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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경제성장은 어느 나라에서 주도하고 있을까?

보스턴컨설팅그룹에 따르면 2014년에서 2016년간의 기간 동안 전 세계의 경제성장의 약 52%는 중국과 미국에 의해 창출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중국과 미국을 포함한 16개국이 전체 경제성장의 80% 이상을 담당하고 있다. 따라서 BSG는 투자자들이 이머징마켓에 가지고 있는 의욕적인 전략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있다.

Courtesy of: Visual Capitalist

 

한편 지난 한해 어느 자산의 가격이 가장 많이 올랐을까? 맥쿼리에 따르면 달러와 나스닥 등이다. 그래프를 보면 애써 원자재와 같은 대체투자에 몰두했던 투자자들에게는 고난의 한해였음을 알 수 있다. 달러화의 강세는 곧 국제유가의 추가하락 예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제 유가가 바닥이 어디라고 함부로 이야기할 사람이 없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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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인출권(special drawing right)의 탄생 과정

처음에 미국은 달러의 기축 통화 역할을 축소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 특별 인출권과 같은 수단을 만드는 것에 반대했다. 1964년 IMF 연례총회에서 달러의 비대칭적 위상을 반대하던 프랑스는 그러한 수단을 만들자고 제안했으나 미국에 의해 좌초되었다. 드골은 이에 굴하지 않고 국제 체제의 대칭성을 회복하기 위해 남은 유일한 길로서 금본위제로의 복귀를 제시했고 프랑스중앙은행은 달러를 금으로 급히 교환했다. 이러한 은근한 협박은 미국의 공식 입장을 변하게 만들었다. [중략] 미국은 미국의 대외 통화 위상이 더 이상 난공불락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고 1965년에 입장을 바꿔 특별 인출권 창출에 동의했다.[글로벌라이징캐피털, 배리 아이켄그린 지음, 강명세 옮김, 미지북스, 2010년, p178]

국제 통화 체제에서의 프랑스의 역할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서구강국이긴 하지만 통화 체제나 금융 체제에서 선두주자가 될 가능성이 낮은 나라, 그렇기 때문에 강대국들 간의 모임에서도 반골(反骨)의 스탠스를 유지하고 있는 그런 나라가 프랑스다. 프랑스의 이러한 입장이 어떤 경우에는 제3세계의 입장과 동일한 선상이기도 하였지만, 많은 경우 그 반발의 동기는 결코 1인자가 될 수 없는 2인자의 앙탈 같은 느낌이 강하다. 1차 대전 이전에는 영국에, 브레튼우즈 체제 하에서는 미국에, 그리고 유로존의 위기 중에는 독일에게 각각 들이대는 “영원한 2인자”.

아시냐의 비극

론인간은 인간 그 자체를 [노예의 형태로] 원시적인 화폐재료로 삼은 일은 가끔 있었으나 土地를 그렇게 한 적은 없었다. 그러한 착상은 발전된 부르즈와사회에서만 나타날 수 있었다. 그와 같은 착상이 나타난 것은 17세기의 마지막 1/3의 일인데, 그것의 실행을 전국적 규모에서 시도한 것은 그보다 1세기 뒤인 프랑스의 부르즈와 革命期[몰수한 교회토지를 근거로 1789년에 발행된 assignats]였다.[資本論 I(上), 칼 마르크스,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1994년, p112]

봉건제 하에서는 당연하게도 토지는 왕이 영주에게 하사하는 것이었기에 칼 마르크스가 말한 바와 같이 토지를 화폐재료, 즉 교환가치가 실현되는 상품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그것이 상품으로 취급되기 위해서는 왕정과 봉건영주가 세력을 잃어 봉건제가 해체되고 부르주와가 사회 주도세력으로 등장하고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토지를 가장 먼저 상품화시킨 것은 아시냐(assignats)를 발명한 부르주아 세력이었다.

아시냐는 혁명세력이 몰수한 토지를 근거로 – 즉 담보/기초자산으로 – 하여 발행한 화폐다. 화폐의 생성과정을 잘 보여주는 사례인데, 어떠한 정치집단이 채권을 발행할 경우 그 채권의 기초자산으로 금이나 은과 같은 귀금속을 담보로 잡는다면 그것은 금/은본위제가 될 것이고, 아시냐와 같은 경우는 바로 토지본위제가 되는 것이다. 오늘날 파생금융에서 모기지 채권을 기초자산으로 CDO를 발행하는 기법이랄지 부동산 자산을 REITs로 유동화하는 기법 등의 원조는 아시냐인 셈이다.

