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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준의 금융만능주의

9월의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 기간 동안 호니그는 연준이 하고 있는 작태에 대해 가장 압축적이고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미국의 심각한 경제침체가 은행 대출의 기회 박탈때문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은행은 이미 빌려줄 돈이 많았다. 각종 심각한 문제가 악화되어가는 실물 경제에서의 진정한 문제는 연준이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금융 시스템 밖에 놓여있었다. 금리를 제로 상태로 유지하고 금융 시스템에 6천억 달러를 쏟아붓는 것은 – 위험한 대출이나 금융적 투기 이외에는 갈 곳이 없는 돈 – 미국 경제의 근본적인 기능장애를 해결할 수 없었다. “난 고금리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에요. 난 그런 적도 없어요. 난 제로 금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고출력의 수십조 달러를 투입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호니그가 덧붙였다.[The Lords of Easy Money : How the Federal Reserve Broke the American Economy, Christopher Leonard, 2022년, Simon & Schuster]

벤 버냉키가 연준 의장으로 있던 글로벌 금융위기에 즈음하여 연준이 어떠한 정책을 시도하였고 이로 인한 내부의 갈등과 그 경제적 효과에 대해 서술한 책이다. 인용한 부분은 당시 캔자스시티 연준 총재이자 FOMC의 멤버였던 토마스 호니그(Thomas M. Hoenig)의 활동과 견해에 관한 에피소드다. 호니그는 당시 열린 FOMC에서 2010년 무렵부터 버냉키의 제로 금리 및 양적완화에 반대하며 버냉키에게 박힌 인물이다. 결국 그의 외로운 투쟁이 헛되게도 연준은 엄청난 돈을 경제 시스템에 쏟아부으며 위기를 돌파하려 했다.

양적완화라는 사실상의 마이너스 금리의 시대는 당시의 경제 시스템을 정상으로 돌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후과는 어쩌면 최근 몇 년간의 인플레이션과 이에 따른 연준의 고금리 정책이라는 또 다른 ‘뉴노멀’의 시대를 초래하였을 것이다. 이에 대한 고찰은 뒤로 하고 내가 저 글을 인용한 이유는 호니그의 금융만능주의에 대한 경고에 어느 정도 공감하기 때문이다. 금융만능주의란 실물경제가 금융과 긴밀하게 결합하여 작동하기 시작한 이후 실물경제의 모순을 금융적 수단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맹신을 묘사하고자 생각해낸 표현이다.

실제로 현대의 경제 시스템에서 화폐, 채권, 주식, 증권화, 유동화, 보험 등 실물경제를 원활하게 움직이게 하기 위한 각종 금융적 수단이 고안되면서 금융은 실물경제의 활력을 불어넣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부문이 된 것이 사실이다. 개인이 집을 한채 사더라도 대출을 통한 레버리지라는 금융수단이 아니고서는 쉽게 결정할 수 없는 경제행위가 되었다. 그렇기에 금융을 통한 유동성 공급은 대량생산/대량소비 시스템에서의 경이적인 경제성장에 큰 몫을 담당하였고, 전 세계 경제는 통합된 금융 시스템으로 묶여 돌아가는 생태계로 발전하여 왔다.

한편으로 이미 많이 알고 있다시피 금융은 한편으로 그 자체가 문제를 발생시키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로 미국 주택시장에 지나치게 많은 유동성을 공급하여 전체 경제 시스템이 망가졌던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를 들 수 있다. 결국 금융 시스템이 실물 경제에 공급하는 유동성의 적정량은 실물 경제가 창출해낼 수 있는 사용가치(worth)가 감내해낼 수 있는 수준이 될 것이다. 만약 유동성 공급이 이 가치를 초과하게 된다면 일부 자산의 가격에 거품이 끼면서 사용가치와 무관한 교환가치(value)가 형성될 것이다. 이것이 허다한 금융위기의 원인이었다.1

