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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크루그먼의 책을 읽고 든 상념 트윗 모음

기업은 돈이 시중에 많이 풀렸다고 해서 가격을 높이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제품의 수요가 증가하기 때문에, 가격을 높여도 매출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다고 기대하기 때문에 가격을 인상하는 것이다.[폴 크루그먼 지음, 박세연 옮김, 지금 당장 이 불황을 끝내라, 엘도라도, 2013년, pp214~215]

# 이 설명은 시중의 높은 유동성이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진다는 통화주의자의 주장에 대한 반박이다. 하지만 통화주의자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현대의 부채 경제에서 유동성과 낮은 금리는 소비주체가 높은 가격에 너그러워지게 한다. 대표적으로 부동산 거품.

# 통화주의자의 오류는 유동성을 가격 인상의 거의 유일한 원인으로 보는 아집이다. 일본은 엄청난 유동성에도 불구하고 디플레에 빠질 정도였다는 반증이 존재함에도 그러하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재정건전성 요구와 결합하면 질리지도 않고 반복되고 이게 먹힌다.

# 그리고 통화주의자와 재정건전론자의 이론적 지원을 받는 정치인이 요구하는 것은 낭비성 예산 삭감인데 대부분 국방예산과 같은 그들의 이해와 직결된 예산이 아닌 공립학교와 같은 필수적인 공공서비스에 대한 공격이다. 홍준표는 이런 도움 없이도 병원을 날렸고.

# 개인적으로 공공서비스에 대한 이런 이론적이거나 실제적인 공격은 단기간 내에 끝나지 않을 것이라 보는데, 증세는 인기낮은 선택이고 기본적으로 예산체계가 경직성 복지 예산의 증가로 말미암아 지속적으로 재정압박이 증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까이고 또 까이고.

일본 엔화 하락으로 돈 번 사람들, 그리고 그 원인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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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Y Banknotes” by TokyoshipOwn work.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조지 소로스 하면 1992년 파운드를 방어하려는 영국중앙은행과 맞장을 뜬 “환투기꾼”이자,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의 위기를 사유하는 “철학자”라는 독특한 삶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인물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최근 이 억만장자 철학자가 일본 엔의 하락세에 베팅하여 파운드 전쟁에서의 노획물에 버금가는 10억 달러의 이익을 거둔 사실을 – 물론 물가가치를 고려하면 그때의 혁혁한 전과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 보도했다.

엔화의 하락에 베팅하는 것은 소심한 이가 할 짓이 못된다. 일본은 몇 년간 자신의 화폐를 절하하여 경제와 주식시장을 재점화하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해 왔다. 그 기간 동안 엔화와 일본 국채에 대해 숏포지션을 취한 많은 이들이, 화폐와 채권이 오히려 상승함에 따라 두들겨 맞았다. 일본은 월스트리트에서는 “과부 제조기”로 알려지게 됐다.[중략]

소로스의 예전의 영국 파운드 하락에 대한 매도와 달리, 소로스와 다른 헤지펀드들의 최근의 움직임들은 일본이나 엔화를 불안정하게 만든 것 같지는 않은데, 이는 부분적으로 일본 엔화의 거래가 투자자들이 좌지우지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광범위한 시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일본의 부채는 국내 투자자들이 가지고 있고, 비관적인 투자자들의 그 나라에 대한 숏포지션이 그리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 또 다른 이유다.

동시에, 소로스의 파운드에 대한 술수는 영국중앙은행의 정책들에 반하는 것이었던 반면, 지금의 헤지펀드들은 디플레이션을 극복하려는 일본중앙은행의 정책이 성공하길 기원하면서 거래를 했다.[U.S. Funds Score Big by Betting Against Yen]

그러니까 소로스를 비롯하여 이번에 큰돈을 번 투자자들은, 1992년의 전투에서와 같이 정부의 의지에 반하는 묘수를 부릴 필요도 없고, 그렇기 때문에 일본정부로부터 욕을 먹을 일도 없었다. 그들은 떨어지는 엔화의 급류에 몸을 맡기고 돈을 벌어들이는 재미를 만끽하기만 하면 됐다. 문제는 WSJ기사에서도 말하듯 내리막이 생기는 시점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엉뚱한 때에 몸을 던졌다가는 과부만 제조되기 때문이다.

엔화 약세의 원인은 무엇일까? 그 원인을 아베 정권 등장과 “무제한적 양적완화레토릭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하지만 WSJ도 지적하듯 이전 정권도 그런 시도를 했지만 지금처럼 성공적이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일본 시티은행의 다카시마 수석 애널리스트는 IMF의 새로운 환평가 모델에 근거해 적정 환율이 1달러당 95엔이고 지금 그 시점으로 복귀하는 것이라 분석하고 있다. 아베는 한 계기일 뿐이란 것이다.

