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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적 지배”에 대한 단상

개인의 현실적 정신적 부 Reichtum는 전적으로 그의 현실적 관련들의 풍부함 Reichtum에 달려 있다는 것이 위에 의거하여 명백해진다. 이를 통하여 비로소 개별적 개인들은 여러 상이한 국민적 또는 지역적 한계로부터 해방되며, 전세계의 생산과(또한 전세계의 정신적 생산과도) 실천적 관련을 맺게 되고, 또한 세계 전체의 전면적 생산(인간의 창조물)을 향유할 능력을 획득하는 상태에 놓여진다. 이 공산주의 혁명을 통하여 전면적인 의존성, 즉 개인들의 세계사적 협업의 이 최초의 자연 성장적 형태는, 인간 상호간의 작용으로부터 창출되었지만 지금까지는 인간에게 완전히 낯선 힘으로서 외경시되어 인간을 지배해왔던 이러한 힘들에 대한 통제와 의식적 지배로 바뀌게 된다.[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1 중 독일이데올로기, 번역 최인호 외, 감수 김세균, 박종철출판사, p218]

맑스와 엥겔스가 “외경시되어 인간을 지배해왔던 낯선 힘에 대한 의식적 지배”를 말할 때의 그 힘이란 무엇일까?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독일이데올로기’에서의 ‘이데올로기’는 당시까지 인민의 의식을 지배해왔던 지배계급의 관념론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바로 그 관념론일 수도 있고, 그 관념론에 의해 온존하고 있던 억압적인 생산관계일수도 있다. 그리고 또한 인간을 무력하게 만들었던 자연일 수도 있다. 실제로 인간은 생산력이 발전함에 따라 풍부해진 정신력과 물질문명을 통해 자연의 변덕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고 그에 따라 더 많은 자원을 채취하고 더 많은 주거지를 확보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자연에 대한 “의식적 지배”를 통한 이득은 사적소유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에서는 당연하게도 자본의 차지다. 현실 사회주의 시스템에서는 이 이득이 좀 더 많은 계급과 공유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체제조차 “의식적 지배”는 자연의 파괴를 지양해야 한다는 체제적 고민은 없었다. 그리하여 체제를 불문하고 무의식적으로 진행된 – 왜곡된 형태의 – “의식적 지배”의 결과로 자연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파괴되고 있다는 증거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손해에 대한 비용은 이득의 향유자가 치르지 않기에 – 부(負)의 외부효과 – “세계사적 협업”은 말뿐인 공허한 외침이 되고 있다.

역설적으로 구(舊)사회주의권에서 이 편견은 더 두드러진 양상을 보였다는 것이 저자의 암시인바, 그들은 인민에 의한 자연정복 또는 자연개조를 사회주의의 승리로 보았다는 정황이 책의 곳곳에 제시되고 있다. 중국의 수많은 댐건설, 소련의 대규모 목화재배 농장들은 이러한 비극의 증거이다. 물론 자본주의 국가들이라고 시장 효율적으로 물을 활용한 것은 아니다. 그들의 탐욕스러운 도시는 먼 곳의 물을 끌어다 분수 물로 써버리는 천박의 극치를 보여준다. 자본주의는 ‘무정부적’으로 사회주의는 ‘계획적’으로 낭비했을 따름이다.[‘강의 죽음’을 읽고]

다만,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경제체제로 자리 잡고 있는 와중에도 인류는 “탄소중립”이라는 구호를 통해 “세계사적 협업”의 실마리를 찾으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유럽 경제가 – 특히 독일 –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의 와중에 유럽이 값싼 러시아의 가스에 마약처럼 중독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그들이 외쳐왔던 재생에너지를 통한 “탄소중립”도 그럴싸한 화장술이었음이 드러났다. 인류가 “낯선 힘을 의식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풍부함 Reichtum”에 기반한 “세계사적 협업”이 필수적인데 그 풍부함이 허상으로 드러나 약하게나마 유지되었던 “탄소중립”이라는 협업도 위기에 처할 것 같은 위기감이 생기고 있다.

