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미분류-경제

40%의 확률로 전망하기에 대해

경제학자와 통계학자들에 관해 좋아하는 오래된 농담이 하나 있다. : 미래의 불황에 대한 예측을 요청받았을 때 당신은 언제나 “약 40%입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왜? 50/50은 동전 던지기에 불과하다. 그래서 부질없다. 75/25는 너무 일방적이다. 40%는 딱 적절한 예측이다. 40%라는 예측이 유용해보이게 해주는 것은 만약 불황이 발생하지 않으면 당신은 언제나 “내가 예측했듯이 불황은 확률이 낮은 이벤트였고 일어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면 됩니다. 만약 불황이 발생했다면 당신의 경고는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발생에 대해 매우 현실적인 확률로(예를 들면 40%) 경고한 것이다.[Can Economists Predict Recessions?]

이 블로그에서도 소위 부동산 전문가들의 우리나라 주택시장에 대한 엉터리 예측을 조롱한 글을 몇번 올렸던 기억이 나는데, 사실 기존의 경제적 현상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갖춘 이라 할지라도 그 패턴을 경험삼아 미래를 예측하기란 – 물론 여러 이유로 본인의 의견과는 다른 시장이 좋아할만한 의견으로 인기를 얻기 위함도 있다 – 결코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인용한 농담은 그러한 만만치 않은 경제학자(또는 통계학자, 또는 분석가)의 태생적 임무의 고단함에 관한 농담이라 생각된다.

경제에 관한 입장 차이는 흔히 미래에 대한 이러한 당파성 혹은 주관적 희망이 섞인 예측의 입장 차이에서 비롯된다. 시장자유주의자라면 시장이 어떻게든 현재의 난관을 헤쳐나갈 것이라 예측하고 사회주의자라면 시장이 가진 고유한 모순으로 인해 현재의 난관이 심화될 것이라 예측할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 이 미래예측을 40%의 확률로 자신의 입장을 피력한다면 본인의 분석력에 대해 큰 비난은 받지 않을지 몰라도 양측의 호감을 얻는데는 실패하거나 미디어적 상업성이 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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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acritica, CC BY-SA 3.0, Link

그런데 어쨌든 누군가는, 특히 경제정책을 결정해야 하는 이는 미래에 대해 40% 이상의 확률로 발생 가능성을 예측하고 정책을 결정해야 한다. 현재의 난관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감세를 해야 한다’ 혹은 ‘증세를 해야 한다’의 의사결정은 40%의 확률을 본인이 원하는 더 개선된 이벤트의 확률로 전환시키기 위한 로드맵을 설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봤을 때에 그 과정은 상당 부분 좌충우돌이었다. 인플레를 잡기 위해 금리를 올리면 경제가 죽고, 금리를 낮추면 자산거품이 도래했다.

그 즈음이 되면 경제학자가 근엄한 목소리로 그 좌충우돌에 대해 ‘내가 40%의 확률로 부작용을 예측하지 않았느냐’하고 꾸짖을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좌충우돌이 시행착오를 통해 사회의 정치적 합의로 도출되는 것이라면 희망이 있을 텐데 오히려 그것이 아전인수격 해석으로 정치적 양분화만 가속화시킬 우려도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나아가 기후변화와 같은 돌이킬 수 없는 재앙으로 이어진다면 경제학자는 더 이상 40%의 확률을 제시할 여유가 없는 세상이 된다는 것이 비극이다.

[코로나19 이후의 세계] 관광

재미있는 표가 있어 하나 가져왔다. 가장 경제규모가 큰 20개국에서 관광으로 인한 수입이 GDP에 기여하는 비율에 대한 랭킹이다. 우선 당연히 상위에 자리한 나라들은 이번 팬데믹에 따른 여행객의 급감으로 인해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입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랭킹을 좀 들여다보면 멕시코가 1위인 것은 조금 의외인데 여하튼 상위를 차지한 나라 면면히 그동안 관광국으로 많이 알려진 국가들이다. 또 조금 의외인 나라는 관광수입 비중이 GDP 대비 9.5%인 사우디아라비아다. 아마도 이슬람 최고의 성지 메카의 영향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든다.