다카시마는 그 예로 2001년에서 2006년에도 일본은행이 양적완화를 실시했지만 외환 시장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 사례를 들고 있다. 당시 일본의 양적완화를 무력화시킨 것은 Fed의 금리인하와 이에 수반된 달러 약세였다. 흥미롭게도 지금의 Fed 수장인 벤 버냉키는 당시 일본이 과감한 통화정책을 통해 불황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논문을 썼다는 점이다. 따라서 미국은 현재 호의적인 침묵을 지키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환율에 관해서 할 말이 많을 폴 크루그먼은 한발 더 앞서가 “환율전쟁”이라는 표현은 “순전히 오해(it’s all a misconception)”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또 다른 저명한 경제학자 베리 아이켄그린의 주장을 빌어 1930년대의 상황조차 최악의 경우에라도 경쟁적인 환율 약세를 통해 “최초의 지점(where they started)”으로 회귀한 것이며, 이번의 “환율전쟁”이라 불리는 것도 결국에는 “순이익(a net plus)”으로 남을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벤 버냉키나 폴 크루그먼이나 “환율전쟁은 근린궁핍화 정책이다”라는 전통적인 주장에서 동떨어져 있는데, 과연 그들의 예언이 어느 정도나 현실에서 실현될지는 아직은 미지수다. 폴 크루그먼은 1930년대 당시 상황 악화의 원인을 금본위제 탈피에서 들고 있지만 어쨌든 당시의 상황을 “전쟁”으로 표현하는데 무리는 없고, 플라자합의도 넓게 봐서는 “환율전쟁”의 파편이 심각한 외상을 입힌 사례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p.s. 현재의 “환율전쟁”이 서로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이코노미스트의 긴 글이 있으니 흥미있으신 분은 읽어보시도록…(난 안 읽었다능)

법은 누가 어떻게 만드는가? 또는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가?

현대사회에서 법은 누가 어떻게 만드는가? 보통 대의민주제를 채택한 국가에서라면 당연히 우리가 의회에 보낸 의원들이 만든다. 다만, 형식적 의미의 입법, 즉 법률제정은 의회만이 할 수 있지만, 실질적 의미의 입법은 의회만이 아니라 행정부나 법원과 같은 그 밖의 국가기관도 하고 있다 할 것이다. 어쨌든 입법행위는 국가라는 공적주체가 수행하는 행위라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과연 현실이 그럴까?

ALEC은 무엇일까? 스스로 초당파적이라고 주장하고 있음에도 그 조직은 익숙한 혐의자들인 코크스, 엑슨 모빌 등이 후원한 보수적인 활동 조직이다. 그러나 그런 유의 다른 그룹과 달리 이들은 단순히 입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정부 입법자에게 완벽한 법률초안을 제공하는 등 문자 그대로 법을 쓰기도 한다. 예를 들어 버지니아에서는 ALEC이 쓴 50개 이상의 법안이 소개되었고 문구 하나 하나가 거의 적용되었다. 그리고 이런 법안들은 종종 법이 된다.[Lobbyists, Guns and Money]

미국이 “로비스트의 천국”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수많은 로비스트들은 그들이 대변하는 이해집단의 이익이 각종 제도, 특히 법률에 적용되도록 워싱턴 정가를 배회하며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 그런데 폴크루그먼이 소개하고 있는 ALEC은 이러한 수동적 역할을 뛰어넘어 법안 자체를 작성한다고 한다. 물론 FTA와 같은 무역협정에 기업이 직접 작성한 안이 쓰이기도 한다니 그리 놀랍지는 않다.

어쨌든 폴크루그먼의 고발에 따르면 ALEC이 주력하고 있는 분야는 “노조파괴, 환경기준 약화, 기업을 위한 세금면제”등이라고 한다. 이 단체가 스스로 주장하는 바의 그들의 목적은 “자유 시장, 제한적 정부, 연방주의, 그리고 개인의 자유에 대한 제퍼슨주의자적인 원칙을 증진”하는 것이라고 한다. 토마스 제퍼슨이 이 문구를 읽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궁금하지만 반색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여기 또 다른 입법과정을 보자.

베네수엘라의 외무장관 니콜라스 마두로는 이 나라의 노동법의 밑그림이 이제 거의 최종단계에 접어들었다고 확인했다. 대통령령으로 5월 1일 통과될 것으로 예상되는 새 노동법은 베네수엘라의 현존하는 고용법률을 철저히 점검한 것이며 출산휴가에서부터 직장 내의 조직화까지 모든 것을 포괄할 것이다.

“우린 권리, 안정성, 그리고 일할 권리를 보호할 법적 제도를 구축하기 위해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논쟁하고 있다… 노동법은 최고 단계의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한 도구의 하나다.”

