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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슨 지대(Rust Belt)”에서의 외침

출구조사에 따르면 미국 전역에서 트럼프는 힐러리 클린턴에 비해 58:37의 추세로 유권자의 70%를 차지하는 백인 유권자의 지지를 획득했다. 백인 유권자 중 대졸자가 아닌 이들의 유권자의 비율은 67:28이었다. 그러나 학위를 가진 백인 유권자들 사이에서는 49:45의 비율이었다.[‘Forgotten’ white vote powers Trump to victory]

이러한 눈에 두드러진 결과 때문에 결국 트럼프는 인종주의적 편견을 가진 저학력의 백인 유권자의 몰표 덕분에 선거에서 승리했다는 해석이 가능하게 되었다. 비록 어떤 트위터 사용자는 “모든 트럼프 지지자가 인종주의자인 것은 아니다”라고 항변했지만, 이 트윗에 다른 사용자가 “트럼프를 지지한 모든 이는 인종주의자에게 투표한 것이다”라고 응수함으로써 그의 볼멘소리에 돌직구를 던졌다.

성난 백인 유권자의 목요일의 외침은 오하이오와 인디아나와 같은 러스트벨트에서 가장 시끄러웠고 이전의 민주당 강세지역이었던 미시간이나 펜실베이니아와 같은 곳에서도 – 두 곳 모두 1988년 이래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승리한 적이 없다 – 작동하였다.[‘Forgotten’ white vote powers Trump to victory]

백인 투표자의 몰표가 더욱 극적으로 두드러졌던 지역은 전통적으로 민주당의 텃밭으로 여겨졌던 소위 “러스트벨트(rust belt)”였다. 트럼프는 위스콘신, 미시간, 오하이오, 펜실베이니아 등 오대호 주변 미국의 전통적인 공업지대인 러스트벨트에 위치한 5개주에서 승리함으로써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클린턴은 당초 이 중 적어도 위스콘신, 미시간, 펜실베이니아에서 우세할 것으로 예측됐었다.

트럼프는 선거기간 내내 인종주의적 언행을 지속했고 이로 인해 많은 양심적 유권자들과 유색인종을 마음 아프게 하였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트럼프의 이런 공격은 주로 경제적 박탈감을 가지고 있는 백인 유권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트럼프는 전략적으로 미국 정부가 정당에 불문하고 지속적으로 추진한 “자유무역협정” 때문에 일자리를 잃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 응답자의 93%가 미국에서 “너무 많은 제조업 일자리가 사라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 응답자의 74%가 “중국산 제조품”에 대해 비호감이었는데, “보수적” 응답자는 77%가 그랬다.
– 응답자의 96%가 “미국산 제조품”에 호감을 보였고, “공화당의 보수적 당원”중에서는 98%였다.
– 응답자의 92%가 “너무 많은 일자리가 외국으로 나가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86%는 “미국에서는 더 이상 어떠한 것도 만들지 않을 것 같다”고 걱정했다.
[“Free Trade”: The Elites Are Selling It But The Public Is No Longer Buying]

올 초 한 단체가 오하이오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의 결과다. 러스트벨트의 유권자들이 무역에 대해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결과다. 이 결과 당시 민주당 예비선거에서는 역시 “자유무역”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가지고 있던 버니 샌더스가 돌풍을 일으키며 미시간에서 힐러리 클린턴을 압도하였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민주당 유권자의 58%는 무역이 “미국에서 일자리를 없앤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미국에서의 제조업 일자리가 사라지고 있다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다. 제3세계로의 공장의 이전을 유혹하는 자유무역협정, 자동화 기술의 발전, 혁신을 거부한 미국 제조업의 경쟁력 상실 등등 원인은 다양할 것이다. 이 중 어느 원인이 더 주되게 지역의 쇠퇴를 초래하였는지는 계속 논의할 주제이지만, 당연히 정치적으로는 자유무역협정이 가장 공격하기 쉬운 대상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공격에서 외통수로 몰린 것은 단연 힐러리 클린턴이다. 그가 퍼스트레이디이던 지난 1994년, 남편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은 당초의 정치적 입장을 뒤집고 그 뒤 악명이 높아질 NAFTA에 서명한다. 힐러리 클린턴은 훗날 입장을 바꾸지만, 당시 이 협정에 찬성했다. 이번 선거에서도 그는 자유무역협정, 특히 TPP지지하였다. 러스트벨트의 유권자에게는 무척 인기 없을 공약이었다.

