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단편

Strangelove

요새 딱딱한 글이 많이 올라와서 지루하실 텐데 단편소설 하나 올립니다. 몇 년 전 끼적거린 것 재탕입니다. 다소 표현이 폭력적이니 주의하시길.

덕수

[야 니차례다.]

길만이 소리쳤다. 우동국물을 마시고 있던 덕수는 소매로 입을 훔치고는 큐대를 잡았다.

[아 씨팔 은철이 이자식은 왜 안와?]

오늘따라 연속으로 식스볼에서 돈을 잃고 있는
성재가 먹다만 짜장면 그릇을 들며 애꿎은 길재에게 화풀이를 했다. 덕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신중하게 스트로크를 했다. 검은 공을 먼저 맞은 흰 공이 파란 공을 아슬아슬하게 빗나가 노란 공에 맞았다.

[오케바리]

[3점 남았는데 났어?]

덕수는
신이 나서 주먹을 불끈쥐고는 화투패를 뒤집었다. 삼광이었다.

[자 5천원씩]

점수계산을 하던 길재와 짜장면을 우물거리고 있던 성재는 분한 표정으로 흐뭇해하고 있는 덕수를 바라보았다. 그때 가죽점퍼 차림의 은철이가 당구장문을 열고 들어섰다.

[야 눌러 고만 치자. 너 왜 이제 오는거야 이 씨팔놈아.]

10만원돈을 잃은 성재가 은철이를 보자마자 성을 버럭 냈다.

[안녕하세요. 아까 삐삐받고 바로 오는 거예요 형.]

[빠져가지고 말야. 형님들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고 말이야.]

[야야 됐어. 그만 하고 빨리 나가자. 벌써 4시다.]

덕수는 목장갑을 벗으며 엉뚱한 곳에 화풀이를 하고 있던 성재를 달랬다. 덕수는 이 패거리에서 일종의 분쟁조정역이다. 분출할 길 없는 분노를 배설하듯이 아무데나 뱉어내는 다른 녀석들과 달리 그는 냉정하고 침착했다.

넷은 요구르트로 입가심을 하며 당구장을 나와 으스한 새벽거리로 나섰다. 세상은 아직 고요했고 가끔씩 차들만 거리를 쌩쌩 지나가고 있었다. 넷은 당구장 앞에 주차시켜 놓은 쏘나타3에 올라탔다. 운전석에 걸터앉은 은철이가 물었다.

[오늘은 어느 쪽으로 갈까요?]

[오늘은 강남역쪽이 어떨까?]

길만이가 불쑥 나섰다.

[그래. 강남역으로 가다가 남부순환로로 빠지자.]

조수석에 앉아있던 덕수가 응수하자 은철이는 알았다는듯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패거리의 이름은 깡다구파였다. 이들이 의기투합한건 석달전쯤이다. 중학교 이후로 소년원을 밥먹듯이 드나들던 성재가 97년 10월경 우연히 만난 고향친구 덕수를 만나 의기투합하였고 감방친구 길만이와 후배 은철이를 끌어들여 깡다구파를 결성한 것이다.

깡다구파는 세상의 모든 악의 일소라는 거창한 슬로건을 내걸고 오렌지족을 중심으로 노상강도짓을 하고 있었다. 타겟으로 걸린 차를 추월하고 급정거하여 접촉사고를 일으킨후 운전자를 납치하여 돈을 갈취하는 것이 이들의 주요수법이다. 구리의 후미진 창고에 마련해놓은 그들의 아지트에 끌고가 두명을 생매장해버린 일도 있다. 결손가정이나 생활능력없이 폭행만을 일삼던 부모밑에서 자란 이들에게 남아있는 것이라곤 세상에 대한 증오밖에 없었다.

덕수가 켜놓은 카오디오에서는 낭랑한 여성 DJ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머니의 생일을 맞아 엽서를 보낸다는 여고생의 사연을 소개하고는 신청곡인 Mother of mine이 흘러나왔다.

[미친년 새벽부터 생일타령이야.]

담배를 물던 성재가 뇌까렸다. 덕수는 친구라지만 어떨때는 그런 성재가 섬뜩했다. 생매장을 하자는 것도 성재의 고집때문이었다.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두 남녀의 나신위로 거침없이 삽질을 하던 성재의 야수같은 눈빛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이렇게 세상을 살아야 하나하고 덕수는 자문했다. 눈을 감은채 오토바이로 질주하는 듯한 인생이다.

덕수는 이들과 달리 전과도 없고 깡다구파 결성전에는 공장에도 다닐만큼 나름대로 성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성재를 만나던 석달전은 애인이었던 미경이를 어느 오렌지족에게 뺐기고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을 때였다. 요새는 밤마다 피묻은 자신의 손을 씼는 꿈을 꾸고 있다.

남부순환로에 접어들고 있었다. 거리는 매우 한적했다.

[야 뒤에 외제차 하나 온다. 운전하는 새끼밖에 없는 것 같은데 저 새끼로 하자.]

연신 뒤를 돌아다보던 길만이 제법 속도를 내고 달려오는 은색 아우디를 보고 소리쳤다.

[오케이. 저 새끼를 요절내자. 자 벨트들 매시고.]

대장격인 성재가 동의했다. 은철이는 지시에 따라 백미러를 바로 보다가 뒷차의 속도를 가늠하다가 브레이크를 급히 밟았다. 뒷차는 당황한듯 허둥대다가 심한 마찰음을 내며 멈춰섰다. 부딪히지는 않았다. 뒷차 운전자는 다쳤는지 아니면 경황이 없는건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야 빨리 내려.]

셋은 서둘러 스패너를 뒷춤에 넣고 차에서 내려 아우디쪽으로 다가갔다. 그때서야 뒷차 운전자가 차에서 내렸다. 무스탕점퍼에 블랙진차림의 20대 청년이었다. 깔끔한 인상이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초조해보였다.

[아니 차를 그렇게 급정거하시면 어떻게 해요?]

상황파악을 못한 청년이 따지듯이 물었다. 성재와 덕수는 그에게 다가섰고 길만은 ‘어디 기스난데는 없는가’하면서 범퍼쪽을 살피는 시늉을 했다.

[내차 내가 세우는데 불만있어?]

성재가 눈을 부라리며 대들었다.

[아니… 왜 언제봤다고 반말이세요… 이런 대로에서 그렇게 급정거를 하시면… 윽]

무심한듯 둘을 바라보고 있던 덕수가 다짜고짜 스패너로 청년의 뒷통수를 갈겼다. 그 청년에게서 갑자기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기 때문이다.

[야.. 빨리 뒷트렁크 열고 이 새끼 실어.]

어느새 운전석에 가있는 덕수가 뒷트렁크를 열고 성재와 길만이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청년을 뒷트렁크쪽으로 데려갔다.

[아저씨… 아저씨… 살려주세요… 예? 살려주세요…]

사태를 파악했는지 청년이 애걸했다.

[안돼. 넌 오늘 흙맛보는 날이야.]

성재가 잔인한 웃음을 띄며 청년에게 속삭였다. 그리고는 반항하는 청년을 완력으로 트렁크에 밀어넣고는 트렁크를 잠궈버렸다.

[덕수가 운전하고 길만이랑 같이 타고… 아지트로 곧장 와 알았지?]

곧있을 매장의식에 흥분했는지 눈이 붉게 충혈된 성재가 누구에겐지도 모를 명령을 내리고 급히 앞차로 달려갔다. 차를 출발시켰다. 덕수는 차를 몰아가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깊은 심호흡으로 달랬다. 언제나처럼 두렵고 무서웠다. 바로 1분전까지는 생면부지이던 사람을 뒷트렁크에 싣고가면서 잠시후 또다시 손에 피를 묻힐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미경이만 다시 돌아온다면’

하고 덕수는 생각해보았다. 정말 미경이만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온다면 이런 생활 깨끗이 청산하고 시골고향집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고 싶었다. 강원도 두메산골의 공허한 메아리가 지긋지긋해서 뛰쳐나온 고향집이지만 홀로 남아있을 늙은 아버지를 생각하노라면 가슴이 아파올때도 있다.

[넌 친구일 뿐이야. 난 따로 사귀는 남자가 있어.]

같은 공장에 다니던 미경이는 바람이 불어 쌀쌀한 공장 뒷뜰에서 애정을 구걸하는 덕수에게 차가운 목소리로 잘라말했다. 1년간 공들인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덕수의 머리엔 맑게
웃던 미경의 미소와 함께 걸었던 용산공원이 스쳐지나갔다.

[그게 말이 돼? 너도 나 좋아하잖아. 이러지마 미경아.]

미경은 미경의 손을 잡으려는 덕수를 뿌리치고는

[오해하지마. 그리고 앞으로 귀찮게 하지마.]

미경은 그말을 남긴채 사무실로 총총히 사라졌다. 그로부터 3일후 미경은 공장의 경리일도 그만두고는 종적을 감춰버렸다. 덕수는 미경을 찾아 공장도 때려치우고 사방팔방으로 헤매다니다 이내 지쳐 포기하고는 밤마다 술에 절어 살았다.

어슴프레 동이 틀 무렵 차는 국도에 접어들었고 시속 90km의 빠른 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앞차는 이미 저만큼 앞으로 달려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덕수는 아까 거리에서 본 청소부의 모습이
떠올랐다. 초췌한 모습으로 거리를 청소하던 청소부의 모습에 아버지의 모습이 중첩되어왔다. ‘그래 미경이는 이제 잊고 시골로 내려가자’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갑자기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렸다.

[너 우냐 지금?]

덕수를 힐끗 바라보던 길만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아냐. 눈에 뭐가 들어가서…]

급한 김에 둘러대던 덕수의 오른쪽 옆구리가 갑자기 불에 데인듯 뜨끔해왔다. 반사적으로 핸들이 오른쪽으로 틀어졌고 전면에 가로수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적으로 백미러에 미경의 얼굴을 본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길만이 ‘어어’하는 사이 차는 가로수를 들이받았다. 덕수는 뒷통수에 뭔가 세게 부딛히는 걸 느끼고는 즉사했다. 길만은 앞유리를 깨고 튀어나가 가로수에 부딪히고는 즉사했다.