그리고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일본이 GDP 대비 비중이 7%에 달한다는 사실이다. 중국과 한국 등 아시아 국가에서 최근 몇 년간 일본에 몰려가 “오버투어리즘”이라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였으니 일본 역시 관광국가로서의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할 것이다. 제조업의 쇠퇴와 엔화의 하락, 그리고 이에 따른 아베 정권 나름의 꾸준한 관광유치 등이 그 배경이리라 짐작된다. 그리고 그만큼 이번 팬데믹으로부터의 고통도 클 것이다. 벌써 올림픽의 연기가 현재진행형의 고통이고 앞으로 코로나19 통계에 대한 세계의 불신감 등으로 인해 그 고통은 더욱 배가될 것으로 짐작된다.

마지막으로 가장 놀란 사실은 한국의 GDP 대비 비중이 2.8%로 이 랭킹에서 꼴찌라는 것이다. 한때 중국 관광객이 물밀 듯이 몰려오고, 한류니 뭐니 해서 외국인들의 호감도가 급상승했다고 해서 관광으로 돈 좀 버나 했더니 그것도 아니었나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다른 산업의 수입들이 좋아서 관광으로 인한 비중이 높지 않은, 결과적으로 이번 팬데믹으로 인한 악영향이 가장 적은 나라가 될 수도 있다고 봐도 좋을 것 같다. 어쩌면 소위 국뽕을 제거해도 상당한 성과를 체감케 하는 “K-방역”으로 인한 신뢰감으로 향후 안전한 여행국으로 급부상할 수 있는 계기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Rank

Country

Travel and Tourism, Contribution to GDP

1

Mexico     

15.50%

2

Spain    

14.30%

3

Italy   

13.00%

4

Turkey

11.30%

5

China

11.30%

6

Australia

10.80%

7

Saudi Arabia

9.50%

8

Germany

9.10%

9

United Kingdom

9.00%

10

U.S.

8.60%

11

France

8.50%

12

Brazil

7.70%

13

Switzerland

7.60%

14

Japan

7.00%

15

India

6.80%

16

Canada

6.30%

17

Netherlands

5.70%

18

Indonesia

5.70%

19

Russia

5.00%

20

South Korea

2.80%

(출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에서 낮은 사회적 지위의 사람들이 어떤 경험을 하는지에 대한 또 다른 연구에 따르면 물질적 생활 수준의 엄청난 차이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적으로 상대적 빈곤에 놓인 이들은 강한 수치심과 자기혐오를 느끼고 그들이 실패작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사는 곳이 영국이든, 노르웨이든, 우간다든, 파키스탄이든 간에 사회적 사다리의 아래에 있으면 똑같은 감정을 느낀다. 그러므로 불평등에 직면하여 단순히 물질적 생활 수준을 높이는 것은 진정한 웰빙이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충분하지 않다. [The Enemy Between Us: How Inequality Erodes Our Mental Health]

절대적 빈곤과 상대적 빈곤을 이야기할 때 (일단 불평등이 확대되더라도) 우선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1 하지만 인용문에서 보듯이 사람들은 단순히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 만족감을 느끼지는 않는 것 같다. 좋은 자동차를 몰고 강남의 아파트에서 살고 있을지라도 그 집이 자기 집이 아니고 전세라면 집값 상승에 동참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열패감을 느끼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낮은 생활 수준에서 살아가는 이는 그보다 더한 열패감에 시달리며 좌절하거나 극단적으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이러한 열등감은 사회를 어떻게 퇴보시킬 것인가? 이미 트럼프 당선이나 브렉시트와 같은 한 집단의 비정상적인 선택에서 볼 수 있듯이 지역 간, 세대 간, 계급 간의 불평등으로 인한 빈곤층의 열등감은 대의민주제조차 공동체에서 더 나은 선택을 하지 못하게 하는 ‘물귀신 작전’으로 전락시켜버릴 위험이 그 퇴보의 한 모습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특히 그 계층은 이러한 불만과 자괴감을 자기보다 더 낮은 위치의 사회적 약자에 – 이민자,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등 – 대한 공격수단으로 삼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사회는 포용보다는 분열과 혐오로 찌든 사회로 전락한다.

