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ㅈㄱㅎㅅㄷ의 돌풍을 보며

ㅈㄱㅎㅅㄷ의 돌풍을 보며 느끼는 시대적 징후. 사람들이 원래부터 밑바닥이던 노동자에 대한 탄압보다 금수저 리버럴 가족이 검사 권력에게 당하는 “불공정”에 더 분노하는 상황. 한드 스타일의 기승전결의 서사가 갖추어져서 더 열광할 요소가 충분함. 노동자의 일상적 착취에는 없는 그런 서사.

한 샌프란시스코의 인공지능 개발자가 올린 트윗을 보고 느낀 단상

트위터에 올라온 글이다.

“민트플라자에서 월 700달러를 내고 30일간 머물 예정이다. 몇몇 인공지능 개발자들과 독립적인 해커들이 여기 머문다.”

라는 트윗과 함께 그가 잠을 잘 캡슐의 사진을 올렸고, 이어 타래로 제법 그럴듯한 그 캡슐이 설치되어 있는 곳의 공용 공간의 사진들을 올렸다. 많은 이들이 ‘합법적으로 지어진 공간이냐’, ‘따로 책상은 있느냐’, ‘화장실은 더럽지 않느냐’, ‘주차는 어떻게 해결하냐’ 등의 질문을 던졌고 원래의 글을 올린 이는 친절하게 답변을 해주고 있다.

어쨌든 이 공간을 보면서 생각나는 공간은 우선 창도 없이 사실상 잠만 자는 값싼 숙소의 역할을 하는 한국의 고시원이나 일본의 캡슐호텔이다. 노동자 이하 빈곤층이 장기적으로 묵는다는 점에서는 고시원이, 공간 디자인의 유사성에 있어서는 캡슐호텔이 어울린다. 요컨대 인공지능 업계에서 근무하는 실리콘밸리의 노동자가 묵을만한 제대로 된 주거지의 느낌은 아니다.

런던, 뉴욕 등 주요 대도시의 높은 임대료는 팬데믹 이후 임대료는 더욱 오르는 추세라고 한다. 어떤 노동자는 임금의 절반 가까이를 집세로 낸다며 불만을 토로하는 영상을 올렸고, 캡슐에서 지내겠다고 트윗을 올린 이가 머무는 샌프란시스코의 경우 높은 집세로 인해 도시경쟁력이 악화되고 있고, 이로 인해 도시가 공동화/슬럼화/범죄화되는 현상을 겪고 있다고 한다.

의식주 중에서 노동자가 가장 많은 비용을 지불하는 것은 주(住)다. 대도시는 생산과 소비의 입지가 우월하다는 점에서 높은 주거비용을 부담하여야 한다는 당위를 감안하더라도 고임금의 노동자마저 감당할 수 없는 주거비용으로 인해 자산소유자가 노동소득자로부터 전유하는 몫이 계속 커진다면 그것은 공멸의 길임은 상업지역의 젠트리피케이션 사태가 잘 말해주고 있다.

부동산이나 젠트리피케이션 역시 때로 신규로 진입한 이가 주택 매입이나 권리금 차익을 통해 일정 정도 이윤을 향유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 노동자나 자영업자는 노동소득을 목적으로 근무지 근처에 거주하거나 장사를 한다. 그들 대부분이 이제 대출을 통해 자산을 보유하고 이에 대한 차익을 기대하기에는 자산은 너무 과점되어 있고 기대 인플레는 낮기 때문이다.

솔직히 저 트윗을 보고 처음 떠올렸던 것은 고시원이나 캡슐호텔이 아니라 19세기 말 노동자나 홈리스들이 숙소로 삼았다는 ‘관(棺)으로 만든 여관(coffin hous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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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nknown author – West, Rebecca (1996). London. London Crescent Books, a division of Random House Value Publishing, Inc (Avenel). Public Domain, Link

