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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황식이 힙스터의 문화가 된 세상

사실 패전 후 일본의 분식에는 밀가루뿐만 아니라 호박이나 감자류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분식까지 포함한 ‘중앙분식협회’였습니다. 그럼 당시 어떤 분식이 소개되었을까요? ‘생활과학’ 1946년 9월호에서 발췌해봅니다.

  • 고구마순 당고 : 고구마의 잎과 덩굴의 가루가 베이스
  • 쌀겨 찐빵 : 쌀겨가 주재료
  • 소바네리 혹은 소바가키(메밀국수 반죽떡) : 메밀가루가 베이스
  • 이소노카오리무시(바다향찜) : 해초의 감태 가루가 베이스

여기서 말하는 분식은 ‘먹을 수 없다고 취급되던 것까지 가루로 만들면 배를 채울 수 있다’는 헝그리 정신에 기초한 음식인 듯합니다.[일본요리 뒷담화, 우오쓰카 진노스케 지음, 장누리 옮김, 글항아리, 2019년, pp130~131]

분식(粉食)에 대한 흥미로운 분석이 있어 가져왔다. “가루로 빻은 음식”라는 의미의 분식은 우리가 평소에 먹거리로 삼지 않던 것들, 즉 쌀겨나 고구마의 잎 등까지도 먹을 만한 음식으로 만들기 위한 과정을 의미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러한 시도는 역시 처참한 가난에 시달리던 한국에도 그 표현 역시 그대로 가져다 쓰며 고스란히 이어졌다. 우리나라는 그 빈곤의 시절이 일본의 그것보다 더 오래 이어졌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도 그 ‘분식 장려의 문화’를 경험한 세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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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TsengBudae jjigae, CC BY 2.0, Link

즉, 한동안 쌀이 귀했던 우리는 박정희 집권 시기에도 여전히 쌀과 잡곡을 섞어 먹는 혼식(混食)과 분식을 장려했었고, 특히 주말에는 분식을 권장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아직 토요일이 근무일이었던 그 시절, 직장인들은 토요일이면 회사 근처 중국 음식점에 가서 짜장면이나 짬뽕을 사 먹는 것이 습관이었다. 이러한 습관은 마치 ‘파블로프의 개’의 행동처럼 박정희 이후의 시기에도 90년대쯤까지도 이어져 토요일이면 업무 단지 근처 중국 음식점은 손님으로 붐비곤 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제는 과거 구황식(救荒食)이었던 그 한국화된 분식이 일종의 한식(韓食)으로 자리 잡았고 동시에 한류의 붐을 타고 해외에 Korean Food Culture로 인기를 얻고 있다는 사실이다.1 본래 의미의 분식이라고는 하기 어렵겠지만, 대표적으로 한국식 라면, 부대찌개, 떡볶이, 한국식 핫도그 등이 외국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싼 맛에 칼로리 보충을 위해 먹던 음식이 힙한 음식으로 인정받고 있는 재밌는 시절을 살고 있다.

박정희는 누구인가?

오랜만에 블로그에 글을 올린다. 바쁜 시기도 있었고 나름대로 시련의 시기도 있어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단 탓이다. 이제 좀 삶이 안정되었으니 다시 글쓰기를 시작할까 한다. 예열 차원에서 역사학자 박태균 씨의 통찰력 넘치는 박정희라는 인물에 대한 강의 영상을 올린다. 한반도의 현대사에서 가장 문제적인 인물, 박정희에 대한 연구야말로 한반도의 과거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열쇠 하나를 제공하는 연구가 아닐까 싶다.

어떤 기념일에 대한 괴롭힘,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하여

일제가 전쟁 준비에 광분하던 1938년 메이데이도 ‘근로일’로 창씨개명을 한다. [중략] 메이데이는 공산 괴뢰도당의 선전 도구라는 이승만의 훈시에 따라 1957년 대한노총은 3월 10일을 ‘노동절’로 정하고 정부의 승인을 받았다. 생일을 바꾼 것이다. 1963년 박정희 정권은 노동절을 ‘근로자의 날’로 개칭했다. 역사적으로 근로자란 지칭에는 천황과 국가를 위해 열심히 일한다는 일제의 통치 음모가 배었다고 한다. [중략] 1989년 재야의 민주 노동 세력은 “민주적인 노동조합 운동에 대한 탄압의 상징인 ‘근로자의 날’을 ‘노동자 불명예의 날’로 규정함과 아울러 메이데이를 우리의 진정한 노동절로 엄숙히 선포한다”, 그리고 1990년 메이데이 기념 100년 만에 민주노총의 누룩 전노협이 결성된다.[정운영, 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 웅진지식하우스, 2006, pp22~23]

