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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록체인이 창조해낼 미래형 자본주의

비트코인(Bitcoin)과 다른 가상화폐들이 다른 어떤 것과도 비슷하지 않다면 그것들은 무엇인가? 가장 적절한 비유는 아마도 1990년대 불었던 인터넷과 닷컴 붐일 것 같다. 인터넷처럼 가상화폐 역시 혁신과 그것을 통한 그 이상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들은 어떻게 은행과 같은 말하자면 책임지는 주체가 없이 공공의 데이터베이스(“블록체인”)를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자체적인 실험이다. 예를 들어 그루지야는 정부기록을 보호하기 위해 그 기술을 쓰고 있다. 그리고 블록체인은 또 다른 실험들의 플랫폼이 되고 있다. 이더리움(Ethereum)을 예로 들자. 그것을 통해 우리는 비디오 게임에서부터 온라인 시장에 이르기까지의 온갖 프로젝트가 이 프로젝트들 내에서 거래되고 사용될 수 있는 토큰 – 필수적으로 사적인 금전을 발행하여 자금을 조달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한 ICO(initial coin offerings)들이 주의 깊게 관리돼야 하지만, 그것들을 통해 발명을 촉진할 수 있다. 팬들은 이를 통해 아마존과 페이스북과 같은 과점 체제의 기술 거인들을 겨냥하는 신생기업들을 흥하게 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What if the bitcoin bubble bursts?]

비트코인의 폭등세가 연일 계속되면서 사람들이 ‘도대체 비트코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계속 던지고 있다.1 개인적으로는 2년여쯤 전에 비트코인을 구입하여 지갑에도 담아보고 그 동전으로 외국 업체에 서비스 사용료를 지불해보기도 했지만, 정확히 어떤 원리로 구현되는지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2 “비트코인의 창시자가 일본인이다”, “사이버 채굴을 통해 돈이 모아진다”3, “일종의 암호통화(cryptocurrency)다”라는 사이버펑크스러운 소리만 들어도 머릿속은 혼란스러워진다. 그리고 “블록체인”이라는 개념을 접하게 되면 ‘이건 작정하고 진지하게 네트워크 공부를 하지 않고서는 기초개념조차 파악이 쉽지 않겠구나’하는 좌절감을 느끼게 된다.

어쨌든 능력이 안 되는 머리를 쥐어짜서 이 글에서 그 개념에 대한 윤곽만 잡아보자면 “블록체인”은 “블록”과 “체인”의 합성어다. 개별 블록들이 체인으로 이어져있다는 의미인데, 결국 데이터베이스가 통상적인 서버처럼 중앙서버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분산되어 있고 그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개념이다. 그리고 몇 년 전에 유행했던 개념인 “클라우드 컴퓨팅”에서 더 나아가 P2P식으로 분산된 모델로 만들어진 거대한 거래장부를 “블록체인”으로 보는 편이 이해가 쉬울 것 같다. 이 블록체인에 기록된 정보는 일방향으로 암호화되어있어 타인이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 볼 수 없다는 점에서 뛰어난 익명성과 보안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또 이더리움은 무엇인가? 이더리움은 블록체인 기술에 기반을 둔 클라우드 컴퓨팅 플랫폼 또는 프로그래밍 언어다. 인용문에서 서술하고 있는 것처럼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는 이더리움을 통해 조성된 사이버 환경에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 프로젝트 대부분에 자금이 소요될 것인데, 우리는 이 자금을 비트코인과 같은 토큰이 암호화폐를 활용한 ICO라 이름붙여진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조달할 것이다. 이 자금은 IPO(initial public offering)와 달리 자금의 소유주를 특정할 수 없다. 그리고 IPO처럼 자금조달을 규제할 수 있는 정부규제도 없을 것이다. 소유주도 규제도 없는 스타트업이 탄생한다는 의미다.

최초의 ICO는 2013년 Mastercoin에서 활용됐다. 이후 ICO의 인기는 치솟아 새로운 웹브라우저 프로젝트인 Brave의 ICO는 30초 만에 3천5백만 달러를 모았다. ICO는 IPO와 달리 투자회수가 훨씬 쉽다. 그들은 언제든 투자지분을 암호통화에서 법정통화로 환전하여 회수할 수 있다.4 개인적으로 흥미 있는 부분은 투자자의 익명성이다.5 이 시장이 앞으로 유의미할 정도로 성장하면 이제 자본주의 체제가 지니는 전통적인 자본가의 의미는 포스트모더니즘적으로 해체되는 체제가 될지도 모른다. 단일 자본가에서 주식회사, 그리고 LBO 펀드 등으로 끊임없이 질적으로 변해왔던 자본주의 기업이 익명의 사이버 자본가 연합으로 변신하게 되는 것이다.