탈원전에 대한 기득권의 저항에 관하여

조선일보는 2020년 1월 14일, 자유한국당 정유섭 의원실의 자료를 받아 <한수원, ‘1778억 이득’ 초안 보고서 19개월간 덮었다>라는 기사를 냈고 ‘월성 경제성 평가 조작’ 프레임을 본격적으로 내세우기 시작했다. 2019년 9월 6일 이후 현재까지 조선·중앙·동아·경향·한겨레·한국일보 6개 주요일간지 지면 기준 ‘월성 경제성 평가 조작’ 키워드가 들어간 기사는 총 326건인데 이 중 121건이 조선일보 기사였다. 타 언론사의 경우 25~50건이였다.[보수진영은 왜 ‘월성 1호기’를 겨냥했나, 공시형, 참여사회 202104, p8]

2012년 설계수명이 만료된 월성 1호기는 당시 행정절차를 무시하고1 7천억 원에 달하는 수리비를 들여 재가동시킨 이후에도 막대한 적자 운영이 이어왔다. 감사원은 2020년 10월 20일 산업통상자원부 공무원들이 이 시설의 경제성 분석에 관한 자료를 삭제하며 감사에 저항한 점이 문제라고 지적했고, 검찰은 자료 삭제를 이유로 산자부 공무원 3명을 기소하였다. 극우 매스미디어는 이 이슈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이 모든 것이 지향하는 바는 동일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바로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 전반을 흔들고자 함이다.


월성1호기는 운영 연장 이후에도 계속 적자였다(출처)

사실 현 정부의 최대 실책 중 하나가 대통령의 무리한 인사권 행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러함에도 대통령이 인선한 감사원장과 검찰총장이 지휘하는 부처가 정부의 공약 이행 과정에서의 갈등에 대해 이렇게 과하게 시비를 거는 상황은 한편으로는 권력에 대한 견제를 통한 자정작용이라고 좋게 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 원자력 기득권의 힘이 여전히 막강하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 선언적으로는 탈원전과 탄소중립을 표방한 현 정부의 정책 이행속도는 여러 면에서 지지부진한 편이다.

신재생 정책에 있어서도 초기에 새만금 등지에 대규모 태양광발전소와 풍력발전소를 설치하겠다고 나섰지만, 생각만큼 진도가 나가지 않고 있다. 그 와중에 ‘수소경제’와 ‘그린뉴딜’이라는 새로운 슬로건을 내세웠지만, 아직까지는 특별히 가시적인 성과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한 상황에서의 탈원전이 불러올 부정적 이미지를 – 전기료 인상 등 – 극우 매스미디어가 계속 부추긴다면 극단적으로는 임기말에 탈원전 정책 자체가 표류할 가능성도 있다. 부동산 보유세 강화 정책이 지자체 정권 교체만으로도 도전받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현 정부의 많은 것이 그렇지만 부동산과 탈원전 등의 개혁이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한 배경에는 그 방향이 잘못되었다기보다는 개혁이 철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동산 투기 규제는 양질의 사회주택 공급을 병행했어야 함에도 그 역할을 방기하여 가수요를 부추긴 정황이 있었고, 탈원전 역시 원전 폐쇄로 인한 공백을 신재생발전으로 재빨리 메워야 함에도 현재 수요공급의 조절이 적절히 이루어질지에 대한 회의감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불철저한 개혁이 초래할 결과는 결국 개혁에 대한 염증과 수구로의 회귀다.

기후변화와 관련한 불확실성

당신은 여러 해 동안 미국의 주택시장이 기후변화와 관련한 위험의 불확실성을 무시하고 있다고 경고해왔습니다. 당신은 우리가 그것을 바로잡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네. 기후변화로 인한 손실은 많은 이들이 예상하는 것보다 더 빨라지고 있습니다. 2020년 미국에서는 기후 재앙이 16건 있었고 각각 10억 달러를 넘는 (어떤 것은 훨씬 더 초과하는) 손실을 초래했습니다. 2015년에서 2019년까지 평균적으로 13.8건의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2020년 전의 40년 간 평균은 6.6건입니다. 더욱이 우리가 불과 몇 년 전에는 예측하지 못했던 리스크까지 목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올바르게도 해수면 상승으로 인한 해안가의 범람을 우려했었지만, 최근 몇 년 동안 호우로 인한 강물의 범람이나 들불로 인한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기도 했습니다. 다른 이슈 들 중에서도 우리는 사람들이 몇 세기동안 자연발화가 발생하는 회랑이라고 인식되어 오던 – 예를 들면 캘리포니아 – 지역들에 건설이나 재개발을 제한하는가의 여부라는 어려운 질문에 직면하지 않았었습니다. 그 대신에 캘리포니아에서 우리는 이러한 위험한 지역에서의 주택의 대항력을 보강하는 유틸리티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주정부는 보험사들이 화재보험을 시장가격 이하로 갱신할 것을 강제하고 있습니다. 유사하게 동부의 몇몇 곳에서는 민간보험사들이 오래 전에 주택소유자들의 홍수 리스크 시장에서 빠져나오고 있고 그 대신에 부보는 국립홍수보험프로그램에 의존하는 국영 에이전시가 많은 부분을 지원하는 프리미엄에 의존하고 있습니다.[Are We On the Verge of Another Financial Crisis?]