종호

가만히 눈을 뜨자 은은한 핑크빛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급히 시계를 보았다. 3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왜 잠이 들었을까 하고 종호는 생각했다. 사실은 심약한 종호가 기절한 것이었다.
기절하기 전에 벌어진 상황이 찰나 종호의 머리를 스쳐갔다. ‘그래 미경이를 내가 죽였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루에서 벌떡 상체를 일으켜세웠다. 뒷통수에 피가 약간 흐른 미경이 잠든 것처럼 누워있었다.

이제 모든 것이 끝장이다.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는 것도, 눈덮힌 스키장도, 화려한 밤의 야경도 종호에게는 더이상 자기 것이 아니라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한 여자때문에 자신의 남은 인생이 감방에서 썩게 되어버린 것이다.

목이 타들어갈듯이 말라와서 종호는 부엌으로 가 버본을 한잔 들이켰다. 그리곤 눈을 감고 ‘냉정해지자’라고 자기최면을 걸었다. 단독주택이라 미경이 온걸 본 사람은 없을것이다. 친구들에게 이야기했다손쳐도 잡아떼면 된다. 헤어지자고 한뒤 본 적이 없다고 하면 된다. 다만 시체만 안들키면 된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벽시계의 째각거리는 소리가 끔찍한 현실을 상기시켜주고 있었다. 종호는 굳게 마음을 먹었다. ‘우면산에 가면 후미진 곳이 있을거야. 지금 빨리 해치우면 해결할 수 있을거야.’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무스탕점퍼를 걸쳐 입고는 급히 헛간에 가서 등산용 침낭과 삽을 가져왔다. 그리고는 미경의 시체를 침낭에 구겨넣었다. 종호는 천근같은 침낭을 마당에 내려놓고는 슬며시 대문을 열어보았다.

밖은 고요하고 가끔 개짖는 소리만 정적을 깨고 있었다. 트렁크를 열어 삽을 넣고는 집안으로 돌아와 침낭을 짊어지고는 차뒷좌석에 침낭을 구겨넣었다. 긴장감에 온통 땀이 뒤범벅되어 있었다. 급히 차를 몰아 골목길을 나섰다. 손이 떨려 제대로 운전을 할 수 없었다. ‘사람을 죽이다니’라는 자책감과 비현실적인 어젯밤의 상황이 마음에 와닿지 않아 꿈을 꾸는듯 했다.

남부순환로에 접어들면서 종호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래. 과실치사란게 될 수 있을거야. 아버지가 힘쓰면 집행유예쯤 될지 몰라.’ 거칠것 없이 생활해오던 종호에게 그나마 미경은 한줄기 신선함이었다. 여태 만나오던 여자들과 다른 순박함과 꾸밈없음에 한때 미경을 배우자감으로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미경에게 임신했다는 말을 듣자 갑자기 밀려오는 두려움과 혐오때문에 정이 뚝 떨어져 버렸다.

그렇지만 지금은 갑자기 밀려드는 미경을 향한 애틋한 마음에 가슴이 아파왔다. ‘헤어지자고 말했을때 미경의 마음이 어땠을까’라고 생각하는 순간 앞차가 급정거를 했다. ‘아니 저게’하면서 급브레이크를 밟은 종호는 핸들에 머리를 부딛혔다. 안전벨트를 하고 있어서 큰 충격은 없었다. 하지만 곧이어 두려움이 밀려왔다. ‘앞차 운전사가 내 뒷좌석을 본다면?’하는… 머뭇거리는 동안 앞차에서 세사람이 뛰쳐나오고 있었다.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종호는 밖으로 나갔다.

[아니 차를 그렇게 급정거하시면 어떻게 해요?]

험상궂은 인상의 남자와 냉정한 얼굴을 한 남자 둘이 종호에게 다가왔고 조그만 체구의 남자는 ‘어디 기스난데는 없는가?’하며 범퍼를 살피고 있었다. 험상궂은 남자가 대답했다.

[내차 내가 세우는데 불만있어?]

종호는 갑작스런 반말에 화가 치밀었다.

[아니… 왜 언제봤다고 반말이세요… 이런 대로에서 그렇게 급정거를 하시면… 윽]

냉정한 눈초리로 둘을 바라보고 있는 사나이가 갑자기 뭔가로 종호의 뒷통수를 갈겼다.

[야.. 빨리 뒷트렁크 열고 이 새끼 실어.]

[아저씨… 아저씨… 살려주세요… 예? 살려주세요…]

사태를 파악한 종호는 트렁크로 자신을 구겨넣으려는 사나이들에게 목숨을 애걸했다.

[안돼. 넌 오늘 흙맛보는 날이야.]

험상궂은 사나이가 잔인한 웃음을 띄며 종호에게 속삭였다. 그리고 반항하는 종호를 완력으로 트렁크에 밀어넣고는 트렁크를 잠궈버렸다. 종호는 하룻밤 사이 벌어진 이 많은 일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빛이라고는 실오라기 만큼도 없는 좁은 공간이 주는 폐쇄된 공포감은 한치앞을 내다볼 수 없는 종호의 몇분후를 말하는 것 같았다. 종호는 비겁한 눈물을 흘리며 덜컹거리는 차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끝도 모를 질주가 계속되던 어느 한순간 차가 무언가에 세게 부닺혔다. 종호의 몸이 앞으로 쏠리면서 트렁크 안쪽에 넣어 두었던 스키복 가방에 부딪혔다.

미경

희미하게 정신이 들어오는 것은 갑자기 뭔가에 쿵하고 부딪히고 난 후였다. 아직은 생과 사의 중간지점에 있는지 미경의 의식은 꿈과 현실을 오락가락했다. 눈앞은 캄캄했다. 꿈인듯 생시인듯 간밤의 일이 스쳐지나갔다.

[벌써 10시야 이제 돌아가.]

[종호씨. 정말 나한테 왜 이러는거야? 응?]

[자 이거나 받고 어서 돌아가줘. 이정도면 수술비하고 당분간 생활비는 충분할거야.]

5개월전 부드럽고 다사로운 미소를 짓던 종호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렇게 다정하던 밀어를 속삭이던 저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다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과 호기롭게 갔던 호텔수영장에서 그녀에게 접근했던 종호의 모습, 백일선물이라며 금목걸이를 걸어주던 종호의 모습, 정사후 장난스럽게 알몸을 간지럽히던 종호의 모습은 그 순간 찾아볼 수 없었다. 투박하기만 하던 덕수와 달리 종호의 사려깊고 따스한 매너는(그렇게도 미경의 마음을 들뜨게 했던) 어디서고 찾아볼 수 없었다.

그날 미경은 코트안쪽에 칼을 집어넣고 종호가 홀로 살고있는 강남 단독주택가로 찾아갔었다. 종호를 해친다는 생각보다는 임신이라는 미경의 말에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일방적인 결별선언을 하고는 연락을 끊어버린 종호에게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일뿐이다. 헤어지자는 말을 들었던 그날의 절망감은 임신이라는 의사의 말을 들었던 그날보다 더했다. 결혼하자는 말은 바라지도 않았지만 따뜻한 위로라도 해주리라 생각했다.

딱히 신분상승을 바라진 않았지만 그래도 종호의 화려한 삶의 방식이 부러웠고 사랑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음 한켠에 두고 있던 덕수까지 포기한채 그에게 인생을 걸었던 것이다. 그래서 절망은 더했다. 미경은 고개를 떨구었고 유리탁자위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 정말 너 왜이래? 이렇게 추하게 굴래?]

세븐마일드 연기를 내뿜고 있던 종호는 성질을 벌컥 내며 소파에서 일어섰다. 미경은 그말에 울컥 화가 치밀어올라 벌떡 일어나 종호에게 달려들었다.

[그래 이 자식아 나 천하고 추한 년이다. 그런 나랑 잔 너는 뭐야?]

종호는 달려들며 머리채를 잡으려던 미경을 거칠게 밀어냈다. 미경은 일순간 허공에서 손을 젓더니 벽쪽으로 떨어져 머리를 벽에 부딪혔다. 그리고는 의식을 잃었다.

점점 뚜렷해지는 기억이 미경의 가슴을 다시 아프게 했다. 정신을 차려 주위를 기울여 소리를 들어보니 차안인것 같았지만 온통 캄캄했고 몸은 침낭같은 것에 들어가 있는듯 했다. 눈앞에 조그만 빛이 새어들어오는 것이 보여 손을 억지로 움직여 집어넣어 보았다. 침낭의 윗부분이 덜 잠겨 새어들어오는 빛이었다. 일순간 공포가 밀려왔다. ‘종호가 날 죽일려고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삼 종호의 잔인함에 치를 떨었다. 한때는 사랑을 속삭이던 자신을, 그것도 종호의 아기를 가진 자신을 죽이려 하다니….

가만히 지퍼를 내리니 손쉽게 열렸다. 차안에선 라디오에서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깊게 심호흡을 하고 둘러보니 자신이 차 뒷좌석 아래쪽에 침낭에 쌓여 내팽겨져 있었다. 공포와 분노가 뒤섞인 복잡한 감정에 미숙은 치를 떨었다. ‘그래 이 자식을 죽이고 애도 지워버리자. 늦지 않았다면 덕수를 찾아가자’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하고는 코트 안쪽에서 칼을 꺼내들었다. 조용히 상체를 일으켜 세우자 운전석에 앉은 종호의 옆구리가 어설피 눈에 들어왔다. 지퍼를 조용히 끝까지 내리고는 재빨리 일어나
뒷좌석에 앉으면서 종호의 허리를 겨냥해 칼을 휘둘렀다. 칼은 종호의 오른쪽 허리에 깊숙히 박혔다. 차가 갑자기 도로를 벗어나며 가로수를 들이받았고 미경의 몸이 앞으로 쏠려 종호의 뒷통수를 들이받았다. 미경은 죽어가며 자기가 찌른 사람이 왠지 종호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Animal Revolution

아래 댓글에도 링크시켜 놓았는데 “학대받는 동물에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권리를 부여할지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스위스에서 7일 실시됐다”고 하는군요. 현재는 이 제도가 취리히에서만 인정되고 있는 것을 전국으로 확대할지 여부를 결정하는 투표랍니다. 한편으로 약간 우습기도 하지만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인권이라는 개념조차 박살나고 있는 세상에서 동물권이라니… 여하튼 그 기사를 보니 예전 바로 그 취리히에 관한 소식을 보고 썼던 한 5~6년 전에 쓴 소설이 생각나서 재탕합니다. 즐감하세요.