[중략]

현재까지 19,000 건이 넘는 제안이 위원회에 제출되었는데, 담당자의 말에 따르면 논쟁의 주요 논점은 노동자의 임금과 사회적 복지뿐만 아니라 노동일, 생산의 사회적 관계의 재규정에 관련된 것들이다.[Drafting of New Venezuelan Labour Law Moves into Final Phase, Instrument for “Highest Stage of Socialism”]

베네수엘라에서의 소식이다. 새로운 노동법을 만들고 있는 중인데 입법과정에서 참여하고 있는 주체는 “노동자, 사회 집산체, 정치정당, 노조” 등이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미국도 (또는 우리나라도) 노동법 제정 및 개정에 노조의 의견을 반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통로는 ALEC처럼 금권에 의한 입법 로비에 한정되어 있거나 (노사정위와 같은) 들러리적인 성격에 머물러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요컨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을 쥔 이들이 공공연히 입법과 같은 권리의 공고화 과정을 주도한다. 노동자 계급이 어느 정도 목소리를 내어 노조가 힘을 얻게 되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입법 로비 집단의 소수에 머물고, 그 과정도 기득권자의 과정을 흉내 낼 뿐이다. 하지만 베네수엘라처럼 거대조직 뿐 아니라 개별 노동자도 합당한 경로를 통해 제안을 하고 입법과정에 반영된다면 그 또한 매력적인 일이 아닐까?

어딘가로 향하고 있는 길

얼마 전 폴 크루그먼이 자신의 뉴욕타임즈 블로그에 “내일의 칼럼을 위해서(For tomorrow’s column)”라는 짧은 멘트와 함께 뉴웨이브 밴드 Talking Heads의 히트곡 Road To Nowhere의 뮤직비디오를 올려놓았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아티스트인지라 반갑기도 했고 제목에서 풍기는 뉘앙스가 짐작 가는 바가 있어 칼럼을 찾아 읽어보았다. 짐작대로 그의 글은 도로, 교육 등 공공서비스에 대한 투자를 포기하는 미국 정부가 제 갈 길을 잃어가고 있다는 중의(重義)적인 의미로 ‘길(road)’을 언급한 것이었다.

칼럼에서 크루그먼은 미국이 한때 이리(Erie) 운하나 주간(州間) 고속도로 등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 기반시설에 많은 돈을 투자하여 전 세계를 매혹시켰는데, 이제 지방정부들이 예산절감을 위해 유지관리에 돈이 드는 도로를 방치하거나 심지어 없애고 있으며, 중앙정부는 이런 상황을 외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를 두고 “미국은 이제 가로등도 꺼져 있고 포장도 안 된 목적지도 없는 길 위에 놓여있다(America is now on the unlit, unpaved road to nowhere)”고 묘사했다.

케인지언으로서 당연하게도 그는 정부가 사상 최저의 금리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데도 이렇듯 재정난을 핑계로 투자를 꺼리는 것은 단기적으로 경제를 악화시키고 장기적으로는 경제성장의 동력을 갉아먹는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주장에 일정 부분 공감하는 한편으로, 뜬금없이 크루그먼이 언급한 그 도로의 경제사적 또는 도시계획사적 의미에서 대한 잡념이 생겼다. 그가 공공서비스로써 당연히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도로가 어떻게 발전해왔고, 그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등에 대한 여러 잡념들 말이다.

도로는 철도와 함께 문명의 현대화를 이끈 원동력 중 하나였다. 서구 자본주의 초기, 도시는 주로 철도역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성장은 20세기 초까지 이어졌고 그 뒤를 자동차도로가 이었다. 즉, 20세기 초 미국에서 포드의 모델 T와 같은 자동차 대량생산이 가능해지고, 르꼬르뷔제와 같은 도시계획가가 담대하게 제안한 격자형 고속도로 체계와 같은 초안이 ‘고속자동차도로(motorway)’ 등으로 실현되며 대도시와 도로로 연계되는 교외단지가 새로이 형성된 것이다. 그 선두주자는 당연히 미국이었다.

미국은 세계 최강대국으로서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공급능력과 소비력, 넓은 영토, 개인 운송수단을 선호하는 소비성향, 스스로 주요 산유국이면서도 해외에서 나는 석유를 석유 메이저를 통해 값싸게 확보할 수 있는 능력 등 높은 마천루와 쭉 뻗은 고속도로의 쾌적함을 누릴 자격을 충분히 갖춘 나라였다. 미국의 소비자들은 다른 나라보다 앞서 오랜 동안 승용차로 중산층 교외 주거단지에서 몇 키로 떨어진 도심의 직장에 다니거나 쇼핑센터에서 구입한 물품을 차 한 가득 싣고 와 소비하는 문화에 익숙해져왔다.

이와 같은 현대 도시의 풍경은 20세기 초 거대도시와 과학기술에 매료된 도시계획가들이 꿈꾸는 세계였다. 일례로 르꼬르뷔제는 도시는 하나의 기계와 같아서 곡선이 될 여지가 없다며 미국의 고층건축과 자동차 사회, 그리고 직선의 고속도로를 찬양하였다. 사상가들의 이러한 영감, 경제력을 어느 정도 갖추게 된 각국 의사결정권자들의 호응, 그리고 개발업자의 교외단지 개발이나 도심 재개발을 통한 수익추구 행위 등이 뒷받침되어 결과적으로 오늘날 세계 주요 대도시는 대부분 미국의 대도시 풍경을 닮아 있다.