흔히 정치적 이슈와 문화적 이슈 등은 경제적 이슈와 분리하여 사고하는 경향이 있지만, 인용문의 필자가 주장하듯이 우리가 느끼는 많은 감정변화는 실은 경제적 상태에 따라 많이 좌우되고, 그러한 감정은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라는 유명한 영화 제목에서 적절하게 알려주듯이 개인을 흑화시키고 나아가 사회를 흑화시키는 밑거름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소득주도 성장론’은 여러 성장이론의 하나의 주장이라기보다는 이 사회가 경제적 약자에게 지녀야 할 최소한의 배려이자 사회를 건전하게 만들 기초라는 의식을 공유해야 한다고 본다.2 곳간에서 인심이 나오는 법이다.

“대량수학살상무기”의 위험성에 대하여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의 여러 혁명적 용어 중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이른바 “빅데이터 Big Data”다. 그런데 이 빅데이터를 “대량살상수학무기”1라 부르는 이가 있다. 뛰어난 학벌과 학문적 업적 덕택에 수학과 종신교수로 근무하던 캐시 오닐은 “수학을 현실세계에 적용한다는 아이디어에 매료”되어 교수직을 버리고 헤지펀드 디이 쇼(D.E. Shaw)의 퀀트가 된다. 이후 “수학과 금융의 결탁이 불러온 파괴적 힘에 환멸을 느끼고 월스트리트를 떠난” 그는 데이터 과학자로 활동하면서 또 다시 빅데이터가 가지고 있는 파괴적 힘에 주목하면서 2016년 인용한 책을 썼다.

‘유에스 뉴스’의 대학 순위 사업이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되면서 이를 조작하려는 시도도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가령 2014년 ‘유에스 뉴스’가 발표한 세계 대학 순위에선 사우디아라비아의 킹 압둘아지즈 대학교의 King Abdulaziz University, KAU 의 선전이 돋보였다. 불과 2년 전에 신설된 KAU 수학과가 케임브리지와 MIT를 포함해 몇몇 전통적인 수학 강호들을 제치고 하버드의 뒤를 이어 세계 7위에 선정된 것이다. [중략] 조사에 따르면 KAU는 유명한 논문을 발표한 다수의 수학자들과 접촉했고 그들에게 겸임교수직과 7만2000달러라는 높은 연봉을 제공했다. [중략] KAU는 교수들에게 톰슨 로이터스 인용 색인 웹사이트에 등록된 근무처 정보를 KAU로 변경하도록 요구했는데, 그 웹사이트는 ‘유에스 뉴스’가 순위를 산정할 때 참조하는 핵심 출처였다. 이는 KAU가 겸임교수들이 발표한 출판물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는 뜻이다. 교수들의 출판물이 인용된 빈도는 ‘유에스 뉴스’ 알고리즘의 주요한 요소 중 하나였기 때문에, KAU의 순위는 급등할 수밖에 없었다.[대량살상수학무기, 캐시 오닐 지음, 김정혜 옮김, 흐름출판, 2017년, pp113~114]

우리가 빅데이터 산업의 현 주소를 확인할 수 있는 경험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예를 들어 당신이 ‘다음 달에 교토나 가볼까?’하고 익스피디아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호텔을 두어군데 검색하고 나왔다 치자.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당신이 페이스북이나 다른 웹사이트에 접속할 때마다 익스피디어에서 추천하는 근사한 호텔 광고가 연달아 등장한다. 당신의 행동 패턴을 분석하여 집요하게 당신에게 “삐끼질”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비즈니스 역시 필자가 월스트리트를 떠난 후 잠시 머물렀던 스타트업 인턴트 미디어 Intent Media 에서 수행한 빅데이터 작업이었다.

저자는 언뜻 보면 대단히 거대하고 정교해서 인간이 인지할 수 없는 영역까지 현명하게 판단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2 빅데이터 분석이 실은 어처구니없이 어리석은 판단의 당사자가 될 수도 있음을 여러 사례를 들어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연출되는 근본적인 이유로 저자는 MBS의 사례를 들며 “수학은 쓰레기 같은 대출채권의 가치를 몇 배로 부풀릴 수는 있으나 해석은 순전히 인간의 몫”(p81)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빅데이터 비즈니스는 기계의 물신성(物神性)을 조장하며 이러한 결함을 감추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Billion Dollar Brain poster.jpg
By Source, Fair use, Link