블록체인이 주류기술이 되지못할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어쨌든 금융 시스템은 이미 질적인 전환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비트코인은 튤립도 금(金)도 아닌 다른 어떤 새로운 개념이다. 그리고 블록체인과 이를 활용한 이더리움 등은 또 다른 새로운 형태의 무엇인가로 진화할 것이다. ICO가 좀 더 일상화되면 각국은 자금세탁방지 등 익명화 방지수단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갈수록 초현실적이고 반(反)물질적으로 진화해가는 금융시장을 개별정부 혹은 국제금융기구 등이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을 것인지, 또는 노동자는 앞으로 쟁의를 할 때 어떤 자본가에 대항해야 할 것인지 등에 상상을 하다보면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전 세계 노동자가 단결하는 동안 전 세계 자본가는 분산되고 있는 것인가?

중국 사회주의의 증표(證票) 소비

계획경제 체제에서 소비는 ‘증표를 지참한 물건 구매’를 통해 이루어진다. 소비자는 화폐가 아니라 직장에서 분배받은 증표를 주고 해당 물건을 구입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증표 소비’다. 당시에 사용되었던 각종 증표는 120여 종에 달했다. 당시 쓰촨성에서 소비가 실제로 이루어지는 방식을 보여주는 유행어가 있었다. 이를 보면, 국가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국민이 ‘먹고 마시고 싸고 하는 것’ 전부를 관리한다. “계획은 천하를 통일했고, 이 정도 수준은 중국 역사상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일이다.”[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1, 조영남 씀, 민음사, 2016년, p211]

중국에서의 계획경제는 마오쩌둥 시대에 체계가 잡혔다. 계획경제에 대해서는 楊江의 ‘건국이래신대경제열점(建國以來十代經濟熱點, 1995)’에서는 “공유제 경제를 기초로 강제성 계획과 행정명령을 주요 수단으로, 위에서 아래로 고도로 집중된 계획 관리를 실행한 경제체제”로 규정하고 있다. 조영남 씨의 책에 따르면 1976년 전체 공업 생산량 중에서 국가 소유(전민소유제)가 80%, 집체 소유가 20%를 차지했으며, 유통 부문에서는 국영 상점이 90.3%, 집체 상점이 9.5%를 차지했다. 이렇듯 견고한 공유제와 계획경제가 결합하면 소비 역시 어느 정도 계획화되지 않을 수 없었을 테고 그 결과가 바로 ‘증표 소비’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화폐의 기능을 대체한 증표는 “필요한 욕망의 이중적인 동시 발생(double coincidence of wants)1의 필요를 줄일 효율적 수단”이라는 화폐의 기능을 공유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특정 소비에 특정 증표를 사용하게 함으로써 호환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중국의 계획경제가 이러한 증표 발행을 통해 소비를 가능케 한 것은 여러 원인이 있을 것이다. 우선 자본으로도 쓰일 수 있는 화폐의 발행이나 유통 없이 소비를 가능케 함으로써 자본축적을 용이하게 하기 위함이나 인플레이션 가능성을 줄일 수 있는 측면이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증표를 사용하면 생산량이 열악할 지라도 증표 발행량으로 소비를 생산량에 맞게 조절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증표는 사회주의 중국 건설 초기에 소비재 생산 대신 중공업으로의 자원 투입을 집중시키기 위해 고안된 유사 화폐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계획경제의 보조 수단이기는 하지만, 조악한 계획경제의 조악한 보조 수단이었다. 이러한 증표 소비는 – 그러할 생산물의 잉여가 많지도 않았겠지만 – “한계효용의 법칙”과는 무관하게 필수품 수요에 대한 단순한 양적 매칭이었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얼핏 자원배분이라는 시장의 기능 없이도 생산과 소비가 유기적으로 매칭될 것 같지만, 다시 증표는 어떻게 분배될 것인가 하는 자원배분의 딜레마가 발생한다. 그리고 그 딜레마는 관료와의 유착으로 해결했을 것이다.