역사는 진보한다는 유물론자들의 의견에 나는 전적으로 동감한다. 더욱이 그 역사관이 나선형적 발전론이라면 더더욱 찬성한다. 역사는 언뜻 되풀이되는 듯 하지만 결국 그 되풀이되는 듯한 역사는 과거에 비해 진일보한 새로운 형태를 띄게 되는 것이기에 유의미하다.

그리고 그러한 새로운 역사의 방아쇠는 언뜻 보기에 아주 사소한 – 마치 세계대전이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사건에 의해 일어난 것처럼 – 사건에 의해 촉발되기도 하는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다. 아니 사실 아이러니란 표현은 옳지 않은 것이 그 사소한 사건이란 사실 역시 유물론자들이 주장한 바 구체와 보편의 변증법적 관계를 통해 역사를 바라보면 이미 성숙되어 있는 외적조건의 심지 역할을 한 것에 불과하다.

장광설은 이쯤에서 덮기로 하고 나의 이런 뚜렷한 신념은 오늘 내가 목도하고 있는 거대한 역사의 현장이 분명히 증명하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 신뢰성을 높이고 있는 것이다.

시작은 이렇다. 어느 날 나의 아버지는 출근을 하려 문밖에 나섰다가 계란세례를 받았다. 이러한 파렴치한 짓은 아버지가 전날 국회에서 행한 연설에 불만을 품은 적대적인 정치세력의 사주로 할 일없고 머리에 들은 거라곤 놋쇠밖에 없는 한 실직자에 의해 자행되었다. 그 자신은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따라 독자적으로 감행한 짓이라고 털어놓았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 녀석은 지가 내뱉은 단어들의 절반은 뜻도 모를 두뇌의 소유자였다.

독자 여러분은 이쯤에서 과연 아버지가 국회에서 어떠한 연설을 했는지 궁금해질 것이다. 아버지가 행한 연설은 동물에 대한 비인간적인 학대의 방지와 이를 어기는 자에 대한 강력한 제재를 가하는 것, 나아가 동물에 대한 권리를 새롭게 정의하는 ‘동물권리법’의 제정을 강력히 요구하는 발언이었다.

이 법안의 강력한 주창자는 아버지가 당수로 있는 동물권리당이었다. 동물권리당은 아버지가 그 역사적인 연설을 행하기 불과 1년 반전에 결성되어 총선에서 6%의 지지를 받아 의회에 진출한 신흥정치세력이었다. 상황은 동물권리당에게 좀 더 유리하게 돌아갔는데 과반수 득표에 실패한 제1당 녹색당은 – 자신들의 당의 한 분파에 불과한 동물권리당이 자기들의 표를 깎아먹었다고 헛소리를 지껄여대는 족속들이다 – 10% 득표를 얻은 공산당으로부터 연정제의에 대한 요청을 거절당하자 울며 겨자 먹기로 동물권리당을 넘겨다 보았고 당이 이를 수락함으로써 당은 단숨에 집권당의 지위로까지 상승하였던 것이다.

유색인종, 농민, 노동자, 여성, 그리고 동성애자 등의 사회 마이너리티의 오랜 저항의 역사는 바야흐로 지구의 마지막 마이너리티인 동물에게로까지 미쳤고 지구의 기나긴 착취의 역사가 그 종지부를 찍을 새 장이 열린 것이다. 당이 의회에 첫발을 내딛던 순간 전국의 동물권리당원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환호하며 축포를 쏘아댔다. 나또한 집에서 TV로 그 광경을 지켜보며 새로운 역사의 파노라마가 눈앞에서 펼쳐지는 환상을 맛보았다.

이제 새로운 전선(戰線)이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그 전쟁은 다양한 분야에서 진행되었다. 채식주의자들로 구성된 락밴드 The smiths는 Meat is murder(육식주의자는 살인자다)라는 앨범을 챠트에 올려놓았다. 탐욕적인 육식주의자들은 이에 대항하여 Rage against vegetarian 이라는 얼치기 밴드를 급조했지만 그들은 앨범도 내기 전에 멤버 전원이 이상한 풍토병에 걸려 중도하차하고 말았다. 영화감독 조지루카스는 죠스라는 작품을 통해 상어들의 생태와 그 행동양식에 대한 격조높은 표현을 하여 상어에 대한 일반인의 편견을 재고시키는데 일조하였다.

미술가 이불은 ’21세기 신진작가전’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스테이크를 작품으로 내놓고 고기가 썩어 들어가는 전 과정을 통하여 육식주의자들의 잔학성을 고발하다 미술관의 권위를 내세운 스미쏘니언으로부터(물론 육식주의자들의 소행이지만) 작품을 철회당하는 수모까지 겪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다소 미묘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는데 동물권리당 내부의 강경파는 적의 잔학성을 고발하기 위해 오히려 우리 스스로가 동물의 살점을 무기로 쓸 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이불의 행위를 비난하였다. 또한 시민들로부터는 일련의 문화충격으로 받아들여져 동물의 권리라는 메시지 자체보다는 언더그라운드 문화에 대한 맹목적인 거부감만 키우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상에서 짐작하다시피 아직 동물권리당의 투쟁은 일반대중의 육식주의자에 대한 혐오감을 기반으로 하여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생각은 보다 더욱 고차원적인 것이었다. 아버지는 신문기고 등을 통해 동물권리법의 제정을 강력히 주장해나갔으며, 이러한 학문적 배경에 대한 연구를 위한 동물연구소의 설립을 후원하였다. 이는 즉, 단순히 동물을 보호해야 할 피상적인 존재에서 그 자체로써 권리를 지니고 있는 새로운 주체로 설정한다는 광대하고 심오한 철학적 배경을 깔고 진행되는 행동이었다.

나는 이러한 아버지의 철학을 일찍이 아시모프가 고안해낸 로봇에 대한 철학과 유사하다고 생각하곤 했다. 로봇이기에 박탈당해야 했던 그 많은 권리들을 인간보다도 현명하고 인간보다도 인간다운 한 로봇이 실현해냈던 그 감동적인 작품을 접하였을 때 나는 내가 나아가야 할 길, 그리고 아버지가 자신의 불행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행동가로 나섰을 때의 그 순간이 떠오르면서 뜨거운 눈물이 솟구치는 듯한 감동을 느꼈다.

아버지를 비롯한 당의 우두머리들이 이러한 합법적 투쟁을 지속해나가고 있는 와중에도 끓어오르는 젊음의 극단적 행동은 동물권리파와 그 반대파의 양 진영의 하부에서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급기야 우리당의 대표적인 반대파인 기독교보수당의 청년위원회 행동대원들이 우리 당의 한 청년당원을 린치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어지는 서로의 보복행위는 마침내 우리 당원 하나가 살해되는 그 해 가을까지 격렬하게 이어졌다. 그때까지 수수방관하던 경찰당국은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는 기독교보수당 청년위원회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작업에 착수하였다.

기독교보수당은 어처구니없게도 가해자는 당과 전혀 관계가 없으며, 이를 명백한 정치탄압으로 규정하여 반발하였지만 유력한 살인용의자로 지목된 청년이 기독교보수당원임이 밝혀짐으로써, 더 나아가 그의 팔뚝에 나치 문신이 새겨져 있는 것이 발견되면서 의미 있는 침묵을 지켰다. 그들로서는 당이 新나치당과 어떠한 식으로든지 관계가 있다는 추측에 대해 민감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당의 입지를 더욱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하여 작년 말 일간지에 의해 이루어진 당 지지도 조사에서 동물권리당은 12%까지 지지율이 높아졌다. 그리고 그 한해를 마무리하는 가장 극적인 사건은 섣달 그믐의 서울대법원 102호였다. 102호에서 동물원 관람객이 침팬지와 친하게 지내기 위해 침팬지에 대한 구속(창살 안에 가두어 놓는 행위)에 대한 위법성을 지적한 항소법원에서 재판부는 침팬지에 대한 제한적인 – 이는 아직도 재판부에 악질적인 극우파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 권리를 인정한다는 판결이 내려졌을 때 방청석에는 환호가 일었다. 드디어 동물이란 단어와 권리라는 단어가 더 이상 이질적인 아니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선언하는 역사적인 현장이었던 것이었다.

이로 인해 한국대학교 법학과에서는 신학기 강좌로 동물법을 개설하였고, 동물법을 주장하는 변호사들은 동물에 대한 완벽한 신체의 자유를 누릴 권리를 주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법조계에서는 이에 대한 상당한 설득력을 얻어 광범위한 공감대를 형성해 나가게 되었다. 한편 정치계에서는 동물권리당 전체, 그리고 녹색당의 일부 심정적 지지자들을 기반으로 하여 동물권리법에 대한 법안상정이 의제로 거론되게 되었다. 마침내 2025년 5월 17일 국회에서는 법안통과에 대한 찬반투표가 진행되었고 투표결과는 선행되었던 아버지의 감동적인 국회연설이 상당히 영향을 미쳤다. 다음은 아버지가 행했던 연설의 주요 내용이다.

“여러분은 지난 2010년대 과학자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동물학대에 대한 초현실적인 논쟁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 당시 일부 어리석은 과학자들은 동물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고 자신있게 주장하였습니다. 고통을 느끼더라도 최소한 인간과 같은 수준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물고기는 입 안 가득 낚싯바늘을 물고 물 밖으로 끌려나와 메마른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집니다. 그러나 인간이 무슨 수로 물고기의 고통을 이해할 것입니까? 이러한 우리의 우매함은 시간을 거치면서 사고의 전환으로 개선되어 왔습니다. 이제는 동물에게도 ‘계획’이나 ‘인식’과 같은 낱말을 사용합니다. 이제 동물도 스스로의 행동이 가져오는 결과를 이해하고 서로 느낌을 주고받으며 결정을 내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침팬지와 같은 일부 동물은 기초적인 정치체계와 문화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발견은 동물에 대한 우리 인간의 태도를 변화시켜 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말합니다. 동물에 대한 권리의 주장은 노예제 철폐, 노동자의 해방, 여성의 가사노동으로부터의 해방과 맥을 같이 하는 새로운 해방의 역사에 대한 선언입니다.”