2010년 버냉키의 시도는 실물가치가 형성되고 있지 않은, 즉 기초체력이 없는 경제 시스템에 양적완화라는 근육 촉진제를 억지로 주입하였던 시도라고 생각한다. 이로 인해 단기간 경제는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촉진제의 비용은 지금 연준의 재무제표, 과도하게 공급된 부동산, 미국채를 잔뜩 사들여놓은 주요국의 외환보유고 등에 임시로 쌓여있다. 이러한 거품은 팬데믹 시기를 거치면서 실물 경제의 기능마비로 인해 더욱 커졌고 이로 인해 파월의 연준은 그간의 제로 금리를 끝내고 고금리 정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해 한국의 아파트 가격이 크게 떨어지면서 많은 시장참여자는 연준의 정책이 자신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 가를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실물과 금융이 글로벌 단위에서 연계가 되면서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의 시장참여자도 금융정책 기관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미연준의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시대가 되었다. 문제는 다시 원래의 문제의식으로 돌아가 관심도의 증가가 연준이 할 수 있는 능력의 증가는 아니라는 점이다. 교환가치의 증감이 사용가치의 증감으로 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은 금융 GURU들의 오만함일 것이다.

위기의 이연을 위한 양적완화가 초래한 결과

경제학자들은 통화당국이 상업은행에 단기 준비금을 제공하고 장기 국채를 매입함으로써 중앙은행의 채권매입 프로그램이 사실상의 재정정책의 하나였다는 것에 동의한다. 최근까지 이건 괜찮은 비즈니스처럼 보였다. 채권은 기술적으로 수익이 거의 없는 반면 조달비용이 무척 저렴했기 때문에(예를 들어 유로존에서는 -0.5%) 중앙은행은 어쨌든 이익이 났다. 그러나 많은 나라에서 물가가 두자릿수에 이를만큼 치솟음에 따라 중앙은행은 정책금리를 급하게 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단기 금리가 장기 채권수익률을 뛰어넘으면서 조달비용이 증가하였다. 결과적으로 중앙은행은 자산의 손실에 직면하여 채권매입 프로그램의 재정 리스크가 현실화되고 있다.[The Fiscal Cost of Quantitative Easing]


금융역사에서 전세계에 큰 파급효과를 초래한 양적완화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의 양적완화, 그 다음이 이번 팬더믹 이후의 양적완화라고 할 수 있다. 두번의 양적완화에서 공급된 유동성이 팬더믹 이후 복합적인 요인과 맞물려 전세계적인 인플레이션에 악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어림짐작할 수 있는 바이지만, 이를 공식적인 발언으로 인정한 중앙은행 관계자는 소수에 불과하다. 어쨌든 그 결과 상당기간 지속되었던 제로금리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사상 초유의 속도로 금리가 상승하고 있다.

지난 3월 연방준비제도의 의장 제롬 파월은 한 TV인터뷰에 출연했다. 질문자는 파월 의장에게 “Fed가 경제에 투입할 수 있는 화폐량에 제한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했고, 파월 의장은 “우리는 계속 빚을 창출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주안점은 가계와 기업에게 경제에서의 신용의 흐름을 지원하기 위해서다”라고 발언하여 사실상 그런 제한은 없음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3월 23일 긴급성명을 통해 사실상의 무제한적 양적완화를 선언한 이후 최근까지 파월 의장은 자신의 인터뷰 발언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Fed의 자산을 거침없이 늘려 마침내 최근 7조 달러(!)까지 자산이 늘어났다. [Fed의 무제한 양적완화 도박은 성공할 것인가?]