재정적 위기로 말미암아 심각한 사회적 의의를 지니는 화폐개혁이 실시되었다. 1789년 11월 2일, 제헌의회는 교회재산을 국가에 귀속시켰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한 국유화된 토지재산을 화폐화(貨幣化)해야만 했다. 1789년 12월 19일, 의회는 4억 리브르의 교회재산을 매각키로 결정하고, 그에 상당하는 양의 아시냐를 국유재산을 담보로 지불보증하는 어음의 형태로 발행할 것을 결심했다. 당초 아시냐는 교회재산으로 생활할 수 있는, 연리 5%의 채권(債券)에 불과한 것이었다. [중략] 그러는 동안에도 국고는 텅빈 채로 남아 있었고 부채는 하루가 다르게 증가했다. 일련의 조치를 통해 의회는 국채인 아시냐를 더 이상 이자를 지불하지 않으며 무제한적 강제통용 능력을 지닌 화폐로 변모시켰다.[프랑사 대혁명사 上, 알베르 소부울 著, 최갑수 譯, 두레, 1984년, pp197~1980]

앞서 설명했다시피 인용문을 보면 혁명세력이 그들의 취약한 본원적 축적을 어떻게 실행하였는지 잘 살펴볼 수 있다. 그들은 구세력 중 가장 큰 재산가들이었던 교회의 재산을 몰수했다. 당장 몰수하기는 했지만 토지란 오랜 기간 활용하여야 부를 창출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더군다나 당시엔 토지를 거래할 수조차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토지를 담보로 채권을 발행하고 이것의 원리금을 보증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또 하나의 기막힌 변장술을 선보이는데 바로 아시냐를 ‘채권’에서 ‘화폐’로 바꾼 조치를 취한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간단하다. 아시냐를 ‘구입’해도 연리 5%의 이자를 더 이상 지급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토지에서 생산되는 부를 통해 5%의 이자를 지급하는 채권이었던 것이 이제는 지불수단을 지닌 화폐로 변해서 이자도 못 받는 신세가 되었다. 고로 혁명세력은 무한발권력을 지니게 된 셈이다.

지폐는 모든 가치를 상실했고, 환거래는 붕괴되었다. 1793년 12월에 명목가치의 50%로 떨어졌던 아시냐는 혁명력 2년 열월(1794년 7월)에는 다시 31%로 떨어졌다. [중략] 국고수입이 줄고 아시냐의 가치가 하락했기 때문에 물가의 상승은 국가로 하여금 더욱 거대한 통화팽창을 하도록 자극했다. [중략] 농민과 상인들은 아시냐를 거부하고 정금(正金)만을 찾게 되었다. 아시냐에 대한 거부는 가치하락을 더욱 부채질했다.[프랑사 대혁명사 下, 알베르 소부울 著, 최갑수 譯, 두레, 1984년, p99]

혁명세력도 나름 신진세력으로서 고충이 있었겠고 경제를 하루빨리 활성화시키고 싶은 욕심이 있었겠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무지막지한 일이었다. 채권이었던 것이 하루아침에 화폐가 되고 그마저도 통화증발 등으로 인하여 인플레이션에 시달려야 했으니 말이다. 결국 사람들은 금을 찾게 된다. 기초자산이 마땅히 없는 – 또는 발행자가 포기한 – 화폐가 걷게 되는 비극을 잘 보여주고 있다.

美달러를 보자. 처음 그 화폐는 금과의 교환을 약속했다. 아시냐처럼 채권은 아니었지만 기초자산은 분명히 존재했다. 하지만 금태환이 한계에 다다르자 이를 일방적으로 포기했다. 그리고 이후 – 아시냐처럼 폭발적이진 않지만 – 통화증발이 이어졌다. 달러 약세가 계속되고 정반대로 금 가격은 상승한다. 비슷한 이치다. 다른 것이 있다면 기축통화로써의 수요가 있기에 아직까지 휴지조각이 되고 있진 않은 셈이다.

다른 나라들이 달러를 보유하고 있는 것은 달러에 새겨진 In God We Trust를 믿어서가 아니다. 대체재가 없기 때문이다.