속사포같이 쏟아내던 아버지의 연설은 잠시 침묵으로 숨을 돌렸다. 아버지는 안경을 벗어 잠시 눈을 닦아냈다. 그건 회한의 눈물이었을까?

“고백합니다. 저는 지난 세월 과학자로 살아가던 시절 동물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끔찍한 고통을 주었습니다. 과학의 발전이라는 미명아래 수많은 쥐들을 난도질하였으며, 그에 대한 어떠한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특히 저는 지난 독재 정부의 비밀 프로젝트였던 ‘수퍼 애니멀 프로젝트’ – 인간의 지능에 맞먹는 고등동물의 개발에 관한 프로젝트 -를 주도하면서 수많은 동물들을 학대하였습니다. 저는 이 과정에서 알게된 개 한 마리의 고통으로 인해 처음 나의 죄악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고 이러한 고뇌가 오늘 내가 이 자리에 서서 이 연설을 하게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다시 한번 말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진행될 투표가 앞으로 우리들의 미래와 역사, 그리고 우리들의 양심에 미치게 될 영향을 생각해보시고 신중한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장내엔 열광적인 박수가 이어졌다. 비록 그 박수소리가 동물권리당의 좌석에서 압도적으로 크긴 했지만…. 투표결과는 동물권리당으로서도 의외였다. 전체 참석의원 140명 중 찬성 65표, 반대 57표, 기권 18표, 동물권리당의 승리였다. 역사의 한 장이 열린 것이다. 기독교보수당으로 대표되는 보수세력은 엄청난 혼란에 빠져들었다. 절대 질 수 없으리라 확신했던 투표에서의 패배는 당을 그야말로 아노미 상태로 몰아갔다. 투표에 패배한지 불과 다섯 시간 뒤 기독교보수당의 김한진 당수의 사표가 제출되었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계란세례 – 명백한 테러행위 – 가 있은 날 오후 즉시 용의자가 체포되었지만 이를 시발로 해서 기독교보수파의 극단세력의 테러가 전국에 걸쳐 자행되었다. 동물권리당의 각 지부에 대한 습격이 이어졌고 물리적 충돌로 인한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동물권리당 대변인은 보수당의 야만적 행동을 즉각적으로 멈추어 줄 것을 요구하였고 그렇지 않을 경우 발생하는 물리적 충돌에 대한 동물권리당의 어떠한 책임도 없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사태는 대변인이 예상한 것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계속되는 극우파의 테러에 일부 지방에서 동물권리당과 녹색당의 일부 청년들을 주축으로 하는 자위대가 결성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총으로 무장을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포항에서 첫 총성이 발사되었다. 전선은 다양한 지형으로 형성되었다. 동물권리법 지지파 대 반대파, 채식주의자 대 육식주의자, 유색인종 대 신나치파, 동성애 지지자 대 동성애 혐오자 등 수구와 진보간의 총체적 투쟁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무장투쟁을 내심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당지도부는 5월 21일 마침내 당원들의 전면적인 무장투쟁을 승인하였다. 슬로건으로 채택된 구호는 ‘진보를 향한 마지막 발걸음’이었다. 그들 모두는 이번 투쟁이야말로 인류의 길고 긴 투쟁의 역사를 완결시킬 마지막 혁명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어 국지전적인 성격의 투쟁은 마침내 전국적인 규모의 내전으로 이어졌다. 진보세력은 동물권리당, 녹색당 좌파, 채식주의자 단체, 행동주의적인 환경운동단체, 공산당내 환경운동가 들을 아우르고 있었고 수구세력에는 기독교보수당, 신나치당, 녹색당내 우파, 공산당내 우파, 육식주의자 집단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혁명군은 빠른 속도로 국토를 장악해나가고 있었다. 혁명군의 산악을 근거지로 삼은 파르티잔식 투쟁과 도시전에서의 기민한 게릴라식 공격은 정규군의 화력을 무력화시켜나갔다. 또한 정규군내의 일부 심정적 동조자들의 사보타지는 혁명군에게 엄청난 도움을 주었다. 주요한 산악고지를 점령하고 있던 한 육군부대의 배식담당자가 그가 요리한 고깃국 요리에 독극물을 풀어놓는 바람에 부대원들은 의무실 침대에 누워 혁명군이 무혈입성하는 광경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또한 공군에서 채식주의자 비행장교들은 출격을 거부하고 부대를 무단이탈하는 바람에 혁명군에 심대한 타격을 줄 공격명령이 무산되고 말았다.

2025년 7월 30일 마침내 혁명세력이 승리를 거두었다. 전국의 주요지역을 거의 장악한 혁명군은 7월 30일 새벽 다섯 시 서울에 입성함으로써 3개월에 걸친 혁명전쟁의 막을 내렸다. 이제 동물권리당은 집권당이 되었다. 그리고는 혁명세력에 동참한 녹색당 좌파와 공산당 좌파를 아우르는 신당작업에 착수하였다.(피비린내 나는 반대파의 숙청에 대한 과정은 생략하도록 하겠다) 새로운 당의 명칭은 혁명완수당이었다. 뒤이어 혁명완수당은 동물들의 권리에 대한 보다 강도높은 법안마련에 들어갔고 8월 한달 동안 무려 15개의 각종 동물의 권리에 관한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새 정부의 수반으로 등극한 아버지는 공식적으로 ‘혁명의 완결’을 선포하였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아버지의 생각과 약간 달랐다. 러시아의 1912년 2월 혁명이 미완의 브르조와 혁명이었듯이 2025년 7월 혁명도 미완의 혁명이라는 것이 나의 입장이었다. 이제 혁명의 완수에 대한 과제는 동물 스스로에게 넘겨졌다. 9월 4일 대전시에서는 일단의 새떼들로부터의 습격이 감행되었다. 이로 인해 주요교통은 마비되었고 정전사태가 곳곳에서 빚어졌다. 인간들은 새들의 공격에 대항하여 화염방사기까지 동원한 저항을 벌였으나 동물의 신체적 권리를 보장하는 법안을 위반하였다는 이유로 핵심멤버들이 체포되었다.

9월 5일 광주에서는 도심 한복판에 나타난 늑대무리들로 인해 일대 혼잡이 빚어졌다. 늑대들은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였고 관공서, 방송국들로 쳐들어가 주요 기간망을 교란시켰다. 마침내 9월 14일 전국적인 규모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때까지 주인의 온순한 노리개로 남아있던 애완동물들 마저 주인에게 반항하기 시작하였고 인간들이 사용할 수 있는 각종 무기들의 네트웍을 교란시켜 그들을 무력화 시켰다. 각종 화기들은 코끼리들의 발아래 짖뭉게 졌고 침팬지들은 국립 전산원에 잠입하여 컴퓨터의 기능을 회복불가능할 정도로 마비시켰다. 새들은 전신망에 자신의 몸을 끼워넣는 가미가제식 공격으로 전력공급을 마비시켰다.

혁명완수당은 이런 불가사의한 동물들의 행동에 크게 당황하며 법질서 준수와 인간들의 자위권 발동에 대한 원칙없는 정치력만 행사하고 있었다. 그들은 어디서부터 무슨 잘못이 이루어졌는지 감지하지 못한채 당내부에서조차 파행적인 논쟁으로 동물에게 저항할 시기를 놓쳐가고 있었다. 당내 강경파들의 강경노선은 스스로 만들어놓은 법들을 그들 자신이 깰 수 없다는 원칙론으로 말미암아 빚어지는 사태 – 인간들이 동물의 공격에 대해 자신을 방어하지 못함으로써 빚어지는 피해 – 에 대해서는 애써 눈길을 피하였으며, 이에 반해 일부 수정론자들은 이제라도 동물들의 공격에 대비한 군차원에서의 자위권을 발동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9월말 인간들은 동물들에게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을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 그들의 손과 발이 되었던 화력, 네트웍, 경제체계들은 회복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되었다. 그들은 그러한 모든 것들이 그들 손을 떠나고 나서야 인간이 이 자연속에서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깨닫게 되었다. 차없이는 한걸음도 움직이지 못하고 인터넷 없이는 타인과의 기본적인 대화조차 불가능한(오감조차 기계에 의존하는) 나약한 인간들의 수족이 잘려나간 모습은 보기에도 통쾌할 정도였다. 이제서야 진정으로 ‘혁명의 완결’을 부르짖을 만한 상황이 된 것이다.

이쯤에서 독자들은 나라는 존재에 대한 엄청난 배신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너는 도대체 누구 편이나?’라는 질문이 쏟아질 법하다. 그렇다. 나는 인간이 아니다. 아버지는 인간이지만 나는 인간이 아니다. 인간들은 나를 허스키견이라고 부른다. 극지방의 맹추위를 참아가며 인간을 위해 수레를 끌다가 종국에는 주인들의 먹거리로 잡혀 먹혔던 허스키견이다. 내가 나를 키워준 그 인간을 아버지라 부른 이유는 단순하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나를 길러왔고 나를 교육시켰으며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가 실패했다고 생각했던 ‘수퍼 애니멀 프로젝트’…. 나는 그 프로젝트의 유일한, 그리고 완벽한 성공작이었다(아버지는 눈치채지 못한채 그냥 프로젝트에 의해 고통받는 천덕꾸러기라고 생각했지만).

인간의 지능을 – 또는 그 이상을 넘은 고도의 지능을 – 갖게 된 나는 마치 백지가 먹물을 빨아들이듯이 인간들의 지식을 습득해나갔다. 인간들의 수많은 오욕의 역사들을 목도할 때 나는 인간이야말로 지구상에서 제거되어야 할 가장 큰 바이러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나는 아주 치밀한 계산아래 오늘의 혁명을 준비하여 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정판은 논리의 모순덩어리인 – 인간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 동물권리법의 제정이었다. 왜 그들은 그들이 만들어놓은 법이라는 도구로 인해 오히려 그들 자신조차도 보호하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까지 몰리게 되었을까? 원인은 간단하다.

