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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정국에 즈음한 쇠라의 그림에 대한 상념

인류는 엄중한 “팬데믹”의 시대에 접어들어 이제껏 접해보지 못했던 갖가지 정치, 경제, 사회적 현상을 목도하고 있다. 각 나라 혹은 지자체의 수장(首長)들이 여태 하지 않았던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상황도 그러한 유례없는 현상 중 하나인데, 바로 이들이 시민들에게 집에 머물러있으라고 달래거나, 윽박지르거나, 읍소하는 업무가 바로 그것이다. 오늘 내가 우연히 접한 기사는 로리 라이트풋이라는 시카고 시장이 시 곳곳을 차를 몰고 돌아다니며 시민들에게 집에 돌아가라고 했다는 예의 그 희한한 업무를 수행하는 상황을 묘사한 기사다.

어찌 보면 – 요즘 상황에 비추어볼 때 –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이 기사에서 내 눈을 잡아끈 것이 있는데 바로 시장의 얼굴을 찍은 자료 사진이다. 시장으로서 흔치 않은 흑인 여성이라서 눈여겨 본 것은 아니고 배경으로 쓰인 그림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점묘법으로 유명한 조르주 쇠라가 그린 그의 필생의 역작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다. 이 그림은 현재 시카고 미술원에 전시되어 있고 바로 그러한 이유로 시카고 시장이 시 곳곳을 돌아다니는 중이라는 상황 설정의 사진에 이 그림이 배경으로 찍히게 된 것이다.

A Sunday on La Grande Jatte, Georges Seurat, 1884.jpg
By 조르주 쇠라 – Art Institute of Chicago, 퍼블릭 도메인, 링크

개인적으로 이 사진이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매체의 의도 여부와 상관없이 이 사진이 현 상황에서의 ‘사회적 거리두기’가 가지는 역사적인 아이러니를 응축하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즉, 유원지와 같은 공공공간(公共空間)과 그곳에서의 휴식은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시민의 투쟁에 의해 쟁취한 것이고, 어찌 보면 쇠라의 그림은 바로 그러한 자유를 암암리에 묘사한 작품인데, 시장이 그 작품 앞에서 그림이 묘사하고 있는 야외에서의 휴식, 혹은 이동의 자유를 공공(公共)의 이익을 위해 제한하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여겨지기에 아이러니하다.

레제가 이런 낙관적인 이상향을 묘사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좌익들이 확실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던 프랑스의 정치상황이 자리 잡고 있다. 프랑스 좌익은 1930년대 파시즘의 위협 하에 사회당, 공산당 등이 결합한 인민전선을 결성한 후 선거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1936년 6월 총파업 이후 전국적 규모의 중앙노사협정인 마티뇽 협정(Accords de Matignon)이 이루어졌는데, 이로 인해 대표적 노동조합의 개념과 단체협약의 효력확장규정이 도입되었다. 그리고 이 협정에는 프랑스에서는 최초로 ‘2주간 유급휴가제’가 도입되어 노동자는 비로소 유급휴가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페르낭 레제, ‘여가 – 루이 다비드에게 보내는 경의’>