그런데 오늘날 경제위기로 인해 바로 미국에서 그 풍경이 달라지고 있다한다. 미국인에게 필수품이나 다름없는 차들이 중고시장에 나오거나 압류 당하고, 또는 차주인 스스로 기름 값을 아끼기 위해 운전을 자제한다. 주택이 압류당해 교외단지는 텅 비어가고 있다. 거기에 크루그먼이 지적했듯이 기존의 도로는 노쇠해졌고 심지어 없어지기까지 하고 있는 실정이다. 직주 기능이나 소비기능이 넓게 분산되어 있는, 거기에 대중교통망이 의외로 발전되어 있지 않은 미국형 도시구조에서 이는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즉 직장, 주거, 상업 등 각각의 기능이 거리가 떨어진 용도지역에 집단적으로 배치된 상황에서 그것을 이어주는 주요수단이 승용차를 몰고 다녀야 하는 고속도로인데, 그 기능이 마비된다면 도시의 기능이 둔탁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때 그 풍경은 이상적인 도시계획과 고도의 물질문명, 그리고 미국식 개인주의의 이상적인 결합을 상징했지만, 오늘날 그것은 그 쇠퇴해가는 물질문명의 영향을 받아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이른바 미국식 조닝(zoning)의 시대적 한계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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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 131, M-6, 68th St interchange” by Michigan Department of TransportationMichigan Department of Transportation.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한편 이런 조닝과는 다른 좀 더 실험적인 시도가 다른 경제체제에서 있었다. 니콜라이 밀루틴이라는 소비에트 도시계획가가 주창한 ‘선형도시(linear city)’형의 스탈린그라드 계획이 그것이다. 이 계획은 철도, 공업지구, 녹지대, 주거지구 등이 샌드위치처럼 선형으로 차곡차곡 쌓여있는 형태다. 즉, 이 도시는 각 기능이 떨어져 있던 현대의 전형적인 도시와 달리 직장과 주거가 녹지를 사이에 두고 길게 선형으로 계획되어 있다. 그리고 도시는 이렇게 좌우로 계속 같은 패턴으로 뻗어가면서 커간다.

이 계획은 원래 스페인의 건축가 아르뚜로 소리아 이 마타가 1882년 제안한 선형도시 개념이 원형이다. 이 제안은 산업발달에 따른 화물수송 등의 도시적 요구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고자하는 목적이었다. 마드리드 일부, 앞서 말한 스탈린그라드 등 몇몇 도시에서 실험적으로 시도되었던 이 방식은 “도시 없는 도로”인 고속도로가 도시와 도시, 도시와 농촌을 잇는 방식과 달리 계속 각종 기능을 도로 옆에 배치하며 도농 통합으로까지 나아간다는 점에서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도시 발전방식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다시 밀루틴으로 돌아가 그는 소리아의 선형도시 개념을 활용해 사회주의적인 ‘직주근접의 계획원리’를 구현하려 했다. 즉 공장과 완충녹지를 사이에 두고 배치된 주거지에 기거하는 노동자는 직장과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편하게 출퇴근을 할 수 있다는 원리다. 이 계획의 단점은 ‘자유’를 제한한다는 것이다. 선형도시가 계속 확산되면서도 직주근접이 되고자 한다면 물적 계획뿐 아닌 직장과 주거의 계획적 배치와 같은 완고한 사회계획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기에 자본주의적 자유 개념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굳이 선형도시를 언급한 이유는 이제 미국식 도시구조는 낡고 비효율적이니 대안으로 선형도시를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을 달리 하면 다른 대안이 고려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다. 애초 우리는 도심을 둘러싸고 원형으로 확산하는 도시, 그 도시들을 잇는 고속도로를 당연시하고 있지만 그러한 모습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십 년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 당시에는 많은 이들이 좀 더 다양한 꿈을 꾸었다.

물론 폴 크루그먼의 주장대로 당장은 생산성 향상 및 생활의 편의를 위해 교통시설 등 기반시설을 짓고 잘 관리해야 한다. 하지만 이제 당연시되는 그러한 시설들의 수요발생 원인과 문제점을 따지고 들어가 그 구조적인 개선을 관찰해야할 시기가 도래했다는 생각도 든다. 사실 우리가 기본 상수로 여기고 있는 도로와 자동차와 같은 스톡들도 그것의 적정선이 어느 정도인지 객관적으로 검증된 근거는 없다. 크루그먼도 모를 것이다.