물론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도 이러한 증표 소비의 영역은 존재한다. 정부가 특정 소비재의 소비를 장려하기 위해 발행하는 바우처(voucher), 기업이 자사의 소비를 장려하기 위해 발행하는 상품권, 특정 지자체에서 지역사회의 경제를 독려하기 위해 발행하는 지역 화폐 등 다양한 증표가 존재한다. 소비 행태가 고도화되는 사회일지라도 특정한 목적에 따라 이렇게 증표를 사용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증표의 기능을 하는 소비에 대한 자격증 발급은 특히 주택과 같은 생애소비재적 성격을 가진 소비재에서는 특히 적용 가능한2, 또는 사안에 따라서 정책적으로 적극 고려해야 할 보조수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독일과 스위스의 대조적인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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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2-euro” by This photo (C) Lars Aronsson – Own work. Licensed under CC SA 1.0 via Wikimedia Commons.

가상의 독일마르크에 비해 유로가 상대적으로 싸다는 사실은 독일에게 이로운 점이다. 독일의 재정적 질서 이외에도 통화 연합에는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그리스 등 모두 최근의 독일만큼 성공적이지는 않은 나라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유로의 힘에 영향을 주었고, 독일의 수출업자에게는 이로운 것이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수출은 독일 경제의 주요 축이다. 강한 통화는 국제시장에서 생산품 가격을 높임으로써 독일 수출업자를 어렵게 할 것임이 거의 확실하다. ING의 이코노미스트 Carsten Brzeski는 유럽중앙은행(ECB)의 통화 정책이 더 약한 나라를 도와주는 경향이 있으며 이 정책 경향이 독일과 같은 수출국에도 도움을 준다고 말했다. “통화는 당신 자신의 통화를 가지고 있는 것보다 언제나 절하되어 있는 상태일 것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지난 한 해 동안의 ECB의 순응적인 통화정책 덕택에 더 싸지는 단일통화로 인해 독일 경제에 250억 유로가 더해졌을 것이라고 예측했다.[How Does Euro Membership Help Germany?]

유로존에서 탈퇴해야 할 나라는 그리스가 아니라 독일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는데, 바로 경제력이 질적으로 차이 나는 국가들이 단일통화를 쓸 경우 위와 같은 상황이 발생하는 것에 대한 우려 때문일 것이다. 수출을 많이 하는 나라의 경우 통화가 비싸지고 이로 인해 수출경쟁력이 떨어지는 상황이 자연스러운 것인데 독일의 경우 단일통화권에서 그런 상황에서 자유롭다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혁신적으로 재분배가 되지 않은 한, 독일의 경제선순환과 경제력이 약한 나라들의 경제악순환이 구조적으로 고착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인 셈이다.

금요일에 스위스의 중앙은행인 스위스국립은행(SNB)은 2분기 200억 스위스프랑(200억 달러)의 손실을 발표했다. 금년의 좋지 않았던 첫 석 달에 연속하여 SNB의 2015년의 현재까지의 손실은 501억 스위스프랑이라는 터무니없는 금액에 달하는데, 이는 스위스 GDP의 7.5%에 해당한다. SNB의 손실은 매우 크지만 예상 못한 것은 아니다. 몇 년간, 은행은 스위스프랑이 1유로에 1.2 프랑으로 2011년 9월 세팅된 환율캡 위로 올라가지 않도록 외환시장에 개입해왔다. 1월에 ECB가 1조1천억 유로에 달하는 양적완화 프로그램을 가동하자 SNB는 돌연 통화 페그 정책을 포기했다. 이로 인해 즉각적으로 프랑의 가치는 유로에 비해 20% 이상 상승하였다.[Switzerland’s central bank makes a massive loss]

또 하나의 수출 강국 스위스가 단일통화권에 합류하지 않아서 얼마만큼의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기사다. 통화정책의 자주성은 견지하고 있지만 양적완화와 같은 비정상적인 조치에는 버텨낼 재간이 없었던 스위스는 결국 올 1월 통화 페그를 포기했고 그 대가는 매우 비쌌다. 수출업자는 경쟁력 악화로 인해 피해를 입었고 – WSJ글에 따르면 업체의 1/3 정도가 영업 손실이 예상된다고 – SNB는 5,500억 달러에 달하는 외환보유고에 엄청난 환차손을 감내해야 했다. 다시 돌아가서 독일은 이런 혼란을 겪지 않고 싼 유로의 단물을 빨아먹고 있다.

유로존이 어떤 식으로든 수술이 있어야 하는 상황이다.