2년 전에 이 블로그에 올린 글의 일부다. 각국 중앙은행의 이 무제한 양적완화의 결과 2년 동안 의 세계경제를 되돌아보면 각국의 국경의 봉쇄와 락다운이라는 초유의 사태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경제는 유지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주요국에서 주가도 뛰고 집값도 뛰고 ‘유행병의 영향이 있는가’ 싶을 정도로 자산가에게는 행복한 2년이었다. 그리고 이연된 위기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즈음에 본격화된 것 같다. 러시아가 유럽으로의 가스 공급을 사실상 중단하면서 저인플레의 민낯이 드러나기도 했다.

휴 필 BOE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이날 영국 상원에 출석해 “최근 물가 오름세의 주원인은 천연가스 가격 상승”이라면서도 “또 다른 원인으로 통화정책에 대한 BOE의 결정도 포함된다고 하는 것이 정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후적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지금이라면 그런 (완화적 통화정책을 지속하는)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중략]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경우 인플레이션 원인으로 통화정책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연준 올 3월 이후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성명서에서 △팬데믹 △에너지 가격 상승 △러시아의 전쟁 △중국 도시 폐쇄를 인플레이션의 원인으로 꼽고 있다.[BOE 수석 이코노미스트 “펜데믹 양적완화는 실수였다”···중앙銀 ‘인플레 유발’ 첫 인정]

팬더믹에서의 양적완화는 이전의 양적완화에서도 그랬지만, 그 수혜자는 주식과 주택을 소유한 자산가였다. 그리고 이연된 인플레이션이 경제를 침체에 빠트리려할 즈음에 파월은 노선을 180도 선회하여 정책금리를 올렸다. 다시 처음 인용문으로 돌아가 이 경우 중앙은행은 그들의 포트폴리오에서 손실을 입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중앙은행의 이익이나 손실은 해당국의 재무부처로 귀속되므로 결국 손실부담의 주체는 납세자다. 인플레와 납세로 두번 고통을 받는 셈이다.

Fed의 무제한 양적완화 도박은 성공한 것인가?

“대량의 중앙은행 언와인드(great central bank unwind)”

Fed가 다음달 4조5천억 달러에 달하는 그들의 재무상태표를 줄이기 시작하기로 하면서 도이치뱅크는 이번 주 그들이 “대량의 중앙은행 언와인드(great central bank unwind)”1라고 부르는 이 조치가 다음 금융위기를 초래할 몇몇의 후보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중략] 언와인드에 관해 Fed는 예상한 것처럼 10월에 그들의 재무상태표를 서서히 줄여가겠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재무상태표는 장기 이자율을 내리고, 위험자산에 투자자들을 유인하고, 투자를 촉진하고, 위기로 인해 고통 받는 경제를 떠받치기 위한 목적의 공격적인 자산 매입 프로그램의 결과로 엄청난 속도로 증가하였다. [중략] 도이치뱅크의 분석가들은 투자자들이 중앙은행의 재무상태표 규모와 소위 양적완화 프로그램에 수반되었던 효과적인 화폐 발행의 범위에 대해 시큰둥해하기만 할지 의문스러워했다.[How the ‘great central bank unwind’ could ignite the next financial crisis]

금융위기 당시 정부가 했던 조치 중 가장 황당한 조치를 꼽으라면 중앙은행의 채권 직매입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역할을 시장의 조성자로 국한하여야 할 중앙은행이 끝내는 직접 시장 그 자체가 됐다는 점에서 그렇다. 특히 MBS의 매입은 더욱 놀라웠는데, 패니메와 같은 정부보증기관이 보증 또는 발행한 채권을 정부나 다름없는 Fed가 다시 사주는 자금흐름을 보면 ‘과연 이게 자본주의 경제가 맞나’하는 의문을 갖게 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가장 큰 시장의 상품 공급자가 모두 사실상의 정부라면 시장경제라 부르기에 민망하기 때문이다.