물론 현재와 같은 자본주의의 비정상적인 작동이 도시와 그 교외의 모습을 단숨에 바꿔놓지는 않을 것이다. 물적 계획은 단기간에 실현되는 것이 아닌 살아있는 생물처럼 오랜 변형을 거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1970년대 에너지 위기가 서구 도시의 대중교통망 확충으로 이어졌듯이 어떤 식으로든 변화는 있을 것이다. 자원에 대한 새로운 관점, 부동산 시장의 질적 변화, 그리고 교통에 대한 새로운 고민 등 시대적 요구로 인해 현대도시들은 새로운 철학적 고민을 떠안게 되었다.

사족이지만 사실 개인적인 의견으로 Road To Nowhere는 폴 크루그먼이 생각했던 비관적인 의미가 아니라 ‘이상향을 향한 길’이라는 의미를 내포한 노래다.

미국의 헬스케어에 관한 몇 가지 사실

up until now, being sick in America has been a private matter; and as a result, 47 million Americans have no health insurance today. [중략] the World Health Organization (WHO) reports that thousands of Americans die each year because they are denied the most basic health care.
현재까지 미국에서 아픈 것은 개인의 문제였다. 그리고 그 결과 오늘날 4천7백만 명의 미국인이 건강 보험이 없다. [중략] 세계보건기구는 수만 명의 미국인들이 매년 가장 단순한 보건치료를 거절당하여 죽고 있다고 보고하였다.[출처]

미국 헬스케어 서비스의 척박한 질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지표다. 슈피겔이 미국, 프랑스, 스위스, 독일, 네덜란드, 이태리, 영국 등 주요국가의 보건 관련 현황을 비교한 표를 보면(표 보기) 미국의 의료시스템의 비효율성을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다. 헬스케어에 대한 비용지출 비중은 영국의 그것의 2배에 육박하며 비교국들 중 최고지만 의료인이나 병원 침대의 수는 최저다. 원인은 지극히 단순하다. 비용이 쓰여야 할 곳에 쓰이지 않고 있고 다른 곳으로 새고 있는 것이다.

한편 미국의 공적 부조의 빈곤이 서비스의 질을 떨어트리고 기업의 비용을 증가시키고 있다는 선입견이 있는데 정작 사실을 살펴보면 미국정부의 의료비 지출이 민간부문의 지출보다도 더 크다.

보건개혁 논쟁에 있어 진정 놀랍고 우울한 사실은 이미 우리 정부가 민간 보험회사(35%)보다 더 많은 의료 청구비를 지급하는(총액 중 47%) 시스템임에도 불구하고 “사회화된 의료”에 대한 끈질긴 공포감 유발이다.
One of the truly amazing and depressing things about the health reform debate is the persistence of fear-mongering over “socialized medicine” even though we already have a system in which the government pays substantially more medical bills (47% of the total) than the private insurance industry (35%).[출처]

그런 한편으로 기업 또한 의료비에 대한 부담으로 자체 경쟁력을 저하시키고 있다. 최근 파산을 선언한 GM의 파산사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원인들이 제기되고 있는데, 그 중에 회사가 부담해야 했던 막대한 유산비용(legacy costs)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 중 많은 부분이 “美 의료보험 시스템의 취약성으로 인한 기업의 의료보장비용”이다.(주1)

요컨대 미국의 의료비 지출은 막대하다 그것이 전체 GDP에 미치는 영향도 크고 – 그로 인해 경제가 좋아지는 것 같은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키면서 – 해마다 그 비중이 커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또한 일반인들의 편견과 달리 정부부문의 지출이 사적부문의 지출보다 많다. 그런데 그 질적 수준은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를 ‘시장의 효율’이라 부른다면 그것은 시장에 대한 모욕이 아닐까?

(주1)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경제위기에 따른 해고자의 증가는 또한 의료취약계층의 증가로 이어진다.

Health Care

요즘 ‘매사귀차니즘’ 시즌에 접어들어 시사를 따라잡고 있지는 않지만 대강 살펴보기에도 큰 집 미국에서의 가장 뜨거운 이슈는 헬스케어의 개혁이다. 시사만화는 헬스케어 개혁의 부진함을 질타하고 있고 오바마는 트위터에서 헬스케어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트위터 이용자들이 의회를 압박해줄 것을 주문하고 있다.

주된 논점은 헬스케어를 여태 그래왔듯이 시장(市場)에서 공급하게끔 하여야 하는지 아니면 공공에서 공급하게끔 하여야 하는지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 같다. 다만 그 폭에 있어서는 좌우 양쪽에서 치열한 공방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폴 크루그먼은 블로그에서 왜 헬스케어가 비시장적인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헬스케어는 두 가지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 하나는 당신이 언제 치료를 필요로 할지 치료가 필요한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그런 상태라면 그 치료는 매우 비쌀 수 있다. [중략] 소비자선택은 헬스케어에 있어서만큼은 난센스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보험회사를 믿을 수도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건강, 또는 당신의 건강을 위해 비즈니스를 영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중략] 헬스케어에 관해 두 번째 특징은 그것이 복잡해서 당신의 경험이나 또는 비교 구매에 의존할 수 없다는 점이다.[중략] 그러나 자유시장의 법칙에 근거해서 성공한 헬스케어의 사례는 없다. 단 한 가지 단순한 이유인데 헬스케어에서 자유시장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There are two strongly distinctive aspects of health care. One is that you don’t know when or whether you’ll need care – but if you do, the care can be extremely expensive. [중략] Consumer choice is nonsense when it comes to health care. And you can’t just trust insurance companies either. they’re not in business for their health, or yours. [중략] The second thing about health care is that it’s complicated, and you can’t rely on experience or comparison shopping. [중략]  There are, however, no examples of successful health care based on the principles of the free market, for one simple reason: in health care, the free market just doesn’t work. [출처]