이 기념일이 뭐라고 이렇게 끊임없이 일제가, 이승만이, 박정희가 괴롭힐 일인가 싶다. 하지만 그만큼 어떠한 대상물에 – 여기서는 기념일 – 대한 호칭은 중요하다. 모욕적인 호칭은 대상물의 지위를 규정하고 많은 경우 정당한 권리 행사를 방해한다. 일제의 창씨개명은 조선인의 주체성을 말살했다. 우리가 건설노동자를 “노가다”로 부르고 나이 어린 편의점 서비스 노동자를 “알바”라고 부르면 그들의 노동자로서의 존엄성을 손상시킨다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더 나아가 현재 많은 플랫폼 노동자들은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법에 의해 자영업자로 규정 ‘당하고’ 있다. “사장님”이니까 좋은 것이 아니냐고 하지만, 바로 실질적인 사장님이 노동자를 고용하며 응당 치러야할 노동의 대가를 회피하기 위해 그들을 그렇게 부른 것이 문제다. 호칭은 그만큼 중요하다.

박근호 교수의 『박정희 경제신화 해부』를 읽고

남한의 “진보”세력에게 박정희의 경제신화는 일종의 계륵이다. 남한은 전 세계 개발도상국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 또는 대만과 함께 – 20세기 전간기의 참화를 딛고 기적처럼 경제성장에 성공한 나라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리고 그 고도성장은 박정희의 집권 기간부터 시작된 것이 객관적 사실이다. 즉, 박정희는 경제개발계획 수립, 수출지향형 공업화, 재벌체제 확립 등 경제전반에 대한 강력한 국가통제를 통해 경제성장을 주도하여 온 것으로 알려졌고, 이것을 근거로 보수 세력은 그를 소위 “근대화의 아버지”로 자리매김했고 진보 세력도 그 정도의 사실은 딱히 반박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그래도 민주주의는 진보 세력에 의해 이루어졌다’ 정도로 항변하곤 했었다.

개인적으로는 『박정희 경제신화 해부』를 쓴 박근호 교수를 “진보” 또는 “보수” 중 어느 것으로 칭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다만 책을 읽고 나서의 느낌은 치밀하고 집요하게 객관적인 경제학자라는 느낌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어느 블로거가 쓴 묵시론 적인 경제전망을 담은 책과 어느 경제지 기자가 쓴 저축은행의 흥망에 관한 책을 읽었는데, 이들 책 내용의 불성실함으로 인해 박 교수의 성실함이 더욱 돋보였다. 이미 1993년에 『한국의 경제발전과 베트남전쟁』이란 책을 출판하면서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이 남한 경제에 미친 영향에 주목한 필자는 2007년 비밀문서에서 해체된 대통령기록물, 美국무성의 한국관련 문서 등을 연구하여 논리를 보강하는 등 치밀한 검증을 거친 결과물이 이 책이다.

1960년대 내내 한국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미국의 안전보장전략 아래 놓여 있었다. 다만 한국이 ‘미국의 불안정한 의붓자식’이었던 관계는 1965년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을 통해 ‘기브앤테이크’ 관계로 이행했다. 따라서 한미관계의 분기점은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이었고, 이를 경계로 미국의 한국정책은 명백히 전환되었다. 미국에게 한국의 전략적 중요성이 커지면서 한국을 공산권진영에 대한 경제적 우위의 증거로 삼으려는 ‘한국모델’ 전략이 행해졌다. 이를 위해 미국이 만든 경제시스템 속에서 개발모델이 된 한국은 우대조치를 받았고, 최대의 수혜자가 되었다. 요컨대 미국이 ‘한국모델’ 정책을 공들여 추진한 결과, 1965년부터 한국의 고도성장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박정희 경제신화 해부, 박근호 지음, 김성칠 옮김, 회화나무, 2017년, p364]

