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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래시의 창시자들은 누구인가

적의 얼굴을 알 수 없을 때 사회는 그것을 만들어 낸다. 하락하는 임금과 불안정한 고용, 과도한 집값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불안 같은 것들은 공격 대상을 필요로 하는데, 1980년대에는 그것이 대체로 여성들이었다. 한 전직 신문 편집자는 ‘뉴욕타임스 매거진’에서 “(1980년대 물질 만능주의를 야기한 원인은) 레이건이나 월스트리트가 아닌, 그보다 더 근원적인 데 있다”면서 “여성운동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음에 틀림없다”고 결론 내렸다.[백래시 누가 페미니즘을 두려워하는가?, 수전 팔루디 지음, 황성원 옮김, 아르테, 2017년, p138]

요즘 시간이 날 때마다 야금야금 읽고 있는 책이다. 1991년 발행된 이 책의 제목은 그 뒤 여성운동이나 성평등에 반하는 인용문과 같은 온갖 언행을 규정짓는 대표적인 표현이 되었다. 어쨌든 이 책은 주로 인용문과 같이 1980년대까지의 미국 사회에 벌어진 갖가지 백래시적인 현상을 집요하게 파헤치고 있는데, 읽으면서 오늘날의 한국사회가 1980년대의 미국사회를 많이 닮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급증, 이전 세대보다 자산을 덜 가지게 될 확률이 높은 젊은 세대, 과도한 집값에 대한 불안과 이를 이용해 소위 “영끌”을 부추기던 작년의 매스미디어, 루나 사태에서 보는 물질만능주의 등등 여러 상황이 미국의 80년대와 오버랩되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백래시 현상은 사회에 만연해 있고 급기야 선거에서의 표심도 일정 정도 그러한 요소가 작동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즉, 사회에 대한 건전한(?) 불만은 원인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통해 기득권에 저항하게 마련인데 불건전한(!) 불만은 원인을 혼동하여 여성이나 노동자 등 소수자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곤 한다. 최근 연세대 재학생의 노동자 시위에 대한 고소 건이 비근한 예다. 그런데 인용한 책에도 분석하듯, 소위 “여혐” 성향이 강하다고 지적받는 2030 남성들은 反페미니즘의 – 또는 反노동의 – 창시자들이라기보다는 수용자에 가깝다.

쿠팡 본사 로비에서 농성 중인 쿠팡물류센터지회가 대낮부터 술판을 벌였다는 한국경제신문의 기사를 두고 공공운수노조가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한국경제신문은 해당 기사에서 술판의 증거로 사진을 제시했는데, 공공운수노조는 해당 사진에 있는 캔음료는 맥주가 아닌 커피라고 정정했다. 명백한 오보지만 기사를 작성한 한국경제신문의 기자는 이같은 사실을 인지 후에도 기사를 수정하지 않고 있다. [쿠팡 노조가 ‘대낮 술판’ 벌였다고 오보낸 한경, 2022년 6월 30일]

기사에서와 같이 한국경제신문은 명백한 오보로 反노동을 부추기고서는 사과는커녕 기사도 삭제하지 않는 뻔뻔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 또한 신임 서울경찰총장은 장애인들의 시위에 대해 “지구 끝까지 찾아가서 사법처리하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권력과 매스미디어가 약자에 대한 음해와 공갈로 反소수자의 수용자들의 판단을 흐려놓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수혜자는 늘 그렇듯 혐오의 수용자가 아니라 창시자일 것이다.

‘교회주식회사’에 관해 트위터에 올린 내용

#이제 개신교 교회를 다니는 것은 신앙심의 유무가 아니라 지적(知的) 판단력의 유무에 해당한다. 노동자로 사는 것은 착취당함을 앎에도 소득이 있기 때문이라는 반대급부가 있는데, 교회에는 돈과 시간을 갖다 바치고 얻는 것은 내세의 약속이라는 점에서 신자, 즉 소비자에게 남는 것 없는 장사다

#다만 유산계급은 여전히 교회 다니는 게 남는 장사. 교회 안에서의 네트워크를 통해 변호사나 의사는 먹거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산계급은 목사의 따까리 짓이나 하기 위해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대형교회에 찾아가는 바보짓을 반복하고 있다. 교회는 가장 발달한 자본주의 착취 체제