금융위기 이후 MBS는 장기국채와 함께 Fed의 재무상태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자산이 됐다. 그 덕에 Fed는 가장 돈 많이 버는 은행이 되기도 했었다. 시장금리도 낮게 유지가 됐다. 그래서 Fed는 이제 경제가 정상화되어가고 있고, 이에 따라 자신의 비정상 자산을 정상화시킬 때가 도래했다고 여기는 것 같다. 실제로 투자자들의 위험 감수 열기도 고조되고 있는 듯 하다. 월스트리트저널의 보도에 따르면 저신용 기업이나 사모펀드가 고금리로 빌려 쓰는 레버리지드론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2 하이일드 채권 거래도 폭증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인용문에서의 분석가의 우려대로 상황이 녹록치 않다. 레버리지론과 하이일드 채권 거래의 폭증은 Fed의 채권매입을 통한 금리 안정화라는 전제 하에 가능한 투자행위였다. Fed가 이제 시장이 정상화됐으니 자신의 자산도 정상화시키겠다고 결정한 것은 자신의 시장에서의 존재감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판단이 든다. Fed의 현재 자산은 미국 GDP의 4분의 1에 해당한다. 이런 규모의 자산이 시중에 풀린다면 채권금리의 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다. 정상화된 시장이 사상누각임을 확인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Fed도 이런 우려를 알고 있는 듯 채권을 한꺼번에 매각하는 방식 대신 만기도래 채권을 재매입하지 않고 상환 받는 방식을 취하겠다는 방침이다. 시장의 반응은 아직까지는 미온적인 편인데 유럽과 일본 중앙은행의 양적완화 방침은 아직도 여전하기 때문인 것도 한 몫 한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동안의 매입 프로그램이 유례가 없었듯이 이번 조치 역시 유례가 없기 때문에 그 여파를 정확히 예측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번 조치가 경제의 어떤 티핑포인트를 건드린다면 도이치뱅크의 우려가 현실화될 수도 있다는 점이 비관적인 시나리오다.

한편 Fed 자산 축소가 하필 지금 시점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관점으로 보자면 Fed의 결정은 다소 정치적 판단이라는 생각이 든다. 현 정부는 오바마의 QE정책과 이를 통해 낮은 금리를 향유하며 정부부채를 끌어다 썼던 오바마 정부를 좋아하지 않는 공화당 정부다.3 게다가 얼마 전에 美정부의 또 다른 권력자 이방카가 옐렌을 만났다.4 물론 탁 까놓고 말하자면 늘 경제는 정치적이었다. Fed의 사상 최대의 채권 매입 프로그램은 면밀한 경제성 분석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정치적 임시방편이었고 그 자산의 언와인드도 또 다른 정치적 고려로 여겨진다.

싸움에서 선빵이 중요하듯이, 정책실행에선 용어가 중요하다

어느 정부나 자신이 추진하는 정책은 일단 멋진 용어로 포장해야 한다. 여론이 정책실행 동력의 주요한 변수가 되어버린 현대의 정치지형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박근혜 정부는 특히 – 의외로(!) – 경제정책의 용어 선점에 익숙했다. 멀리는 지난 대선 국면에서의 “경제민주화” 용어 선점이 있었다. 이후 그 용어는 집권 성공과 김종인의 퇴장과 함께 짧은 생을 마치고 장렬히 산화하였다.

그 다음에 등장한 주요한 경제용어(?)는 “창조경제”다. 이 표현이 쓰일 즈음 당시 유행하던 농담이 ‘도대체 정체를 모를 것이 ㅇㅊㅅ의 “새정치”와 ㅂㄱㅎ의 “창조경제”’라고 할 정도로 오리무중인 이 용어는 그래도 “경제민주화”보다는 오랜 생명력을 가지며 버텼다. 주로 서구의 각종 성공사례가 “창조경제”의 성공사례라고 주장하는 식이 아전인수적인 해석을 통해 그 생명력을 연장한 것이다.