기후변화가 초래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자연재해가 늘어나면서 이러한 재해가 주택의 유지비용을 상승시키고 결국에는 2008년과 같은 집값 폭락으로 인한 금융위기로 이어질 것이라 주장하는 하바드비즈니스스쿨 John Macomber 조교수와의 인터뷰다. 우리나라의 주택시장과는 여건이 많이 다른지라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미국의 금융시장 교란은 우리나라 시장에도 악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관심을 가질만한 주제라고 생각된다. 이미 우리의 눈앞에서 현실로 일어나고 있는 기후변화의 징후들은 날이 갈수록 그 정도가 더 심해지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그리고 인터뷰하는 이의 주장대로 이는 시장에서의 통상적인 선입견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것이라는 주장에도 공감이 가는 바가 있다.

코로나19 정국에 즈음한 쇠라의 그림에 대한 상념

인류는 엄중한 “팬데믹”의 시대에 접어들어 이제껏 접해보지 못했던 갖가지 정치, 경제, 사회적 현상을 목도하고 있다. 각 나라 혹은 지자체의 수장(首長)들이 여태 하지 않았던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상황도 그러한 유례없는 현상 중 하나인데, 바로 이들이 시민들에게 집에 머물러있으라고 달래거나, 윽박지르거나, 읍소하는 업무가 바로 그것이다. 오늘 내가 우연히 접한 기사는 로리 라이트풋이라는 시카고 시장이 시 곳곳을 차를 몰고 돌아다니며 시민들에게 집에 돌아가라고 했다는 예의 그 희한한 업무를 수행하는 상황을 묘사한 기사다.

어찌 보면 – 요즘 상황에 비추어볼 때 –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이 기사에서 내 눈을 잡아끈 것이 있는데 바로 시장의 얼굴을 찍은 자료 사진이다. 시장으로서 흔치 않은 흑인 여성이라서 눈여겨 본 것은 아니고 배경으로 쓰인 그림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점묘법으로 유명한 조르주 쇠라가 그린 그의 필생의 역작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다. 이 그림은 현재 시카고 미술원에 전시되어 있고 바로 그러한 이유로 시카고 시장이 시 곳곳을 돌아다니는 중이라는 상황 설정의 사진에 이 그림이 배경으로 찍히게 된 것이다.

A Sunday on La Grande Jatte, Georges Seurat, 1884.jpg
By 조르주 쇠라 – Art Institute of Chicago, 퍼블릭 도메인, 링크

개인적으로 이 사진이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매체의 의도 여부와 상관없이 이 사진이 현 상황에서의 ‘사회적 거리두기’가 가지는 역사적인 아이러니를 응축하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즉, 유원지와 같은 공공공간(公共空間)과 그곳에서의 휴식은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시민의 투쟁에 의해 쟁취한 것이고, 어찌 보면 쇠라의 그림은 바로 그러한 자유를 암암리에 묘사한 작품인데, 시장이 그 작품 앞에서 그림이 묘사하고 있는 야외에서의 휴식, 혹은 이동의 자유를 공공(公共)의 이익을 위해 제한하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여겨지기에 아이러니하다.

레제가 이런 낙관적인 이상향을 묘사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좌익들이 확실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던 프랑스의 정치상황이 자리 잡고 있다. 프랑스 좌익은 1930년대 파시즘의 위협 하에 사회당, 공산당 등이 결합한 인민전선을 결성한 후 선거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1936년 6월 총파업 이후 전국적 규모의 중앙노사협정인 마티뇽 협정(Accords de Matignon)이 이루어졌는데, 이로 인해 대표적 노동조합의 개념과 단체협약의 효력확장규정이 도입되었다. 그리고 이 협정에는 프랑스에서는 최초로 ‘2주간 유급휴가제’가 도입되어 노동자는 비로소 유급휴가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페르낭 레제, ‘여가 – 루이 다비드에게 보내는 경의’>