무인화(無人化)의 그림자

이전 글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지금 자본은 또 다시 도래한 인플레이션 시대 등에 대비하여 노동자의 노동력을 대체하기 위한 갖가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 중에서도 자본은 무인화를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이는 제조업이 대공장으로 재편되던 시기에 기계화를 통해 노동력을 대체하려던 시도와 동일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1 특히 주목할 만한 현상은 제조업에 비해 일관된 공정이 아니고 고객과 직접 대면하여 응대를 해야 하는 서비스업에서 이러한 무인화가 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서비스업 노동 중에서도 소비자가 요즘 가장 빈번하게 접하게 되는 무인화 서비스는 소위 “키오스크“라 불리는 무인단말기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무인단말기 앞에서 커피나 음식을 주문하고 직원에게 완성된 제품을 받는 서비스에 익숙해져가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커피나 음식의 제조마저 로봇이 제조하는 매장이 등장하고 때로는 이 과정도 눈요기로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종래에는 완전한 무인화 매장에서 우리는 종업원의 도움도 없이 제품을 받는 행위가 일상화될 것이다. 지금의 현재가 어쩌면 과거 사람들이 꿈꿨던 미래세계다.

그러면 이러한 무인화 서비스의 신세계는 과거의 SF영화가 그렸듯이 아름답고 깔끔한 미래의 세계에 부합하는 그런 세계일 것인가? 불행하게도 그러한 세계에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그림자가 몇 겹 짙게 드리워져 있다. 첫 번째 그림자는 그 세계는 당연하게도 노동자의 일자리를 뺏는 사회라는 점이다. 두 번째 그림자는 그 세계는 무인화 서비스를 이용하기 어려운 소수자를 배제하는 사회라는 점이다. 세 번째 그림자는 그 세계는 자본이 부담해야 할 각종 비용을 공공에게 전가시키는 사회라는 점이다.

An automat in Manhattan, New York City in 1936.
By Berenice Abbotthttps://digitalcollections.nypl.org/items/510d47d9-4f4a-a3d9-e040-e00a18064a99, Public Domain, Link

첫 번째, 어떤 면에서 고령화 시대에 접어들며 필수 노동인력이 줄어드는 마당에서 무인화 노동은 어쩔 수 없는 대세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무릇 모든 기술 발전이 그렇듯 무인화 기술 역시 친자본이냐 친노동이냐에 따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 소비자에게 결재노동을 전가시키는 “셀프 결재” 기능의 도입에 따라 대규모소매점에서 지난 몇 년간 많은 노동자가 해고당했다는 주장이 있다. 노동자의 해고를 용이하게 하는 셀프 결재의 도입이 상당 부분 소비자의 양심적인 결재에 의존한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2

두 번째, 무인화 노동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장애인 등 소수자 소비자를 배제하고 있다. 며칠 전에 시각장애인이 한 햄버거 프랜차이즈 매장에서 무인단말기를 이용하여 제품을 구매하는 시위(!)를 벌여 한 매체가 보도하기도 했다. 시각장애인 혹은 휠체어 이용자가 단말기를 이용하는 것 자체가 시위로 둔갑할 만큼 단말기 이용은 장애인에게는 엄청난 도전이다. 이렇듯 많은 서비스 노동자를 배제한 무인화 서비스는 서비스 이용에 익숙하지 않은 노인이나 다른 소수자에게는 또 다른 도전이 되는 그런 신세계다. 차별적인 서비스라 아니할 수 없다.

세 번째, 소위 “공유경제”가 그렇듯 무인화 서비스 역시 주요한 이윤의 원천 중 하나는 여태의 기존 서비스가 치러야할 치안, 안전, 보건 등 기본적인 서비스에 소요되는 비용을 공공에게 전가시키는 서비스라는 심증이 짙어지고 있다. 매장 이용자가 범죄나 사보타주와 같은 행동을 할 때 이전 같으면 상주하고 있는 직원이 그러한 상황을 통제하겠지만, 무인화 매장에서는 행정력에 의존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당연하게도 자본이 부담해야할 비용을 부담하지 않은 결과다. 무인화 매장의 지속 가능성에 회의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 정도에서 살펴보듯이 서비스 노동의 무인화는 인구구조 적으로 불가피한 측면이 있는 동시에 소수자의 서비스 이용에 대한 대안을 찾고 있다고 하지만, 아직도 해결해야할 장벽이 많은 그런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로 맑시즘적 입장에서 보면 노동력이라는 가변자본이 기계라는 불변자본으로 대체되는 과정에서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현상도 가속화될 소지도 있을 것이다. 거칠게 보아도 노동자는 기계와 달리 감가상각비를 고려할 필요가 없다. 단기적인 비용절감을 넘어선 이윤율 저하는 소자본에게 특히 치명적일 것이다.