외교관계협의회의 Edward Alden은 “NAFTA는 상징적일 뿐이다. 다만 그 협정은 미국이 자신보다 훨씬 임금이 싼 나라와 맺은 최초의 대규모 협정이었다.”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즉, 이전부터 이미 러스트벨트를 포함한 미국의 제조업은 쇠퇴하던 중이었고, NAFTA는 그러한 경향을 상징하는 하나의 변곡점이 된 것이다. 따라서 힐러리 클린턴은 적어도 이 지역에서 가장 인기 없는 민주당 후보가 될 운명이었다.

어쨌든 이 지역의 실제 경제사정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 1999/2000년의 피크를 지난 후 이 지역의 소득은 – 아이오와를 제외하고 – 퇴보했다. 최근 다시 경제가 살아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오지만, 노동자들은 트럼프가 재건하겠다는 “위대한 미국(Great America)” 시절의 노동자의 고임금 정규적 일자리가 아닌 저임금 비정규직 일자리에 만족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이런 상황을 트럼프가 되돌릴 수 있을까?

트럼프는 집권 이후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제소하고 자유무역협정의 재협상에 나서겠다고 공약했다. 하지만 그의 자유무역에 대한 무모하리만큼 단순한 접근은 많은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다. 사실 미국은 러스트벨트가 쇠퇴하는 와중에 중국의 저가 제조품 덕에 고성장에도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지 않았던 골디락스 시절을 누렸었다. 트럼프의 현재 공약은 이 경제순환 고리를 대책 없이 끊는 자충수가 될 가능성이 있다.

미국의 노동계급들은 골디락스라는 환상 속에서 자신들이 일하던 일터를 멕시코나 아시아의 노동계급에게 빼앗겨버리고 줄어든 소득을 보충하기 위해 은행으로부터 빚을 얻고, 월마트에서 중국산 싸구려 상품을 구입하는 자기 파괴적인 소비패턴으로 버텨왔던 것이다. 물론 아시아 노동계급이라고 나을 것은 없었다. 약간의 실질소득 증가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잉여는 다시 자국 내 기업의 주주들에게 배당으로 돌아가거나 국가의 외환보유고에 쌓여 선진국에 재투자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던 것이다.[골디락스의 환상과 그 결과]

나는 자유무역협정의 위험성이 단지 트럼프의 지나친 허풍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많은 자유무역협정이 그렇듯이 TPP역시 지적재산권에 대한 지나친 보호, 투자자국가소송제도 등 다국적 자본에게 지나치게 유리한 독소조항을 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면에서 트럼프를 찍은 백인 노동계급도 일말의 진정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꿈꾸는 위대한 미국이 “위대한 백인의 미국”일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 면에서 미국의 리버럴은 – 브렉시트를 수세적으로 방어할 수밖에 없었던 영국의 리버럴도 마찬가지지만 – 전통적인 제조업 지역의 노동계급(또는 그 노동계급의 향수를 가지고 있는 노인들)의 외침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동계급 표에 의존하던 서구의 리버럴이 이제 그들을 무시하고 사회문화적인 진보에 주력하는 동안, 이 (쇠퇴하는?) 계급은 트럼프와 같은 극우의 유혹에 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백인 노동계급 남성은 현재의 시스템이 자신들을 위해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일하는 미국(Working America)’의 멤버인 ‘전미철강노동자(United Steelworkers)’의 부의장 Fred Redmond의 말이다. “펜실베이니아의 전역에 걸쳐 트럼프를 그들이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이 시스템의 대안으로 여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고철회사의 매니저인 Matt Sell이 이중 하나다. “우리는 한번 흔들어 엎어줘야 합니다. [중략] 트럼프를 찍는 것은 진정 워싱턴에 있는 복도 양쪽에 있는 정치 내부자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입니다.”[Labor Makes Clinton’s Case to Rust Belt Whites Curious About Trump]

하필 그 메시지의 전달자가 트럼프라니. OTL

자유무역협정은 관세철폐가 주된 목적일까?

또 다른 옵션으로는 농업이나 데이터 보호와 같은 논쟁이 되고 있는 이슈들을 자유무역 협정에서 제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무역 협상에서 남는 것은 많지 않을 것이고 전체 프로젝트가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관세는 오늘날 평균 3% 정도로 이미 너무 낮아 상대적으로 부차적인 역할을 할 뿐이다.[Plan for Trans-Atlantic Trade Agreement Could Founder on EU Concerns]

유럽과 미국이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협상을 하고 있고, 유럽의 시민단체들이 이를 무력화하기 위해 노력 중이라는 슈피겔의 기사다. 오늘날의 자유무역협정이 지니는 의미를 잘 표현해주는 문단인 것 같아 소개한다.

기사를 보면 미국의 농축산업 로비스트, 그리고 구글과 같은 기업들은 자유무역협정을 통해 유럽의 까다로운 상품기준, 예를 들면 유전자조작 식품에 대한 규제나 개인의 데이터 사용에 대한 규제 등을 철폐하고 싶어 한다.