그 다음에 등장한 주요한 표현이 “노동개혁”으로 대표되는 “4대개혁”이다. 행정부는 자신의 개혁의지가 담긴 노동개혁 법안을 국회가 통과시켜주지 않는다며 “국회심판론”을 내세웠고, 선거가 끝난 이후에도 ‘국회가 심판당한 것’이라며 – 우리는 평행우주를 살고 있는가? – 노동개혁을 중단 없이 밀고 가겠다고 할 만큼 집권 후반기인 현재까지 행정부가 집요하게 추진하고 있는 국정과제다.

“경제민주화”와 “창조경제”가 콘텐츠 없는 레토릭에 가까웠다면 “노동개혁”은 개혁과 거리가 먼 노동개악의 모습을 지닌 존재이자 노동자의 삶에 영향력을 지닐 수 있는 – 또는 이미 영향을 미치고 있는 – 존재다. 여론이 이 “개혁” 레토릭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에 대해서는 갑론을박이 있지만, 적어도 이번 선거결과를 놓고 보자면 유권자를 박근혜 식 “개혁”을 승인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제 현 정부가 꺼내든 또 하나의 신박한 용어가 있는데, 바로 “한국형 양적완화”다. 총선 국면에서 여당의 강봉균 선대위원장(뭐 그런 비스무리한 직함)은 난데없이 “양적완화” 정책을 내놓았다. 각국이 제로금리를 넘어 더 이상의 금리정책을 내놓을 수 없는 상황에서, 주로 장기 금리를 낮추기 위해 내놓은 이 정책을 우리나라에서 시도하겠다고 해서 어이가 없던 와중에 다행히 선거에서 패배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카드를 청와대가 꺼내들었다. 청와대 관계자는 일본의 양적완화는 “묻지마 양적완화”인 반면에 우리의 양적완화는 “특수 목적을 갖는 양적완화”라고 주장하는 등 일본에 의문의 1패를 안기는 자화자찬까지 곁들였다. 정책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서 선거에서 패한 정책을 다시 꺼내든 것부터가 유권자를 무시하는 것이다. 게다가 전문가들은 이 정책이 양적완화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부가 이 용어를 선점한 의도는 무엇일까? 전에 담뱃값 인상 등 사실상의 증세를 실행하면서도 “증세는 없다”고 강변했고 이 입장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비슷한 논리로 특정산업의 구조조정을 수행할 국책은행에 중앙은행이 자본을 확충하는 행위는 “양적완화”가 아닌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그렇게 명명한 것이 중요한 것이다. 남들 다하던 바로 그 한국형 “양적완화”.

디플레이션이 꼭 나쁜 것일까?

맥킨지는 지난 달 내놓은 보고서에서 호주와 말레이시아와 함께 태국과 남한을 가계부채가 지속 불가능할 수 있는 곳으로 꼽았다. 남한의 소득 대비 가계부채 수준은 가용 가능한 최신 자료인 작년 2분기 말 현재 144%다. 이는 미국의 서브프라임 위기 직전보다 높은 수준이다. [중략] 한국은행은 집값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는 신용 강화를 원하지 않는다. 스탠더드차터드에 따르면 그 경우 가계자산의 4분의 3이 부동산인 – 미국의 25% 수준보다 훨씬 높은 – 이 나라에는 큰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Asian Central Banks’ Dilemma: Balancing Debt and Growth]

예상대로 한국은행이 금리를 내려 사상 최초로 1%대 기준금리 시대에 접어들었다. 얼마 전 경제부총리가 “디플레이션”을 거론하던 상황에서 이미 짐작할 수 있었던 결과다. 국가경제 차원에서 보자면 디플레이션이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하지만 개별 경제주체별로 보면 그 손익분석이 다를 것이다. 무주택자에 무차입자라면 – 임금하락을 빼놓고는 – 디플레이션이 나쁠 것 없다. 현금을 모아놓으면 그 가치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빚을 내어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자라면 손해다. 실물가치가 내리는 와중에 실질금리는 상승하는 이중고에 시달릴 것이기 때문이다. 자산 중 압도적인 비중이 부동산인데다 가계부채 수준도 높은 이 나라는 역시 금리인하라는 모르핀 이외에는 뾰족한 방도가 없는 것일까? 언제까지 이 모르핀을 맞아야 할 것인가?