“時間의 主人”은 누구인가?

그보다도 더 큰 이익은 노동자 자신의 시간과 고용주의 시간 사이에 드디어 명백한 구별이 생겼다는 점이다. 노동자는 이제 자기가 판매하는 시간이 언제 끝나고 언제부터 자기 자신의 시간이 시작되는가를 알고 있으며, 그리고 이것을 미리부터 정확히 알고 있음으로써 자기 자신의 시간을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 미리 배정할 수 있게 된다.(공장감독관 보고서, 1859년 10월 31일, p52) 그것(공장법)은 노동자들을 자기 자신의 時間의 主人으로 만들어 줌으로써 그들을 정치적 권력의 궁극적 장악으로 향하게끔 하는 정신적 에너지를 그들에게 부여하였다.(같은 보고서 p47)[자본론 I상, Karl Marx 저,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1994년, p384]

노동자가 노동시간을 정해놓고 노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時間의 主人”이라 칭하는 것은 다소 과장된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당시의 공장감독관으로서는 – 특히 노동자에게 온정적이었을 공장감독관이라면 더욱 – 자못 감격스러운 일이었을 것이기에 그런 표현을 썼을 것이다. 영국 사회는 19세기 중반 당시 가장 선진화되었던 자본주의 시스템이었으니 이미 자본주의의 온갖 모순과 갈등이 표출되었고 결국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의 치열한 내전(內戰)의 결과로 노동자는 ’10시간 노동법’이나 ‘아동노동 금지’라는 전리품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時間의 主人”으로서 자신의 삶을 설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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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ino Antero Bergius – http://www.uta.fi/koskivoimaa/tyo/1900-18/index.htm, Public Domain, Link

앞서 말했듯이 노동시간의 규제는 계급투쟁의 산물이다. 또 한편으로 이러한 개혁은 기술의 발전이 가져온 부수적 효과라고도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의 기술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자본가는 이전의 가내 수공업 중심의 상품생산 시스템을 대규모로 지어진 건물 내에서의 기술집약적인 프로세스로 개선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기술 발달로 대규모 공장에서 함께 근무하게 된1 노동자는 그들의 정치적 의지를 표현할 조직화가 용이해졌고2, 다른 한편으로 그들의 노동력은 사회적 평균의 균질화로 이어져 단일한 노동시간 제한이라는 전리품을 얻어내기에 유리한 조건이 형성된 것이다. 기술발전은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들 이롭게 만들었던 셈이다.

요기요 AI는 먼저 들어온 주문을 제쳐두고 뒤에 들어온 주문을 우선 배달하라고 명령했다. 첫 번째 주문을 한 손님은 화가 날 터이지만, 욕은 라이더가 들어야 한다. 돌발 상황도 벌어졌다. 12층에 올라가야 하는데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서 계단으로 뛰어간 라이더, [중략] 주소를 잘못 적은 손님 때문에 20분 동안 헤맨 라이더, 조리가 늦어져 식당 밖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라이더까지. AI는 이런 변수를 계산하지 않는다. [중략] 누군가는 우리를 자유로운 플랫폼노동자라 부르지만 족쇄와 ‘캐삭’ 사이를 아슬아슬 달리는 평범한 노동자일 뿐이다. 디지털일터에 AI라는 컨베이어벨트가 도입됐다. AI에 대한 규제와 통제 없이 플랫폼노동 대책도 없다.[우리는 데이터가 아니다]

이제 기술발전이 자본가에게만 유리한 시스템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우리는 오늘날의 플랫폼 경제가 처음에 “공유경제(共有經濟)”라는 기만적인 이름표를 달고 사회 모두에게 이로운 시스템인 것처럼 행세했으나 이내 플랫폼이 자본에 의해 점령될 경우 “공유경제”는 그 즉시 “플랫폼은 사유(私有)지만, 사회적 비용은 공유(共有)”인 시스템으로 고착화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칼 맑스가 서술한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인 것처럼 보였고 아직도 플랫폼의 점령자들은 그러하다 주장하고 있는 우리의 “자유로운 생산자”도 사실은 자신이 AI라는 신개념 콘베이어벨트에 묶여 옴짝달싹 못 하는, 19세기 노동자보다 더 퇴행적인 노동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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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oto by CEphoto, Uwe Aranas or alternatively © CEphoto, Uwe Aranas, CC BY-SA 4.0, Link