해당 인용문이 책의 전반적인 요지를 담은 문구라 생각되어 인용했다. 박 교수는 박정희가 그 어떤 나라의 위정자보다 더 적극적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하려 했던 이유를 “한국의 경제성장, 한미관계의 강화, 한국군의 전투력 향상, 그리고 플러스알파”를 노렸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박의 철저한 계산에 따라 진행된 베트남파병은 이후 박정희의 1965년의 방미로 이어지고 존슨 정부는 남한을 일본과는 다른 공산권에 대한 “자립형 완충지대”이자 “민주주의의 쇼윈도”로 키울 마음을 먹는다. 이를 위한 미국의 지원은 다양한 물질적 지원 이외에도 한국산 제품의 수입확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설립을 위한 학술적 지원, 미국기업의 한국 직접투자를 위한 노력 등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진다.

그러한 박정희의 미국을 향한 집요한 구애가 성공했다는 점에서 “근대화의 아버지”라 부른다면 달리 반박할 말은 없다. 다만 박 교수가 분석한바, 박 정권이 미국의 요구에 따라 수립한 경제개발계획이 실제 집행에서는 많은 오류가 있었고, 미국의 바텔기념연구소가 전자산업 육성으로 방향을 제시한 후1, 미국기업의 제조업기지화를 위한 투자가 있은 다음에야 경제가 궤도에 올랐다는 사실은 박정희 체제가 미국이라는 외생적 변수 없이는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는 점에서 그를 “OOO의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몰염치한 짓일 것이다. 그리고 이때 기득권층은 미국의 위력을 실감하고 그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불경스러운 행동임을 깨달았고2 이런 행태가 오늘날에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따라서 박정희 체제는 대미굴종, 많은 노동자의 희생, 정경유착 및 재벌체제 공고화, 수출지향형 경제성장, 한미일 군사/경제 동맹 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한 가지씩 곱씹어보면 아직도 이러한 모순들이 그대로 온존하고 있음을 최근의 많은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새로 들어선 정부가 이러한 모순을 조금이라도 개선하려고 들면 개떼처럼 달려들어 짖어대는 기득권 세력의 저항을 보면 그 썩은 뿌리가 이 나라에 얼마나 깊숙이 박혀 있는 지를 서늘하게 느낄 수 있다. 어쨌든 박근호 교수의 책은 이런 썩은 뿌리의 토대인 “박정희 경제신화”의 허구성을 깨닫게 하는 입문서로서의 자격이 충분한 책이다. 이 연구가 초석이 되어 이 나라의 대안 경제를 꿈꾸고 실천할 그 날이 어서 오길 바란다.

박정희 정부가 받아온 돈은 누구의 돈인가?

일본 수상으로서 아베 수상은 위안부로서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고 치유할 수 없는 육체적 및 정신적 피해를 입어 고통 받는 모든 여성들에 대한 진지한 사죄와 유감을 다시 한 번 표했다. 한편으로 일본은 위안부 이슈 등을 포함하여 일본과 남한 간의 자산이나 청구권과 관련한 이슈들은 1965년 한일청구권 및 경제협력협정에서 완전하고도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입장을 견지했다.[Announcement by Foreign Ministers of Japan and South Korea on the Issue of “Comfort Women”]

아베가 박근혜 대통령과 통화하면서 말한 내용이라고 한다. 요컨대 아베는 일본 수상으로서 “일본군이 관여한(with an involvement of the Japanese military authorities)” 성노예 제도에 대해서 “책임을 통감하(is painfully aware of responsibilities)”지만 이번에 주는 10억 엔은 기부금이지 배상금이 아니고 그런 배상은 이미 1965년에 완료했다는 주장을 또다시 반복한 것이다. 그렇다면 민간의 청구권이 이미 1965년에 완료됐다는 일본의 주장은 타당한 주장인가?