이러한 규제철폐는 미국기업에게만 이로운 것은 아닐 것이다. 유럽기업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열리는 것이다. 가장 손해를 보는 집단은 미국소비자와 유사한 수준으로 질이 떨어지는 소비에 노출될 유럽의 소비자들일 것이다.

슈피겔이 지적하고 있다시피 오늘날의 자유무역협정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관세가 주요이슈가 아니다. 그러한 자유무역협정이 전 세계적으로 얽혀서 체결되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 기업 활동의 무한자유.

제3연륙교 건설을 둘러싼 도시개발의 새로운 풍경

국토해양부는 2003년 6월 인천대교와 협약을 맺었다. 협약에는 경쟁노선(제3연륙교)이 건설될 경우 30년간 추정 통행료 수입을 보전해준다는 벌칙조항이 포함됐다. 최대 8조4000억원에 달하는 금액이다.

문제는 그 다음 일어났다. 이번엔 재정경제부(지금 기획재정부)가 2개월 뒤인 8월 제3연륙교 건설이 포함된 인천경제자유구역개발계획을 승인해줬다. 2개월 전 제3연륙교 건설을 사실상 봉쇄하는 협약을 맺은 정부가 이번엔 제3연륙교 건설을 승인해준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결과가 고쳐지지 않고 6년 뒤 영종하늘도시 분양에 이용됐다는 점이다. 지난 4월 영종하늘도시 입주예정자들은 인천시청 앞에서 집회를 열고 “2009년 분양 당시 약속했던 제3연륙교가 건설되지 않으면 사기분양으로 사업자인 LH와 인천시를 고소하겠다”고 밝혔다.[정부, 제3연륙교 놓고 이중플레이했다]

제목의 “이중 플레이”는 좀 심한 말 같고, 결국 부처 간 의사소통의 혼선으로 인해 계획이 중복되어버린 상황인 것으로 판단된다. 인천대교는 민간투자사업으로 진행되는 사업이므로 – 즉, 독립채산제이므로 – 여하한의 경쟁노선의 신설은 사업의 존립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특정 사업의 실시협약의 체결에 있어 ‘경쟁노선의 신설에 따른 보상’은 으레 삽입되는 조항이다.

2003년 6월 국토해양부가 영국 금융회사 에이멕, 맥쿼리 등이 주주로 참여한 인천대교주식회사와 체결한 실시협약 제10조에 따르면 “인천대교와 보상 방법과 수준에 대한 사전 합의없이 정부는 인천대교 사업에 영향을 미치는 유사한 다른 시설에 권리를 설정하거나 부여할 수 없다”고 되어 있다.[인천시·LH 제3연륙교 추진은 ‘협약’ 위반]

문제는 이러한 국토해양부의 협약체결 사실을 알지 못한 재정경제부가 바로 그 경쟁노선의 건설이 포함된 개발계획을 승인하고, 이를 이용하여 LH가 신도시를 분양하였다는 점이다. 만약 제3연륙교가 건설이 되면 정부는 인천대교 사업자에게 감소된 수입을 보전해주어야 한다. 보전금이 8조4천억원이라는 내일신문의 분석결과도 있지만 다른 보도에 따르면 2조원에 달할 것이라는 예상이다.

한편 국토연구원도 최근 건설 타당성에 대한 용역 조사 결과 ‘사업성이 있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따라 주민들의 다리 설치 요구는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인천시도 지역발전을 위해 앞당겨 건설해야 한다는 입장이라 한다. 문제는 바로 인천대교에 보전해줘야 할 금액인데, 이에 대해 중앙정부와 인천시가 핑퐁을 치고 있는 상황이다. 더 복잡한 것은 인천대교에 외국 출자자가 끼어있다는 사실이다.

김수홍 (주)인천대교 사장은 “마치 우리가 제3연륙교 건설을 반대하는 것처럼 국민들에게 비쳐져 곤혹스럽다”면서 “그러나 지난 3월부터 연륙교 건설 얘기가 계속 나왔지만 인천시나 국토부에서 단 한번도 상의해 온 적이 없었다”고 섭섭함을 드러냈다. 건설업계 역시 정부, 지자체의 민자사업자에 대한 고압적, 일방적 자세에 대한 불만을 감추지 않는다. 이번 사태만 해도 인천대교에 영국의 에이맥 지분(25%)이 없었다면 상황은 전혀 달랐을 것이란 얘기까지 나온다. 건설업계의 한 민자 담당자는 “7월부터 한ㆍEU FTA(자유무역협정)가 발효한 상태에서 잘못 처리하면 한국 정부와 EU기업간 첫 소송전이자 외교 문제로 비화할 가능성 때문에 조심스러운 것 아니겠느냐”며 “국내 기업 컨소시엄이라면 완전히 달랐을 것이며 앞으로 민자사업을 할 때 외국업체를 끼워서 들어가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MRG(최소운영수입보장) 발목 잡힌 제3연륙교 해법 찾을까]