#교회 매물은 신자수로 계산하고 절은 기와 숫자로 계산한다는 속설이 있다. 허언이 아닌 것이 교회는 성경이라는 콘텐츠를 – 업데이트도 안 되는 후진 – 가지고 내세 장사를 하며 신자의 헌금으로 캐쉬플로를 맞추는 – 세금도 안 냄 – 프로젝트파이낸스 사업에 해당한다. 바보들이 수입원인 투자사업

#사랑제일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말고가 현재의 썩은 개신교계에서 어떤 이득이 되는가?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이단”으로 여겨지지도 않고, 명성교회가 세습을 정당화하고, 사랑의교회가 불법 점거한 공간을 “영혼의 공공재”라고 떠드는 개신교가 정통이라서 정상인 집단인가? 싹 골병이 든 집단

#어린 자식 둘을 데리고 “봉사”를 하러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대형교회에 가는 신도를 본 것은 내가 실제 마주친 경험이다. 그의 신앙심은 높이 살 수 있어도 그의 어리석음은 인정할 수 없는데, 이런 노동 착취가 개신교, 천주교, 불교에 만연해 있다. “성직자”의 묵인 내지는 의도적 조장 하에서.

#1990년대 말이 지나면서 교회성장론은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됩니다. 그것은 마케팅과 자본주의 논리의 도입입니다. 한국 같은 경우는 소위 말하는 총동원 주일 등의 행사를 통해 경품과 많은 실적(?)을 올린 성도들에게 시상을 하는 해괴한 짓들을 하기 시작합니다. http://economicview.net/12400/

“출퇴근 2시간을 전차에서 허비하게 되면 가정생활에도 문제가”

나의 사견으로는 출퇴근 2시간을 전차에서 허비하게 되면 가정생활에도 문제가 생기는 등 좋지 않으며, 30분이 좋을 듯하다. (중략) 현재 경성시가지계획의 목표 인구는 110만이며, 인천은 20만이다. 여기에 이번에 결정한 구역(경인시가지계획구역) 목표 인구 약 100만, 경성 북부와 동부 방면에 신설할 주택도시에 목표 인구를 약 70만으로 하여, 합계 300만을 수용할 계획이다.[1939년 10월 21일 市街地計劃委員會速記錄 / 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 염복규 지음, 이데아, 2016년, p360에서 재인용]

일본이 우리를 강점하던 시절, 총독부의 제5회 시가지계획위원회에서 총독부 기사 야마오카 케이스케가 했던 발언의 일부다. 1919년 처음으로 『도시계획법』을 제정하여 “도시계획”이란 개념을 자기네 도시공간에 적용한 일본이 이 개념을 한국 땅에도 적용하였고, 상기 인용한 발언은 이러한 공간계획을 도시에서 더 확장하여 일종의 지역계획 내지는 광역계획의 개념으로 접근한 “경인시가지계획”의 사례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각각의 도시는 훨씬 많은 인구가 살고 있어 계획이 소박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지만, 당시로서는 매일신보라는 신문에 “경인 메트로포리쓰 환상곡”이라는 제목의 2면에 걸친 특집기사를 낼만큼 오히려 약간은 무모한 광역도시권 계획에 가까웠다. 흥미로운 점은 인구와 함께 통근시간의 기준치를 제시한 것인데 이를 통해 공간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는 잣대가 된다는 점에서 유용한 기준치일 것이다.


『매일신보』 “경인 메트로포리쓰 환상곡”

야마오카는 “출퇴근 2시간을 전차에서 허비하게 되면 가정생활에도 문제가 생긴다”고 단언하였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아도 이는 타당한 발언이다. 그때보다 노동시간은 어느 정도 줄었을 것이라 가정한다해도 출퇴근에 2시간을 허비하게 되면 소위 “저녁 있는 삶”을 누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경인 메트로폴리스에서는 이것이 현실이다. 서울의 직장인의 출퇴근 시간은 134.7분으로 2시간이 넘는다.