개인의 이동과 휴식의 자유는 소중하다. 그렇기에 유사 이래 이윤창출을 위해 쉼 없이 일해야 했던 노동계급은 끊임없이 그 자유를 쟁취하려 했고, 이러한 투쟁의 결과로 문명사회에 접어들어 휴식의 자유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공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데 2020년 전 세계 상당수의 시민들은 광학현미경으로는 볼 수도 없는 바이러스 때문에 그 자유가 자율적/타율적으로 제한당하고 있는 상황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의료보건의 팬데믹에 대한 확실한 인프라의 구비 역시 여태의 자유를 보장하는 또 하나의 전제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 인프라 중 핵심은 의료 인프라겠으나, 또 하나 한국에서의 코로나19 통제에서 관심을 끌고 있는 인프라가 디지털화된 개인정보 데이터 축적과 이 정보의 공유 시스템이다. 한국은 오늘날 대의민주주의의 형식은 달성했다는 유리한 여건 이외에도 사실상 전 국민을 코드화한 주민등록번호 시스템으로 대표되는 개인정보 빅데이터가 존재하고 국가가 그것을 통제하기에 역설적으로 도시폐쇄 없이 주민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게 만들어주고 있다는 점이 “프라이버시”를 지고의 가치로 여기는 자유주의적 유럽인들의 심경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개인적으로도 국가 혹은 여하한의 기관이 개인정보 빅데이터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활용할 개연성이 충분하다는 사실이 불편하다. 조직범죄나 다름없는 “n번방” 사건 역시 개인정보를 시골 면사무소 286 컴퓨터에서조차 검색할 수 있는 한국이기에 더 범행이 용이했을 것이라는 개연성도 그러한 불편한 상황의 한 사례다. 하지만 어떤 유튜버도 말하듯 어차피 개인정보 빅데이터는 이미 구글과 페이스북이 일개국가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1 자유주의자들이 생각하는 통제 없는 개인의 완벽한 자유는 이제 애당초 성립 불가능한 꿈인지도 모른다.

우연치 않게 한국이 현재 코로나19 사태에서 크게 주목받고 있는 상황이다. 각국은 이 사태가 진정된 이후 복기를 통해 앞으로의 사회가 어떠해야 할지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반성 없이 일상으로 복귀할 수도 있고) 각국의 지도자들이 올바른 정신세계의 소유자라면 ‘민주적 의사결정’, ‘투명성’, ‘적절하게 통제되는 정보의 활용’이라는 교훈을 얻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21세기 형 경찰국가’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이미 어떤 나라는 그러한 황폐한 사회로 접어들고 있는 것 같다. 어떤 나라는 아직도 우월감에 빠져 다른 나라를 까기 바쁘고.

“출퇴근 2시간을 전차에서 허비하게 되면 가정생활에도 문제가”

나의 사견으로는 출퇴근 2시간을 전차에서 허비하게 되면 가정생활에도 문제가 생기는 등 좋지 않으며, 30분이 좋을 듯하다. (중략) 현재 경성시가지계획의 목표 인구는 110만이며, 인천은 20만이다. 여기에 이번에 결정한 구역(경인시가지계획구역) 목표 인구 약 100만, 경성 북부와 동부 방면에 신설할 주택도시에 목표 인구를 약 70만으로 하여, 합계 300만을 수용할 계획이다.[1939년 10월 21일 市街地計劃委員會速記錄 / 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 염복규 지음, 이데아, 2016년, p360에서 재인용]

일본이 우리를 강점하던 시절, 총독부의 제5회 시가지계획위원회에서 총독부 기사 야마오카 케이스케가 했던 발언의 일부다. 1919년 처음으로 『도시계획법』을 제정하여 “도시계획”이란 개념을 자기네 도시공간에 적용한 일본이 이 개념을 한국 땅에도 적용하였고, 상기 인용한 발언은 이러한 공간계획을 도시에서 더 확장하여 일종의 지역계획 내지는 광역계획의 개념으로 접근한 “경인시가지계획”의 사례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각각의 도시는 훨씬 많은 인구가 살고 있어 계획이 소박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지만, 당시로서는 매일신보라는 신문에 “경인 메트로포리쓰 환상곡”이라는 제목의 2면에 걸친 특집기사를 낼만큼 오히려 약간은 무모한 광역도시권 계획에 가까웠다. 흥미로운 점은 인구와 함께 통근시간의 기준치를 제시한 것인데 이를 통해 공간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는 잣대가 된다는 점에서 유용한 기준치일 것이다.


『매일신보』 “경인 메트로포리쓰 환상곡”

야마오카는 “출퇴근 2시간을 전차에서 허비하게 되면 가정생활에도 문제가 생긴다”고 단언하였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아도 이는 타당한 발언이다. 그때보다 노동시간은 어느 정도 줄었을 것이라 가정한다해도 출퇴근에 2시간을 허비하게 되면 소위 “저녁 있는 삶”을 누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경인 메트로폴리스에서는 이것이 현실이다. 서울의 직장인의 출퇴근 시간은 134.7분으로 2시간이 넘는다.