음악이 흐르는 동안은 계속 춤을 출 투자자

‘경제위기국’ 낙인이 찍혔던 키프로스, 그리스, 에콰도르 등이 잇달아 국채 발행에 성공하며 국제금융시장으로 속속 복귀하고 있다. [중략] 미국, 유럽 등 주요 선진국 중앙은행들이 저금리 정책을 유지하면서 해당 국가의 국채 수익률이 저조하자 투자자들이 과거에는 눈길도 주지 않던 국가들의 국채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는 것이다.[‘경제 위기국’ 국제 금융시장 복귀 러시, 서울경제, 2014년 7월 2일]

서구의 투자자들이 자국의 낮은 금리로 조달한 금액을 이머징마켓이나 경제위기국에 투자하여 차액을 챙기는 이른바 “캐리트레이드(currency carry trade)”가 계속 되고 있다. 최근 EU의 문제아로 낙인찍힌 그리스가 5년물 국채를 5%에 조달하는가 하면 2008년 채무불이행을 선언한 에콰도르조차 10년물 국채를 7.95%에 조달했다고 한다. 이런 “비이성적인” 투자는 선진국 중앙은행의 저금리 정책과 막대한 유동성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이런 저금리가 마냥 계속될 수는 없다”고 말하지만 투자자는 음악이 흐를 동안은 춤을 춰야 하는 모양이다.

채권 투자자는 보통 채무자의 신용 리스크, 환(換) 리스크, 인플레이션 리스크 등을 부담해야 한다. 국제적으로 큰 손으로 행세하고 있을 서구 투자자는 이 중에서 환 리스크에 대해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많은 국채들이 기축통화 표시채권으로 발행되기 때문이다. 신용 리스크가 가장 큰 리스크 인데 자국정부가 국제정치에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면 신용 리스크 또한 상대적으로 경감될 수 있다. 1990년대 멕시코의 페소 위기 당시 서구 채권자에 대한 채무불이행이 우려되자 빌 클린턴이 구제 금융을 통해 불이행을 막은 것이 한 예이다.

Bond issued by the Dutch East India Company in 1623

최근 아르헨티나를 디폴트로 몰아넣을 수 있는 헤지펀드와의 소송도 좋은 예다. 2000년대 초반 아르헨티나는 경제위기에 직면하여 채권자들에게 부채 조정을 요구했고 신용 리스크에 노출된 채권자 상당수는 불가피한 헤어컷에 동의했다. 하지만 이에 불복한 미국의 한 헤지펀드는 완전한 변제를 요구하며 법정 투쟁을 벌였다. 미국에서 발행된 채권이니 만큼 미국 법원에서 벌어진 재판에서 재판부는 아르헨티나 정부가 채무를 모두 갚으라고 판결했다. 어쨌든 서구 투자자는 다른 지역의 투자자라면 누리지 못할 보호막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환(換)과 신용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지고 금리 아비트리지 까지 향유할 수 있다면 서구 투자자가 경제위기국에 대한 투자를 망설일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중앙은행은 기축통화를 저리에 융자해주고, 채무국의 채무불이행이 우려되면 정부나 법정은 채무이행을 강제할 것이고 – 물론 그마저도 안 통할 때도 있지만 – , 투자자는 차익을 향유할 것이다. 어쩌면 현재 상황에서 투자자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이성적인” 투자일지도 모른다. 바닥을 기고 있는 美국채를 사는 것이 멍청한 일 아니겠는가? 언제까지 음악이 흐를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바클레이스의 LIBOR 조작 스캔들 단상