그는 요컨대 헬스케어라는 서비스는 (1) 소비자 스스로가 소비의 시기와 소비 여부를 선택할 수 없다는 특수성과 (2) 서비스의 형태가 복잡해서 – 즉 어떤 의미에서는 표준화가 어려워서 – 과거의 경험치나 비교견적이 어렵다는 점을 들고 있다. 우리가 이른바 공공재의 특성이라 이해하고 있는 비경합성이나 비배재성과는 다른 뉘앙스의 특성분석이다. 논리는 수긍이 가지만 일부 이견도 있다.

그런데 내 짧은 지식으로는 여전히 대부분 시장을 통해 공급되고 있는 허다한 보험은 어느 정도는 위와 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다. 건강의 이상과 같은 불확실성 또는 잠재위험은 개인의 여타 삶이나 – 예를 들어 화재로 인한 재산 파괴 – 비즈니스의 분야에서도 언제든 일어날 수 있기에 그것들을 제거(hedge)하기위해 이해당사자들은 보험에 든다. 또한 유사한 성격으로 외환이나 금리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각종 파생상품이 오늘날에도 시장에서 공급되고 있다.

폴 크루그먼의 입장을 확대해석하면 이러한 것들의 서비스는 시장에서 공급되어서는 위험하다는 논리로 확장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현재 금융위기는 수요이든 공급이든 간에 통제되지 않은 그러한 각종 보험 성격의 상품들이 기초자산을 – 헬스케어로 치면 보험수혜자? -훨씬 초과하는 시장규모를 가지게 된 바람에 악화된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럼 이제 크루그먼은 그것들도 사회화(또는 비시장화)시켜야 한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전에 어느 블로그에서 미국 금융권의 악성자산을 정부에서 인수해주는 것이 욕먹을 일이 아니라는 논리를 간단한 셈법으로 풀어내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즉 기업의 이자비용이 정부의 이자비용보다 비싸서 할인율이 높으므로 악성자산을 정부에 이전시키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이었다. 그 논리에 찬성하면서 그렇다면 왜 악성자산은 정부에 넘기는 것이 타당하지만 비즈니스는 여전히 사기업 혹은 시장의 영역이라 하는지 의아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정부가 유지비용은 싸지만 기대수익은 시장보다 적다는 논리를 전개할 수도 있다. 즉 정부는 공적영역의 특징으로 간주되고 있는 – 이 또한 편견일 수도 있지만 – 경직성으로 말미암아 수익성의 극대화가 가능한 유연성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유연성 발휘가 핵심 포인트가 아닌 헬스케어는 정부가 떠안아도 되지만 그밖에 유연성이 요구되는 보험시장이나 파생상품시장은 여전히 시장의 영역으로 남겨놓아야 한다는 논리도 가능하다.

왠지 혼자 북치고 장고치는 느낌이지만 요는 이렇다. 건강은 인간의 생로병사의 핵심적인 부분으로 대체소비나 소비감소 등의 시장변동성이 거의 없는 상품이다. 소비자는 그 서비스로부터 역으로 선택당하는 입장이고 그 형태도 매우 복잡하여 시장으로부터 그것을 공급받았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고 유지비용이 싼 정부가 공급한다(또는 최소한 비시장화시킨다). 다른 불확실성이나 잠재위험도 그에 상응하긴 하나 그 정도가 덜하고 시장변동성도 있는지라 시장에서 공급하여도 무방하다(또는 더 효율적이다). 이 정도가 나름대로 구성해본 헬스케어 사회화 논리의 보론이랄 수 있다.(주1)

헬스케어는 전체 인류역사에 비추어 볼 때 공적 부조가 국가의 예산 범위 내에서 공급가능하다는 것이 실증된 이후부터 발달한 극히 최근에 시작된 서비스다. 그 기간 동안 대부분 국가는 그 서비스를 일차적으로 시장 바깥의 부문에서 공급하였지만 미국은 그것을 철저히 시장화 시켰고 그로 인해 그 짧은 기간 동안 서민들이 많은 고통을 겪어 왔다. 갈 길은 그리 만만해 보이지 않는다. 헬스케어 시장을 둘러싼 엄청난 이권과 사회화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알러지 반응이 그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부디 이번에 올바르게 헬스케어를 개혁하여 손가락이 두 개 잘린 사람이 보장범위가 한정적이어서 어느 한 손가락만을 봉합할지 선택하여야 하는 나라가 안 되길 기원해본다.