우리나라 직장인의 하루 평균 출퇴근 시간이 약 100분(1시간 40분)이 넘는 것으로 조사됐다. 서울에 사는 직장인의 경우에는 2시간이 넘었다. 17일 취업포털 잡코리아에 따르면 남녀 직장인 820명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하루 출퇴근 소요시간이 평균 101.1분인 것으로 조사됐다. 출근 시간은 48.1분, 퇴근 시간은 53분으로 나타났다. 서울 거주 직장인의 경우 이 시간이 134.7분으로 가장 길었다. 이어 기타 지역 118.8분, 경기도 거주 직장인 113.4분 순이었다.[직장인 평균 출퇴근 시간 101분… 서울은 2시간 넘어, 2017년 7월 17일, 조선일보]

이런 시간낭비를 줄이는 방법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첫째, 교통 인프라스트럭처의 확충이다. 현재 GTX 등 여러 교통계획이 입안되어 있기는 하지만, 재정문제 등 여러 사유로 인하여 추진이 지지부진하다. 좀 더 장기적인 프로세스로는 위성도시가 아우르는 광역도시권이랄지 용도지역을 분할하여 교통을 유발시키는 조닝(zoning)과 같은 계획기법에 대한 반성으로 직주근접 내지는 복합개발을 늘려나가는 방식이 있다.

공간계획이 아닌 대안으로는 노동시간 단축이나 재택근무와 같은 노동을 재배치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이런 대안은 노자 간의 협약이나 노동시간 단축 법안 제정 등의 방법이 있으나 장기적인 효과로 귀결될 것이기에 결국 정부 차원에서는 공간계획의 방법으로 푸는 것이 현실적일 것이다. 문제는 새 정부는 인프라 예산을 대폭 축소했다는 점이다. 인프라가 “건설족”의 먹거리이기도 하지만, 복지이기도 하다는 사실에서 우려되는 대목이다.

교정교화 서비스의 위기

셜리 슈미트는 위험한 범죄자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아이오와의 농장에서 말을 기르고 딸을 키우며 조용히 살고 있었다. 2006년 남편이 죽자, 우울해지고 만성적인 통증으로 고통 받으면서 그는 메스암페타민(속칭 “히로뽕”)에 의지하기 시작했다.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그와 친구들은 약을 개인적인 복용 목적으로 제조하기 시작했다. 그는 2012년 체포되어 마약치료 과정을 이수했고 그 이후 정상이 됐다. 그는 돈벌이를 위해 마약을 판 적이 없으나 연방의 의무적인 최소형량 법칙(federal mandatory minimum rules)에 따라 – 이전의 마약소유에 따른 판결들이 무시된 채 – 판사는 10년형을 선고해야만 했다. 그를 복역시키는 데에는 납세자의 돈이 연간 3만 불 정도 드는데, 이는 아이오와에 있는 학비로 곤란한 학생 세 명의 학비를 내주기에 충분한 돈이다. 그가 출소하면 연금을 받을 만한 나이가 될 것이다.[America’s prisons are failing. Here’s how to make them work]

엄벌주의로 인해 감옥이 중죄인으로 가득 들어차 있는 미국의 교정 서비스 현황, 그리고 미국을 포함한 서구사회의 획일적인 교정 서비스 문화를 비판한 이코노미스트 기사의 일부다. 사례로 든 사안은 타인에게 가한 유해한 범죄가 아닌 본인의 중독을 통제하지 못한 의지박약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마약을 직접 제조할 정도로 – 마치 브레이킹배드를 연상시킨다 – 희귀한 범행을 저지른 자조(自助) 행위에 가깝지만, 어쨌든 판매를 하지 않았다면 적어도 자유주의적 관점에서는 범죄로 볼 것이냐 하는, 적어도 10년 형을 받을 정도로의 중죄로 볼 것이냐 하는 것에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이코노미스트조차 미국은 “아웃라이어(outlier)”라고 규정할 만큼 미국의 교정시설에는 수감자들로 차고 넘친다. 미국의 교정시설 수감자는 1970년에서 2008년 사이의 기간 동안 다섯 배 증가했다. 인구 대비 수감자수로 봤을 때 미국의 수감자 수는 프랑스의 수감자 수의 7배, 네덜란드 수감자 수의 11배, 일본의 수감자 수의 15배에 달한다고 한다. 이러한 과도한 수감 상태의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데에는 양극화 현상의 심화로 인한 범죄증가, 교정시설의 민영화 추세, 보수정권의 엄벌주의1 등을 들 수 있을 텐데, 적어도 인용한 사례는 우선 표면적으로는 엄벌주의로 인한 부작용으로 보인다.