영국의 투자은행 바클레이스의 LIBOR 조작 스캔들의 여파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 사건은 금리를 민간 기업이 조작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 조작이 정부당국의 묵인 하에 이루어졌을 개연성이 있다는 사실로 인해 시장에 더 큰 충격을 주고 있다. 금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금융회사에게 있어 생산원가나 같은 의미다. 그런 의미에서 금리 조작은 가격담합과 같은 의미를 가지기에 이번 행위를 셔먼 반독점법 위반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셔먼법 제1조는 부당하게 거래를 제한하는 계약(contract), 담합(combination) 또는 결탁(conspiracy)을 금지하고, 제2조는 단독의 독점행위 및 독점의 시도 행위와 함께 독점하려는 결탁을 금지한다. 그리고 클레이튼법 제3조는 임차인이나 구매자가 임대인이나 판매자의 경쟁자의 상품을 이용하거나 거래하지 않는다는 조건, 합의 또는 양해 아래 체결된 임대차 또는 상품 매매계약을 위법하다고 규정한다. (…) [The Sherman Antitrust Act (1890), 출처, 재인용]

이 사건은 당초 내부고발자의 고발에 따라 미국의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가 2008년 5월부터 수사에 착수한 건이다. CFTC는 2010년 봄에 금리조작에 대한 강력한 증거를 가지고 영국의 금융당국에 협조를 요청했고, 이후 사건수사는 영미의 공조 하에 진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관련 기사 보기) 현재 바클레이스는 혐의사실을 인정하고 법정에 가지 않는 대신 영미의 규제당국에 4억5천만 달러의 합의금을 내는 것으로 면죄부를 받았다.

그렇다면 바클레이스는 왜 Libor를 조작했는가? 은행은 2007년 후반기부터 2009년 5월까지 자체 조달 금리를 낮게 보고한 것을 인정했는데, 은행이 금융위기 동안 투자자들을 안심시키고(속이고?) 싶었고 다른 은행들도 다 그렇게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라 한다. 또한 트레이더들이 파생금융상품에서 돈을 벌기 위해 금리신고에 부당하게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인정했다.(관련 기사 보기) 금리조작으로 투자자도 속이고 돈도 벌고 일석이조인 셈이다.

리보를 기준으로 산정된 이자를 받는 채권 투자자는 은행들이 금리를 낮게 조작하면 그만큼 손실을 보게 된다. 금리가 올라갈 경우 이득을 보는 파생상품을 보유한 투자자들 역시 손실을 입는다. 영국 금융당국은 은행들이 리보를 조작한 뒤 관련 파생상품에 투자, 부당한 이익을 얻은 것으로 보고 조사 중이다. 현재 리보에 연계한 금리 파생상품의 전 세계 시장 규모는 약 800조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못믿을 리보…소송 확산 가능성]

한편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허술한 Libor 산정 방식 때문이다. Libor는 영국은행협회(BBA)가 매일 오전 16개 은행으로 구성된 패널이 제출한 금리 가운데 중간값 평균으로 정한다. Libor는 사실상 자체 조달 금리인데, 이 금리를 당사자가 보고한 셈이다. 그런데 BBA는 금리를 물어보지만 사실여부 체크는 안 한다. 트레이더는 매일 몇 베이시스포인트 씩 금리를 낮추는 것이 일반적으로 용납되고 있다고 말했다.(관련 기사 보기)

주) 몇 개 은행이 금리를 제출하는지는 보도마다 다른데 어떤 언론은 20개라고 하고, 예전에 번역하여 정리한 자료에는 15개의 금리라고 한다. 하나금융연구소의 보고서에서는 18개라고 서술하고 있는데 개별 은행들의 리스트를 적어놓아 가장 신뢰도가 높다.