올해 88살의 이근목 할아버지. 22살이던 1943년 일본 미쯔비시 조선소에 끌려가 해방될 때까지 돌덩이를 날랐습니다. 임금을 절반 밖에 받지 못했지만 조선소도, 일본 정부도 보상해주지 않았습니다. 지난 1965년 한일협정을 맺어 강제점령에 대한 보상금을 우리 정부에 지급했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 등 강제징용 피해자 100명은 보상금으로 설립됐던 포스코, 당시 포항제철을 상대로 위자료를 지급하라며 소송을 냈습니다.[“강제징용 배상, 도의적 책임”]

하지만 할아버지는 패소했다. 법원은 “포스코 때문에 강제징용자들이 보상금을 못 받았다고 보긴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입장은 일본정부의 입장과 명백하게 배치된다. 비슷한 맥락에서 한국 법원은 2013년 7월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과 미쓰비시중공업이 35년간의 일제강점기에 끌려가 강제노동을 한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그렇다면 우리 행정부의 수장은 아베의 말에 어떻게 반응했을까? 인용한 글에선 그 반응은 적지 않았다.

드디어 1969년 12월 韓日간에 종합제철에 관한 기본협약이 체결되어 건설에 착수하게 되었다. 韓日 국교정상화 때 양국간에 합의된 청구권 및 對韓차관 공여액은 무상자금 3억 달러, 유상자금 3억 달러, 상업차관 3억 달러 이상으로서 무상 및 유상자금 각 3억 달러에 대해서는 항일독립유공자보상, 對日민간청구권보상, 평화선철폐에 따른 어민보상 등 국민적 요구가 방대했다. 朴대통령은 국민적 반발이 적지 않을 것을 각오하면서 낭비보다는 건설이라는 견지에서 종합제철건설에 상당한 액수를 투자하는 대영단을 내렸다.[김정렴, 한국경제정책30년사, 중앙일보사, pp138~139]

한편, 박정희 정부의 경제관료였던 김정렴 씨는 이근목 씨가 포스코에 위자료 지급 소송을 낸 정황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정부가 받은 돈에 대해 “국민적 요구가 방대”했음을 증언했다. 그런데 박정희 씨는 그 돈을 종합제철건설에 투자하는 “대영단”을 내렸다. 스텝이 꼬이는 구간이다. 당시 관료가 그런 뉘앙스로 증언했고 협정문에도 일본의 주장이 타당해보일 수도 있는 문구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한국법원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 현 대통령의 생각이 궁금하다.

제2조 1.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에 샌프런시스코우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 (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빨갱이” 사냥의 희생양이 될뻔했던 어떤 정치인

1963년

이 무렵 군정연장 원대복귀 민정참여의 거듭된 번의 속에 곤욕을 치른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우여곡절 끝에 63년 8월 31일 민주공화당의 총재와 대통령 후보가 되었고 대통령 선거가 벌어지게 됐다. [중략] 윤보선은 황태성 사건까지 끌어들여 연일 박후보의 사상관계를 융단폭격했고 이에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박정희 후보는 “저들이 나를 빨갱이로 몰려 한다”고 비명을 질렀다. [중략] 63년 10월 10일 대선을 닷새 앞둔 시점에서 민정당 유세반의 김사만이 경북 영주에서 느닷없이 “부산 대구에는 빨갱이가 많다”고 후려쳤다. [중략] 사흘간의 개표 끝의 최종결과는 박정희 4백70만표, 윤보선 4백54만표로 불과 16만표의 차이였다.[박정희, 윤보선에 16만표 차이로 승리, 박상길 전 청와대 대변인, 한국 현대사 119 대사건, 월간조선 엮음, 1993년, pp168~169]

2015년

동아일보 종편 채널A가 민언련을 ‘종북세력’으로 묘사했다가 정정보도는 물론 손해배상도 물게 됐다. 민언련이 제기한 소송에서 항소심 재판부가 원심을 깨고 원고 측 손을 들어준 것이다. [중략] 채널A <김광현의 탕탕평평>은 2013년 5월 종북좌익척결단 조용환 대표를 출연시켜 ‘대한민국을 위협하는 종북세력 5인방’을 주제로 토론하면서 민언련에 대해 “강정구와 송두율을 비판하는 언론을 비판하고, 국가보안법 폐지를 반대하는 언론을 공격하고 주한미군 철수를 선동한다”며 “우리나라 안보를 해치는 일련의 선동을 줄기차게 해왔기 때문에 종북세력의 선동 세력이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 조용환 대표는 “(민언련이) 북한 노동당 통전부 225국의 컨트롤을 받는다”는 등 근거 없는 주장을 이어갔다. [채널A, 민언련에 ‘종북’ 딱지붙였다가 손해배상 1000만원]