개인의 이동과 휴식의 자유는 소중하다. 그렇기에 유사 이래 이윤창출을 위해 쉼 없이 일해야 했던 노동계급은 끊임없이 그 자유를 쟁취하려 했고, 이러한 투쟁의 결과로 문명사회에 접어들어 휴식의 자유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공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데 2020년 전 세계 상당수의 시민들은 광학현미경으로는 볼 수도 없는 바이러스 때문에 그 자유가 자율적/타율적으로 제한당하고 있는 상황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의료보건의 팬데믹에 대한 확실한 인프라의 구비 역시 여태의 자유를 보장하는 또 하나의 전제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 인프라 중 핵심은 의료 인프라겠으나, 또 하나 한국에서의 코로나19 통제에서 관심을 끌고 있는 인프라가 디지털화된 개인정보 데이터 축적과 이 정보의 공유 시스템이다. 한국은 오늘날 대의민주주의의 형식은 달성했다는 유리한 여건 이외에도 사실상 전 국민을 코드화한 주민등록번호 시스템으로 대표되는 개인정보 빅데이터가 존재하고 국가가 그것을 통제하기에 역설적으로 도시폐쇄 없이 주민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게 만들어주고 있다는 점이 “프라이버시”를 지고의 가치로 여기는 자유주의적 유럽인들의 심경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개인적으로도 국가 혹은 여하한의 기관이 개인정보 빅데이터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활용할 개연성이 충분하다는 사실이 불편하다. 조직범죄나 다름없는 “n번방” 사건 역시 개인정보를 시골 면사무소 286 컴퓨터에서조차 검색할 수 있는 한국이기에 더 범행이 용이했을 것이라는 개연성도 그러한 불편한 상황의 한 사례다. 하지만 어떤 유튜버도 말하듯 어차피 개인정보 빅데이터는 이미 구글과 페이스북이 일개국가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1 자유주의자들이 생각하는 통제 없는 개인의 완벽한 자유는 이제 애당초 성립 불가능한 꿈인지도 모른다.

우연치 않게 한국이 현재 코로나19 사태에서 크게 주목받고 있는 상황이다. 각국은 이 사태가 진정된 이후 복기를 통해 앞으로의 사회가 어떠해야 할지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반성 없이 일상으로 복귀할 수도 있고) 각국의 지도자들이 올바른 정신세계의 소유자라면 ‘민주적 의사결정’, ‘투명성’, ‘적절하게 통제되는 정보의 활용’이라는 교훈을 얻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21세기 형 경찰국가’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이미 어떤 나라는 그러한 황폐한 사회로 접어들고 있는 것 같다. 어떤 나라는 아직도 우월감에 빠져 다른 나라를 까기 바쁘고.

소설을 읽다가 샘터 주인인 척 했던 어떤 인간이 떠오르다

“아니, 내가 뭐, 버는 게 있어서? 빨래라야 그저 여름 한철이지, 그것두 이제 장마나 지면 다 쓸려내려가구…. 흥! 그야말루 오 전 십 전 빨래 값 받어가지구 해마다 세금 바치려면 쩔쩔매는 판인데….”
그리고 그는 잠깐 말을 끊었으나, 칠성아범이,
“허지만….”
하고, 또 이의를 제출하려는 기색에, 그는 즉시 말을 이어,
“더구나, 소문을 들으면, 뭐 청계천을 덮어버린단 말이 있지 않어? 위생에 나쁘다던가… 그러니, 정말 그렇게나 되구 본댐야, 인젠 삼순구식두 참 정말 어려울 지경이니…. 흥! 말두 말어.”[천변풍경, 박태원 저, 문학과지성사, 2014년, p168]

소설가 박태원이 1936년 8월부터 10월까지 『조광』에 연재한 ‘천변풍경’의 일부다. 이 소설은 청계천 주변에 사는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소묘(素描)하듯 담백하게 그린 소설이다. 인용한 부분은 그 중에서도 제17절 샘터 문답에서 샘터 주인이 칠성아범과 민주사 집 행랑아범과 나누던 대화의 일부다. 샘터 주인이란 말 그대로 청계천 중 일부를 자기 것으로 하여 빨래하는 이들로부터 사용료를 받는 이었다. 이런 권리가 어떠한 법적 권리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소설에 나와 있지 않다.

Frame house along Seikei-Sen.JPG
미상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일제 침략 아래서의 서울(1910-1945)」의 “Frame house along Seikei-Sen“. 위키미디어 공용에 의해 Public domain으로 라이선스됨.