책에 나오는 다른 사례로는 새로 부임한 교육감이 학생들의 학습 능력 강화를 위해 교사들을 빅데이터로 분석하여 열등한 교사를 쫓아내는 사례가 있다. 이 사례에서는 한 평판이 뛰어난 교사가 등장하는데 그는 이러한 평판에도 불구하고 빅데이터 분석에서 열등한 교사로 분류되어 해고당한다. 이를 납득하지 못한 교사는 담당자에게 판단기준의 공개를 요구하지만, 담당자는 외주화된 그 작업의 알고리즘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실토한다. 교사는 담당자도 이해하지 못하는 분석을 통해 노동자를 해고하는 것이 합당하냐고 따진다. 해석조차 포기한 물신성의 극단적 사례다.

사실 이런 빅데이터 분석에 대한 맹신의 어리석음과 그 위험성은 이미 마이클 케인이 주연한 1967년 스파이 스릴러 “백만 달러짜리 두뇌(Billion Dollar Brain)”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공산주의 소련을 절멸시켜야 한다고 믿는 한 미치광이 미국인 자본가는 판단의 엄정성을 위해 슈퍼컴퓨터로 소련 침공 시나리오를 짠다. 영화에서 그 자본가의 수하 중 하나인 레오 뉴비겐은 입력 데이터를 조작하여 소련 침공이라는 아웃풋이 나오게 하여 침공을 강행하고 주인공 해리 팔머는 이를 저지한다. 이제 우리는 현실에서의 해리 팔머를 만나야 하는데 그게 과연 누구일지 궁금하다.

캐시 오닐?

여성존중은 꼰대남성의 생존전략이다

후생노동성의 <2013년 인구동태 통계월보 연계 개황>을 살펴보면, 20년 이상 함께한 부부가 이혼하는 건수는 1985년 2만 434건이었던데 비해 2013년에는 3만 8,034건으로 크게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p110] 그래서 부부가 합해 매달 연금 수입이 30만 엔인 경우, 재판과 조정에서 아내의 노동비율이 절반으로 인정되면 이혼 후의 수급액은 1인당 15만 엔이 된다.[p113] 내가 봐온 경험에서 아내의 경우 월 15만 엔의 생활비로도 문제없이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남편의 경우는 거의 절망적이다. 특히 베이비 붐 세대 이전 남성들의 일상생활 능력은 놀랄 만큼 낮다. [p114] 따라서 남성의 경우 이런 사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가능한 이혼하지 않도록,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특히 남성이 일밖에 몰랐다면 더욱 그렇다. 남자는 돈만 벌어다주면 된다는 사고방식을 버리고, 가정에서 남성의 역할을 바꿔야 한다.[p115]

후지타 나카노리가 쓴 <2020 하류노인이 온다>1라는 책에서 나온 구절을 요약해보았다. 사회복지사로서 오랜 기간 현장에서 활동하며 쌓은 빈곤, 특히 노인의 빈곤에 대한 풍부한 경험을 구체적인 통계수치와 함께 버무려 쓴 이 책에서 저자는 고령화 사회에 접어든 일본의 처참한 현실과 그 대책을 담담한 필체로 묘사하고 있다.

인용한 부분은 특히 급속하게 늘어가는 노령 부부의 이혼, 이른바 “황혼이혼”이 노인의 빈곤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 간명하게 보여주는 상황이라 인용해보았다. 저자는 노년에 이르러 이혼까지 결심하는 – 특히 여성의 요구에 의한 – 상황을 십분 이해하면서도, 다만 이런 이혼으로 인한 경제적 악영향을 우려하고 있다.

저자는 경제적 악영향이 특히 집안 살림을 등한시한 남성에게2 치명적임을 경고하고 있다. 저자가 다른 부분에서 설명하지만 같은 돈으로 여성은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아끼며 살 수 있지만, 남성은 외식으로 끼니를 때우는 등 씀씀이가 여성과 같지 않다는 것이 치명적인 문제점이다. 한국의 상황에 비추어 보아도 익숙한 풍경이다.