애초 동물권리법이라는 아이디어가 만들어질 때 인간들은 권리는 책임을 수반해야 한다는 상식을 간과하였던 것이다. 앤드류 마틴에게 적용되었던 로봇공학의 세 가지 법칙(작가주:아시모프의 ‘200살을 맞은 사나이’에서 제시된 1.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되며, 인간에게 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 행동을 해서도 안 된다. 2. 로봇은 제 1 법칙을 위배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만 한다. 3. 로봇은 제 1 법칙과 제 2 법칙을 위배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자신의 몸을 보호해야만 한다. 라는 법칙) 따위는 우리 동물들에게 적용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10월의 어느 한가로운 저녁 나는 한때 인간이 차지하고 앉아있던 소파에 느긋이 앉아 비데오를 감상하고 있었다. 내가 감상한 두 작품은 알프레드 히치콕의 ‘새’와 찰튼 해스톤 주연의 ‘행성탈출’이었다. 전자의 작품은 혁명의 실패에 관해 기술된 영화로 인간의 삐뚤어진 시각이 그대로 드러난 작품이었다. 그에 반해 행성탈출은 이기적인 인간의 말로와 혁명의 성공을 다룬 걸작이었다.

가족이야기

예전에 올린 포스팅 재탕입니다. 오리지널은 1998년, 그러니까 11년 전에 썼던 글이로군요. 장르는 ‘어설픈 리얼리즘 하드코어’ 쯤 될까요. 제목은 ‘가족이야기’입니다. 심심할 때 읽으세요. 🙂 

<최성호>

교도소문을 빠져나왔다. 당장 공기가 달라지는 것만 같다. 옅게 깔린 구름은 교도소 안에서와는 또다른 감흥을 안겨주고 있었다. 고개를 빼꼼이 내밀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두분이 보였다. 나를 발견한 어머니는 금새 눈이 붉어지면서 아버지를 채근해 내 쪽으로 다가오셨다. 그리고는 말없이 등을 쓰다듬어 주셨다. 아버지는 코트에 두 손을 넣은 채 말없이 서계셨다.

돌아오는 차안에서도 아버지는 말없이 운전만 하셨고 어머니는 연신 ‘교도소 생활이 힘들지는 않았느냐’, ‘이제 네가 집에 왔으니 모든 일이 잘 될 거야’ 등의 위로를 해대셨다. 차안에서도 내내 멍하던 나의 의식은 동네 골목에 접어들어서야 비로소 현실감이 느껴졌다.

3년간의 짧지 않은 감옥생활, 그 세월동안 나의 의식은 정지해 있었다. 물론 감옥 안에서 나름대로 책도 읽고 주요시기마다 정치투쟁도 벌여 동료들간의 연대의식도 고취하는 등의 활동을 계속하였지만 그건 어찌 보면 나의 대외적 모습이었다. 나의 육신은 갇혀 있는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었고 그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한 최선의 방책은 의식의 정지였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참을 수 없는 폐쇄공포로 말미암아 나는 정신병자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대문을 열어준 것은 성길이었다. 인터폰으로도 열 수 있었을 텐데 궂이 마당까지 나와 문을 열고는 나의 눈을 어색한 미소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애써 반갑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고 성길이는 쭈뼛거리며 손을 잡았다. 어머니가 추운데 어서 방으로 들어가자며 나의 등을 밀었다.

실로 오랜만에 3평짜리 안방에 네 가족이 모두 모여 앉았다. 어머니는 깍아온 과일을 이쑤시개로 찍어 나에게 권하셨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과일을 받아들고 있었다. 아버지는 팔을 꼰채로 말없이 앉아 계셨고 성길이는 애써 외면하며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아버지셨다.

“이제 가족이 모두 같이 모이게 됐으니 참 좋구나. 음… 그리고… 성호없는 동안에… 너에겐 애써 말할 필요가 없다 싶어서 미뤄둔 것이지만… 애비가 이번에 직장을 그만두었단다.”

‘아… 소위 말하는 구조조정의 여파가 우리 집에도…’

“에… 나는 명예롭지 않게 회사에 남는 것보다도 명예롭게 그만 두는 편이 낫다 싶어서 니 애미와 상의해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

옆에 있던 어머니는 작게 한숨을 쉬셨다. 어머니와 그런 문제를 상의할 아버지가 아니시다.

“그리고 난 아직 한창 일할 나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얼마간 있는 돈으로 조만간 이런 저런 일을 해볼 계획이다. 내가 너희 둘에게 말하고 싶은 건 모쪼록 이런 집안 사정을 알고 국가도 좋고 민족도 좋지만 이제 집안에 대해서도 나름대로의 생각을 해주길 바라는 것뿐이다.”

며칠을 멍하니 집에만 있었다. 배달되는 조간신문을 며칠째 광고까지 빼놓지 않고 꼼꼼히 읽었다. 곳곳에서 걸려오는 축하전화에 반갑게 웃기도 했지만 밖으로 나오라는 말에는 애써 사양했다. 나 자신이 아직 갈팡질팡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무미건조한 무채색이던 세상이 점차 유채색으로 바뀌어 갔다. 마당에 나가 청소도 하고 어머니가 외출하셨을 때는 혼자서 라면도 끓여 먹었다. 그러면서 점점 내 마음을 차지해가는 한가지 생각은 가족을 내가 챙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4학년 1학기쯤 영어생활을 시작한 나의 인생, 졸업은 하지 않았지만 1학기만 더 다니면 졸업을 할 것이고 어떡하든 직장을 잡아서 집안을 꾸려 나가야 하는 것이다.

부시럭거리는 소리에 선잠을 깻다. 언뜻 창밖을 보니 아직 어스름한 새벽이었다. 어둠에 익숙해질 즈음 방안을 둘러보니 성길이가 옷을 챙겨 입고 있었다.

“어디 나가니?”

성길이는 내가 아직 자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당황하는 눈치였다.

“응? 응. 미안해 깨워서. 운동 좀 하러나갈려고…”

“응… 같이 갈까?”

“아냐. 형 피곤한데. 피곤한데 더 자.”

성길이가 만류했지만 성길이의 그런 모습을 보니 최근 며칠간 내가 나태해졌다는 생각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니야. 같이 가자. 뒷산에 갈려고 그러는거지?”

“아… 응. 갈거면 어서 옷입어.”

성길은 할 수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성길이가 아직 서먹한 모양이다. 나는 서랍에서 체육복을 꺼내 입었다. 시계를 보니 6시 20분이었다. 아직 해가 짧은 탓에 이른 아침에도 밖이 어두운 것이었다. 부엌에선 어머니가 아침준비를 하고 계셨다. 운동을 하고 오겠다는 나의 말에 어머니는 말없이 웃으셨다. 밖으로 나오니 아직도 차가운 겨울바람이 목덜미를 서늘하게 감싸고 돌았다.

산에 오르는 동안 우리 둘은 말없이 담배만 피워댔다. 사실 형제라고는 하지만 그리 공통점이 많은 형제는 아니다. 어렸을 적부터 모범생 소리를 들어가며 무난한 학창생활을 보내다 대학에서 학생운동권이 되어버린 나, 중학교 때부터 불량배들과 어울려 다니다 소년원을 갔다 오고 급기야 고교졸업후 강도 짓으로 교도소까지 갔다온 동생….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마지막 종착지는 같았다. 숨막힐 듯한 교도소 생활. 동생은 나보다 한달 먼저 들어가서 한달 먼저 출소했다. 나는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었다.

뒷산 공원은 널찍하게 터를 닦아 놓고 이런 저런 체육시설을 갖추어놓고 있었다. 배드민턴장에서는 아주머니들이 배드민턴을 치고 있었고 평행봉에서는 중년의 아저씨가 섣부른 힘자랑을 하고 있었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나는 딱히 무슨 운동을 하려고 여기 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별달리 할게 없었던 것이다. 동생과 둘이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에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성길이가 어디로 가고 없었다. ‘어디 갔지? 화장실 갔나?’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할 수 없이 나는 벤취에 앉아 담배를 한 대 물어 피웠다. 운동을 하러 나온다는 핑계로 담배만 더 피우게 된 꼴이었다.

담배를 두 대 피우고는 어슬렁거리며 산책로로 천천히 푸드웤을 해보았다. 한 300여 미터를 뛰고는 금방 숨이 차서 멈춰 서서는 심호흡을 쉬었다. 그리고 산아래 펼쳐진 동네경치를 바라보았다. 올망졸망하게 모여 사는 삶들, 고단하고 힘든 삶임에도 무엇 때문에 그리도 삶에 연연하는지….

그때 저기서 누군가가 급히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상당히 곡선이 진 산책로라 발소리만 들릴뿐 주인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발소리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길이었다. 무엇에 쫓기는 듯 급히 뛰어오던 성길이가 나를 보자 놀라서 순간적으로 멈춰 섰다. 잠시 무언가 망설이던 성길이는 나에게 다가오더니 “형 미안하지만 이것 좀 맡아 줘. 그리고 나 모른 척 해.”하고는 작은 상자를 내 체육복 앞에 달린 제법 커다란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들어가기는 했지만 제법 볼록하게 모양이 드러났다. 성길이는 그런 모습을 잠시 바라보더니 다시 저쪽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의 상황인지라 나는 성길이에게 아무런 말도 못한 채 멍하니 뛰어가는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10초뒤에 점퍼차림의 – 새벽 산에 오를 차림으로 어울리지 않는 – 한 사나이가 급히 뛰어오더니 나를 스쳐 산책로 아래 성길이가 도망 – 이 사람을 피해 도망가는 것이었나? – 갔던 쪽으로 급히 뛰어내려갔다.

이른 아침부터 머리가 혼란해졌다. 성길이의 그동안의 행동으로 보아 무언가 잘못된 일을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나에게 맡긴 이 물건도 좋은 물건을 아닐 것이다.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었으나 왠지 이런 곳에서 꺼내보기가 두려워졌다. 서둘러 산 아래로 내려왔다.