스위스 프랑을 둘러싼 일련의 사태에 대한 斷想

최근 스위스 프랑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몇몇 사태는 제3자의 시각으로 관전하기에는 – 몇몇 실패자에게는 무척 고통스러운 상황이었겠지만 – 매우 흥미로운 광경이었다. 자국 통화를 유로에 고정시켜놓거나 기준금리를 마이너스 수준까지 내려 실질적인 통화 보관료를 받는 등 환율 방어에 힘썼던 스위스가 “기습적으로” 페그 정책을 포기한 후 스위스 프랑의 가치가 급격히 올라갔고, 이로 인해 몇몇 주요투자자들이 천문학적인 손실을 기록하여 펀드를 접는 등의 일련의 혼란스러운 사태가 요 며칠 파노라마처럼 펼쳐졌기 때문이다.

단기적으로는 유럽중앙은행의 양적완화 실시 계획을 눈앞에 두고 스위스 중앙은행이 내린 결정이 원인이지만 중장기적으로는 투자자들의 안전자산 선호, 스위스의 정치적 특수성, 스위스의 무역구조 특성, 유럽의 경제상황 등이 다층적으로 맞물린 상황이 이번 혼란의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아직까지 당사자나 언론이 투자자들의 손익계산서를 계산중인 모양이지만 일단 가장 극적인 실패를 맛본 이는 스위스 프랑의 약세에 돈을 걸었다가 주요 펀드 하나를 통째로 잃어버린 에베레스트 캐피탈이라는 회사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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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unt Everest as seen from Drukair2 PLW edit” by Mount_Everest_as_seen_from_Drukair2.jpg: shrimpo1967
derivative work: Papa Lima Whiskey 2 (talk) – This file was derived from: Mount_Everest_as_seen_from_Drukair2.jpg .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이들의 극적인 패배는 러시아의 경제상황에 올인했다가 역사적인 패배의 사례가 되었던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제로섬 게임에 가까운 환율변동에 돈을 걸었다가 몇몇 투자자들이 참패를 맛본 이번 사태로 말미암아 또 다시 펀드 자본주의의 투기적 성격이 도마에 오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실패의 배경이었을 단기적 성과주의, 높은 레버리지, 투기적 투자성향 등이 펀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이들의 전형적인 레퍼토리다. 하지만 정작 헤지펀드들이 그러한 비판을 감수하면서 거둔 성적은 무척 초라하다.

이는 펀드 투자 자체가 제로섬 게임은 아니지만 그 업계도 지나친 경쟁으로 말미암아 진작 뜯어먹을 시체도 별로 없는 레드오션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보다 더 우월한 위치를 점하고 있을 투자자들의 인내심의 주기는 점점 더 짧아진다. 펀드 매니저로서도 못해먹을 노릇일 것이다. 이러한 추세를 반영하듯 일부 탑클래스의 매니저들은 영구자본의 비중을 늘리거나 투자자에게 환매가 아닌 다른 투자자로의 주식 매도 등으로 펀드를 빠져나가게 하는 등의 방법으로 펀드 투자의 안정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사실 지속적으로 뛰어난 성적을 거두고 있는 극히 일부의 매니저에게나 가능한 시도일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펀드 투자가 이렇게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투자수익을 선호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펀드 자본주의는 투기 자본주의’라는 선입견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자본주의 체제 건전화의 한 대안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볼 수도 있을 것이다. 펀드가 레버리지보다는 안정적인 영구자본을 투자재원으로 삼는다면 적어도 이번처럼 하루아침에 에베레스트에서 수직 낙하하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폴 크루그먼의 책을 읽고 든 상념 트윗 모음

기업은 돈이 시중에 많이 풀렸다고 해서 가격을 높이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제품의 수요가 증가하기 때문에, 가격을 높여도 매출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다고 기대하기 때문에 가격을 인상하는 것이다.[폴 크루그먼 지음, 박세연 옮김, 지금 당장 이 불황을 끝내라, 엘도라도, 2013년, pp214~215]

# 이 설명은 시중의 높은 유동성이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진다는 통화주의자의 주장에 대한 반박이다. 하지만 통화주의자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현대의 부채 경제에서 유동성과 낮은 금리는 소비주체가 높은 가격에 너그러워지게 한다. 대표적으로 부동산 거품.

# 통화주의자의 오류는 유동성을 가격 인상의 거의 유일한 원인으로 보는 아집이다. 일본은 엄청난 유동성에도 불구하고 디플레에 빠질 정도였다는 반증이 존재함에도 그러하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재정건전성 요구와 결합하면 질리지도 않고 반복되고 이게 먹힌다.