차(茶), 아편, 달러

영국인의 차사랑은 유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럽은 동양의 고급스러운 차 문화를 동경하여 약17세기 경부터 차를 수입하여 음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중에서도 차를 유난히 사랑한 나라는 영국과 네덜란드였다. 영국은 믿거나 말거나 2차 대전 시기 핵무기가 영국에 떨어질 경우 물품부족에 시달릴 것을 걱정하였는데 그 중 차의 부족을 가장 걱정하였다 할 정도다. 그 차사랑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데 일인당 차소비량은 영국(2.3kg), 아일랜드(1.5kg), 뉴질랜드(1.0kg) 순으로 범영국계가 4위 일본(0.9kg)과 나머지 나라들을 압도하고 있다(관련자료).

차를 그토록 사랑한 영국인에게는 불행한 상황이 하나 있었다. 차를 담는 도자기는 어찌어찌하여 본국 생산이 가능하였지만 차만은 영국 땅에서 생산하는 것이 자연조건 상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들은 차를 동양으로부터 수입할 수밖에 없었는데 최고의 차수출국은 당연하게도 중국이었다. 17~18세기의 중국과 유럽의 무역은 차와 같은 ‘사치품의 무역’이 주를 이루었는데 국내생산만으로도 웬만한 소비가 가능한 중국은 무역을 일종의 ‘천조(天朝)의 은혜’로 여길 따름이었다. 이점이 또한 영국에게는 난감한 상황이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그토록 원하는 차와 교환한 마땅한 상품이 없었다는 점 때문이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인도 옥양목의 수입 금지 이후 동양으로부터 수입하는 품목의 주력 상품을 중국 차로 바꾸었다. 그런데 영국 내 차 대중 시장의 확대는 동인도 회사의 중국 무역에 대한 의존도를 한층 높였다. 그 결과 차 무역의 증대는 18세기 말에 영국 정부에 두 가지 중대한 문제를 안겨 주게 된다. 그 하나는 은銀 유출流出의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차 밀수의 문제였다. 은 유출의 문제란, 영국이 중국으로부터 수입하는 차에 비해 영국에서 가져갈 적당한 물품이 없어 전체적으로 상당한 편무역片貿易을 초래하였고 그 결제 수단으로 은을 지출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결국 차의 수입 증가와 함께 대량의 은이 유출되어 은 부족 현상이 심화되었다.[녹차문화 홍차문화, 츠노야마 사가에 지음, 서은미 옮김, 예문서원, 2001년, pp109~110]

은은 오랜 기간 주요한 결제수단, 즉 화폐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중상주의(重商主義) 무역에서 금과 은의 확보가 국부의 핵심이라 생각하고 있던 차에 차라는 소비품, 그것도 사치품을 위해 이들 금속의 유출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였음은 당연하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결국 대체상품의 투입이었는데 그것이 바로 아편이었다. 18세기 말부터 동인도 회사는 인도에서 아편을 대량으로 생산하여 이를 중국에 수출하였고 아편의 유행은 빠르게 중국내륙으로 퍼지게 된다.

결과적으로 중국으로의 은 유입은 줄어들고 급기야 19세기 초에는 중국으로부터 은이 유출되기까지 했는데, 이러한 중국으로부터의 정화(正貨)유출은 유례가 없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은 가격이 크게 올라 중국 경제를 동요시켰고, 동시에 아편중독자가 늘어 사회가 혼란스러워졌다. 중국 정부는 이에 심각성을 느끼고 아편을 강력하게 단속하였다. 하지만 그 결말은 파국적이었다. 즉 영국은 중국정부가 무역을 방해한다는(?) 논리로 시비를 걸어 보복조치를 취하고 결국 1839년에서 1842년에 걸쳐 양국은 이른바 아편 전쟁을 벌였고 중국이 패하여 난징조약을 체결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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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um smokers China” by Archibald Little (1838-1908) – Archibald Little, The Land of the Blue Gown, London 1902 [1].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새삼스럽지만 영국이라는 나라와 동인도 회사의 포악함과 뻔뻔함에는 혀가 내둘러진다. 문물이 발달한 동양을 동경하여 차를 즐기게 되었으면 그 문물의 소중함을 알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데 노력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데, 오히려 그 문물을 오염시키고 파괴함으로써 자신들의 욕망을 달성시켰으니 말이다. 좀바르트가 근세 초기의 자본주의를 만들어 낸 것은 ‘사치’라고 주장하였다는데, 영국의 차가 바로 영국의 자본주의 무역을 활성화시킨 동시에 서구 자본주의가 동양의 봉건주의를 굴복시킨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

