운 것은 자동차에 대한 미국인들의 집착에 대한 신랄한 조롱이다. 자동차에 대한 미국인의 애정은 각별한 듯한데 그런 영향인 탓인지 유난히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카레이스 장면이 많다. 때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카레이스로 이어지기도 한다.

물론 극중에서야 ‘불가피한’ 상황이었음을 전제로 하고 있지만 선악을 떠나서 신나게 벌이는 한판 레이스를 보고 있노라면 문득 그들이 레이스를 위한 레이스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레이스를 피하는 보행인들의 날렵함이 보통을 넘어서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감탄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부조리한 상황에서 자유롭다. 아예 대놓고 사람을 죽이고 점수를 얻는다. 이것이 바로 B급 영화의 솔직함일 것이다.

항상 보다 숭고한 가치를 위해 불가피한 것임을 강조하면서 폭력을 향한 본능적 쾌락을 자극하는 메이저 영화의 이중적 행태보다는 – 예를 들면 진주만처럼 – 폭력 그 자체에 직진하고 그런 자신조차 거리낌 없이 조롱의 대상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물론 결론에서는 이러한 가치가 전복되고 말지만 그 순간에서조차 영화는 미국인의 개념없는 사고방식을 조롱한다. 속도감 넘치는 레이스 장면과 프랑켄스타인의 안티히어로적인 이미지, 블랙코미디적인 극전개가 감상 포인트다. 아이러니하게도 개봉 당시 드라이브인 극장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