이제 그들은 더 이상 “時間의 主人”이 아니다. AI는 그들의 편의대로 절대적인 노동시간을 임의로 늘려버린다. AI는 배달 과정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저마다의 사정을 노동시간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현 정부는 집권 초기 주52시간 근무제라는 엉성하지만, 그럼에도 살인적인 한국 노동자의 노동시간에 대해 다소 개혁적이라 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하였지만, 플랫폼 경제의 자본은 다시 노동자에게 “자유로운 플랫폼노동자(생산자)” 혹은 “개인사업자”라는 직함을 씌워주고서는 노동시간 제한의 “족쇄”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 버렸다. 그러나 그들이 해방되는 바로 그 순간에 다시 AI라는 족쇄를 씌워서 그들이 “時間의 主人”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제 21세기의 정부와 공장감독관은 새로운 노동법을 만들고 새로운 방식으로 자본을 감독해야 한다. 자본가의 행태와 기술은 날이 갈수록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이전의 이차산업 중심의 대규모 공장을 짓던 자본과 그곳에서 근무하던 노동자에게 적용되던 법과 제도는 한계에 부닥치고 있다. 어떤 자본은 플랫폼을 선점하자마자 지분을 일본의 사모펀드에게 넘겨 엄청난 투자금을 받아 그걸로 플랫폼을 독점하였고, 미국 주식시장에 회사를 상장시킨 후 창업자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피해 모든 공식직함을 던져버렸다. 그런데 때마침 그 플랫폼의 창고에 화재가 발생하였고 화재의 진화는 한국 사회가 부담하였으며 그 보험료는 한국 보험사에 청구할 것으로 보인다.

늘 그랬듯이 자본은 “時間과 空間의 主人”이다

“독립형 일자리 경제” 모델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 어떻게 보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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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exander Torrenegra from Secaucus, NJ (New York Metro), United States – On my first @Uber ride in Bogota heading to a Startup Weekend. Priceless easiness and safety. I love disruptive innovation., CC BY 2.0, Link

어제의 여의도가, 요즘의 한국이, 그리고 요즘의 전 세계가 “공유경제(sharing economy)”1라는 신종 비즈니스 모델 때문에 적잖이 몸살을 앓고 있다. “공유경제”라 불리는 분야에는 다양한 비즈니스 모델이 있지만, 가장 큰 갈등을 겪고 있는 분야는 우버나 카카오 카풀 등 최근 몇 년 사이 새로 등장한 신개념의 승차 서비스다. 이 업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은 이해당사자들 사이에서, 그리고 이 비즈니스 모델을 바라보는 경영인이나 학자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논쟁을 촉발하고 있다.

우선 우버가 촉발한 갈등은 현재 서구 언론이 이 비즈니스 모델을 지칭하는 표현인 “독립형 일자리 경제(gig economy)”의 진위(?)를 둘러싼 갈등이다. 기그는 원래 1920년대 미국 재즈 공연장에서 연주자를 즉석에서 고용하여 단기로 공연 계약을 맺던 것을 뜻하는 말이었는데 서구 언론은 “공유경제”라는 보다 애매한 의미의 용어보다는 “독립형 일자리 경제”라는 고용 행태에 주목한 용어를 선호하고 있고 나도 이런 용어의 취사 선택이 어느 정도 합당하고 생각한다.

그런데 최근 영국의 재판부는 우버와 우버 운전자들 간에 벌어지고 있는 소송의 2심에서 운전자들의 손을 들어주며 “독립형 일자리 경제”라는 정의에 대해 의문을 표했다. 즉, 우버 운전자들은 독립적인 사업자라기보다는 우버에 고용된 노동자이며 이에 따른 지위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이 판결 내용이다. 1심에서 판사는 “런던에서 우버는 3만 개의 작은 비즈니스가 플랫폼으로 연결된 모자이크라는 개념은 약간은 바보같다.”라며 운전자의 노동자성을 옹호하였다.