한편 이러한 불행한 역사는 현대에 들어 좀 다른 형태로 반복된다. 서구 자본주의는 2차대전 이후 급속하게 발달하였다. 반면 중국은 공산화되어 사회주의 블록을 형성하여 자본주의 블록과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그러던 것이 등소평의 집권 이후 급격한 변화를 맞게 되어 중미 국교수복 등의 상황을 거쳐 오늘날 (영국을 대체한 강대국) 미국과 중국은 과거 영국과 중국이 그러했던 것처럼 활발한 무역관계를 형성해왔다. 이번에도 수출국은 중국이고 수입국은 서구였다. 과거 역사와의 차이가 있다면 양국간에 전쟁은 아직 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또 하나 거슬러 올라 더 중요한 차이가 있다면 지불수단이 은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결제수단은 금본위제를 대체한 달러본위제 시대의 결제수단인 美달러다. 이것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크다. 즉 은은 생산을 하거나 수입하지 않으면 한 국가가 보유할 수 없는 자연자원이다. 반면 지폐는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제쳐놓고 보자면 거의 무한한 규모로 찍어낼 수 있다. 실제로 미국 제조업이 경쟁력을 잃어가며 수입으로 대체하기 시작한 그 즈음부터 미국은 달러를 필요이상으로 찍어내, 소위 세뇨리지의 단맛을 실컷 누려왔다. 바로 그 증발이 용이한 점 덕분에 미국은 정화의 부족에 대한 걱정 없이 달러로 물건을 사들였고 중국은 그 달러를 쓰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서 다시 미국의 채권을 구입했다.

금이나 은과 같은 정화에 연계되지 않은 달러가 양국 무역에 쓰였다는 점 때문에 다행히도(?) 미국이 달러대신 아편을 파는 몹쓸 짓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또한 그 탓에 중국은 은과 달리 다른 소용이 없는 달러와 채권만을 손에 쥐고 있게 되었다. 달러가 여전히 기축통화로써의 위상을 지니고는 있지만, 미국경제가 기울며 달러가 약세로 돌아서며 결제능력이 약화되어 더 많은 달러를 풀고 그 때문에 달러가 더 약해지는 악순환의 고리에 중국이 엮여 들어간 것이다. 그 와중에 금값은 치솟고 있는데 달러약세의 영향도 있거니와 근원적으로 금이라는 정화가 달러와의 연계가 끊어졌고 시장이 이를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신의 필요 이상으로 생산하게 되고 이를 교환하기 시작한 이래 화폐는 다양한 상품의 교환에 표준적인 잣대를 제공하며 시장을 발전시켜왔다. 금과 은은 그 고유한 기능으로 인해 진작부터 화폐로써의 독점적인 지위를 누려왔지만 유한한 자원이라는 태생적 한계 등으로 말미암아 종이돈에 그 지위를 물려주었다. 종이돈이 권위를 가지는 배경은 단 하나 그 돈을 찍어내는 국가에 대한 믿음(credit)이다. 실로 현재의 금융위기의 가장 정확한 표현은 그런 점에서 ‘신용붕괴(credit crunch)’다. 아편처럼 피워 없애지 않았지만 그 소용이 갈수록 줄어드는 달러를 중국이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가 향후 세계경제의 주요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다.

결국 달러는 미국인에게 아편이었던 것일까?

캐리트레이드

그래서 이 거대한 랠리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확실히 그것은 제로 금리에 가까운 이자율과 양적완화에서 비롯된 유동성 물결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러나 이 자산 버블을 추동하는 더 중요한 요소는 모든 캐리트레이드들의 어머니인 美달러의 약세이다. 美달러는 Fed가 이자율을 현상유지하고 오랜 기간 동안 계속 그럴 것이라고 예상됨에 따라 캐리트레이드의 주요한 저금리 통화가 되었다. 높은 레버리지를 기반으로 하는 더 높은 수익률의 자산과 다른 글로벌 자산을 매입하기 위해 美달러를 매도하는 투자자들은 달러를 단순히 제로 금리에 빌리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美달러 약세로 달러 숏포지션에 거대한 자본이익을 안겨줌에 따라 — 연 이율로 하면 마이너스 10에서 20%까지 내려가는 — 엄청난 마이너스 금리로 빌리고 있는 것이다.
그 대신 사람들이 그들의 총 포트폴리오들에 대한 value at risk(VAR)의 감은 증가할 수밖에 없는데 각각의 자산군 사이의 위험 상관관계가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모두는 이 평범한 통화정책과 캐리트레이드에 의한 것이다. 사실상 그것은 하나의 거대하고 단순한 거래가 되었다. — 달러를 매도하고 임의의 글로벌 위험자산을 사라.[Mother of all carry trades faces an inevitable bust, 전문보기]