(주1) 파생상품 등을 그럼 마냥 시장에 내버려두자는 이야기냐 하면 그것은 아니라는 것쯤은 이 블로그에 몇 번 오신 분들이라면 익히 아실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생략

성장과 분배에 관한 단상 2

리에라님께서 본문보다 더 좋은 댓글을 남겨주셔서 공유차원에서 갱신하여 재발행합니다. 원글은 2008년 6월 23일 쓴 글입니다.

A futures contract assures importers that they can sell the oil at a profit. That’s the theory, anyway. But we all know that some people on Wall Street are not above gaming the system. When you have enough speculators betting on the rising price of oil, that itself can cause oil prices to keep on rising. And while a few reckless speculators are counting their paper profits, most Americans are coming up on the short end ? using more and more of their hard-earned paychecks to buy gas for the truck, tractor, or family car. Investigation is underway to root out this kind of reckless wagering, unrelated to any kind of productive commerce, because it can distort the market, drive prices beyond rational limits, and put the investments and pensions of millions of Americans at risk. Where we find such abuses, they need to be swiftly punished.

선물거래 계약은 수입업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이익을 남기고 석유를 팔 수 있다는 것을 보증해준다. 어쨌든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월스트리트의 몇몇 사람들이 시스템을 남용할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 하는 것을 알고 있다. 유가상승에 베팅한 투기자들이 많을 때에는 그것 자체가 유가 상승을 지속시키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몇몇 무모한 투기자들이 그들의 서류상의 이익을 계산하고 있는 동안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그들이 어렵게 번 돈을 그들의 트럭, 트랙터, 또는 가족의 자가용에 넣을 기름을 사는데 더 많이 쓰면서 손해를 보고 있다. 이렇게 가격을 정상적인 범위 이상으로 올리고 수백만 미국인의 연금과 투자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등 시장을 왜곡시킬 수 있기 때문에, 어떠한 생산적인 상거래와도 관련이 없는 무모한 노름을 뿌리 뽑기 위해 수사가 진행 중이다. 우리가 그러한 폐해들을 발견하여 그들을 신속히 처벌할 필요가 있다.

이 연설은 누구의 연설일까?

1) 바락 오바마 2) 존 맥케인 3) 마이클 무어 4) 랄프 네이더

정답은 2번 존 맥케인이다. 폴 크루그먼 조차도 맥케인의 이러한 발언에 놀란 눈치다. 시장에 대한 절대적 신봉자여야 할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가 이러한 발언을 한 사실이 놀랍다는 눈치다.(주2) 그는 공화당이 이러한 자세를 취하는 이유로 “자본주의 마술(the magic of capitalism)”에도 불구하고 원유를 찾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지자 선물시장의 광기를 유가상승의 주범으로 몰아세우고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뭐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석유메이저들이 월스트리트의 투기자들 때문에 자신들의 몫이 줄어들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몰아세우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어찌되었든 저 연설 속에서 재밌는 문장 하나를 발견하였다.

“어떠한 생산적인 상거래와도 관련이 없는(unrelated to any kind of productive commerce)”

선물시장에서의 거래행위, 넓게 보아 금융자본의 활동이 “생산적”이지 않다는 논리는 가장 공격적으로 주장한 칼 마르크스를 비롯하여 노동가치론자들의 생각이었다. 적어도 주류 경제학자들의 생각은 아니다. 그들은 생산의 3요소를 ‘토지, 노동, 자본’로 생각해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비록 선물시장에서의 금융활동을 투기적 행위로 특정하기는 했지만 엄연히 금융자본의 한 종류의 활동을 “생산”과 관계없는 행위로 규정하다니 저 연설문을 혹시 노동가치론자가 작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신선(?)하다.

여하튼 금융자본의 활동이 “생산적”이지 않다는 맥케인의 주장(!)에 동의할 것 같으면 우리는 노무현 정부 시절부터 주장되어 오던 ‘금융허브론’이 꽤나 허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미국이나 영국, 그리고 유럽의 몇몇 강소국들은 금융지배를 통하여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였다. 보다 정확하게 그것은 이윤을 ‘창출(produce)’하였다기보다는 생산자본의 활동으로부터 얻어진 전지구적인 이윤을 ‘전유(appropriate)’하였다. 일국 내에서의 산업자본이 더 이상의 경쟁우위를 상실하였을 때에 그리고 자국 내의 금융 시스템이 경쟁우위를 확보하였을 때에 쓸 수 있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미국은 NAFTA등을 통하여 생산기지를 해외로 이전시켜 자국내 산업자본의 비용을 절감시켜주고 그 생산된 가치들을 금융자본을 통하여 국내로 다시 이전시켜 왔다. 이것이 전 지구적 성장에 대한 국가간의 분배의 형태다. 그것이 한 나라에서는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표현된다. 우리나라의 금융허브론으로 돌아가면 우리나라도 미국처럼 산업자본 포기하고(주1) 금융허브 키우자는 이야기인데 우리나라의 국제화 정도나 경제규모로는 참 난감한 소리다.