이 판결이 확정되면 그렇지 않아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버에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도 있다. 우버 운전자가 노동자로 인정받게 됨에 따라 회사는 그들에게 최저임금과 휴가 수당 등의 비용을 지급해야 하며, 노동시간은 운전자가 승객을 이동시키는 시간이 아닌 우버 앱을 켜놓은 시간으로 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경우 우버는 그동안 누리고 있던 결정적인 이점, 즉 전통적인 승차 서비스에서 갖추어야 할 노동조건으로부터 자유로웠던 기회비용이 감소하게 될 것이다.

한편,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 갈등은 조금은 다른 양상이다. 이미 우버와 같은 전면적 모델은 금하고 있는 와중에 택시 운전사들을 링크시켜 거대한 플랫폼을 형성한 카카오 택시는 이 황금알에서 만족하지 않고 ‘카카오 카풀’이라는 변종의 우버 모델을 도입하였는데, 이게 기존의 택시 노동자들의 분노를 폭발시킨 것이다. 서비스 성공 여부의 불투명함과 여론의 차가운 반응에도 불구하고 10만 명이 넘는 노동자가 모인 것을 보면 사태가 자못 심각함을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 만났던 택시 운전사나 관련 공무원의 말을 종합해보면 택시 노동자는 플랫폼을 독점한 카카오가 이전의 콜택시나 신규 업자에 비해 우월한 계약조건을 강제하고 있던 와중에 이번에 카택이라는 기존의 서비스와 경쟁관계가 되는 카풀 서비스를 런칭하는 상황에 분노의 폭이 더 커졌다고 할 수 있다. 우버가 내부에서의 노자(勞資)관계의 갈등이라는 카풀은 거대 플랫폼에 포섭되어 공존관계였던 기존 업계가 동업자의 배신에 분노한 형국이 된 셈이다.

이런 갈등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벤처 사업자라면 기득권 세력이 비즈니스의 진보를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승자는 플랫폼의 독점자가 될 확률이 높다. 하지만 그 와중에 영국 법원의 판결이나 한국 택시 노동자의 저항은 그들이 독점자로서 미처 마련하지 못한 자정 능력을 키울 수 있는 사회적 갈등의 초기 증상일 수 있다. 그들의 비즈니스가 “공유경제”와 “독립형 일자리 경제”에 맞는 비즈니스 모델인지 고민하는 비용 정도는 치를 가치가 있을 것이다.

“녹슨 지대(Rust Belt)”에서의 외침

출구조사에 따르면 미국 전역에서 트럼프는 힐러리 클린턴에 비해 58:37의 추세로 유권자의 70%를 차지하는 백인 유권자의 지지를 획득했다. 백인 유권자 중 대졸자가 아닌 이들의 유권자의 비율은 67:28이었다. 그러나 학위를 가진 백인 유권자들 사이에서는 49:45의 비율이었다.[‘Forgotten’ white vote powers Trump to victory]

이러한 눈에 두드러진 결과 때문에 결국 트럼프는 인종주의적 편견을 가진 저학력의 백인 유권자의 몰표 덕분에 선거에서 승리했다는 해석이 가능하게 되었다. 비록 어떤 트위터 사용자는 “모든 트럼프 지지자가 인종주의자인 것은 아니다”라고 항변했지만, 이 트윗에 다른 사용자가 “트럼프를 지지한 모든 이는 인종주의자에게 투표한 것이다”라고 응수함으로써 그의 볼멘소리에 돌직구를 던졌다.

성난 백인 유권자의 목요일의 외침은 오하이오와 인디아나와 같은 러스트벨트에서 가장 시끄러웠고 이전의 민주당 강세지역이었던 미시간이나 펜실베이니아와 같은 곳에서도 – 두 곳 모두 1988년 이래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승리한 적이 없다 – 작동하였다.[‘Forgotten’ white vote powers Trump to victory]

백인 투표자의 몰표가 더욱 극적으로 두드러졌던 지역은 전통적으로 민주당의 텃밭으로 여겨졌던 소위 “러스트벨트(rust belt)”였다. 트럼프는 위스콘신, 미시간, 오하이오, 펜실베이니아 등 오대호 주변 미국의 전통적인 공업지대인 러스트벨트에 위치한 5개주에서 승리함으로써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클린턴은 당초 이 중 적어도 위스콘신, 미시간, 펜실베이니아에서 우세할 것으로 예측됐었다.