이코노미스트는 수감 위주의 교정 서비스가 전반적으로 실패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전자발찌 등 다양한 교화 프로그램으로도 교정이 가능하다면 세금을 절약하면서 교화라는 본래의 목적도 달성할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살인, 강간 등 격리가 불가피한 범죄 이외의 기결수에게 사용해볼만한 할 것이다.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장기적으로 사례와 같이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 행위에 대한 비(非)범죄화도 병행돼야 한다는 점이다.. 대마초 소지에 대한 각국의 비범죄화가 대표적인 사례다.. 단죄가 사회에 의한 복수가 아닌 교화가 목적이라면 이러한 방향이 바람직할 것이다.

[대선 후보 공약 리뷰] 그래서 복지는 무슨 돈으로 할 건데?

이번 대통령 선거에도 주요 후보들은 다양한 복지공약을 발표했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자유한국당 홍준표,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10대 공약을 제출하면서 재원조달 방안으로 증세를 포함시키지 않았다. 증세 없이 세출 구조조정 등으로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다만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는 증세를 염두에 둔 ‘중부담·중복지’를 제안했고, 정의당 심상정 후보가 일찌감치 사회복지세 신설, 법인세 인상을 약속했을 뿐이다.[‘복지 확대’ 약속한 문·안·홍, 재원조달 방안에 ‘증세’는 없다]

각 후보들이 경쟁적으로 복지공약을 내놓고 있는 반면 재원마련 방안에 대해서는 명확한 입장표명 없이 눙치고 있다는 비판기사다. 503이 당초 “증세 없는 복지”를 약속했지만 실제로는 가계의 세금부담 증가속도가 소득의 그것에 비해 2배에 달했다는 보도도 있는 것을 보면 어떻게든 정부가 세금을 더 걷었고, 현재의 후보들도 세금을 안 걷고 복지를 확대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것 같다. 문제는 지금 공약으로라도 그 세수확보방안을 제시하지 않고 대통령이 된 이는 명확한 기조 없이 세금 우려내기 만만한 상대만을 고를 것이란 정황이다.

즉, 주요 세원인 법인세와 소득세 세입이 2012년부터 역전되어 소득세 세입이 더 많은 것도 한 예다. 진짜 현금이냐 아니냐에 말도 많았지만, 기업의 내부유보금이 증가일로인 상황에서 503은 담뱃값 인상, 연말정산에 관한 소득세제 개편 등 “사실상 증세”라는 편한 길을 걸었다. 증세냐 아니냐의 논쟁은 사실 경제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이슈 같다. 법인세율 인하는 친시장적인 정부에서 가속화되어온 정황이 있고, 그 경제학적 논리로 내세웠던 “낙수효과” 이론은 비웃음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이제 법인세 인상을 진지하게 고려할 시점이다.