둠박사 누리엘 루비니의 경고다. 사실상 금융업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캐리트레이드다. 선진국들의 낮은 금리의 안전한 통화를 기반으로 나머지 나라들의 금융기관들이 가산금리를 붙여 기업과 가계에 대출하는 방식이다. 현재의 캐리트레이드는 그 공식을 따르고 있을 뿐이다. 차이가 있다면 ‘저금리 통화(funding currency)’인 美달러가 ‘안전한’ 통화가 아니라는 점이다. 루비니도 지적하다시피 달러 약세는 캐리트레이드와 정비례 관계이다. 그러니 둘은 서로를 가속화시킨다. 하지만 값싼 통화는 기축통화는 고사하고 저금리 통화도 되지 못하는 법이다.

어느 순간 美당국이 — 혹은 시장이 — 이에 대한 위기감을 느껴 금리를 올리고 달러가 강세로 돌아서는 순간, 각 투자자들이 포지션을 청산할 것이다. 포지션 청산기는 완만한 수준으로 전개되는 포지션 구축기와는 달리 모든 사태가 급격하게 돌아간다. 바로 얼마 전에 목격했던 그 거대한 디레버리징을 상기하면 된다. 루비니를 비롯한 비관론자들은 현재의 캐리트레이드가 적절한 조절 없이 청산되면, 그 여파는 이전의 금융위기를 무대연습 수준으로 느끼게 할 정도로 강력한 것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세계 경제 불균형에 대한 버냉키 의장의 시각과 의미

현재의 경제위기의 근저에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국제무역불균형(Global Imbalance)’이 자리 잡고 있다. 즉, 한쪽은 열심히 쓰는데 한쪽은 열심히 팔기만 하고 있으니 쓰는 쪽은 빚내서 쓸 수밖에 없고, 결국 그것이 한계에 도달하여 삐걱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경제에서는 무한정 개미와 무한정 베짱이만 있으면 곤란하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상황과 관련, [자본시장연구원]에서 짧지만 알찬 글을 발견하여 소개한다. 미국의 재정적자의 근본적 모순, 달러약화에 대한 미국의 입장, 아시아 국가의 외환보유액 증가 배경, 제2의 플라자합의가 불가능한 이유, 각국의 대안 등이 조밀하게 잘 설명되어 있으니 일독을 권한다. 파일 다운로드는 회원만 가능한데 무료회원이므로 등록하여 들를만한 곳이다.

세계 경제 불균형에 대한 버냉키 의장의 시각과 의미

경제예측

가장 최근의 사례로는 2004년 12월 달러가 최저점을 기록했을 때를 들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주간지로 꼽히는 <이코노미스트>의 표지 기사 제목은 ‘달러의 실종’이었다. 얼마 뒤 <뉴스위크>는 ‘믿을 수 없는 달러화 위축’이라는 제목의 머릿기사를 실었다. 그리고 워렌 버핏이 막대한 규모의 달러화 공매도를 한 것을 놓고 수많은 사람들이 글을 썼으며, 또 다른 유명한 투자가는 달러화 공매도가 소위 ‘대박’을 터뜨릴 것이라고 했다. [중략] 사실 나도 이 광풍에 휩쓸려서 달러화 공매도를 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던가. 달러는 그 광풍이 한창이던 때에 최저점을 기록한 뒤 곧바로 반등을 시작해서 달러 지수를 거의 10% 이상 끌어올렸다. [중략] 2005년 늦봄에도 언론은 새로운 광풍을 일으켰다. 주택 가격의 거품이 꺼지면서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부동산 활황은 새로운 골드러시이며 거대한 거품이기 때문에 재앙이 임박했다는 경고가 쏟아졌다. 늘 믿을 만하던 매체라 생각했던 <비즈니스위크>의 2005년 4월 11일자 특집 제목은 ‘주택 호황 이후를 생각한다 : 곧 다가올 경기 후퇴는 경제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일까?’였다. <포춘>, <워스>, <이코노미스트> 그리고 <뉴욕타임스> 모두 이 합창에 목청을 높였다. 정말 놀라운 일이다.[투자전쟁(원제 : Hedgehogging), 바턴 빅스 지음, 이경식 옮김, Human & Books, 2006년, pp245~246]