트럼프는 선거기간 내내 인종주의적 언행을 지속했고 이로 인해 많은 양심적 유권자들과 유색인종을 마음 아프게 하였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트럼프의 이런 공격은 주로 경제적 박탈감을 가지고 있는 백인 유권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트럼프는 전략적으로 미국 정부가 정당에 불문하고 지속적으로 추진한 “자유무역협정” 때문에 일자리를 잃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 응답자의 93%가 미국에서 “너무 많은 제조업 일자리가 사라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 응답자의 74%가 “중국산 제조품”에 대해 비호감이었는데, “보수적” 응답자는 77%가 그랬다.
– 응답자의 96%가 “미국산 제조품”에 호감을 보였고, “공화당의 보수적 당원”중에서는 98%였다.
– 응답자의 92%가 “너무 많은 일자리가 외국으로 나가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86%는 “미국에서는 더 이상 어떠한 것도 만들지 않을 것 같다”고 걱정했다.
[“Free Trade”: The Elites Are Selling It But The Public Is No Longer Buying]

올 초 한 단체가 오하이오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의 결과다. 러스트벨트의 유권자들이 무역에 대해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결과다. 이 결과 당시 민주당 예비선거에서는 역시 “자유무역”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가지고 있던 버니 샌더스가 돌풍을 일으키며 미시간에서 힐러리 클린턴을 압도하였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민주당 유권자의 58%는 무역이 “미국에서 일자리를 없앤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미국에서의 제조업 일자리가 사라지고 있다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다. 제3세계로의 공장의 이전을 유혹하는 자유무역협정, 자동화 기술의 발전, 혁신을 거부한 미국 제조업의 경쟁력 상실 등등 원인은 다양할 것이다. 이 중 어느 원인이 더 주되게 지역의 쇠퇴를 초래하였는지는 계속 논의할 주제이지만, 당연히 정치적으로는 자유무역협정이 가장 공격하기 쉬운 대상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공격에서 외통수로 몰린 것은 단연 힐러리 클린턴이다. 그가 퍼스트레이디이던 지난 1994년, 남편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은 당초의 정치적 입장을 뒤집고 그 뒤 악명이 높아질 NAFTA에 서명한다. 힐러리 클린턴은 훗날 입장을 바꾸지만, 당시 이 협정에 찬성했다. 이번 선거에서도 그는 자유무역협정, 특히 TPP지지하였다. 러스트벨트의 유권자에게는 무척 인기 없을 공약이었다.

외교관계협의회의 Edward Alden은 “NAFTA는 상징적일 뿐이다. 다만 그 협정은 미국이 자신보다 훨씬 임금이 싼 나라와 맺은 최초의 대규모 협정이었다.”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즉, 이전부터 이미 러스트벨트를 포함한 미국의 제조업은 쇠퇴하던 중이었고, NAFTA는 그러한 경향을 상징하는 하나의 변곡점이 된 것이다. 따라서 힐러리 클린턴은 적어도 이 지역에서 가장 인기 없는 민주당 후보가 될 운명이었다.

어쨌든 이 지역의 실제 경제사정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 1999/2000년의 피크를 지난 후 이 지역의 소득은 – 아이오와를 제외하고 – 퇴보했다. 최근 다시 경제가 살아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오지만, 노동자들은 트럼프가 재건하겠다는 “위대한 미국(Great America)” 시절의 노동자의 고임금 정규적 일자리가 아닌 저임금 비정규직 일자리에 만족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이런 상황을 트럼프가 되돌릴 수 있을까?

트럼프는 집권 이후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제소하고 자유무역협정의 재협상에 나서겠다고 공약했다. 하지만 그의 자유무역에 대한 무모하리만큼 단순한 접근은 많은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다. 사실 미국은 러스트벨트가 쇠퇴하는 와중에 중국의 저가 제조품 덕에 고성장에도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지 않았던 골디락스 시절을 누렸었다. 트럼프의 현재 공약은 이 경제순환 고리를 대책 없이 끊는 자충수가 될 가능성이 있다.

