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대안경제

“사회적 소유”에 대한 단상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는 인간이 조직화된 사회의 의지에 따라 그에 반응하도록 경제적 자극을 정하는 것이 가능하게 한다. 이 경우에 인간 행동의 경제법칙은 인간이 의도한 대로 작용한다. 그 외에도,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는 인간 행위의 상호작용 양식을 목적에 맞도록 계획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 결과 인간 행위의 상호작용 법칙 또한 인간의 의도대로 작용한다. 마지막으로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는 생산관계의 적대적 성격을 제거하고, 경제법칙 작용의 가능성을 사회 전체의 의도대로 이용하는데 반대하는 특권계급으로 인한 장애를 제거한다. 이렇게 해서 사회주의적 생산양식은 사회 발전과 경제법칙의 작용을 조정할 수 있게 된다.[정치경제학, 오스카르 랑게 지음, 문태운 옮김, 이제이북스, 2013년, p90]

이 문단을 읽고 드는 의문은 여기서의 “인간”은 개별의 합으로서의 인간인가 사회 총체로서의 인류인가 하는 점이다. 소위 ‘집단의식’ 혹은 ‘집단행동’이라는 개념에서 생각해보자면 인간은 개별적인 이성과 감성을 가진 인간의 행동과는 다른 행태를 보이기도 한다는 점은 이미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개념이다. 그 집단 역시 일국의 차원인가 전 세계적인 차원인가에 따라 그 행태가 또 천차만별인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한 집단의 민족주의적인 감성일 것이다. 예로 어느 국가에서 “사회적으로 소유”한 생산수단을 극단적인 민족주의적인 의도로 활용했을 경우 미치는 영향이 “적대적 성격이 제거”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사회적으로 소유된 생산수단을 ‘기후변화 저지’라는 인류보편적인 – 이마저도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 목적으로 사용한다는 이상적인 상황이 랑게가 그리고 있는 적대적 성격이 제거된 사회적 소유의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그간의 일국 사회주의 체제 혹은 국가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사회적 소유”를 가장한 권위주의적인 국유화와 그 정점에 있는 정치 및 경제 지도자의 – 일종의 사회적 생산수단 펀드의 펀드매니저 – 관리자로서의 이익 전용(轉用) 혹은 횡령으로 인한 폐해도 만만치 않은 지라 “사회주의적 생산양식”의 구체적 운용에 대한 갖가지 의구심은 여전히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는 상황인 것 같다.

“의식적 지배”에 대한 단상

개인의 현실적 정신적 부 Reichtum는 전적으로 그의 현실적 관련들의 풍부함 Reichtum에 달려 있다는 것이 위에 의거하여 명백해진다. 이를 통하여 비로소 개별적 개인들은 여러 상이한 국민적 또는 지역적 한계로부터 해방되며, 전세계의 생산과(또한 전세계의 정신적 생산과도) 실천적 관련을 맺게 되고, 또한 세계 전체의 전면적 생산(인간의 창조물)을 향유할 능력을 획득하는 상태에 놓여진다. 이 공산주의 혁명을 통하여 전면적인 의존성, 즉 개인들의 세계사적 협업의 이 최초의 자연 성장적 형태는, 인간 상호간의 작용으로부터 창출되었지만 지금까지는 인간에게 완전히 낯선 힘으로서 외경시되어 인간을 지배해왔던 이러한 힘들에 대한 통제와 의식적 지배로 바뀌게 된다.[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1 중 독일이데올로기, 번역 최인호 외, 감수 김세균, 박종철출판사, p218]