저자는 “황혼이혼”으로 인해 보다 큰 피해자가 될 개연성이 큰 남성 노인들에게 “이혼을 당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충고한다. 여성멸시와 이에 대항하는 페미니즘이 화두가 되고 있는 요즘, 노년 남성들이 배우자를 – 나아가 여성을 – 존중하고 가사를 공유하는 것은 사회시류에 대한 자각을 넘어서 생존전략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서사가 압도하는 사회에 대한 단상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문화와 정체성은 네 가지 주요 측면의 상호작용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정치, 종교, 경제, 예술 말이다. 그중에서 정치와 종교가 권력을 두고 다툼을 벌였다. 하지만 이제 정치가들은 개그맨의 먹잇감에 불과하고 종교는 자살폭탄 테러범이나 성추행이나 떠올리게 만든다. 예술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전부 예술가이다. 경제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신자유주의 서사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우리는 어떻게 괴물이 되어가는가, 파울 페르하에허 지음, 장혜경 옮김, 반비, 2015년, p128]

이 구절을 읽고 불현듯 생각난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물체를 구성하는 4대 요소’였다. 과문하여 그 깊은 뜻까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 요소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이다. 불교의 교리에 따르면 우주 삼라만상의 물체는 인연에 따라 만나는 이 네 가지가 뭉쳐 이루어졌다가 인연이 다 되면 본래의 요소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한 사회도 인용문의 네 가지 요소가 뭉쳐져 그 사회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이 어딘가 비슷한 구석이 있지 않은가?

여하튼 좀 거칠게 표현하였다는 느낌이 들지만 인용문의 저자의 말대로 오늘 날의 사회는 경제가 나머지 세 요소를 압도하며 문화와 정체성을 이끌고 있다는 데에 대해 공감하는 바이다. 특히 신자유주의적 서사가 – 특히 서구에서 – 종교적 서사를 대체하며 우리의 정서를 지배하고 있다는 저자의 주장 역시 공감이 간다. 이러다보니 정치는 증시(證市)에 목을 매고, 종교는 성탄절 정도에나 의미가 있으며 – 그나마도 상업화된 – 예술은 경제에 종속 된지 오래다.

어쨌든 그 경제적 서사가 신자유주의 서사든 아니면 다른 경제 이념의 서사든 중요한 것은 그 서사가 다른 요소들을 지나치게 압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할 것이다. 지수화풍은 각각 단단한 것, 물기, 열, 움직임을 뜻한다고 한다. 우리 몸의 골격, 피, 체온, 생장(生長)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이 요소들이 적절히 조화가 되지 않는 몸은 병든 몸이지 않을까? 사회도 마찬가지다. 모든 시각을 경제적 관점에서만 사고하는 사회, 병든 사회일 것이다.

불평등에 대해 다시 한 번

어제에 이어 다시 불평등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스위스 은행인 크레딧스위스가 “Global Wealth Report 2015”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막 내놓았고 여기에도 재밌는 그래프가 있어서다. 아래 피라미드가 바로 그것인데, 이 피라미드는 전 세계 부의 45.2%가 상위 0.7%의 인구에 집중되어 있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반해 하위 71%의 인구가 보유하고 있는 부는 불과 3%다.

2008년 이후 부의 불평등이 심화된 데에는 대부분 주식 가격의 상승과 미국 및 다른 몇몇 부유한 국가에서의 금융자산의 규모와 관계있는데, 이로 인해 전 세계의 제일 부자인 나라들과 제일 부자인 이들의 부를 함께 증대시켰다.[Global Wealth Report 2015, Credit Suisse]

문제는 이런 불평등이 금융위기 이후 더 심각해졌다는 것이 중론인데, 보고서 역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부자들은 자산의 상당부분을 주식으로 들고 있고 선진국에서의 주식 활황세는 부를 더욱 집중시키는 상황을 초래했다. 그리고 아래 그래프에서 보는 것처럼 세계 최상위 부자들의 절반에 육박하는 이들이 미국인임을 감안할 때 미국시장의 활황이 곧 지구촌 부의 지형을 바꾼 것이다.


이렇듯 불평등이 심화되는 상황은 전 세계 정치지형도 바꿀 기세다. 이미 유럽의 변방 그리스는 좌익 정당이 집권에 성공했고 미국과 영국에서는 “사회주의자”와 “골수 좌파”가 중앙정치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인민들의 경제여건 악화에 따른 민심의 이반이 반영된 탓일 것이다. 버니 샌더스가 적절히 지적했듯이 현 상황은 힐러리 클린턴의 이메일이나 까대고 있을 때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