그렇다면 맑고 깨끗한 금융시장에서 바클레이스만이 악랄하게 금리를 조작한 것인가? CFTC는 이번 조사 과정에서 여러 은행들이 공모해 금리 조작을 조직적으로 진행해왔을 가능성도 제기되면서 씨티그룹, HSBC, RBS, UBS 등도 함께 조사하였다. 특히 영란은행(BOE)이 바클레이스의 행위를 공모했을 것이란, 그리고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역시 이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혐의는 사태의 의미를 더욱 확대시키고 있다.

이 시점에서 ‘금리라는 것이 무엇일까’하는 물음을 던져봐야 할 것 같다. 금리는 돈에 대한 가격이다. 경제학자 로버트 라이시는 “은행 시스템이 미래의 돈의 가치에 대한 최상의 추측에 기초해” 결정할 것이라고 우리가 생각하는 그 금리가 틀렸을 상황을 가정해보라고 말하고 있다. 금리란 것이 전능한 존재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어떤 “주어진 가격”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약삭빠른 인간들이 금리를 자기들 이익을 위해 조작하는 경우 말이다.

우리는 은행 시스템이 미래의 돈의 가치에 대한 최상의 추측에 기초해 오늘의 이자율을 결정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추측이 결국은 미래 돈의 공급 및 수요와 관련한 전 세계 수없이 많은 채권자와 채무자의 무수한 시장 예측에 기반하고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우리가 틀렸다고 해보자. 은행가들이 이자율을 조작해 당신이 빌리거나 그들에게 되갚아야할 돈을 두고 내기를 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그 내기는 그들에게 막대한 이익을 안겨줄 것이다. 그들은 시장이 실제로 어떻게 흘러갈지에 대한 내부 정보, 당신과 공유하지 않을 정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리보 스캔들’, 월가가 바닥을 뚫고 들어갔다”]

금리의 제일 밑바닥 금리는 각국의 중앙은행, 더 근본적으로는 미국의 연방준비제도에서 책정하는 정책금리에 바탕을 둔다고 할 수 있다. 지급불능의 위험이 사실상 없다고 간주하는 이 금리는 정부의 신용도를 바탕으로 하는 돈의 가격이며, 그 다음 단계로 금융기관, 기업, 가계 등이 자신의 신용도에 따라 가산 금리를 더하는 방식으로 금리가 정해질 것이다. Libor는 이 중에서도 벤치마크 금리로 인기 있는, 신용도 높은 금리로 행세해왔다.

하지만 금융위기 당시 신용이 깨지면서(credit crunch) 정책금리를 내리는데도 시장은 서로를 믿지 못하여 금리가 큰 폭으로 오르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 와중에 바클레이스는 스스로의 신용을 조작하기 위하여 Libor를 조작한 것이다. 일반기업으로 치면 회사가 멀쩡하다고 선전하기 위해 회사채를 낮은 금리에 발행하는데 성공했다고 사기를 친 셈이다. 자신의 조달 금리를 스스로가 보고할 수 있는 금융회사의 특권을 악용한 사례라 할 수 있다.

한 토론에서 경제전문가인 Max Keiser는 바클레이스의 이러한 조작, 이를 방임 내지는 공모한 영란은행의 행위를 두고 “공산주의적 방식”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러면서 시장이 가격을 결정하게 내버려 두라고 말한다. 하지만 문제는 시장이 결정하는 그 가격의 기초가격은 다른 가격과 달리 중앙은행의 정책금리를 통해 결정되는 태생적 한계가 – 물론 정책금리는 중앙은행이 원하는 시장금리로 유도하는 역할에 그치지만 – 있음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즉, 금융업이 스스로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1,2차 산업 가치생산의 촉매 역할을 통해 가치를 전유(appropriate)하는 것이라는 ‘노동가치론’적 입장에서 본다면, 그 체제가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정책입안자는 거시경제 이익률의 선순환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정책금리를 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금리와 시장금리에 괴리가 발생하면 이를 조정하고 싶은 유혹에 빠져든다. 그런 면에서 담합이나 가격조작은 사실 국가 차원에서는 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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