맑스와 엥겔스가 “외경시되어 인간을 지배해왔던 낯선 힘에 대한 의식적 지배”를 말할 때의 그 힘이란 무엇일까?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독일이데올로기’에서의 ‘이데올로기’는 당시까지 인민의 의식을 지배해왔던 지배계급의 관념론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바로 그 관념론일 수도 있고, 그 관념론에 의해 온존하고 있던 억압적인 생산관계일수도 있다. 그리고 또한 인간을 무력하게 만들었던 자연일 수도 있다. 실제로 인간은 생산력이 발전함에 따라 풍부해진 정신력과 물질문명을 통해 자연의 변덕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고 그에 따라 더 많은 자원을 채취하고 더 많은 주거지를 확보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자연에 대한 “의식적 지배”를 통한 이득은 사적소유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에서는 당연하게도 자본의 차지다. 현실 사회주의 시스템에서는 이 이득이 좀 더 많은 계급과 공유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체제조차 “의식적 지배”는 자연의 파괴를 지양해야 한다는 체제적 고민은 없었다. 그리하여 체제를 불문하고 무의식적으로 진행된 – 왜곡된 형태의 – “의식적 지배”의 결과로 자연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파괴되고 있다는 증거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손해에 대한 비용은 이득의 향유자가 치르지 않기에 – 부(負)의 외부효과 – “세계사적 협업”은 말뿐인 공허한 외침이 되고 있다.

역설적으로 구(舊)사회주의권에서 이 편견은 더 두드러진 양상을 보였다는 것이 저자의 암시인바, 그들은 인민에 의한 자연정복 또는 자연개조를 사회주의의 승리로 보았다는 정황이 책의 곳곳에 제시되고 있다. 중국의 수많은 댐건설, 소련의 대규모 목화재배 농장들은 이러한 비극의 증거이다. 물론 자본주의 국가들이라고 시장 효율적으로 물을 활용한 것은 아니다. 그들의 탐욕스러운 도시는 먼 곳의 물을 끌어다 분수 물로 써버리는 천박의 극치를 보여준다. 자본주의는 ‘무정부적’으로 사회주의는 ‘계획적’으로 낭비했을 따름이다.[‘강의 죽음’을 읽고]

다만,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경제체제로 자리 잡고 있는 와중에도 인류는 “탄소중립”이라는 구호를 통해 “세계사적 협업”의 실마리를 찾으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유럽 경제가 – 특히 독일 –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의 와중에 유럽이 값싼 러시아의 가스에 마약처럼 중독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그들이 외쳐왔던 재생에너지를 통한 “탄소중립”도 그럴싸한 화장술이었음이 드러났다. 인류가 “낯선 힘을 의식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풍부함 Reichtum”에 기반한 “세계사적 협업”이 필수적인데 그 풍부함이 허상으로 드러나 약하게나마 유지되었던 “탄소중립”이라는 협업도 위기에 처할 것 같은 위기감이 생기고 있다.

국제자본주의인터내셔널은 테크자이언트를 길들일 수 있을까?

G7 국가들이 이번 주 콘월의 정상회담에서 서명할 협정은 두 가지 부문으로 나뉜다. 첫째, 여러 나라에서 영업하는 다국적 기업들은 그들이 어디에서 상품을 팔거나 서비스를 제공하든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는 특정 국가에서 어떤 기업이 수십억 달러를 벌지라도 그들은 그곳에서 매우 적은 세금만을 내곤 했다. 이것은 그들이 더 낮은 세율로 더 많은 이윤을 취하는 곳에 본사를 두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중략] 그러나 G7 협정에 따라 매출 대비 10%의 이윤을 취하는 어떤 나라 정부라도 이들 기업에게 과세할 수 있게 된다. [중략] 협정의 두 번째 부문은 15%의 국제적 최저 법인세율이다. 이것의 목적은 각국이 다국적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세율을 내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중략] 아일랜드는 작은 나라들의 사정을 경청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은 EU의 멤버이고 협정의 구속을 받는다.[G7 tax deal: What is it and are Amazon and Facebook included?]