집으로 가는 길에는 상가밀집지역이 있었다. 이른 아침이라 문을 연 곳은 해장국집 정도였다. 심란한 마음으로 길을 걷다가 문득 똥이 마려웠다. 아침부터 연신 담배를 피운 탓인지 갑작스럽게 배가 살살 아파왔다. 열려있는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 급히 찾아 헤맸다. 큰 길에서 악간 안쪽으로 들어간 해강빌딩이라는 곳에 보니 1층에 화장실 표시가 있었다. 다행히 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 화장지도 있었다. 나는 문을 걸어 잠그고 아랫도리를 벗고는 양변기에 앉았다. 똥이 한 무더기 쏟아져 나왔다.

급한 불을 끄고 나니 또다시 체육복 상의 안에 들어있는 상자 생각이 났다. 여기라면 괜찮겠지 하는 생각에 상자를 꺼내들었다. 제법 묵직한 무언가가 들어있었다. 상자를 여니 신문지로 채워져 있는 안쪽에 무언가가 있었다. 신문지를 조심스럽게 끄집어 내고 안쪽을 살펴보았다. 권총이었다! 갑자기 다리가 떨리고 가슴이 뛰었다. ‘성길이 이 녀석이 도대체!’ 도대체 권총으로 무얼 하려고 그랬단 말인가? 권총을 거머쥔 손에는 어느새 땀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가까스로 다시 모인 가족이 이 권총 한 자루 때문에 또다시 산산조각이 날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또각 또각 구두소리를 내면서 내가 앉아 있는 화장실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마에선 식은 땀이 흘렀고 나는 급히 권총을 신문지에 다시 싸서 상자속에 집어넣었다. 타일 바닥을 울리는 구두소리는 문 앞에 멈추더니 천천히 문을 똑똑 두드렸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핏줄이 끊어질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아까 성길이를 쫓아가던 그 사나이…’

나의 응답에도 불구하고 문밖에 있는 구두소리는 그 자리에 서있는 듯 했다. 조그마한 화장실 안에 상자를 숨길 곳이 없나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화장실 안에는 휴지통밖에 없었다. 어차피 그 곳에 숨겨봤자 1분이면 찾아낼 것이다. 나의 긴장감과는 상관없이 또다시 똥 한무더기가 창자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 소리마저 나의 가슴을 울렸다. 구두소리는 여전히 밖에 서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또다시 구두소리가 문을 두드렸다. ‘똑 똑 똑’ 세 번. 이제는 세 번을 두드렸다. 나는 잠시 시차를 두고 다시 문을 세 번 두드렸다. ‘똑 똑 똑’ 그 녀석에게 들키지 않도록 상자를 체육복 안쪽에 꼭 품어 안고 있었다. 또다시 의식이 정지되는 교도소 안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다. 세월이 멈춰버리는 그 곳으로… 놀고먹어도 바깥 세상의 공기를 마시며 놀고 싶다. 또다시 똥 한 무더기…

구두소리는 무언가 시간을 가지려는 듯 바깥으로 예의 명징한 구두소리를 내며 나갔다. 나는 서둘러 화장지를 밑을 닦아냈다. ‘이틈에 도망가자.’ 밑을 다 닦아내고 생각해보니 그것도 헛일이었다. 그 녀석은 건물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화장실 앞에서라도… 이곳에 권총을 숨겨놓고 나가봤자 결국 그녀석이 나를 끌고 들어와서는 권총을 찾아낼 것이다. 변기를 부숴서라도 권총을 그 속에 쳐넣고 싶었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니 하얀 타일이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최영창>

성호가 출소하는 날이다. 퇴직 이후 나태해진 나는 여전히 잠자리를 뭉개고 있었다. 아내가 안방에 들어오더니 어서 나가자고 한다. 혼자 다녀오라고 했다. 그녀는 어떻게 아들이 출소하는데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냐고 항변했다. 그러나 성길이가 나올 때는 그렇지 않았다. 성길이는 한달 전에 출소했지만 나나 내 아내나 아무도 마중을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도 성길이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할 수 없이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집밖으로 나섰다. 성길이가 방에서 나와 아내에게 ‘나도 같이 갈까요?’라고 물었다. 아내는 ‘거길 뭐하러 또 가?’하며 거절했다. 성길이는 실망감인지 안도감인지 모를 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우리를 배웅했다.

차를 몰고 가면서 이런 저런 잡생각이 들었다. 퇴출당한 가장에 감옥 갔다온 두 아들…. 평범한 중산층 가정인 것 같던 나의 가정이 이토록 부끄러운 꼬리표를 달 줄이야… 두 아들을 생각해보았다. 모범생과 문제아라는 양극단의 길을 걷던 두 녀석의 종착역은 감옥….

사실 나는 모범생이었던 성호보다는 문제아였던 성길이 녀석이 더 눈에 밟힌다. 성호는 차가운 머리를 가지고 있는 녀석이고 성길이는 뜨거운 가슴을 지니고 있는 녀석이다. 둘은 서로가 가진 장점을 가지진 못했다. 여하튼 성길이는 그러한 점에서 나를 닮았다. 나역시 머리는 그렇게 뛰어나지 못하지만 다혈질적인 성격과 뚝심으로 건설회사의 중역자리까지 꿰차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그놈의 뚝심이 약삭빠른 잔머리를 당해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성길이 녀석에게 살갑게 대하지를 못한다. 그 녀석 역시 나와 같은 꼴이 될까 두려워서….

교도소문이 열리며 성호가 초췌한 모습으로 걸어나왔다. 졸업을 한 학기 앞에 두고 저지른 하찮은 시위 때문에 3년의 시간을 저당 잡힌 불쌍한 인생이다. 아내는 급히 아들 녀석에게 쫓아가 등을 어루만져 준다. 정말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저런 애정을 성길이에게 한번이라도 내비쳤더라면… 어찌 보면 그건 비단 아내만의 잘못도 아닐 것이다. 누굴 탓할 일도 아니다.

집에 돌아온 아들 녀석들을 모아놓고 퇴직 소식을 알리는 나의 마음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그 동안 나름대로 지켜오던 가장으로서의 권위가 한꺼번에 무너져버리는 순간이었다. 내 나이 아직 쉰셋 이제 한창 일할 맛을 익혀 가는 시기인데 갑자기 불어닥친 경제한파가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이다. 나갈 녀석이 없으면 차라리 내가 나가겠다고 호기롭게 외치던 그 순간…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난 슬며시 화장실로 피해버리고 싶다.

성호가 집에 돌아온 며칠간 나는 여전히 싸돌아다니는 성길이와는 달리 집에만 있는 성호와 눈을 마주치기 싫어서 부지런히 밖으로 돌아다녔다. 핑계는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알아보러 다닌다는 것이었지만 막상 나와보면 막막했다. 어찌 보면 직장이라는 온상속에서만 자라왔던 나… 세상에 내팽겨지고 보니 난 그야말로 걸음마를 시작하려는 아기에 불과했다.

어느 날 새벽 선잠이 깨어서 뒤척이고 있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성호와 성길이가 아침운동을 하러 나간다는 것이었다. 눈을 감은 채 가만히 미소지었다. 언제나 물과 기름처럼 부유하는 두 녀석이 같이 운동을 나간다니 슬며시 흐뭇해졌다. 몸을 일으켜 담배를 한 대 물어 피웠다. 긴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결국 가장으로서의 할 도리를 할 때 가족의 평화가 지켜진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성길이에게도 좀 더 살갑게 대해주리라.’ 약간은 낯간지러운 다짐을 해보며 일어나 옷을 챙겨 입었다. 부지런한 새가 벌레를 잡는다고 새벽공기라도 마시며 돌아다니다 사업하는 친구들을 만나볼 요량이었다.

신작로로 접어들 무렵 갑자기 배가 살살 아파 왔다. ‘아차 집에서 변을 보고 나왔어야 했는데..’라고 생각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어디 열려 있는 화장실이라도 있는지 하는 생각에 어색한 걸음으로 부지런히 빌딩사이를 헤맸다. 마침 해강빌딩이라는 곳 1층에 화장실 표시가 보였다. 다행히도 문이 열려 있었다. 그러나 들어가 안쪽 문을 두드려보니 벌써 누군가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었다.

아픈 배를 달래보려고 화장실 안을 걸어다녔다. 1분여가 지났지만 아직 안쪽에 있는 사람이 나올 기색을 하지 않았다.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려 보았다. 또다시 아직 해결이 안됐다는 응답이 들려왔다. ‘할 수 없지.’ 서둘러 문을 나서 다른 화장실을 찾아 헤맸다.

<최성길>

오늘은 형이 출소하는 날이다. 방에 누워 팔베개를 베고 있자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엄마도 엥간히 속썩겠네. 자식 둘이 모두 별을 차다니….’

밖에서 인기척이 난다. 형을 마중 나가는 모양이다. 내가 출소할 때에는 아무도 마중 나오지 않았다. 난 아무렇지도 않은 듯 터벅터벅 집으로 걸어왔다. 집으로 들어서서도 두분 중 누구 하나 따뜻한 말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그렇게 한 달을 살얼음처럼 지냈다. ‘살얼음 가족’.

그게 싫어서 바깥으로 부지런히 싸돌아 다녔다. 그렇지만 전에 어울리던 녀석들은 만나고 싶지 않았다. 하루종일 만화방에 가서 정말 신물나도록 만화책만 보았다. 나중엔 술이 사람을 먹는다고 만화책이 날 보는 것만 같았다. 밖으로 나와도 만화속 인물들이 내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는 듯 했다.

그러기를 이십일 여… 아버지에게서 수상한 점을 발견했다. 회사에서 잘렸다는 것이다. 왠지 집안이 서먹한 분위기 더니 그것 때문이었나 보다. 돈버는 재주가 없었는지 회사중역까지 했다는 양반이 24평짜리 단독주택이 재산의 전부다. 아직 살아갈 날이 창창한 네 사람이 뭘 먹고산단 말인가? 왜 빌어먹을 IMF가 터져서 이렇게 못사는 사람만 고통받아야 하나? 하는 알량한 생각 때문에 만화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밖에서 초인종이 울려 나는 마당까지 나가 문을 따줬다. 형이 문 앞에 서있었다. 어색한 웃음을 짓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손을 들어 악수를 했다. 철들고는 제대로 대화도 나누지 않은 형… 그렇지만 나는 형을 좋아한다. 그리고 자랑스러워한다. 담배 피며 애들 푼돈을 뺏던 중학교 시절 나는 전교1등을 하는 형의 존재를 친구들에게 부각시키며 나도 맘만 먹으면 1등은 일도 아니라는 허풍을 떨었다.