심상정 후보는 법인세 최고세율을 25%까지 올리겠다는 공약을 내놓았다. 거기에 사회복지세라는 목적세도 신설하겠다고 한다. 안철수 후보는 “법인 고소득 대상 누진세율 체계 확립”이란 공약을 내놓았고, 국민의당은 이미 24%로 세율을 올리는 법안을 제출했다.1 문재인 후보는 “재정지출 개혁과 세입확대”라는 표현을 쓰긴 했지만, 문 후보 스스로 “고소득자, 고액 상속ㆍ증여자 과세 강화, 자본소득 과세 강화, 법인세 실효세율 인상 그리고 법인세 명목세율 인상 이런 식으로 제시하며 동의를 받겠다”고 우선순위를 두고 있어 입장이 모호하다.2

유승민 후보는 “저부담-저복지”를 “중(中)부담-중복지”로 전환하겠다는 슬로건을 내세우지만, 어떻게 그렇게 복지의 기조를 바꿀 것인지에 대한 언급은 “세제 구조 조정 및 세제 개편”이란 표현으로 눙치고 있다. 홍준표 후보는 “탈루소득 발굴 및 지하경제양성화 등 세정강화”, “대기업 세제감면 재정비”를 이야기하고 있어 가장 소극적인 입장이다.3 경남도 부채를 다 갚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기대하는 것 같다. 요컨대 법인세와 기타 목적세 공약에 있어 심 후보가 가장 적극적, 안 후보가 적극적, 문과 유 후보는 유보적, 홍 후보가 가장 소극적으로 보인다.

한편 가계의 세수부담은 가처분소득의 감소라는 역효과를 불러온다는 사실은 꽤 신뢰를 얻는 주장이므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예를 들어 담뱃값 인상으로 저소득층이 더 부담이 됐다는 정황에서 볼 때, 결국 가처분소득과 소비와의 상관관계가 적은 부유층에 세금부담을 더 지우는 누진세 인상과 같은 정책이 필요하다. 심은 소득세 누진강화와 종합부동산세 등 부자증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안은 “선 금융· 부동산 등 자본이득에 대한 과세, 후 고소득 세율 인상 최고세율 인상”을 주장하고 있어 세율 인상에 부정적인 인상을 풍긴다.

문 후보는 앞서 언급하였듯이 “고소득자, 고액 상속ㆍ증여자 과세 강화, 자본소득 과세 강화”를 공약으로 내놓았다. 유 후보는 공약집에서 조세에 관한 별도의 내용을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누진구조라는 큰 틀에서는 찬성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여전히 세금감면 제도 개선 등에 방점을 찍고 있다. 홍 후보는 달리 언급할 내용이 없다. 종합하면 세금 정책은 심 후보가 가장 강경하고 문과 안 후보가 비슷한 내용, 유 후보가 유보적, 홍 후보는 퇴행적이라 할 수 있다. 여하튼 이제 차기 정부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증세가 논의할 시점인 것 같다.

연금 받는 자산가의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

지금 일본에서는 특별회계까지 포함하면 사회보장비 중 1,000조 원이 고령자 복지로 지출되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예금 총액 역시 매년 300조 원씩 증가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중략] 어째서 이렇게 늘어나고 있는가 하면, 연금을 받아도 쓰지 않는 고령자가 많기 때문입니다. 지금 일본에는 젊을 적부터 많은 보험료를 지불한 덕분에 노후에도 매년 400만 원 이상의 연금을 받을 수 있는 고령자가 있습니다. [중략] 최근 도쿄 도심에 있는 아파트 값이 엄청나게 뛰면서 ‘포티 버블’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지요? [중략] 일본인 부유층, 그것도 고령의 부유층이에요. 그 사람들이 상속세 대책으로 사고 있는 겁니다.[98%의 미래 중년파산, 아카기 도모히로/아마미야 가린/가야노 도시히토/이케가미 마사키/가토 요리코/아베 아야 공저, 류두진 옮김, 오찬호 해제, 위즈덤하우스, 2016년, pp112~113]