인천대교 출자자 중에 영국업체가 끼어있어 제3연륙교의 문제는 ‘한ㆍEU FTA’까지 고려해야 하는 문제로 비화한 것이다. 사실 민간투자사업은 엄밀하게 말해 정부의 변형된 국채에 가까운 관계로 민간사업자가 채권자이나 정부가 건설업계에 가지는 우월한 지위 때문에 독선적인 행정도 적지 않았으나, 인천대교의 경우 인용문처럼 국제적인 분쟁의 소지가 있어 조심스럽게 행동해야할 처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중앙정부는 인천대교의 건설부담의 이연을 위해 민간자본을 동원하였고, 이와는 별개로 이미 인천대교의 사업성을 저해할 제3연륙교를 가시화시켰다. 이에 채권자인 인천대교 측은 채권자로서의 지위를 – 한ㆍEU FTA로 인해 더욱 강화된 지위 – 이용, 손실보전의 극대화를 도모할 것이다. 이전의 정부가 발주하고 재정도 부담하는 도시개발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풍경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노동통제에 대한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모순

과거에는 자본은 자유로운 노동자에 대한 자기의 所有權을 행사하기 위하여 필요할 때에는 언제나 强制法에 의거하였다. 예컨대 1815년 까지는 영국의 기계제조 노동자들의 外國移住가 중형으로써 금지되고 있었다.[자본론 I 下, 칼마르크스,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2000년, pp726~727]

오늘날엔 물론 이런 야만적인 노동통제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또한 보다 교묘한 형태로 노동자들의 이전의 자유는 제한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각국의 이주노동자에 대한 노동권 제한이다. 자국 노동조건의 보호라는 미명 하에 진행되는 이 통제는 현실에서는 결국 3D업종에 대한 저임금 노동력의 일상적인 공급으로 귀결될 뿐이다.

제조업이나 저부가가치 서비스업에 대한 위와 같은 노동통제가 일반시민들의 평균적인 정서에 다소 반하는 야만적인 형태라면, 상대적으로 고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연구인력 등에 대한 노동통제는 보다 교묘하고 그럴듯한 형태를 취한다. 이 주장은 보통 국가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옷을 입고 있어 위와 같은 노동통제보다 더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국가핵심기술을 지키는 일이 말처럼 쉽지가 않다. 설계도면이나 실험 데이터 등을 이메일이나 디스켓에 담아 빼내가는 ‘보이는 기술유출’은 수사기관을 동원해 손써 볼 기회라도 있다. 하지만 연구원들의 머리에 담아가는 ‘보이지 않는 기술유출’은 더욱 심각하다. 국가핵심기술 개발에 참여한 엔지니어가 어느 날 외국기업으로 이직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의 두뇌에 축적된 기술개발 노하우도 고스란히 함께 유출된다. 결국 기술을 지키려면 엔지니어의 외국기업 이직을 막아야 한다.[핵심 엔지니어 국가가 관리해야]

이 주장은 결국 상대적인 고급 “노동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하여 그들의 직업선택의 자유와 심지어 19세기 영국에서 시행했던 야만적인 거주이전의 자유까지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멋모르는 칼럼니스트의 공허한 주장 일뿐이라고? 2010년 법원은 기술의 유출을 우려하여 연구원들의 이직을 일정기간 금지하는 판결을 내렸다.

서울중앙지법은 LG화학이 “2차전지 핵심기술이 유출될 우려가 있다”며 외국계 경쟁사로 이직한 연구원 6명을 상대로 낸 전직 금지 가처분신청에서 “퇴사일로부터 1년에서 1년6개월 동안 외국계 경쟁사로 이직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법원 ‘기술유출우려’ LG화학 연구원 이직 금지]

결국 공권력은 개별자본의 이익을 보호해줬는데, 이러한 결정의 근저에는 총자본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 국가의 이익이라는 이데올로기가 깔려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공포감은 자본 대 자본의 이합집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만약 LG화학이 “외국계 경쟁사”와 기술협력을 하거나 M&A를 시도한다면 이는 경영활동으로 보호받을 것이다.