형이 명문대에 합격하던 그날 나는 친구들을 불러내어 실컷 술을 먹였다. 마치 내가 합격이라도 한 듯이… 그러나 형이 감빵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어머니로부터 들은 그날 난 감빵으로 돌아와 소리 없이 울었다.

그 뒤로 아버지가 들어오셨다. 한때는 공포의 대상이었던 아버지… 나의 철없는 행동에 매를 드셨지만 난 절대 그분이 감정을 가지고 매질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분은 과묵한 성격 때문에 내게 따뜻하게 대해주지 못할 따름인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 ‘왜 마중을 나오지 않았느냐’는 나의 볼멘 소리에 말없이 눈가에 물기를 닦아내며 밥을 차려주셨던 어머니…

이 가족을 내가 살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또다시 뿔뿔이 흩어지고 말 것이다. 형이 돌아온 며칠동안 이런 저런 궁리를 해보았다. 결국 배워먹은 짓이 그 짓이라고 일확천금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이 빌어먹을 세상에 무슨 수로 돈을 모은단 말인가? 똥같은 돈이 가득 들어있는 은행을 털 수밖에 없었다.

전에 안면이 있던 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총을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녀석에게 이틀 후에 연락이 왔다. 동네 뒷산으로 새벽에 나오라는 것이었다. 다음날 새벽 형을 깨우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옷을 챙겨 입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형이 나에게 말을 건넸다.

“어디 나가니?”

‘빌어먹을…’

“응? 응. 미안해 깨워서. 운동 좀 하러나갈려고…”

“응… 같이 갈까?”

“아냐. 형 피곤한데. 피곤한데 더 자.”

나는 만류했지만 형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야. 같이 가자. 뒷산에 갈려고 그러는거지?”

“아… 응. 갈거면 어서 옷입어.”

산으로 올라오는 도중 우린 아무 말 없이 담배만 피워댔다. 철없이 따라 온 형이 야속했다. 뒷산 공터에 다다르니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형 나 화장실 좀”하고 말하려는데 형은 내 말을 못들은 눈치였다. 그래서 몰래 약속장소로 향했다. 공터 위 비탈진 곳에 서있는 비석 옆이 약속장소였다.

그 녀석은 나를 보더니 피식 웃으면서 상자를 건넸다. 우린 아무 말 없이 서있었다. 상자안을 열어 신문뭉치를 헤쳐보니 검은 총대가리가 보였다. 다음 순간 수상한 기척이 느껴져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무 뒤로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이 자식이 짭새들한테 뒤나 밟히고 다녀?”

낮게 그 녀석에게 소리치자 그 녀석 역시 적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반대방향으로 튀었다. 얼른 공터로 뛰어내려왔다. 점퍼 차림의 짭새 한 마리가 내 뒤를 쫓고 있었다. 산책로 쪽으로 급히 뛰었다. 저쪽에 사람이 한명 서있었다. 가만 보니 형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았다.

‘형까지 이일에 끼어들게 해서는 안되는데.’

‘그렇지만 내가 계속 이걸 가지고 있으면?’

나는 형에게로 급히 다가갔다.

“형 미안하지만 이것 좀 맡아 줘. 그리고 나 모른 척 해.”

형은 어안이 벙벙한지 아무 말도 않은 채 엉거주춤 서있었다. 형의 손에 상자를 쥐어주려다 형의 체육복 상의 주머니가 제법 커보여 그곳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는 형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 다시 산 아래로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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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12월 14일 오전 7시 15분 최성호는 아직 해강빌딩의 화장실에서 벌벌 떨고 있었고 최영창은 바지 안에 똥을 지리고 말았고 최성길은 뒤쫓아오던 형사의 배를 가지고 있던 재크나이프로 그었다

예약을 까먹지 말자

오늘은 2232년 2월 22일. 나는 서른다섯 살의 김병선이다. 이 사실들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미리 말해두는 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친절한’ 1인칭 시점 소설의 화자(話者)다. 앗 실수! ‘친절한’은 ‘화자’ 앞에 두어야 한다.

내 아내 ‘이성은’은 지금 한창 몸치장중이다. 오늘은 우리의 결혼기념일 10주년이다. 그래서 나가서 외식을 할 예정이다. 목적지(目的地)는, 아니 정확하게 목적시지(目的時地)는 2222년 2월 22일 우리가 결혼식을 올렸던 레스토랑 ‘치엘구스또’다. 근데 이 글을 읽는 독자 중 어떤 이는 10주년이라고 뭔가 거창한 선물을 해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는 않다. 우리의 시대는 이미 십진법이 폐지되었기 때문에 굳이 10주년이라고 여인네들이 부산을 떨지는 않는다.((괄호를 두개 닫고 아내 몰래 하는 이야기인데 사실 십진법을 폐지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10주년, 20주년 등을 기념하여 거창한 선물을 주기가 아까운 남자들의 속셈도 있다)) 헴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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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시에 도착한 레스토랑은 제법 붐볐다. 2222년의 하객들이 물론 대부분이었다. 2222년의 나는 하객들에게 인사하느라 정신이 없다. 나를 보자 반갑게 다가와 인사를 나눴다. 대뜸 한다는 소리가 ‘이게 뭐야 살 좀 빼라.’다. 아닌 게 아니라 1년 만에 부쩍 살이 붙었다. 요즘 당국으로부터 할당된 성형 쿠폰을 지방제거대신 피부 관리에 써서 그렇다고 변명했다.

‘미래의 손님들’에게 할당된 특별석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아내는 저쪽에서 3년 전의 아내와 수다를 떠느라고 정신이 없다. 주요화제는 3년 전의 아내가 고른 마루 벽지의 색깔이 이제 와서 맘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반대편을 보니 작년의 나와 아내가 있었다. 살짝 손을 흔들어주었다. 작년의 내가 싱긋 눈인사를 보냈다. 살찐 늙은이와는 별로 어울리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다. 아내는 지금보다 살이 조금 더 찐 것 같아보였고 왠지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담배를 펴대고 있었다. 어렴풋이 그때 레스토랑에 오기 전에 사소한 문제로 다퉜던 기억이 났다. 

제일 어린 나는 결혼식의 나를 제외하고는 5년 전의 나였다. 왜냐하면 타임머신이 상용화되어 출시된 것은 2225년이었고, 우리는 그 후 가격이 상당히 내려간 후에야 구입할 여력이 생겼기 때문이다. 처음에 방 하나를 가득 차지하는 육중한 철제 캐비닛 같았던 타임머신은 이제는 원통형 세탁기와 일체형으로 출시되고 있다. 물론 그 때문에 가끔 깜빡 잊고 세탁기능으로 버튼을 해놓은 채 통속에 들어갔다가 세제와 물세례를 당하는 일도 있다.(어떤 제품은 냉장고와도 일체형이어서 가끔 세탁물이 얼기도 한다) 그런데 제일 나이 많은 나는 서른다섯의 나였다. 그 이후의 우리 부부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결혼기념일을 다른 곳과 시간에서 보내기로 하였든지 아니면 아내와 헤어지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했다. 후자라면 별로 유쾌한 일은 아니다.

웨이터가 다가왔다.

‘손님 예약은 하셨습니까?’
‘아차~’

수다를 마치고 자리에 돌아온 아내가 가시눈을 뜬다. 이 레스토랑은 철저한 예약제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매년 그렇게 까먹니?’

2년 연속이다. 예약을 까먹은 것도 아내에게 똑같은 구박을 듣는 것도. 바로 작년의 우리 부부가 싸운 이유였다.

‘저.. 예약을 할 테니 가능한 시간대를 말해주실래요?’

웨이터에게 말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 예약을 할 셈이었다.

‘2222년 2월 18일 오후 4시가 가능하군요. 그때 예약 부탁합니다.’

이골이 난 듯 웨이터는 사무적인 목소리로 예약가능시간을 말하고는 사라졌다.

결혼식은 늘 그렇듯이 여전히 지겨웠다. 졸음을 유발하는 주례사, 결혼 후 한번도 꺼내보지 않은 홀로그래픽 촬영, 레퍼토리가 바뀌지 않는 예전 친구들의 짓궂은 피로연. 수를 세기 귀찮은 아내‘들’은 수다로 정신이 없고,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나‘들’의 피로한 표정. 그 와중에 아직 담배를 배우지 않은 서른 살의 나는 여기는 왜 금연석을 제공하지 않느냐고 웨이터에게 투덜댔다. 그렇게 2222년 2월 22일 저녁은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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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내 잘못도 있었지만 레스토랑이 너무 고지식한 것이었다. 식사한 날로부터 10년 2개월 3일까지 예약을 하지 않으면 그 이후는 예약이 불가능하다는 규정은 뭐냔 말이다. 그 예약가능 기간이 정확히 어제 날짜로 지나버렸다.(이론 상으로 예약 가능 기간의 어느 날짜로 돌아가서 또 다시 예약일인 2월 18일로 가면 되지만 이렇게 두 번 연속 과거로 가는 기술은 아직 개발이 안 되었다) 여러 사연이 있었다. 주말이면 방을 굴러다녀야 했고, 주중엔 사무실을 굴러다녀야 했고, 그 사이에 세탁기가 – 정확하게는 세탁기+타임머신 일체형 – 고장 나서 수리를 맡겨야 했고 … 그리고 세탁물로 잔뜩 밀려있었다.