일제강점기 시절의 청계천 모습

청계천은 원래 그냥 개천으로 불렸으나 일제강점기에 청계천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한다. 인용문을 보면 박태원이 이 소설을 연재하던 시점에는 이미 개천의 이름이 청계천으로 바뀌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설에서 샘터 주인이 이야기하듯 실제로 일제 총독부는 청계천을 복개(覆蓋)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한다. 하지만 예산의 문제로 실행되지 못하고 한국전쟁 이후 1950~70년대에 걸쳐 복개공사가 이루어졌고, 이 공사는 일종의 근대화의 한 사례로 홍보되었다고 한다.

천변주민들에게는 빨래터이자 쓰레기 투기장이었고, 샘터 주인에게는 영업장이었던 그 곳이 “근대화”를 위해 덮여지고, 다시 “현대화”를 위해 덮개가 뜯어져 친환경(?) 관광 상품이 된 곳이 바로 청계천인 것이다. 청계천은 샘터 주인에게는 오 전이나 십 전 빨래 값 받아서 연명하게 해주는 도구였지만, 후에 이걸 보다 큰 이익에 이용해먹은 이가 있다. 2011년 건축가에 의해 최악의 건축물 3위에 뽑힌, 복원된 청계천으로 대통령이 되어 4대강으로 그 스케일을 확대시킨 이명박.

독일의 핵폐기 전략과 관련한 국제중재 소식과 그 의미

슈피겔 : 십억 유로 소송에 직면한 단계적 핵폐기

한 보도에 따르면 스웨덴의 에너지 기업 바텐팔(Vattenfall)이 독일정부를 고소할 계획인데, 이는 독일의 핵발전소에 대한 단계적 폐지와 관련된 대규모의 손실을 보상받기 위해서이다. 바텐팔은 전에 한번 성공적으로 독일정부와 겨룬 일이 있었다.

올봄 일본 후쿠시마의 핵재앙에 즈음하여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독일에서의 핵에너지를 단계적으로 폐지하겠다고 재빨리 결정했을 때, 많은 이들은 이 정책이 법정에서 끝을 맺으리라는 사실을 예상하고 있었다. 경제일간지 한델스블라트(Handelsblatt)의 수요일판의 보도에 따르면, 바텐팔은 독일정부에 대하여 십억 유로의 소송을 제기할 계획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 소송은 워싱턴D.C.에 있는 국제분쟁해결센터(the International Center for Settlement of Investment Disputes ; ICSID)에 제기될 예정라고 신문은 전하고 있다.

내부자가 한델스블라트에 전한 바에 따르면 바텐팔의 변호사들은 이미 고소장 작업을 거의 마무리했다고 한다. 회사는 단지 그들이 “핵에너지로부터의 탈피에 따른 보상”을 기대한다고만 기사에 말했다. 바텐팔은 브룬스뷔펠(Brunsbüttel) 핵발전소에 66.7%의 지분을, 크륌멜(Krümmel) 핵발전소에는 50%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 이 둘은 모두 함부르크(Hamburg) 근처에 있다. 이 회사는 또한 두 발전소의 운영사이기도 한데, 둘 다 현재 웹사이트는 없다.

메르켈 정부는 2010년 가을, 게르하르트 슈뢰더(Gerhard Schröder)가 이끈 중도좌파 정부가 계획한 단계별 핵폐기의 데드라인을 넘어서 독일의 핵원자로의 생명을 연장키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후쿠시마의 비극 이후, 메르켈의 친핵적인 과정은 정치적으로 연장되기 어려웠고 그는 재빨리 그 과정을 뒤집는다. 몇몇 원자로 — 바텐팔이 운영하는 두 개를 포함하여 — 2022년에 완결하는 것으로 예정한 새로운 단계적 폐지 계획에 따라 즉각 폐쇄됐다.

6월, 회사는 두 발전소의 폐쇄와 관련한 손실의 “공정한 보상”을 요구했고 법률소송을 암시했다. 독일 핵원자로의 다른 운영사들도 그 당시 비슷한 의도를 알려왔다. RWE 와 E.on은 이미 핵발전소 세금에 관해 연방정부를 고소한 상태다.

‘공정하고 공평한 대우’

바텐팔의 시각으로 보면, 핵발전소를 포기하는 독일정부의 결정은 그들 자산의 가치를 파괴시키는 것이었다. 예전 발전소의 운영주기를 연장시킬 것이라는 계획을 신뢰하였기에, 회사는 두 시설에 7억 유로를 투자했다. 회사에 따르면, 이 투자는 이제 가치가 없다. 다른 여섯 개의 원자로 역시 일본에서 지진과 쓰나미가 발생한 4월 11일의 그 주에 즉시 폐쇄되었다.