영국의 한 해변 마을에서 G7 회담이 열리고 있다. 그 와중에 G7 회의석상에서는 미증유의 세금 “혁명”이 진행 중인데 팬데믹 와중에 우리나라 대통령이 초대를 받은 특별한 의미가 있기 때문인지, 우리 매스미디어의 관련 소식은 코로나19 관련이나 문 대통령의 동향에 집중되어 있다. 아마도 특별히 세금 협정의 의미에 무관심하거나 또는 그 의의를 싫어하는 매체이기 때문일 것이다.1 여하튼 개인적으로는 이 뉴스가 특히 반가운 소식인 것이 몇 년 전에 이 블로그에 ‘전 세계에 단일세율을 적용하면 어떨까’라는 부질없는 희망사항을 끼적거린 적이 있는데, 이제 그것이 현실에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HedgeFund.net은 중요한 아이디어를 하나 제공하고 있다. ‘전 세계 단일세율’이 바로 그것이다. 현실적으로 지금 각국은 낮은 세율과 낮은 임금을 쫓아 부나방처럼 옮겨 다니는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경쟁적으로 세율을 내리고 있는 형편이다. [중략] 그러나 결국 조세피난처와 같이 극단의 세율을 제시하지 않는 이상은 그들의 자본유치활동은 결국 자본이 거쳐 갈 하나의 정거장을 제공하는 행위일 뿐이다.. 이럴 바에야 아예 주요 국가들이 단일세율로 자본유치에 대해 일종의 공정경쟁을 선언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마치 쿄토 의정서에서 CO2 감축을 위해 의무감축량을 정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또 이래놓고 미국이 빠져나가면 우스운 꼴이 되겠지만 말이다.[전 세계가 단일세율을 적용하면 어떨까?]

이번 협정이 각국의 세법에 적용이 된다는 그동안 각국 세무당국을 조롱하며 탈세를 일삼던 테크자이언트들이 이제는 어느 정도 합리적인 금액의 세금을 납부해야 할 것이다. 그동안 천문학적인 매출을 달성할 동안 “稅테크”를 통해 쥐꼬리만큼의 세금만을 내는 동안 지구상의 자산은 점점 더 소수에 집중되어 왔고, 각국 정부는 부족한 재원을 국채로 발행하거나 엄한 국민에게 소비세를 더 걷는 방식으로 예산을 충당해왔다. 팬데믹 사태 이후 각국의 부채비율이 치솟고 중앙은행의 재정부실이 가속화되는 이 상황은 지속가능하지 않은 경제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이미 망한 시스템을 빚으로 메꾸고 있는 상황이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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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ijksvoorlichtingsdienstFlickr: G7 in het Catshuis, CC BY 2.0, Link

플랫폼 경제와 테크자이언트가 득세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이전 체제와 다른 가장 큰 특징중 하나는 “이동성(mobility)”다. 대규모 부지에 세워진 제조업 공장은 이제 우버나 카카오톡과 같은 애플리케이션 안에 집약적으로 담겨져 있어 그 안에서 생산, 유통, 노동자 통제가 가능하게 되었다. 영업범위와 기업 본사의 위치가 공간적으로 한계를 가지고 있던 과거의 기업과 달리 테크자이언트들은 언제든지 M&A, FTA, 각국의 세법과 유치정책 등을 활용하여 본사를 자유로이 옮길 수 있게 됐다.2 노동조합도 정부도 이렇게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자본의 이동성에 굼뜨게 대응하느라 넋을 놓고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여하튼 이번 협정을 가능하게 했던 가장 큰 배경은 역시 미국 행정부의 민주당 바이든 대통령으로의 정권 교체일 것이다. 테크자이언트 대부분의 CEO가 바로 미국인임에도 민주당으로서는 더이상 이들의 전횡과 오만함을 묵인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미재무부는 각국의 세율 인하를 통한 기업 유치 행태에 대해 “바닥을 향한 레이스를 종식(ending the global race to the bottom)” 시켜야 한다고 발언했을 정도로 이 협정에 대해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 결국 전 세계 최저 법인세율이 관철되면 여러 다국적 기업의 본사, 그리고 보다 중요하게는 세금이 미국으로 귀속되리라는 복안도 깔려 있을 것이다.