부유한 은행가의 자식으로 태어나 예일대를 졸업한 후, 모건스탠리와 헤지펀드에서 활약한 뛰어난 투자가 바턴 빅스의 투자일지 ‘투자전쟁’의 일부다. 이 글은 ‘시장이 극단으로 달릴 때 개미 군단은 늘 잘못된 선택을 한다’라는 작은 절에서 발췌한 내용으로, 읽어보면 익히 알겠지만 빅스는 경제지나 전문가들마저 추세예측에 실패한다는 것을 달러화와 부동산 활황에 대한 시장의 우려를 예로 들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정말 부동산 시장이 붕괴되고 말았으니 이번에는 <비즈니스위크>가 맞았고 빅스가 바로 스스로 지적한 “잘못된 선택을 한 개미 군단”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정말 놀라운 일이다.”

책을 읽어보면 빅스는 철저한 가치투자자이다. ‘가치투자자’란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경제를 거시적인 측면에서 분석하여 향후 예측되는 추세에 따라 장기적으로 투자하는 행태를 일컫는 것이라 할 수 있다.(주1) 실제로 ‘투자전쟁’의 다른 부분을 보면 빅스가 전체 경제상황을 면밀히 분석하여 원유가격 공매도에 나선 일화가 소개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양반이 불과 몇 달 후를 내다보지 못하고 부동산 활황을 경고한 언론은 비웃었다.

나는 이 글에서 빅스의 어리석음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만큼 경제예측이란 어렵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실제로 경제위기가 몰아닥쳤을 때 대부분은 달러의 폭락을 예측했다. 하지만 달러는 보란 듯이 강세로 – 최소한 보합세로 – 돌아섰다. 이에 대한 사후분석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어려울수록 달러’라는 신화가 재연된 것이다. 마치 금태환 정지를 선언한 1970년대 달러가 더 강고한 기축통화가 되었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경제예측은 힘들까? 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모든 계(界)중에서도 가장 복잡한 계이기 때문이다. 주요변수들은 존재하지만 그밖에도 수많은 변수들이 존재한다. 때로 하찮은 변수라 여겨졌던 것들이 주요변수로 수시로 급변하기도 한다. 심지어 사후적인 분석조차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러하기에 경제관은 늘 좌우로 갈라지며 각각의 입장에 대한 백가지 변명이 존재한다.

또 하나 이유를 들자면 그 예측 자체가 또 하나의 변수가 된다는 사실이다. 실로 경제는 여타 분야와 달리 예측을 하는 그 자신이 그 시스템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스스로도 변수가 되는 환경을 가지고 있다. 이른바 자기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이 가장 잘 먹히는 곳이라는 이야기다. 개개 경제주체들이 실상은 멀쩡한데도 어느 한 은행이 망할 것이라는 심리적 불안감 때문에 그 은행의 예금을 인출한다면? 정말 망한다. 이것이 bank run이다.

그래도 경제예측은 해야 한다. 현재의 경제 시스템은 예측을 하지 않으면 정부와 기업들은 경제정책을 수립할 수도 없고 경제활동을 할 수도 없는 구조다. 그런데 또 그 예측에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편견이 개입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둘러싸고 정치사회적 반목을 일으키고, 어떤 이는 횡재를 얻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쪽박을 차기도 한다. 이것이 시장에서의 경제예측 및 계획의 근본한계다. 완벽한 예측과 계획은 있을 수 없다. 다만 그에 접근해갈 뿐이다. 그럼에도 어떤 이가 자신은 ‘완벽하게’ 예측할 수 있다고 선전한다면 그는 ‘완벽하게’ 사기꾼이다.(무슨 ‘주가大예측’ 이런 문구 들어가면 100% 사기라 할 수 있다)

 

(주1) 그래서 이들은 기술적 투자, 모멘텀 투자를 혐오한다고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