우리나라 직장인의 하루 평균 출퇴근 시간이 약 100분(1시간 40분)이 넘는 것으로 조사됐다. 서울에 사는 직장인의 경우에는 2시간이 넘었다. 17일 취업포털 잡코리아에 따르면 남녀 직장인 820명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하루 출퇴근 소요시간이 평균 101.1분인 것으로 조사됐다. 출근 시간은 48.1분, 퇴근 시간은 53분으로 나타났다. 서울 거주 직장인의 경우 이 시간이 134.7분으로 가장 길었다. 이어 기타 지역 118.8분, 경기도 거주 직장인 113.4분 순이었다.[직장인 평균 출퇴근 시간 101분… 서울은 2시간 넘어, 2017년 7월 17일, 조선일보]

이런 시간낭비를 줄이는 방법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첫째, 교통 인프라스트럭처의 확충이다. 현재 GTX 등 여러 교통계획이 입안되어 있기는 하지만, 재정문제 등 여러 사유로 인하여 추진이 지지부진하다. 좀 더 장기적인 프로세스로는 위성도시가 아우르는 광역도시권이랄지 용도지역을 분할하여 교통을 유발시키는 조닝(zoning)과 같은 계획기법에 대한 반성으로 직주근접 내지는 복합개발을 늘려나가는 방식이 있다.

공간계획이 아닌 대안으로는 노동시간 단축이나 재택근무와 같은 노동을 재배치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이런 대안은 노자 간의 협약이나 노동시간 단축 법안 제정 등의 방법이 있으나 장기적인 효과로 귀결될 것이기에 결국 정부 차원에서는 공간계획의 방법으로 푸는 것이 현실적일 것이다. 문제는 새 정부는 인프라 예산을 대폭 축소했다는 점이다. 인프라가 “건설족”의 먹거리이기도 하지만, 복지이기도 하다는 사실에서 우려되는 대목이다.

기간제 교사를 괴롭히는 학생들을 찍은 동영상을 보고 나서 든 상념

# 페북에 누군가 올린 기간제 교사를 괴롭히는 고등학생들의 동영상을 보았다. 굴욕적인 장면이지만 교사는 학생의 처벌을 바라지 않는단다. 암튼 학생들은 그저 교육받았을 뿐이란 생각도 든다. 기간제는 괴롭혀도 된다는, 이미 사회가 괴롭히고 있으니까 말이다.

# 기간제, 파견직, 비정규직. 자본주의가 발달하며 노동계급의 힘도 함께 발달하며 임금을 올리니까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자본가가 고안해낸 노동자 아래 노동자다. 사회는 그러고는 상대적 우위에 놓인 노동자를 “귀족노조”라고 매도하여 노노분열을 부추겼다.

# 노노분열을 일으키려는 이유는 딱 한가지다. ‘너희들이 천대받는 것은 나때문이 아니라 귀족노조때문이다’라는 착시효과를 일으키기 위해서인데, 이게 꽤 잘 먹혀들었다. 누구도 “귀족자본가”라고 부르지 않지만 정규직만 많은 회사도 “착한 회사”라고 칭송한다.

# 이제 정부는 정규직이라 할지라도 저성과자는 자르고 취업규칙도 불리하게 고칠 수 있게끔 하려고 한다. ‘노동자 지위 향상 – 비정규직 양산 – 정규직 고용안정 해체 – 모든 노동자의 각자도생’의 과정이 진행 중이다. 명심할 것은 치킨집은 차리지 말 것.

# 이러한 경제 체제를 공고하게 만드는 중요한 사회적 요인은 바로 문화다. 노동자를 천시하고, 잘못을 사과하지 않고, 이익을 위해 남을 해하는 것이 용납되는 문화가 제도만큼이나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그 학생들만 욕할 수는 없다.

요새 아이들 시험문제는 왜때문에 이렇게 어려운 것인가?

지인의 페이스북에 올린 딸의 사회 시험지다. 문제를 보면 요즘 시험이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13번 문제는 反노동적인 이 사회의 분위기를 생각한다면 어렵지 않게(?) – 시험을 보는 이가 反노동적인 관점으로 시험에 임했다면 – 답을 맞힐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문제는 14번 문제, “기업가들의 노력이 우리 경제에 미친 영향으로 알맞지 않은 것은 어느 것입니까?”란 질문에 답하는 문제다.

 

오지선다형 객관식의 이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나조차도 솔직히 답을 찾지 못하겠다. 교사가 원하는 답은 1번 “수입을 늘렸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 시험 문제를 풀어서 틀린 친구가 내 딸이라면 이 답을 추출하는 과정에서의 수많은 전제가 생략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 과연 내가 딸에게 차근차근 잘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면 도저히 자신이 없다.