인용한 책에서 가야노 도시히토 씨가 한 발언이다. 가야노 씨는 싸다주쿠 대학의 철학과 교수로 국가, 폭력, 성장 등과 같은 주제로 몇 권의 책을 저술한 바 있는 만큼 해당 주제의 권위자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경제학이 주 전공이 아닌 분이다보니 인용한 부분에서 서술한 내용이 얼마나 신뢰성이 있는가 하는 문제에서는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단, 해당 발언을 인용한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돈의 흐름에 대한 발언이 어느 정도는 관련 연구에 영감을 줄 수 있는 아이디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본도 그렇지만 한국도 지금 심각한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었다. 은퇴자에게 지불해야 할 연금의 규모가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 더욱더 커질 것이다. 물론 당사자의 입장에서야 만족스럽지 않은 금액일지 몰라도 확실히 이 사회는 고도 성장기에 설계된 연금계획에 따라 역사적으로 유례없는 규모의 비용을 지불하여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 상황에서 은퇴자들의 연금소득이 노동소득보다는 “여윳돈”일 가능성이 높고, 그 돈이 부동산 투자 등으로 자본의 흐름에 다시 투입될 것이라는 가정 역시 그리 무리한 가정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내수가 엉망이라는데도 집값이나 상가 월세가격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세대별로 볼 때 고령층이 부동산 자산을 더 많이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전제 하에, 이들 자산가들이 연금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수입을 늘려갈 수 있다면 단순한 수요-공급 법칙에 따라 자산을 매각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1 더군다나 기업의 구조조정으로 자영업자 후보군들은 계속 시장에 진입하고 있다. 요컨대 부동산 자산과 내수 시장의 괴리 사이에 자영업자 예비군, 그리고 노령 연금이 쿠션 작용을 하고 있는 상황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가 청년에게 각자도생 이외의 대안을 내놓지 않으면서 “아프니까 청춘”이란다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서 특히 젊은 층일수록 부동층의 비중이 높아서 정치권이 표심을 잡기 위해 열중하고 있다는 기사를 봤다. 기사는 새삼스러울 것이 없으나 나의 눈길을 잡아끈 것은 그 기사의 ‘베스트 댓글’이었다. (아래 참조) 이글을 쓴 사람들은 그 정치적 성향을 굳이 나누자면 “진보”측으로 여겨진다. 흔히 진보진영에서는 보수적인 투표성향의 노인층에 대항하여 청년층이 투표를 해야 한다는 – 즉 청년층은 야권을 지지할 것이라는 – 기대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젊은 부동층은 벚꽃구경가느라 투표안한다. 지들 앞길을 지들이 망친다.”
“10대 20대에서 43%. 그러나 투표를 하는 사람은 4.3% 정도??”

실제로도 청년층의 대통령 지지도를 보면 反여권 성향이 강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관계를 제외하고는 위 베스트 댓글이 비아냥대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여태의 투표에서도 청년층의 투표율은 결코 낮지 않았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그렇게 투표해서 뽑은 정치권이 실제로 청년층을 위해 한 일은 그리 많지 않다.1 이는 주요하게 이미 청년층의 비중이 갈수록 작아지는 과소대표성 경향을 보이고 있고, 정치권이 이를 간파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2014년 ILO 보고서는 각국 청년의 교육 및 고용현황을 비교하였는데, 이를 보면 우리 청년의 열악한 처지가 잘 드러난다. 보고서에는 1996년 및 2006년 각국의 교육수준을 지수로 표현해놓았는데, 우리나라는 각각 5.96과 7.34를 기록하였다2. 이 수치는 각 년도 2위, 1위에 해당하는 수치다. 반면 성인소득 대비 청년소득과 고용률은 1996년 꼴찌에서 두 번째, 2006년에는 꼴찌를 기록했다. 요컨대, 남한은 최고 수준의 고등교육을 받은 청년이 가장 열악한 고용수준에 시달리는 나라다.

각국 노동시장에서의 청년층의 교육수준

출처 : At work but earning less : minimum wages and young people, Damian Grimshaw, ILO, 2014, p13 에서 재구성

성인소득 대비 청년소득

출처 : 같은 보고서 p16 에서 재구성

청년고용률

출처 : 같은 보고서 p16 에서 재구성

다시 정치권으로 돌아가 보자.. 청년의 상황이 이러한데 앞서도 언급하였다시피 정치권이 청년층을 위해 한 일은 별로 없다. 많은 청년층 노동자들이 해당사항일 최저임금을 올리는데 인색하던 여권이 부랴부랴 총선공약으로 최저임금 인상을 내놓았지만, 이런 그들이 또 지자체에서 실시하던 청년수당에 대해서는 예의 “포퓰리즘”이라고 맹비난한 바 있다. 보수층은 “흙수저”3, “헬조선”이란 유행어에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며 비난하고, 진보층은 투표를 안 해서 그런 것이라 비아냥댄다.