물론 일부의 경우 소위 “국부유출”이나 “국가적 자존심” 등 정치적 문제로 인해 기업의 이러한 활동이 제약을 받을 때도 있다.(이를테면 중국기업의 미국 내 인프라 자산의 인수 등) 하지만 이를 무력화시키는 양자간 투자협정 등이 FTA의 형태를 띠고 나타나면, 여하간의 정치적 프로파간다도 기업 활동의 저해되는 행동을 취하지 못한다.

쌍용자동차나 외환은행의 경우처럼 외국 기업의 한 기업에 대한 전면적 기술이전과 자본이전에 대해서는 “외자유치”라는 명목으로 보호되지만 연구 인력의 직업선택에 대한 (상대적으로) 부분적인 기술이전에 대해선 공권력의 힘으로 막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은 FTA등 자본의 자유를 강화하는 협약에 의해 더 빈번해질 것이다.

 

보론 :

트위터에서 aleph_k님이 아래와 같이 의견을 주셨다.

기술직 인력의 해외 유출을 막는 독소조항은 당장 FTA하면 외국에서 제소할 제0순위 중 하나 아닌가요?[출처]

이 지적은 어느 정도 타당한 것으로 판단된다. 예를 들어 한미FTA 제19.2조(기본 노동권)에 보면 “각 당사국은 작업장에서의 기본원칙 및 권리에 관한 국제노동기구 선언 과 그 후속조치(1998년)(국제노동기구선언)”에 기술된 대로 “고용 및 직업상의 차별의 철폐”를 준수하여야 한다.

표현이 추상적이긴 하지만 ‘특정고용이 자국 자본에 유리하다면’ 위에 예로 든 연구 인력의 이직금지 판결 등에 대하여 충분히 딴죽을 걸 수 있지 않을까 판단된다. 다만 이와 같은 행태는 당사국의 선의에 의한 노동의 자유 부여라 기보다는 이 또한 국가의 외피를 둘러쓴 자본의 경쟁이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FTA와 자본이 부여하는, 또는 부여할 수 있는 “노동의 자유”는 당사국 자본에 유리한 범위 내에서만 적용될 가능성이 높다. 이른바 저급인력은 여전히 이러한 자유에서 배제될 것인데, 이는 NAFTA를 체결했음에도 미국이 어떻게 멕시코로부터의 인력유입을 통제하고 있는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바로 그 땅에 멕시코 사람들이 다시 몰려들고 있다. 전에도 불법 이주의 익숙한 통로가 되었던 그곳에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체결 뒤 급증한 멕시코의 빈민들이 매년 몇십만 명씩 새로운 삶을 찾아 목숨을 걸고 있는 것이다. 사막과 늪지대에서 국경수비대에게 발각돼 비참한 최후를 맞는 멕시코인들의 처절한 ‘생존투쟁’은, 그 맞은편에서 선조들이 빼앗은 국경을 철저히 수호하는 미국인들의 ‘애국전쟁’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다.[모순의 멕시코 국경]

근본적으로 FTA는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은 명시적으로 보장하고 있지만,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에는 관심도 없으며 당연하게도 명시적으로 보장하고 있는 조항은 없다. 다만 어디까지나 자국의 자본에 이익이 되는 한에서 전문적인 연구 인력의 이직제한에 대해 딴죽을 걸 소지는 있으나 노동자 일반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다.

오히려 한미FTA에서는 변호사 등 전문직 서비스에 대해서만큼은 제12.4조(시장접근) 등에서의 제한 없는 시장접근에 대한 유보조항을 두었다. 이들 전문직의 기득권이 자본의 그것에 근접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엔지니어링 서비스 역시 자국에 사무소를 설치를 의무화하고 있어 어떤 의미에서 노동의 자유를 제한한 측면이 있다.

“공공의 정신(public-spiritedness)”

Vaughan ignored the remark. “I don’t want you to close the beaches,” he said.
“So I see.”
“You know why. The Fourth of July isn’t far off. and that’s the make-or-break weekend. We’d be cutting our own throats.”
“I know the argument, and I’m sure you know my reasons for wanting to close the beaches. It’s not as if I have anything to gain.”
[중략]
Brody sighed. “Shit,” he said. “I don’t like it. it doesn’t smell good. But okay, if it’s that important.”
“It’s that important.” For the first time since he had arrived, Vaughan smiled. “Thanks, Martin,” he said, and he stood up. “Now I have the rather unpleasant task of visiting the Footes.”
“How are you going to keep them from shooting off their mouth to the Times of the News?”
“I hope to be able to appeal to their public-spiritedness,” Vaughan siad, “just as I appealed to yours”
[Jaws, Peter Benchley, 三志社, 1984년, pp 86~92]

Steven Spielberg의 걸작 영화로 잘 알려진 Jaws의 원작 소설 중 일부분이다. 뜨내기 여인이 해변에서 상어의 습격으로 추정되는 공격을 당해 온 몸이 찢긴 채 해변에서 발견된 다음 날, 이에 해변을 폐쇄하려는 경찰서장 Martin Brody와 이를 말리는 읍장 Larry Vaughan의 설전을 묘사한 장면이다.