한델스블라트에 따르면, 바텐팔은 본사가 해외에 있기 때문에 보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재산권 개입에 대한 조인국의 해외투자자들을 보호해주는 에너지헌장조약(Energy Charter Treaty ; ECT)의 투자규칙을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약문에 보면, 여기에는 투자자의 “공정하고 공평한 대우(fair and equitable treatment)”가 포함되어 있다.

이 스웨덴 기업은 이미 2009년에도 독일정부를 상대로 ICSID에서 소송을 제기한 적이 있다. 바텐팔은 함부르크-무부르크(Hamburg-Moorburg)의 석탄화력 발전소에 대해 강화된 환경규정에 소를 제기했는데, 이자를 포함한 손실 14억 유로를 청구했다. 2010년 법정 바깥에서 합의가 이루어졌다.

출처 : 슈피겔

투자 중에서도 발전소 사업은 대규모의 자금조달, 장기의 투자회수 기간, 국제적인 규모의 투자에 따른 폴리티컬리스크 등 투자 사업이 가질 수 있는 주요한 리스크를 모두 망라하는 투자형태에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기사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에너지헌장조약과 같은 투자위험을 최소화해주어, 투자를 활성화시키기 위한 각종 유인책이 마련되곤 한다.

바텐팔에게 있어 메르켈 정부의 결정은 정확하게 폴리티컬리스크에 해당한다. 이전의 단계적 핵폐기 전략을 수정한 우파 정부의 정책결정을 믿고 발전소 사업에 투자했던 바텐팔은 갑작스런 정책변경에 따라 수익창출의 기회를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연히 이 사안의 일차적인 책임은 정책의 일관성을 잃어버린 메르켈 정부에게 있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후쿠시마 사태라는 사상 초유의 비극이 핵발전소가 많은 특정국에 주는 충격을 감안하면, 그 결정을 마냥 비합리적이라거나 표를 의식한 정치적 결정이라고만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이는 “공익에 따른 수용”에 해당할 것이고 이는 전 세계 법체계 모두에서 인정하고 있는 바이다. 문제는 폐쇄될 공익시설이 市場化되어 있는 상황이다.

정부지출의 일종의 부외금융(off-balace financing)에 해당하는 민영화가 일반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공익시설의 민영화는 어느 정도 정부채권의 변종형태에 해당하지만, 비극은 이렇게 정부가 그 채권의 지불을 중단할 때 발생한다. 그리고 비극은 그 보상이 에너지헌장조약이나 FTA처럼 투자자에게 더 유리한 각종조항이 존재할 경우 한층 배가된다.

결국 이 사태에서 – 또는 다른 사례에서 – 어느 일방을 도덕적으로 매도하기는 쉬우나 그 사태의 본질을 바라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초국적으로 움직이는 자본의 존재, 그 자본의 자유를 보장하는 각종 조약, 행정권역이 제한된 국민국가의 존재, 사법적 판단의 초국적 상태 등이 가지는 의미를 살펴봐야 한다. 이전과는 매우 다른 낯선 풍경 말이다.

거리가구(street furniture) 단상

약수역 화장실 앞의 모습이다. 이건 ‘화장실을 찾기 쉽게’라기보다는 ‘이래도 화장실이 어디 있느냐고 불평할 테냐?’라고 외치는 것만 같은 신경질적인 풍경이다. 이런 경우는 극단적인 예일지 몰라도 우리나라는 도시생활의 편리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소위 ‘거리가구(street furniture)’에 대해서 참 무감각하다 싶을 정도로 디자인 감각이 떨어진다.

여기서 디자인이라 함은 심미적인 면도 중요하거니와 가독성을 높여 이용자에게 편리함을 주는 디자인을 말한다. 여태 우리나라에서 도시의 거리가구들에 대해 디자인을 외치는 경우도 그리 많지 않았지만 그나마 이걸 강조한 오세훈 서울시장이 또 그런 디자인의 혁신을 이끌어냈느냐, 또는 최소한 그 기반을 마련했느냐 하는가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기껏 기억나는 디자인 이벤트는 서울시의 택시들을 획일적으로 한 색깔로 바꾸겠다는 시도였는데, 통일성을 부여한다는 면에서야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데 결국 그가 고른 색깔은 최악의 듣도 보도 못한 색깔이었다는 점이 비극이었다. 누군가 그 색을 일컫길 “김치전 먹고 토한 색깔”이라고 하였는바, 이에 크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기억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