국제자본주의인터내셔널(!)이 테크자이언트를 길들일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플랫폼 노동자의 ‘노동자성 제거 시도’에 대한 투쟁

자본가는 노동일을 될수록 연장해서 가능하다면 1노동일을 2노동일로 만들려고 할 때, 그는 구매자로서의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판매된 이 상품의 특수한 성질은 구매자에 의한 이 상품의 소비에 일정한 한계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데, 노동자가 노동일을 일정한 표준적인 길이로 제한하려고 할 때 그는 판매자로서의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하나의 이율배반이 일어나고 있다. 즉, 쌍방이 모두 동등하게 상품교환의 법칙에 의해 보증되고 있는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동등한 권리와 권리가 서로 맞서 있을 때에는 힘이 문제를 해결한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의 역사에서 노동일의 표준화는 노동일의 한계를 둘러싼 투쟁, 다시 말하면 총자본(즉 자본가계급)과 총노동(즉 노동자계급) 사이의 투쟁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자본론 I상, Karl Marx 저,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1994년, p296]

자본론에서 처음으로 “투쟁”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구절이다. 결기가 차고 넘치는 “불온서적”치고는 꽤 늦게 투쟁이라는 단어가 등장했다는 느낌이다. 여기서 투쟁이라는 표현은 바로 냉철한 상품교환 시장에서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거래하는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에서 발생한 갈등을 의미한다. 시장에서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의 갈등은 통상 거래가격에 대한 갈등일 것이다. 이러한 갈등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보통의 거래는 상품의 양도 시점과 가격의 지불 시점을 일치시킨다. 그런데 어떤 상품은 – 대표적으로 노동력 – 이 양자 간의 시점이 일치하지 않아1 갈등을 초래한다. 또는 시점이 일치하더라도 사회적으로 상품의 가격이 과대추정 혹은 과소추정되어 갈등을 일으킨다. 역사적으로 노동력이라는 상품은 판매자인 노동자계급에 의해 그 가격이 과소추정되었다는 주장에 따라 노동시간의 단축 등의 투쟁을 촉발하였던 것이다.

결국, 노동자계급은 지속적인 투쟁을 통해 노동력을 시장에서 제값을 받는 상품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왔고 이에 따라 노동시간 단축과 유급휴가의 확보라는 결실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역사적 재평가에 급제동을 걸고 있는 조류가 새로 등장하고 있으니, 그것은 플랫폼 경제를 통한 노동자계급의 해체다. 이 조류는 자유로운 노동력의 소유자인 노동자를 플랫폼에 예속시켜 마치 봉건시대의 농노처럼 플랫폼의 농노로 후퇴시키고 있다는 것이 그리스 맑스 경제학자 야니스 바루파키스(Yanis Varoufakis)의 주장이다.2 노동시간은 노동자 각각의 특성에 따른 저마다의 노동시간이 아닌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으로서만이 가치를 측정할 수 있다.3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는 균일한 노동력의 보유자인 조직 노동의 투쟁을 통해서 보다 의의를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자본이 택한 전략은 이 노동자성의 해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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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klin HeijnenDSCF2049.jpg, CC BY-SA 2.0, Link

이미 서구국가에서의 제조업의 쇠퇴로 인해 이전과 같은 노동조직은 약화되어왔다. 그런 한편으로 우버와 같은 플랫폼 경제는 보다 적극적으로 노동자의 노동자성을 제거시켰다. 즉, 노동력의 구매자인 자본가는 노동력의 판매자인 노동자에게 ‘너는 더 이상 나에게 노동력을 파는 것이 아니라, 운행 서비스와 같은 용역을 파는 것이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운행 서비스라는 사용가치를 창조해내는 노동력이라는 교환가치를 보유한 노동자로부터 기적처럼 노동자성을 삭제함으로써 노동자를 개인사업자(혹은 자신의 자동차를 생산수단으로 하는 자본가)로 둔갑시킨 것이다. 이에 각국 사법체계가 어느 정도 플랫폼 노동자의 노동자성을 인정받는 성과도 얻어내고 있으나 아직도 자본은 아직 조직적 행동 역량이 떨어지는 배달 노동자와 같은 이들에게 노동시간이 아닌 업무성과라는 기만적인 노동관행을4 강요함으로써 노동시간을 둘러싼 투쟁을 피해가고 있는 상황이다.