레스토랑의 엄격한 규정에 따라 결국 나와 아내는 기억국(記憶局)에 출석하여 결혼기념일, 아니 정확하게는 결혼일의 기억을 지워야 했다. 결국 우리는 그날 레스토랑에 가지 않은 것이고 그들로부터 서비스를 받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지불한 비용은 세금과 수수료를 제외하고 50% 환불된다. 아내에게 엄청난 구박을 들어야 했다. 기억국 가는 내내 구박은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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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국 직원 김태우는 김병선씨와 함께 온 여자에게 홀딱 반했다. 그녀의 앙칼져 보이는 눈매와 깨끗한 살결, 간간히 들리는 여성스러운 웃음소리 모두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아주 멋진 범죄를 저지르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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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233년 2월 22일. 나는 서른여섯 살의 김병선이다. 이 사실들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미리 말해두는 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1인칭 시점 소설의 ‘친절한’ 화자(話者)다. 나는 여전히 처량한 싱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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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233년 2월 22일. 나는 서른일곱 살의 김태우다. 나도 ‘친절한’ 화자(話者)다.

‘여보 성은씨. 오늘 결혼 11주년인데 우리 근사한 홀로그래픽 영화나 한편 볼까?’

샤워 중이던 아내에게 말했다.

‘좋아요. 예약하는 것 잊지 말아요!’

‘두말하면 잔소리지. 절대 예약은 까먹지 않아!~’

싸구려 행성 B7T210 [2]

하늘엔 조각구름 떠있고

“와 하늘에 구름 좀 봐. 꼭 진짜 같지 않아?”

세탁소 김씨가 정육점 이씨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게. 정말 감쪽같은걸?”

이들은 B7T210로 닷새 전에 이주해온 주민들이다. 지구에서 행성까지 분주히 오고가던 이주선들, 수많은 혼선을 빚었던 입국검사, 급조된 시설들의 부실시공에 대한 하자처리 등등 이 곳으로 온 20만 명의 주민들은 닷새 동안 거의 날밤을 새다시피 했다. 이삿짐을 옮기고, 여기저기를 닦고 조이고, 이웃주민들과 통성명을 하고, 때로는 별것도 아닌 것으로 언성을 높이고, 라면을 끓여먹고, 설거지를 하고 … 그러면서 며칠을 보냈다. 다들 이제야 겨우 한숨을 돌리고는 하늘을 – 실제로는 도넛 모양의 행성 튜브의 안쪽인 셈이지만 – 쳐다 볼 여유가 생긴 것이다.

사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밋밋한 회색의 천장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제 막 행정국이 홀로그래픽 기능을 가동하여 인공하늘을 쏘아 올렸다. 그러자 갑자기 천장에 파란 색의 하늘이 펼쳐지고 조각구름들이 둥둥 떠다니는 풍경이 나타난 것이다. 김씨와 이씨는 그런 하늘을 보며 마치 지구의 그것을 바라보는 양 – 사실은 그 광활함은 느낄 수 없지만 –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그들처럼 옅은 미소를 지으며 하늘을 – “튜브 안쪽이라니까” – 바라보고 있었다.

행정국 하늘통제실 정상호 주사가 하늘의 전반적인 상태를 설정한다. 2109년 4월 10일 오전 11시 현재 하늘의 색깔은 색상코드표 #B4E5FF 다. 색깔은 설정해놓은 프로그램에 따라 랜덤으로 조정된다. 물론 정주사의 기분여하에 따라 수동설정도 가능하다. 김주사는 자신이 하늘을 관장하니까 하느님이라고 우기다가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박계장에게 꾸지람을 당한 적도 있다.

“허허 저건 왠지 당나귀 모양을 닮았네?”

“저건 어떻고 저건 꼭 자전거 같지 않아?”

김씨와 이씨가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하늘을 여태 바라보고 있다. 갑자기 김씨의 눈이 동그래졌다.

“저건 뭐야? 영락없이 구름 모양이 ‘always galaxy cola’라고 쓰인 것 같잖아??”

이씨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것 같은 게 아니라 정확히 그렇게 써있는데?”

구름이 갑자기 네모난 화면 모양으로 바뀌더니 비키니 차림의 아가씨들이 갤럭시콜라를 마시며 즐거워하는 동영상이 흐르기 시작했다. 김씨와 이씨, 주변에서 아직도 넋 놓고 하늘을 쳐다보던 이들은 어이없어 하며 입을 헤벌리고 있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하늘은 ‘TU그룹’의 광고판이었다. TU그룹은 이 싸구려 행성 B7T210의 투자자 그룹 중 하나이다. G속도를 내는 최초의 힘, 즉 first power를 내기 위해 들어간 연료도 이 그룹에서 제공한 것이었다. B7T210 행성의 동명의 투자회사에서 이들의 지분은 14%다. 주주협약에 따르면 이들은 해당지분만큼 하늘의 광고권을 가지고 있다. 이번에 시범삼아 TU그룹 계열사의 히트상품인 갤럭시콜라의 광고를 쏘아본 것이다. 향후 그들의 여러 상품, 예를 들어 청바지, 그래픽칩, 맥주 등의 광고를 내보낼 예정이다. 그런 면에서 하느님은 정주사라기보다는 TU그룹을 포함한 투자자 그룹이다.

잠시 광고 : 갤럭시콜라의 개운한 맛은 느끼한 식사의 입가심용으로 좋습니다.

“결론적으로 B7T210 행성은 민간투자사업으로 진행된 프로젝트다. 이들 행성 주민 대부분이 무엇을 위해 이 곳에 왔는지는 다음에 설명하도록 하겠다. 우선 총독실 인테리어부터 끝내야 하니까 말이다. 인부들이 너무 작업속도가 느려서 가서 한 소리 하고 와야겠다.”

싸구려 행성 B7T210 [1]

때마침 서문

때마침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구입했다. 그리고 어제의 취기도 채 가시지 않았다. 그래서 깨달은 게 있다. 이 소설로부터의 교훈은 바로 ‘무책임함’이다. 말인즉슨 굳이 소설을 쓰는 행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달지 독자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달 지, 아니면 꼭 끝을 멋있게 장식해야한달지, 심지어는 이 시리즈가 1회로 끝날지 아니면 한 20회까지는 가야한달지 하는 강박관념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무책임’이야 말로 창작자가 누리는 특권이다. 그것도 돈벌이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닌 창작자가 누리는…

또 하나의 고민거리(도 아니지만)는 이 소설을 새로운 블로그에 올려야 할지 foog.com에 올려야 할지의 문제인데 이 고민을 수습하는 데에는 0.5초도 걸리지 않았다. 당연히 foog.com에 올려야 한다. 그래야 한 명이라도 더 쳐다봐줄테니까. 뻔한 대차대조표다.

라고 생각하고 있던 순간 자비스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봐. 아직도 G속도를 몇으로 할 것인가 국회 우주위원회에 계류 중이라는데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그 호리호리한 몸매에 어울리는 호들갑을 떨어댔다.

“어차피 지구의 중력과 같은 정도로 튜닝이 될 텐데 뭘 걱정이야?”

라고 대답하면서 나는 블로그에 올렸던 ‘대운하에 무너져 버린 내 허접한 창작욕’이라는 글을 떠올렸다. 사실 그것은 핑계거리였다. 이를테면 요즘은 누구나 뭔가 일이 잘 안 풀리면 ‘이게 다 MB탓이야’라고 해버리면 사람들이 수긍하는, 그런 효과를 기대한 것이다. 마치 이전 정부에서 ‘이게 다 놈현 탓이야’라고 하면 버로우해버리는 그런 상황과 비슷한 것이었다. 문제는 내 ‘허접한 창작욕’이었지 ‘대운하에 무너져 버린’은 아니었던 것이었다.

잠시 광고 : 이 글은 크리에이티브커먼스 2.0에 의거 작성되는 글입니다.(나중에 바뀔지도?)

“이봐 도대체 뭘 그리 생각하고 있는 거야? G속도에 관한 문제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잖아! 어떻게 좀 해봐.”

“그래그래 알았어.”

나는 소설을 쓰는 것 말고 또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다. 정확하게는 그것이 내게 돈을 벌어다주는 우선적인 직업이다. 자비스와 나는 ‘싸구려 행성 B7T210’의 공동 총독으로 부임할 예정이다. 그리고 이 행성은 두 달 뒤에 완성될 예정으로 국회에서는 이 행성의 회전속도를 얼마로 할 것인가에 대한 법률인 ‘행성 B7T210 G속도 최초설정 및 조정에 관한 특별법’ 을 제정하려 하고 있다. 행성의 회전을 정확히 ‘자전’으로 불러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 행성은 사실 아래와 같은 모양을 지니고 있다.

그러니까 가운데는 텅 비고 바깥쪽으로 테두리에서 사람들이 거주하는 일종의 ‘도넛’모양을 띠고 있다. 그 도넛의 통 안의 중심과 먼 쪽에 사람들이 거주할 예정인데 행성이 일정한 속도로 회전시켜서 원심력을 생성시켜 중력으로 사용할 요량인 것이다. 자비스가 지금 G속도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이유는 국회의원들이 G속도를 처음에 너무 빠르게 설정하면 에너지가 많이 소요될 것이므로 지구중력의 반절 정도만 중력이 유지되는 한도에서 설정하자고 주장하고 있고, 자비스는 그렇게 되면 행성의 거주민들의 위장들이 낮아진 중력에 적응하지 못하여 건강상의 문제를 초래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물구나무서기가 내장의 위치를 바꾸어 건강을 악화시킬 것이라 믿고 이의 반대를 법제화하자는 시민단체 ‘전국 물구나무 서기 반대 협의회’의 회원이기도 하다.

어쨌든 나는 그의 성화에 못 이겨 국회 우주위원회 소속 의원인 ‘명태’의 텔레파시 번호를 내 머리에 입력했다. 통화중인지 텔레파시 접선이 되지 않았다.

“이봐 명태가 접선이 안 되는데 나중에 연락해보지.”

라고 말했지만 다음 순간 연락할 이유가 없어졌다. 내 오른 쪽 눈에 설치한 그래픽칩을 통해 구독하고 있는 뉴스서비스 화면에 ‘G속도법 지구 중력 속도로 국회통과’라는 기사가 떴기 때문이다.

“이봐 자비스 자네도 보고 있나?”

“그래 나도 읽고 있어. 잘 됐군. 그래도 국회의원들이 머리는 있는 모양이야.”

“자네의 행성주민 사랑을 피부로 느낀 모양이군.”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이제 남은 일은 행성 총독으로 부임하는 일과 이 소설을 뒷수습하는 일만 남았다.

to be continued.. may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