# 그리고 통화주의자와 재정건전론자의 이론적 지원을 받는 정치인이 요구하는 것은 낭비성 예산 삭감인데 대부분 국방예산과 같은 그들의 이해와 직결된 예산이 아닌 공립학교와 같은 필수적인 공공서비스에 대한 공격이다. 홍준표는 이런 도움 없이도 병원을 날렸고.

# 개인적으로 공공서비스에 대한 이런 이론적이거나 실제적인 공격은 단기간 내에 끝나지 않을 것이라 보는데, 증세는 인기낮은 선택이고 기본적으로 예산체계가 경직성 복지 예산의 증가로 말미암아 지속적으로 재정압박이 증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까이고 또 까이고.

인도경제의 관전 포인트 하나

그러나 아시아에서 세 번째로 큰 경제권인 인도는 어느 나라보다 위험하다. 지난 2년 동안의 경제 관련 뉴스는 실망스러웠는데 성장률은 4~5%로 떨어졌다. 이는 2003~2008년의 호황기의 반절이다. 더 떨어질 수도 있다. 소비자 가격 인플레이션은 여전히 10%로 고정되어 있다. [중략] 외국자본에 대한 인도의 의존도 역시 높은 상태며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경상수지 적자는 2012년 말 GDP의 7% 정도 까지 치솟았다. 금년엔 4~5%에 머물 것으로 예상하고 있지만 말이다.[Why India is particularly vulnerable to the turbulence rattling emerging markets]

서양의 주요한 경제지에는 최근에 연일 인도 관련 소식이 주요기사로 올라오고 있다. 이들 언론은 대체적으로 이 나라의 경제 위기에 대한 단기적인 원인을 미국 경제지표의 호전, 이에 따른 美연준의 양적완화 축소 기조 가능성, 그리고 연쇄적인 서구자본의 인도에서의 자금회수를 들고 있다. 이로 인해 인도 및 주변국들의 통화가 급락하는 등의 즉각적이고 심각한 부작용이 언론의 눈길을 끌었던 것이다.

유동성이 풍부한 통화로 신흥국에 투자하는 소위 “캐리트레이드”의 주된 통화는 한동안 일본의 엔貨였다. 미국이 신용위기에 직면하여 연준이 일본 당국의 해법과 비슷한 저금리 기조와 통화팽창으로 대응하자 美달러가 새로운 캐리트레이드의 통화가 되었다. 결국 신용위기의 발단이었던 풍부한 유동성에 따른 서브프라임모기지 대출 사태가 지구적인 범위에서 확대된 셈이고 인도가 그 주요 대상국이었다.

값싼 통화가 더 높은 수익률을 보장해주는 곳으로 흘러들어가는 투자는 기발하다고 할 것도 없는 투자기법인데 역사적으로 볼 때 주기적으로 그 위험이 파괴적인 규모로 반복되고 있음에도 또한 투자자는 주기적으로 그 위험을 간과하며 그 불구덩이에 뛰어든다. 특히 인도의 경우에는 2008년 이후 성장세가 정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위험이 더한 것으로 여겨진다. 결국 빚의 상환재원이 빚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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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Dealogic Project Finance Review(1H 2012)

이런 인도의 상황과 관련하여 한 가지 특이점이 있다. 위의 표는 최근 5년간 전 세계 민간투자사업(PPP, Public Private Partnership)의 지역별 추이다. PPP는 정부에서 필요한 인프라시설을 건설할 때 민간의 자금을 빌리는 방식으로 통상 경제성장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하지만 재정이 부족할 때 쓰는 방식이다. 즉, PPP방식으로 투자를 하면 단기적으로는 단기적으로 재정도 건전해지고 경제성장률도 올라간다.

표를 보면 인도의 PPP 활용도는 워낙 압도적이어서 Dealogic이 아시아와 별개로 떼놓았을 정도다. 경제성장 여력이 있던 2008년까지 미미하던 인도의 PPP투자는 2011년에 이르러서는 압도적으로 증가한다. 역시 경제성장률을 위해 인프라 투자를 주도했던 중국이 재정을 활용한 것과 달리 인도는 민간자본을 이용했고, 이는 결국 미래의 빚으로 이연된다는 점에서 인도의 경제상황은 생각보다 더 위험할지도 모른다.

일본 엔화 하락으로 돈 번 사람들, 그리고 그 원인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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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Y Banknotes” by TokyoshipOwn work.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조지 소로스 하면 1992년 파운드를 방어하려는 영국중앙은행과 맞장을 뜬 “환투기꾼”이자,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의 위기를 사유하는 “철학자”라는 독특한 삶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인물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최근 이 억만장자 철학자가 일본 엔의 하락세에 베팅하여 파운드 전쟁에서의 노획물에 버금가는 10억 달러의 이익을 거둔 사실을 – 물론 물가가치를 고려하면 그때의 혁혁한 전과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 보도했다.