미국의 노동계급들은 골디락스라는 환상 속에서 자신들이 일하던 일터를 멕시코나 아시아의 노동계급에게 빼앗겨버리고 줄어든 소득을 보충하기 위해 은행으로부터 빚을 얻고, 월마트에서 중국산 싸구려 상품을 구입하는 자기 파괴적인 소비패턴으로 버텨왔던 것이다. 물론 아시아 노동계급이라고 나을 것은 없었다. 약간의 실질소득 증가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잉여는 다시 자국 내 기업의 주주들에게 배당으로 돌아가거나 국가의 외환보유고에 쌓여 선진국에 재투자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던 것이다.[골디락스의 환상과 그 결과]

나는 자유무역협정의 위험성이 단지 트럼프의 지나친 허풍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많은 자유무역협정이 그렇듯이 TPP역시 지적재산권에 대한 지나친 보호, 투자자국가소송제도 등 다국적 자본에게 지나치게 유리한 독소조항을 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면에서 트럼프를 찍은 백인 노동계급도 일말의 진정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꿈꾸는 위대한 미국이 “위대한 백인의 미국”일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 면에서 미국의 리버럴은 – 브렉시트를 수세적으로 방어할 수밖에 없었던 영국의 리버럴도 마찬가지지만 – 전통적인 제조업 지역의 노동계급(또는 그 노동계급의 향수를 가지고 있는 노인들)의 외침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동계급 표에 의존하던 서구의 리버럴이 이제 그들을 무시하고 사회문화적인 진보에 주력하는 동안, 이 (쇠퇴하는?) 계급은 트럼프와 같은 극우의 유혹에 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백인 노동계급 남성은 현재의 시스템이 자신들을 위해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일하는 미국(Working America)’의 멤버인 ‘전미철강노동자(United Steelworkers)’의 부의장 Fred Redmond의 말이다. “펜실베이니아의 전역에 걸쳐 트럼프를 그들이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이 시스템의 대안으로 여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고철회사의 매니저인 Matt Sell이 이중 하나다. “우리는 한번 흔들어 엎어줘야 합니다. [중략] 트럼프를 찍는 것은 진정 워싱턴에 있는 복도 양쪽에 있는 정치 내부자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입니다.”[Labor Makes Clinton’s Case to Rust Belt Whites Curious About Trump]

하필 그 메시지의 전달자가 트럼프라니. OTL

기간제 교사를 괴롭히는 학생들을 찍은 동영상을 보고 나서 든 상념

# 페북에 누군가 올린 기간제 교사를 괴롭히는 고등학생들의 동영상을 보았다. 굴욕적인 장면이지만 교사는 학생의 처벌을 바라지 않는단다. 암튼 학생들은 그저 교육받았을 뿐이란 생각도 든다. 기간제는 괴롭혀도 된다는, 이미 사회가 괴롭히고 있으니까 말이다.

# 기간제, 파견직, 비정규직. 자본주의가 발달하며 노동계급의 힘도 함께 발달하며 임금을 올리니까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자본가가 고안해낸 노동자 아래 노동자다. 사회는 그러고는 상대적 우위에 놓인 노동자를 “귀족노조”라고 매도하여 노노분열을 부추겼다.

# 노노분열을 일으키려는 이유는 딱 한가지다. ‘너희들이 천대받는 것은 나때문이 아니라 귀족노조때문이다’라는 착시효과를 일으키기 위해서인데, 이게 꽤 잘 먹혀들었다. 누구도 “귀족자본가”라고 부르지 않지만 정규직만 많은 회사도 “착한 회사”라고 칭송한다.

# 이제 정부는 정규직이라 할지라도 저성과자는 자르고 취업규칙도 불리하게 고칠 수 있게끔 하려고 한다. ‘노동자 지위 향상 – 비정규직 양산 – 정규직 고용안정 해체 – 모든 노동자의 각자도생’의 과정이 진행 중이다. 명심할 것은 치킨집은 차리지 말 것.

# 이러한 경제 체제를 공고하게 만드는 중요한 사회적 요인은 바로 문화다. 노동자를 천시하고, 잘못을 사과하지 않고, 이익을 위해 남을 해하는 것이 용납되는 문화가 제도만큼이나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그 학생들만 욕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