포항제철 건립에 대해 다시 한번

역사적 기록을 보면 자본의 이동성 capital mobility 이 부유한 국가들과 가난한 국가들의 수렴을 촉진하는 주요 요인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일본이건 한국이건 타이완이건 그리고 더 최근 들어서는 중국을 막론하고 최근 몇 년 동안 선진국 코앞까지 쫓아온 아시아 국가들 중 그 어느 곳도 대규모 외국인 투자로 수혜를 입지는 않았다. 본래 이들 국가는 모두 물적자본과 그리고 더 중요한 인적자본의 투자에 필요한 재원을 스스로 조달했는데, 최근 나온 연구들은 특히 인적자본이 이들 국가의 장기성장에서 핵심적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반대로 식민지 통치 시대건 오늘날의 아프리카에서건 다른 국가들의 지배를 받았던 국가들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 이유로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점은, 그들은 미래의 발전 가능성이 크지 않은 분야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고, 만성적으로 정치적 불안에 시달렸다는 사실이다.[토마 피케티 지음, 장경덕 외 옮김, 이강국 감수, 글항아리, 2014년, p90]

피케티의 이 책은 역사적으로 자본의 수익률(r)이 노동의 수익률(g)보다 크다는 “근본적인 불평등”에 다룬 책이다. 인용한 구절은 이러한 경향이 국제적으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한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 구절이다. 즉, 부유한 국가에서 ‘자본의 한계생산성 marginal productivity of capital’이 낮아지면서 자본의 흐름은 가난한 국가로 흐르게 마련인데, 이럼으로써 이들 국가들 사이에 불평등이 감소할 것이라는 고전파 경제학 이론의 주장과 달리 오히려 자체적으로 자본을 조달한 국가들이 더 고도로 성장했다는 것이 피케티의 관찰이다.

이러한 관찰은 한 예로 든 우리나라의 경우를 놓고 볼 때 그리 틀린 관찰은 아니다. 한국은 강제적인 근대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일제 강점기부터 사실상 자력으로 인적자본을 늘려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일정 부분 일본이나 미국과 같은 과거 및 현재의 선진국들의 물질/비물질적인 도움이 있었지만 – 그리고 이것이 정치적인 편향에 상당부분 영향을 미쳤지만 – 교육을 책임진 가정의 헌신은 거의 유례없을 정도로 혹독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더불어 피케티는 인적자본을 더 강조하기는 했지만 물적자본 역시 자체적으로 해결했다는 사실도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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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wangyangIronworks” by 저작자 김소민의 허가를 받고 퍼블릭 도메인으로 공개함 – 저작자 김소민의 허가를 받고 퍼블릭 도메인으로 공개함. Via Wikimedia Commons.

포스코 광양제철소

이미 이 블로그에서 몇 번 다뤘던 포항제철 건립의 비화가 대표적 사례다. 박정희 정권은 국제금융기구들로부터 무모한 계획이라고 비판받았던 제철소 건립을 대일청구권 자금을 활용하여 건설한 – 사실상의 내자조달 – 사례는 남한의 ‘국가주도형 자본주의 모델’에서 매우 중요한 국면이다. 또한 박 정권은 당시 절대적인 자본부족에 시달리던 상황에서 독일에는 간호사와 광부를, 베트남에는 군인을 보내고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외자를 조달한다. 사실상 이런 자금이 그런 조달 배경 덕분에 자본수익이라는 반대급부의 꼬리표가 달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만일 포항제철이 ‘자본의 한계생산성’으로 인해 새로운 고율의 자본수익을 쫓던 투자자들의 자본에 의해 건설되었다면 상황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역사에 가정은 금물이지만 아마도 포항제철의 모습, 나아가 남한 전체의 모습은 지금과 상당히 달랐을 것이다. 지금 봐도 무모하기 그지없는 두 박씨의 원대한 계획은 “공상과학”이라 치부되어 사업계획이 수정되었을 것이고 투자에 쓰일 잉여는 배당에 쓰였을 것이다. 하지만 두 박씨는 사실상의 주주인 일제의 피해당사자들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마패’까지 등장하는 개발독재로 포항제철의 투자효율을 극대화하였다.

고전파 경제학 이론으로 설명하기 매우 난해한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