정 지부장에 따르면 쿠팡노동자들이 사용하는 배송현황 애플리케이션은 휴게시간에도 접속할 수 있어 정규직 전환을 위해 쉬는 시간에도 배송을 계속하는 노동자들이 많다고 한다. 정규직 전환 과정에서 상대평가를 하는 터라 노동자끼리 배송물량 경쟁을 부추긴다. 또 최근 사측이 인센티브 정책을 변경하면서 그 기준을 알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인센티브를 받기 위해 무리하게 일하는 일도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정규직도, 계약직도] 쿠팡 노동자 2명 또 쓰러졌다, 매일노동뉴스, 2021년 3월 9일]

쿠팡이 노동자들을 직접 고용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대다수를 일용직으로 채용한다는 것이 함정이다. 쿠펀치라는 어플을 통해 매일 일용직을 ‘선별’ 채용하는 것이다. 쿠팡은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상시직을 제안하고 있다고 했지만 정규직이 아니라 계약직을 제안한다. 3개월·9개월·12개월 쪼개기 계약을 하고, 이렇게 2년을 다 채운 노동자 중에서 극히 일부만 ‘선별적으로’ 무기계약직을 시켜 준다.[쿠팡의 쪼개기 계약, 노조탄압 수단되나, 매일노동뉴스, 2021년 6월 10일]

사업자등록을 한 적도 없고 사업한다고 표방하지도 않았지만 배민·쿠팡·네이버 같은 플랫폼사업자가 미리 세금을 떼고 인적용역 사업자로 보고해 졸지에 ‘사업자’가 된 그들은 자신이 왜 사업자인지, 수입 대비 소득률은 왜 전문직보다 높은지 의아해한다. 플랫폼경제가 커지고 플랫폼노동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무시로 새로운 문제가 생기지만 정부와 국회는 문제의식도 고민도 없다.[고삐 필요한 ‘플랫폼경제’, 경향신문, 2021년 6월 10일]

이 기사들에서 알 수 있듯이 현대 기술문명이 이루어낸 새로운 업적은 애플리케이션을 통한 노동자성 제거, 극한경쟁을 통한 24시간이라는 제한된 노동시간 내에서의 노동력 쥐어짜기이다. 공장에서 일하는 조직화되고 집단화된 노동이 ‘9시 출근 5시 퇴근’이라는 집단적 행동을 통해 얻어낸 노동시간의 집단적 통제를 애플리케이션을 통한 인센티브 (혹은 패널티) 제공이라는 제도를 통해 노동자들의 자발적(?) 노동을 추출해내는 기적을 연출한 것이다. “기술 봉건주의”가 다소 과한 표현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봉건제의 농노가 토지에 예속되어 있던 것처럼 오늘날의 플랫폼 노동자는 애플리케이션에 예속되어 있는 노예일지도 모른다. 자본가와 노동자가 시장에서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거래했던 자본주의의 거래방식이 새로운 질적 국면에 접어든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시대를 어떻게 부르든지 간에 지금 투쟁을 촉발할 갈등은 증폭되고 있다.

이제 투쟁은 노동일에 대한 투쟁과 함께, 노동자성 제거 시도에 대한 투쟁도 함께 진행되고 있다.

탈원전에 대한 기득권의 저항에 관하여

조선일보는 2020년 1월 14일, 자유한국당 정유섭 의원실의 자료를 받아 <한수원, ‘1778억 이득’ 초안 보고서 19개월간 덮었다>라는 기사를 냈고 ‘월성 경제성 평가 조작’ 프레임을 본격적으로 내세우기 시작했다. 2019년 9월 6일 이후 현재까지 조선·중앙·동아·경향·한겨레·한국일보 6개 주요일간지 지면 기준 ‘월성 경제성 평가 조작’ 키워드가 들어간 기사는 총 326건인데 이 중 121건이 조선일보 기사였다. 타 언론사의 경우 25~50건이였다.[보수진영은 왜 ‘월성 1호기’를 겨냥했나, 공시형, 참여사회 202104, p8]

2012년 설계수명이 만료된 월성 1호기는 당시 행정절차를 무시하고1 7천억 원에 달하는 수리비를 들여 재가동시킨 이후에도 막대한 적자 운영이 이어왔다. 감사원은 2020년 10월 20일 산업통상자원부 공무원들이 이 시설의 경제성 분석에 관한 자료를 삭제하며 감사에 저항한 점이 문제라고 지적했고, 검찰은 자료 삭제를 이유로 산자부 공무원 3명을 기소하였다. 극우 매스미디어는 이 이슈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이 모든 것이 지향하는 바는 동일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바로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 전반을 흔들고자 함이다.