읍장의 논리는 여름 한철 장사로 그 해를 탈 없이 지내는 조그만 휴양지촌인 Amity가 뜨내기 여자의 죽음 때문에 망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경찰서장 Brody는 공공의 안녕을 위해 2~3일 간 해안을 폐쇄하겠다고 고집을 부렸으나 자치조례에 따라 자신을 해임할 수도 있다는 읍장의 협박에 굴복하여 자신의 주장을 철회한다.

그런데 묘하게도 읍장이 서장의 입을 막으려는 또 다른 논리 역시 서장의 논리와 유사하다. 즉, 그것은 바로 “공공의 정신(public-spiritedness)”이다. 서장의 논리가 불특정 다수인 공공의 안전을 보장하려는 목적이라면, 읍장의 논리가 공공, 즉 Amity 읍민들의 경제적 이해를 해치지 않겠다는 – 더불어 스스로 부동산 개발업자인 자신의 경제적 이해도 – 의지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물론 서장에게 가장 큰 위협은 읍장의 해임 협박이었지만 그 역시도 읍민들이 공유하고 있는 정서, 즉 ‘다수의 이익을 위한 소수의 희생’이라는 정서에 공감한 바도 크다. 소설에서는 그 해 여름 장사를 망칠 경우 Amity읍민의 1/3이 생활보호 수당을 받아야 할 정도의 가난한 읍으로 그리고 있다. 투표에 의한 선출직인 서장 역시 이러한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 동일한 문제에 봉착할 경우 우리는 어떠한 선택을 하여야 할까? 경제적 피해는 다수에게 미치지만 상어의 습격은 극소수, 그 또한 지극히 희박한 확률 상의 문제이기 때문에 전자의 보호가 더 시급한 문제라고 판단하면 될까? 원작에서 Amity읍은 전자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상어의 습격으로 말미암아 결국 후자의 결정으로 선회하였다. 우리 역시, 특히 ‘경제적 이익’과 결부된 의사결정에서는 ‘경제적 요소’가 일차적인 고려사항이 되는 경우가 많다.

FTA에서 그러했고, 환경문제와 경제적 이익이 상충할 때에 그러했고, 지난 선거철 뉴타운 이슈가 그러했고, 기업 및 공공기관의 구조조정 시에 경쟁력 강화라는 슬로건을 채택할 때에 그러했다. 하지만 때로 불특정 다수에 대한 적은 확률적 문제에 불과하기에 간과되었던 ‘상어의 습격’으로 인해 그간 얻었던 경제적 이익보다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할 때도 있었고, 지불할 개연성도 있는 상황이 많다.

이는 또한 소수자의 보호의 이슈일수도 있다. 즉, 다수자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과 소수자의 이익을 보호하여야 하는 것이 있을 때에 우리는 다수결의 원칙이 민주주의라는 논리를 들어 소수자의 이익(또는 권리)을 쉽게 포기하곤 한다. 하지만 다수의 이익을 관철하는 것이 대의민주제에 반드시 합치하는 것은 아니다. 해변의 안정이 보호되어야 하는 이유는 어느 누구든지 해변에 나가서 수영하는 한 상어의 습격은 무차별적이기 때문이니 말이다.

요컨대 “공공의 정신(public-spiritedness)”이라는 개념은 고정불변의 진리가 내포되어 있다기보다는 우리가 공화제를 채택한 이래로 시대와 장소에 따라 그 크기와 내포하는 의미가 변화되어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과거 왕이나 귀족이 누리던 특혜를 공공(public)이 함께 누린다는 이상향의 큰 틀은 당연시되지만 세세한 항목은 때때로 정치적으로 악용되기도 했고 공공 스스로에 의해 수정되기도 했던 것이다. 이전의 공공성 개념이 그랬듯 21세기 형 공공성은 어떠해야 할지는 결국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손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정부, 독점, 자유무역

어디에서도 마찬가지다. 관세나 기타 조치로 나타나는 공공연한, 혹은 은밀한 정부지원 없이는 한 나라 안에 독점이 성립하기 힘들다. 규모가 세계적이면 그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드비어즈 다이아몬드 독점이 우리가 아는 바로는 성공한 유일한 실례이다. 정부의 직접 지원 없이 오랫동안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밖에는 없는 것으로 안다. – OPEC 카르텔과 초기의 고무 및 커피 카르텔이 아마도 두드러진 예일 것이다. 그리고 정부지원을 받는 카르텔의 대다수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들은 국제경쟁의 압력 아래 부서져 버렸다. – 우리는 이 운명이 또한 OPEC을 기다리고 있다고 믿는다. 자유무역의 세계에서는 국제 카르텔은 더 빨리 사라져버린다. [選擇의 自由, 밀턴 프리드먼 저, 朴宇熙 역, 중앙신서, 1980년 pp84~85]