엔화의 하락에 베팅하는 것은 소심한 이가 할 짓이 못된다. 일본은 몇 년간 자신의 화폐를 절하하여 경제와 주식시장을 재점화하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해 왔다. 그 기간 동안 엔화와 일본 국채에 대해 숏포지션을 취한 많은 이들이, 화폐와 채권이 오히려 상승함에 따라 두들겨 맞았다. 일본은 월스트리트에서는 “과부 제조기”로 알려지게 됐다.[중략]

소로스의 예전의 영국 파운드 하락에 대한 매도와 달리, 소로스와 다른 헤지펀드들의 최근의 움직임들은 일본이나 엔화를 불안정하게 만든 것 같지는 않은데, 이는 부분적으로 일본 엔화의 거래가 투자자들이 좌지우지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광범위한 시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일본의 부채는 국내 투자자들이 가지고 있고, 비관적인 투자자들의 그 나라에 대한 숏포지션이 그리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 또 다른 이유다.

동시에, 소로스의 파운드에 대한 술수는 영국중앙은행의 정책들에 반하는 것이었던 반면, 지금의 헤지펀드들은 디플레이션을 극복하려는 일본중앙은행의 정책이 성공하길 기원하면서 거래를 했다.[U.S. Funds Score Big by Betting Against Yen]

그러니까 소로스를 비롯하여 이번에 큰돈을 번 투자자들은, 1992년의 전투에서와 같이 정부의 의지에 반하는 묘수를 부릴 필요도 없고, 그렇기 때문에 일본정부로부터 욕을 먹을 일도 없었다. 그들은 떨어지는 엔화의 급류에 몸을 맡기고 돈을 벌어들이는 재미를 만끽하기만 하면 됐다. 문제는 WSJ기사에서도 말하듯 내리막이 생기는 시점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엉뚱한 때에 몸을 던졌다가는 과부만 제조되기 때문이다.

엔화 약세의 원인은 무엇일까? 그 원인을 아베 정권 등장과 “무제한적 양적완화레토릭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하지만 WSJ도 지적하듯 이전 정권도 그런 시도를 했지만 지금처럼 성공적이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일본 시티은행의 다카시마 수석 애널리스트는 IMF의 새로운 환평가 모델에 근거해 적정 환율이 1달러당 95엔이고 지금 그 시점으로 복귀하는 것이라 분석하고 있다. 아베는 한 계기일 뿐이란 것이다.

다카시마는 그 예로 2001년에서 2006년에도 일본은행이 양적완화를 실시했지만 외환 시장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 사례를 들고 있다. 당시 일본의 양적완화를 무력화시킨 것은 Fed의 금리인하와 이에 수반된 달러 약세였다. 흥미롭게도 지금의 Fed 수장인 벤 버냉키는 당시 일본이 과감한 통화정책을 통해 불황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논문을 썼다는 점이다. 따라서 미국은 현재 호의적인 침묵을 지키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환율에 관해서 할 말이 많을 폴 크루그먼은 한발 더 앞서가 “환율전쟁”이라는 표현은 “순전히 오해(it’s all a misconception)”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또 다른 저명한 경제학자 베리 아이켄그린의 주장을 빌어 1930년대의 상황조차 최악의 경우에라도 경쟁적인 환율 약세를 통해 “최초의 지점(where they started)”으로 회귀한 것이며, 이번의 “환율전쟁”이라 불리는 것도 결국에는 “순이익(a net plus)”으로 남을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벤 버냉키나 폴 크루그먼이나 “환율전쟁은 근린궁핍화 정책이다”라는 전통적인 주장에서 동떨어져 있는데, 과연 그들의 예언이 어느 정도나 현실에서 실현될지는 아직은 미지수다. 폴 크루그먼은 1930년대 당시 상황 악화의 원인을 금본위제 탈피에서 들고 있지만 어쨌든 당시의 상황을 “전쟁”으로 표현하는데 무리는 없고, 플라자합의도 넓게 봐서는 “환율전쟁”의 파편이 심각한 외상을 입힌 사례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p.s. 현재의 “환율전쟁”이 서로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이코노미스트의 긴 글이 있으니 흥미있으신 분은 읽어보시도록…(난 안 읽었다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