이 문제의 정답이 “수입을 늘렸다”라는 문제 출제자의 기업가, 혹은 기업에 대한 시각은 출제자의 기업에 대한 시각이 딱 개발도상국의 수입대체 산업화 발전전략의 시각에 머물러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기업가가 기업을 성장시키면 기업이 이전에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 않던 볼펜도 만들고 핸드폰도 만들고, 소비자가 외제 제품에 대한 수요가 줄어 수입이 줄 것이다”라는 그런 선입견 말이다.1

2번의 “기업을 발전시켰다”는 항목은 동어반복적인 항목이라 당연히 답이 아닐 것이다. 한편 3번의 “국가 경제를 발전시켰다” 역시 개별 기업의 성장과 국민경제의 성장을 동일시하는 개발도상국의 일국경제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고다. “근로자들의 소득을 높였다”, “새로운 일자리를 늘렸다”라는 나머지 항목 역시 자본의 금융화, 세계화에 따른 추세를 반영하지 못한 구태의연한 편견이다.

즉, 예를 들어 LBO식의 M&A를 주업으로 하는 “기업가” – 소위 “프라이빗에쿼티” – 는 근로자들의 일자리를 늘리거나 소득을 높이는 기능을 거의 하지 않는다. 이들은 기업을 인수한 후 구조조정을 – 가장 손쉽게는 근로자들의 정리해고와 임금삭감 – 통해 이익을 쥐어짜는 임무를 수행한다. 교사는 아마도 그러한 업태의 기업가는 시험문제의 “기업가”에 포함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인의 딸은 답이 5번이라고 응답해서 틀렸다. 지인의 딸이 어떤 배경지식을 가지고 이렇게 문제를 풀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아이가 업장을 필리핀으로 옮겨서 국내 노동자의 일자리를 뺏은 한진중공업의 예를 들어 교사에게 항의를 했을 때 교사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궁금하다. 일국경제적 관점에서 생각하는 교사가 설마 “글로벌 경제적 관점에서는 일자리가 늘었다”라고 대답했을 것 같지는 않다.

0.01%가 다시 앞서가고 있는 미국의 자본주의

런던 경제학 스쿨의 Saez씨와 Gabriel Zucman의 새 보고서는 이전에는 최상위 부자들의 부(wealth)의 지분을 매우 과소평가했다고 판단하고 있다. [중략] 1920년대에 하위 90%는 미국의 부의 단지 16%를 소유하였을 뿐이다. 이는 1929년의 붕괴 이전까지 전체 부의 4분의 1을 통제한 상위 0.1%의 것보다도 한참 모자라는 것이었다. 대공황의 시작부터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까지 전체 부에 대한 중산층의 지분은 꾸준히 들었는데, 이는 주요하게는 부유한 가구가 망가진 탓이다. 그 이후로 중산층의 지분은 보다 광범위한 자본 소유, 중산층의 소득증가, 그리고 주택소유 상승률 덕분에 국부와 함께 증가하였다. 퇴직연금에 대한 세금면제 확대도 또한 기여했다. 1980년대 초반까지 중산층의 가구의 부에 대한 지분은 36%까지 증가했고 거칠게 볼 때 상위 0.1%의 지분의 네 배에 달했다. 그러나 1980년대 초반부터 이러한 추세는 역전된다. [중략] (차트를 보라) 1986년에서 2012년까지 상위 1% 가구의 실질소득은 연 3.4% 증가한 반면 하위 90% 가구는 0.7% 증가하였다. 그러나 Messrs Saez와 Zucman은 추락하는 중산층의 순수자산 추이의 주된 원인은 치솟는 부채 탓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치솟는 주택가격은 모기지 부채 역시 늘어났기 때문에 중산층의 부의 증가에 거의 기여하지 못했다. 하지만 초라한 주택의 가격이 떨어져도 부채는 그대로 남아 중산층의 부를 더욱 쥐어짠다.[It is the 0.01% who are really getting ahead in America]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다양하게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화, 미국 산업에서의 금융업의 예외적 성장, 배당과 소득 비중의 역전, 인터넷 산업의 융성, 노조운동의 쇠퇴 등이 떠오른다. 미국이라는 한 나라만 놓고 본다면 소위 “자본주의의 모순”에서 비롯된 현상도 있을 것이지만 산업구조의 변화라는 피하지 못할 원인에서 비롯된 현상도 있다. 상황이 그러하다면 과연 부의 불평등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던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는 자본주의 체제의 부의 집중 경향에 있어서의 예외적인 시기였던 것인가 하는 의문도 든다.