나는 이글에서 밀턴 프리드먼의 진정성을 믿는다. 억압(프리드먼이 생각하기에 주로 정부의 통제) 없고 독점 없는 경제가 진정 좋은 세상을 만든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고 “공공연한, 혹은 은밀한 정부지원”이 없다면 한 나라 안에서, 더군다나 세계적인 규모에서의 독점은 불가능에 가깝기에 정부의 지원(또 다른 의미의 통제이므로)은 철폐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고, 이는 매우 아름다운 구조를 이루고 있다.

위와 같은 프리드먼의 사상을 이어받아 오늘날 많은 자유주의 국가들은 “자유”무역의 실현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특히나 그들은 보호무역이 대공황을 심화시켰으며, 심지어는 세계대전이라는 참혹한 결과까지 낳았다고 여기고 있기에, 금융위기에 직면한 지금은 한층 자유무역의 수호에 열을 올리고 있다. 문제는 프리드먼의 희망과 달리 자유무역의 실천수단인 WTO, FTA 등은 각국 정부의 통제와 지원에 의해 실현되고 있고, 그 조약체결 주체 역시 여전히 국민국가라는, 더불어 그러한 것들은 또 하나의 “정부지원”이라는 ‘역설’이다.

프리드먼의 이상론에 의하면 모든 관세장벽은 부서져 버려야 하고 오로지 자유로운 생산자들이 정부의 간섭이나 지원 없이 경쟁을 하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자유무역 노정은 실은 유력한 국가들의 주도하에 상호평등이 실현되지 않은 상태에서 WTO와 FTA가 체결되고 있고, 그 와중에 국가의 의사결정단위에 개입할 수 있는 독점기업들이 배타적으로 조약체결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꼴이다.

예를 들어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바대로 농업부문 등에서는 카길 등 국제 곡물메이저가 조약 초안을 작성하고, 심지어는 협상 테이블에 앉고 있다. 제약분야와 지적재산권 분야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매우 강하다. 그 반면에 조약의 내용을 투명하게 알아야할 국민들은 – 심지어 대다수 중소기업들도 – 협상의 기밀을 유지하여야 한다는 명분 하에 정보접근으로부터 차단당하고 있다. 국민을 대변한다는 각 나라의 의회마저 크게 다르지 않은 처지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우리는 과연 현재의 무역기조를 진정 “정부의 간섭이 배제된 자유무역”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프리드먼이 살아 돌아온다면 한미FTA를 자신의 이상과 일치하는 타당한 무역협정이라고 간주할 것인가? 나는 그것에 회의적이다. 그의 오류는 현존하고 있는 가장 큰 경제주체인 – 일수밖에 없는 – ‘국민국가’라는 존재를 애써 외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없앨 수 없다면 그것의 개선을 위해 노력하여야 할 터인데 그는 땅을 머리에 처박고는 ‘국가’가 안보이므로 없어졌다고 믿으라고 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의 예언 – 혹은 바람? – 과는 달리 여전히 OPEC은 건재하다.

탈정치적이었던 한미FTA의 정치적 윤색 과정

우리 정부가 한미FTA를 한미동맹의 강화의 수단으로 간주한다는 증거는 – 참여정부도 그러한 관점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 곳곳에서 감지되지만 사실 미국은 남한을 ‘동맹’의 ‘파트너’로 간주하고 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미국에 있어 남한, 더 큰 개념에서 한반도는 미일 동맹의 군사적 부담을 덜어주는 주체, 중국 영향력의 확대저지선 정도의 역할일 뿐이다.[북한의 핵도발에 대한 단상 中에서]

알려진 바에 따르면 한미FTA는 미국의 부시 정부에서보다는 한국의 노무현 정부에서 더 적극적으로 추진되어온 사안이다. 즉 우리 측에서 먼저 양국간 FTA에 미온적이던 미국의 무역대표부 등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였고, 이에 미국 측은 자동차 및 의약품 수입장벽, 미국산 소고기 금지, 스크린쿼터 등의 선결되어야 할 장벽철폐를 조건을 내세우면서 협상이 진행되어 온 것이다.