이 나라는 여태의 노동자와 자본가의 역학구도도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상황이다. 그 와중에 노년층은 정치4, 경제5, 문화6 등에서 권력을 잡고 기득권을 놓지 않고 있어 노자(勞資)간의 대립에 중층적으로 고통 받는 新노동계급이 형성되고 있다. 더군다나 젠더의 문제로 가면 한층 복잡해진다. 남녀간 임금차이는 세계최고 수준이고 문화적으로도 “여혐”문화가 일상화되고 있다. 고통 받는 청년, 여성, 노동의 이슈가 맞물려 피해의식을 특정계층에 쏟아 붓는 양상으로 추측되는 상황이다.

사회가 청년에게 各自圖生 이외의 대안을 내놓지 않으면서 “아프니까 청춘”이란다

헬리콥터 투하를 고려할 때라는 이코노미스트

정치인들이 중앙은행과 함께 싸움에 동참해야 할 시간이 도래했다. 가장 급진적인 정책 아이디어는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을 융합한 것이다. 그런 옵션 중 하나가 “헬리콥터 투하”라고 알려진, 돈을 찍어내어 공공 지출에 (또는 세금 감면) 쓰는 것이다. 양적완화와 달리 헬리콥터 투하는 은행과 금융시장을 거치지 않고 막 찍어 낸 현금을 사람들의 주머니에 바로 찔러 넣는 것이다. 이 단순함 무모함을 통해 이론적으로는 사람들은 횡재를 저축하는 대신에 사용하게 된다.[Out of ammo?]

중앙은행의 경기부양 수단들이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상황에서 이코노미스트가 이제 정치인이 가세해야 한다며 쓴 기사의 일부다. 이 아이디어는 일부 진영에서 주장하고 있는 기본소득을 연상시킨다. 돈을 찍어내어 바로 사람들 주머니에 찔러 넣어주는 행위, 그 행위가 소득수준 등에 따라 차별적이지 않다면 바로 그것이 기본소득일 것이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은 어쩌면 점점 더 많은 중앙은행들이 시도하고 있는 마이너스 금리와 유사한 효과를 기대하는 보다 급진적인 정치적 행위라 할 만하다. 마이너스 금리는 예금자들에게 금리 대신 오히려 비용을 요구하는 것이기에 사람들이 예금을 찾아 어딘 가에 돈을 쓰기를 기대하는 정책이다. 그런데 그마저도 시원찮다면 예금 대신 쓸 돈을 정부가 직접 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론적인 예상을 벗어나서 사람들이 국가의 용돈마저 비용을 물고서라도 저축을 하게 되는 상황을 배제할 수 없다. 그렇기는 하지만 적어도 여태의 양적완화가 결과적으로 중앙은행이 돈을 특정용도에 부어넣음으로써 자금배분 왜곡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던 반면, 기본소득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무차별적인 살포라는 점에서 진일보해 보이기는 하다.

(첨언)

한편 페이스북에서 어느 분도 지적하셨다시피 시장자유주의 성향의 이코노미스트가 이런 케인지언 적인 주문을 한다는 사실이 의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인용기사의 결론부분을 보면 이코노미스트가 이런 제안을 한 이유를 알 수 있다. 그것은 “국유화와 같은 궤멸적인 계획을 대안으로 가지고 있는 포퓰리스트”의 등장을 막기 위해서다. 누군지는 대충 짐작이 간다.

한편 바로 그런 점에서 급진좌파 일부는 오히려 기본소득이 사회주의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즉, 기본소득은 “현찰자본주의의 일환으로서 복지의 시장화”일뿐 이라는 주장이다. 시장을 거치지 않은 소득이긴 하지만 다시 시장의 활성화를 위해 쓰일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수긍이 가는 의견이긴 하다. 그게 과연 “사회주의 강령”과 충돌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