(출처 : cfr.org)

최근에 빌 게이츠가 토마 피케티의 책을 읽고 이에 반박하면서 최상위 부자들이 상당수 이전 세대의 부자들에서 바뀌었다는 정황을 들어 피케티의 논지를 반박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자산 축적의 작동방식은 그리 많이 바뀌지 않았음은 분명하며 이를 이용해 부를 쌓는 이에 대한 부의 집중도가 계속 높아지고 있음은 추세적인 것 같다. 즉, 자본(equity)의 소유는 소득 없이 부를 축적할 수 있는 보편화된 수단이며 금융위기 전까지 정치권은 “자본 소유의 민주주의”를 통해 자본 평등을 주창하였지만 부동산 거품 붕괴와 함께 그 신화는 무너져 내린 것이다. 반면 최상위층의 자본 소유와 축적 방식은 세계화와 더불어 더 세련되어 지고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역시 이런 “자본 소유의 민주주의”에 어느 나라보다 앞선 나라였다. 한때는 망국병이라 할 만큼 부동산 투자, 즉 자본소유를 통한 시세차익의 시현은 국민적 붐을 이루었고 이는 차입을 통해 레버리지를 들어 올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며칠 전에 발생한 일가족 자살사건에서 알고 보니 가족 명의로 열다섯 채나 집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 화제가 되었는데, 바로 그들이 그렇게 많은 집을 갖게 된 것이 부채를 통한 주택 구입이었다. 자본의 부의 축적 방식은 진화하고 있는데 아직도 중산층의 부동산 신화는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 후 자기계발서 시장을 연다

자기계발의 메시지는 불안사회를 전제하고 있다. 가령 노후 자금을 최소한 10억은 모아놓아야 안정된 미래를 기대할 수 있다는 식이다. 이를 위해 실제 이상으로 국민연금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 노후의 경제 현실을 왜곡하고 있다. 이러한 메시지는 물론 금융회사와 그와 연계된 경제 연구에서 나온 공포마케팅의 일환이다. [중략]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개인이 아니라 일정한 집단과 나아가 한 사회 전체에 공포의 감정을 조장한다는 점이다.[거대한 사기극, 이원석 저, 북바이북, 2013년, p201]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라는 영화가 있다. 제목 자체만으로도 특정상황에 대한 은유 등으로 쓸모가 많은지라 각종 지면에 꽤 많이 인용되는 영화다. 인용문의 메시지를 이 영화제목에 끼워 맞추면 아마 이렇지 않을까?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 후 자기계발서 시장을 연다’. 미래에 대한 불안은 누구에게나 잠재해있는 공포심이고 현대의 자기계발서나 재테크서는 이러한 공포심을 자극하여 시장을 창출한다. 물론 그들은 그들의 계시를 통해 독자들의 불안도 잠재우고 영혼도 계발될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말이다.

The Scream.jpg
The Scream“. 위키백과에서 제작됨.

이 그림을 자기계발서의 표지로 쓰면 어떨까?

‘거대한 사기극’의 저자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자기계발서를 읽고 신학을 전공한 경험을 바탕으로 자기계발서가 미국, 개신교, 자본주의라는 세 가지 요소의 결합을 통해 탄생하고 발전했다고 분석한다. 이 세 요소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남의 도움이 아닌 자조(自助, self-help)를 최대의 미덕으로 여기는 자기계발의 메시지다. 자기계발의 메시지는 마치 종교의 그것처럼 ‘믿고 실천하면 당신만은 현실의 난관에 상관없이 성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물론 그 성공은 대개 자본주의에서의 물질적 성공이다.

자기계발 전파자들은 메시지 전파의 대상을 미국의 세일즈맨에서 직장인, 여성, 심지어는 어린이까지 넓혀왔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각각의 대상에게 자기계발 신화는 불안을, 특히 물질적 빈곤에 대한 불안을 조장한다. 그나마 자본주의가 성장하던 시기에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 류의 “윤리적 자기계발”이, 저성장으로 접어든 때에는 「시크릿」 류의 “신비적 자기계발”이 유행한다는 정도의 차이다. 이제 자본주의 체제의 불안은 자기계발 신화를 통해 성공적으로 개인의 불안으로 전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