지난번 NekoNeko 님이 달아주신 코멘트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그런데 이것을 예를들어 4천만 국민 모두에게 1/n씩 나누어 준다고 하면 일인당 약 7만 5천원 정도씩을 분배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규모의 경제나 기회비용의 측면을 생각해 봤을때 정몽준에게 3조 재산이 가 있는 것이 더 큰 파이를 생산하는데 나을지 국민 모두에 7만5천원씩 나누어 주는 것이 소득 증대 효과 측면에서 더 나을지 고려해 볼때 아무래도 전 전자쪽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전 지구적으로 정몽준이라는 산업자본가에게 3조의 재산을 몰아주어 그것이 자본화(資本化)되어 6조라는 실물을 생산하였으면(주3) 4천만 국민에게 1/n 씩 나눠주어 홀랑 까먹는 것보다 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나눠줄 수 있는 돈들이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주4) 그런데 이러한 도식에는 몇몇 함정이 있다.

정몽준이라는 산업자본가가 아닌 박현주라는 금융자본가에게 3조원을 몰아주면 어떠할 것인가? 그것은 생산적 활동에 투입되지 않고 맥케인도 인정하는 비생산적 활동에 투입하게 될 수도 있다. 그 금융자본이 또 다시 산업자본의 생산비용으로 투입되는 것이 아닌(주5) 맥케인이 혐오하는 석유 선물시장에 투입되었다고 생각해보라. 유가를 급등시켜 박현주는 3조원을 벌지는 모르겠으나 그 돈은 맥케인이 표를 구걸해야할 ‘대부분의 미국인’의 주머니를 터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날과 같이 세계화된 세상에서는 미국인 돈만 터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화물연대 노동자들의 돈도 털고 전기요금과 같은 공공요금의 인상요인이니 내 돈도 턴다.

이와는 별도로 4천만 국민에게 1/n 씩 나눠주는 것은 쓸데없는 짓인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즉 그것은 전혀 생산적이지 못한가? 그들의 가처분소득 증가가 상품에 대한 수요를 창출하여 국내 산업기반을 다져갈 것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나라당과 청와대의 유류환급금도 이러한 원리를 알고 만들어진 정책이다. 그렇게 선순환적으로 흘러가면 산업자본을 자극하여 경제가 활성화될 수 있다. 케인즈적인 냄새도 풍긴다. 그런데 NekoNeko 님이 1/n 씩 주지말고 정몽준에게 몰아줘야 더 큰 파이를 생산시킨다는 아이디어는 사실 ‘내수형 산업기반’보다는 과거 ‘수출주도형의 산업기반’을 염두에 둔 것이다. 과거에는 유효했지만 산업구조가 바뀌고 주주자본주의가 강화된 오늘날까지 유효할지는 의심스러운 구석도 있다.

요컨대 성장과 분배의 문제에 있어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진리에 근접한 것일 수 있다. 성장은 전 세계의 인간이 삽질을 해서 자연자원을 착취(labor)하는 만큼 증가한다. 화폐는 이를 통해 생산된 상품의 표현양식이다. 산업자본은 상품을 노동자이자 소비자인 인민에게 팔아 이윤을 남기고 금융자본은 산업자본의 전후방에서 이를 전유한다. 인민 역시 산업자본의 전후방에서 제 몫을 가져오고(주6) 그것을 소비한다. 필요소비에 모자랄 경우 금융자본은 노동자에게 뒷돈을 대주어 또 한 번 이윤을 전유한다.(주7) 한 국가의 성장은 전 지구적 차원의 이러한 활동에서의 일국에 대한 분배의 형태일 뿐이다.

(주1) 포기까지는 아닐지라도 산업고도화(?) 정책에 의하여 경쟁우위 품목만 남기고 나머지는 산업기지 이전 등을 통해 정리하고

(주2) 사실은 비아냥거림이지만

(주3) 전 세계적으로 3조의 부가가치를 창출하였고 그것을 한국으로 온전히 가져왔다는 모양새

(주4) 물론 지독한 성장론자들은 이 돈 마저 다시 정몽준에게 몰아주자고 주장할 것이다. 좋은 시절 되면 그때 가서 나눠주겠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 때가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주5) 즉 예를 들면 생산기지 이전에 따른 비용에 대한 시설자금대출 등

(주6) 이를 충분히 못 가져온다는 것이 마르크스 노동착취론의 주장일 것이다

(주7) 금융자본은 비생산적 활동을 한다고 여기저기서 욕을 먹어도 어찌 되었든 경제의 핏줄의 역할을 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