월성1호기는 운영 연장 이후에도 계속 적자였다(출처)

사실 현 정부의 최대 실책 중 하나가 대통령의 무리한 인사권 행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러함에도 대통령이 인선한 감사원장과 검찰총장이 지휘하는 부처가 정부의 공약 이행 과정에서의 갈등에 대해 이렇게 과하게 시비를 거는 상황은 한편으로는 권력에 대한 견제를 통한 자정작용이라고 좋게 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 원자력 기득권의 힘이 여전히 막강하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 선언적으로는 탈원전과 탄소중립을 표방한 현 정부의 정책 이행속도는 여러 면에서 지지부진한 편이다.

신재생 정책에 있어서도 초기에 새만금 등지에 대규모 태양광발전소와 풍력발전소를 설치하겠다고 나섰지만, 생각만큼 진도가 나가지 않고 있다. 그 와중에 ‘수소경제’와 ‘그린뉴딜’이라는 새로운 슬로건을 내세웠지만, 아직까지는 특별히 가시적인 성과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한 상황에서의 탈원전이 불러올 부정적 이미지를 – 전기료 인상 등 – 극우 매스미디어가 계속 부추긴다면 극단적으로는 임기말에 탈원전 정책 자체가 표류할 가능성도 있다. 부동산 보유세 강화 정책이 지자체 정권 교체만으로도 도전받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현 정부의 많은 것이 그렇지만 부동산과 탈원전 등의 개혁이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한 배경에는 그 방향이 잘못되었다기보다는 개혁이 철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동산 투기 규제는 양질의 사회주택 공급을 병행했어야 함에도 그 역할을 방기하여 가수요를 부추긴 정황이 있었고, 탈원전 역시 원전 폐쇄로 인한 공백을 신재생발전으로 재빨리 메워야 함에도 현재 수요공급의 조절이 적절히 이루어질지에 대한 회의감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불철저한 개혁이 초래할 결과는 결국 개혁에 대한 염증과 수구로의 회귀다.

앱 뒤에 노동자 있어요

혁신은 상층부에서의 고숙련의 소수 일자리들이 상대적으로 저숙련인 일자리들을 감시하는 전통적인 노동의 피라미드 구조를 교체하지 않는다. 대신 기술이 바꾸는 것은 자동화를 통해 대부분의 반복적인 작업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새롭고 보다 복잡한 작업을 계속하여 채워 넣음으로써 피라미드의 구성이다. [중략] 이러한 경향은 특별히 소프트웨어와 알고리즘이 실존하는 노동자들에 의해 수행되는 구체적인 서비스를 팔기 위한 (양방향 시장의) 플랫폼을 제공하는 긱이코노미(gig economy)에서 명백하다. 우버의 차량호출과 배달 앱이 아무리 세련됐을지라도 이 회사는 차량 운전자와 배달 노동자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The Revenge of the Precariat]

어쨌든 세상은 점점 더 편리해지고 있다. 전 세계적인 신종코로나바이러스 창궐로 말미암아 집밖에 섣불리 나가지 못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긴 하지만, 그러한 이동의 제약을 우리는 배민과 같은 첨단 배달앱을 통해 극복하고 있다는 점이 그러한 편리해지고 있는 세계의 한 단면이다. 그런데 이러한 편리성의 뒤편에는 바로 인용문에서 언급하는 저숙련 노동자들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우린 자주 잊곤 한다. 앱 이용 과정에서 그들을 마주치는 순간은 배달음식을 전해 받는 바로 그 짧은 순간에 국한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기둥 뒤에 공간 있어요”라는 유명한 유머 게시물도 있었지만, 이 경우를 그 표현에 빗대어 보자면 “앱 뒤에 노동자 있어요”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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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 FUKA from Yokohama, Japan – Cleaner [Suzhou Station / Suzhou], CC BY-SA 2.0, 링크