위 인용문에서도 썼다시피 나는 노무현 정부가 과연 당초 우리의 FTA 주요목표가 중국이나 일본 등 아시아 주요국이었고, ‘동북아균형자론’을 주장하는 등 아시아에서의 자리매김에 열중하다가, 어떻게 난데없이 한미FTA를 꺼내들게 되었는가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귀차니즘에 무능력함까지 겹쳐서 그 탄생비화를 아직 소상히 알지 못한다.

짐작컨대 집권 초 전체적인 로드맵을 그리는 과정에서 지배엘리트 내에서 이에 관해 활발한 의견교환이 있었고 결국은 한중간이나 한일간보다는 한미간의 무역장벽 해소가 더 큰 경제적 이득을 가져올 것이라는 자본가들의 계산이 있었든지, 아니면 여하한의 아시아 블록의 형성이 한미간의 경색을 더 심화시킬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무릇 모든 의사결정이 그렇듯이 이 결정도 복합적인 동기가 작용하였겠지만, “권력이 시장에 넘어갔다는” 노무현 前 대통령의 발언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나는 주로 전자의 입장에 방점을 두는 의견이다. 초기 과정에서 안보가 주요 변수가 아니었을 것이라는 심증은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안보 문제 등과 관련되어서는 한미FTA가 추진되지 않았다. 내가 추적해봤는데 NSC[국가안전보장회의]의 개입 흔적이 없다. 한미FTA에 관련해서 통상교섭 본부하고 NSC가 단 한번도 회의를 하지 않았다. 그냥 간 거다.[“한미 FTA는 참여정부 업적조급증 탓, 대연정 제안에 이어 제2의 패착될 것”]

정태인 前 청와대 비서관이 오마이뉴스와 가진 인터뷰 중 일부이다. 즉 그에 따르면 한미FTA는 “YS 하면 금융실명제와 하나회 척결, DJ 하면 6·15 정상회담 등이 떠오르는데, 노 대통령은 이것이 없다”며 “남은 임기 안에 무엇인가 업적을 남겨보려는 노무현 대통령의 조급증이 원인”이라는 것이었다.그랬던 순수한(?) 경제적 동기가 미국의 외보안보전략, 그리고 이명박 정부로의 집권이양과 결합되면서 정치적 양상을 띠게 되었다는 것이 내가 보는 한미FTA의 진행과정이다.

노대통령은 이미 대연정 화두를 제시했을 때부터 한국의 미래전략 정립에 매우 강한 집착을 보여 왔고 한미FTA를 미래 선진 국가로 도약하는 중심고리이자 탈정치적 이슈로 인식해왔다. 다시 말해 미국정부의 관심이 외교안보적 차원이라면 노대통령의 주된 관심은 경제적인 것이다. 이런 노대통령의 탈정치적 인식은 부시 행정부의 외교안보 전략의 자장 안에 급속히 편입되는 결과를 초래하며, 이미 한미FTA 제안과 그의 동북아 균형자론 간의 조화될 수 없는 모순에 대해 많은 이들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한미FTA 국민보고서, 한미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 정책기획연구단 엮음, 그린비, 2006년, pp72~73]

결국 한미FTA는 시민의 정치적 자유를 추구하는 ‘정치적 자유주의’와 시민의 경제적 자유를 옭매고 자본의 경제적 자유를 보장하는 ‘경제적 자유주의’가 큰 모순 없이 상호 공존하던 노무현 정부의 작품으로서 큰 손색이 없는 작품이었다. 또한 이는 당연히 미국의 안보전략에 순응하며 ‘경제적 자유주의’를 위해서라면 ‘정치적 자유주의’쯤 은 쉽게 무시해버리는 한나라당의 열렬한 호응을 얻게 되었다.그리고 이후 한미FTA의 한미동맹 강화론은 빠지지 않는 소재다.

한미 FTA가 발효되면 ….. 미사일 발사 이후 거세진 북한의 위협에 공동대처하는 한미동맹에도 활력을 줄 것이다.[한미 FTA, 이제는 美정부와 의회가 답할 차례, 동아일보, 2009년 4월 23일]

요컨대 우리는 경제에 대한 국정철학이 갈팡질팡했던 한 정치적인 리버럴 정부가 탈정치적으로 추진했던 FTA가 권력이양 및 국제정세의 변화와 결합하면서 가장 정치적인 레토릭이 되어버리는 과정을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이제 지배 엘리트에게 한미FTA는 포기할 수 없는 떡밥이 된 셈이다. 문제는 그 떡밥을 어떻게 ‘안보공포증’ 및 ‘경제만능론’(주1)과 결합하여 국민적 저항을 최소화하느냐 하는 점일 것이다.

(주1) 예를 들자면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의 정서였던 ‘나라를 망쳐도 좋다. 경제만 살려다오(내 집값만 올려다오)’식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