우버와 에어비앤비와 같은 “공유경제” 모델이 등장할 때만 해도 혁신이 노동의 피라미드 구성을 바꿀 것이라는 꽤 낭만적인 전망도 있었다. 노동과 자본을 공유하면서 세상은 좀 더 친환경적이 되고 계급의 피라미드 구성도 완화될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하지만 예전에 JP모건 체이스가 분석한바 에어비앤비와 같은 자본 플랫폼의 참여자는 플랫폼 참여를 통해 실질적인 소득증가로 이어진 반면, 우버와 같은 노동 플랫폼의 참여자에게는 플랫폼 참여는 소득증가의 수단이라기보다는 대체소득의 수단으로 기능할 뿐이었다. 즉, 노동 플랫폼에서 노동의 전통적인 피라미드 구성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조직노동이 비조직노동, 즉 프롤레타리아트가 프레카리아트로 전락하는 상황만 초래했다.

긱이코노미의 비조직노동은 점차 노동자성을 인정받으며 지위를 개선해가고 있지만, 아직도 상당수 노동자는 전통적 노조나 정부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화려한 조명을 받는 “혁신” 주도자들의 천문학적 부의 창출에 푼돈을 받아가며 기여하고 있다. 팬데믹으로 인해 전통적인 일자리에서 쫓겨나는 산업예비군들이 또 긱이코노미에 참여하게 되면 기존 노동자들의 지위는 더 열악해질지도 모른다. 우아한형제들은 최근 배달 노동을 통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광고를 냈는데, 실제로는 경쟁 증가로 인해 소득이 감소하는 추세여서 노동자들의 비난을 받고 있다. 노동의 피라미드는 상층부에 세련된 소프트웨어, 하층부에 불안정 비조직노동이 자리잡는 형태로 고착화되어가고 있는 셈이다.

어떤 주인의식 없는 주주에 관한 이야기 (한국 버전)

지난 4월 말, 40조 원 규모의 ‘위기극복과 고용을 위한 기간산업안정기금’을 설치하는 내용의 산업은행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중략] 코로나19 극복과 국민경제의 안정을 위해 혈세를 투입하는 만큼 기간산업기금 지원을 받는 기업에 대한 대주주의 책임 분담과 고용안정보장은 반드시 실현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번 산업은행법 개정안의 내용을 뜯어보면 지원대상 기업의 경영을 정부가 감독하거나 참여할 수 있는 권리는 전무하고, 고용유지 대책은 기업의 자율에 맡기고 있습니다. 일례로, 개정안은 기간산업기금이 출자 등 자금지원으로 보유하게 된 기업 주식에 대해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는다고 못 박고 있습니다.[코로나19 시대, 기업 공적자금 지원에 대한 단상, 이지우 경제금융센터 간사, 참여사회 통권 276호, 참여연대, p54]

지난번 ‘재난 자본주의’에 대한 글을 쓴 바 있는데, 위 글쓴이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번 구제 금융이 ‘재난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국가와 자본가와의 결탁의 한 사례일지도 모르겠다. 알다시피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기업은 노동자를 고용하여 산업을 영위하며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존재다. 기업의 규모가 커져온 와중에 이런저런 사유로 기업이 위기에 몰리면 실업이 증가하는 등 전체 경제에 악영향을 미친다. 그 악영향이 대공황이나 팬데믹 상황에서처럼 시스템을 통째로 흔들 경우 국가는 기업에 구제 금융을 실시하곤 한다. 문제는 국가가 자본가에게 통제권 및 재산권 제한 등 위기의 책임을 확실히 묻지 않을 경우, 자본가는 위기로부터 이득을 얻는 ‘재난 자본주의’ 혹은 “부자를 위한 사회주의”의 수혜자가 된다는 점이다.

제29조의4(기간산업안정기금의 관리ㆍ운용 및 회계 등) ⑤ 한국산업은행과 회사등은 제2항제1호에 따른 자금지원으로 인하여 보유하는 기간산업기업의 의결권 있는 주식(출자지분을 포함한다. 이하 이 조에서 같다)에 대해서는 의결권을 행사하지 아니한다. 다만, 제29조의5제2항에 따른 자금지원의 조건을 현저하게 위반하여 자금회수에 중대한 지장을 초래할 것으로 예상되는 경우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제42조(자금지원 등에 관한 특례) ① 제3장의2에 따른 자금지원으로 기간산업기업에 출자하는 경우 해당 기업은 「상법」 제344조의3제2항 및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제165조의15제2항에 따른 한도를 초과하여 의결권이 없거나 제한되는 주식을 발행할 수 있다.[개정 한국산업은행법]

위 조항을 근거로 산업은행은 보유주식의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게 된다. 즉, 「한국산업은행법」 개정안에서는 상법자본시장법에서 의결권이 없거나 제한되는 주식을 발행하는 경우 이 총수가 발행주식 총수의 일정비율을 초과하지 못하도록 규제하고 있는 조항 등을 무력화시켜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는다. 금융위의 보도 자료를 봐도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으려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참여연대의 비판처럼 “고용”을 위해 필요할 것으로 보이는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으려는 이유를 굳이 추측해보자면 여전히 산은의 골칫덩이인 대우조선해양, 대우건설 등과 같은 “자회사”를 더는 늘리지 않겠다는 의중이 아닌가 한다. 관치 논란도 싫고, 혹여 골칫덩이 자회사가 되면 처치도 곤란하니 의결권 없는 주식이나 보유하겠다는 심산이 아닐까?

이렇게 관(官)이 굳이 사기업을 통제하지 않으려는 의지의 이유는 개정안 제41조의 “한국산업은행 및 그 임직원이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 없이 업무를 처리한 경우 그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면제한다.”는 조항에서도 엿볼 수 있는 데, 그 유명한 ‘변양균 신드롬’이 생각나는 조항이다. 그간의 부실기업에 구제 금융을 실시하는 목표가 기업의 재무적 위기의 해소에 주로 초점이 맞추어져있었다면 이번 구제 금융의 목표에는 팬데믹으로 인하여 악화될 수 있는 고용상황의 안정이라는, 어찌 보면 재무상태 개선과 양립하지 않는 경우가 왕왕 있는 목표가 또 하나 있다는 점에서 많은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관(官)이 의결권도 갖고 싶지 않고 “중과실이 없으면” 책임도 면제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이런 관치에 대한 두려움은 비단 우리나라 정부만의 두려움이 아니기는 하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의 미행정부의 행태가 대표적인 사례인데, 당시 그들은 씨티그룹에 보통주가 아닌 우선주를 투입한달지, 말 그대로 “국유화”한 패니메와 프레디맥에 대해 실은 정부가 “후견체제(conservatorship)”의 역할만 할 뿐이라는 되도 않는 변명을 늘어놓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대(對)기업 통제기피증은 “국유화”라는 개념에 대한 공포감도 한몫했겠지만, 결국 관료 엘리트와 자본가들의 공동운명체적 행보를 통해 “재난 자본주의” 혹은 “부자를 위한 사회주의”가 구현된 전형적 사례인 것이다. 그 결과 위기는 현재까지 이연되었고 지난번 글에서 말한 것처럼 Fed는 또다시 엄청난 부실채권을 사들여 자신의 자산 건전성을 망가뜨리고 있다.

재무부는 250억 달러 규모의 정부 보유 우선주뿐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민간 주주의 우선주를 보통주로 전환하는 데 동의했다. [중략] 놀랍게도 재무부는 씨티에 자구책을 모색하라는 요구를 거의 하지 않았다. 보통주 전환을 통해 정부가 확보한 씨티 지분은 전체 주식의 3분의 1이 넘었다. 그뿐 아니라 연방예금보험공사에는 씨티그룹의 자회사이며 부보은행인 씨티은행의 영업을 정지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이 있었다.[정면돌파, 실라 베어 지음, 서정아/예금보험공사 옮김, 곽범국 감수, 알에이치코리아, 2016년, p302]

그런 “재난 자본주의”의 악몽이 산업은행에서 재연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