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세당한 노동자는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Soul is the rhythm of sex. and it’s the rhythm of the factory too. The working man’s rhythm. Sex and the factory.”

더블린을 공간적 배경으로 하는 음악영화 The Commitments의 대사다. 공장노동자들을 주축으로 결성된 밴드에게 매니저 Jimmy가 소울 음악의 의미를 설명하는 장면인데, 노동, 섹스, 그리고 음악을 서로 연결시켜 이것들이 리듬이라는 공통요소로 묶인다는 논리가 인상적이다. 규칙적인 기계음을 반복하면서 노동이 이루어지는 공장이라면 이러한 주장이 그리 어색하지 않게 느껴진다.

이러한 시각을 확장해보자면 노동의 박탈은 하나의 거세라고도 할 수 있다. 노동하지 않는 노동자는 기계로부터 떨어져 나간 부속처럼 그 존재의의 자체를 부정 당하는 것이기에, 거세당한 생물과도 같아진다. 아니, 거대한 기계로부터 거세된 생물의 생식기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직장을 잃은 남성 노동자는 일상의 삶에서도 남성적 힘을 잃은 性불능자로 낙인찍혀 버릴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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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ll monty” by May be found at the following website: eBay. Licensed under Fair use of copyrighted material in the context of The Full Monty“>Fair use via Wikipedia.

이러한 가정이 바로 영화 The Full Monty의 전제조건이다. 입지우위를 상실하고 쇠락해버린 철강공업도시 셰필드에서 노동자들에게 미래는 없다. 그래서 해고노동자 가즈와 데이브는 가즈의 어린 아들을 데리고 공장에서 좀도둑질이나 시도하는 등 부질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가즈는 아내에게 이혼을 당했고, 데이브는 아내와 정상적인 성생활을 풀어나가지 못하고 있다. 남성성의 상실.

탈출구 없는 그들의 삶에서 기회는 엉뚱한 곳에서 시작된다. 여성전용 남성 스트립쇼가 인기를 얻는 것을 본 가즈가 친구들에게 스트립쇼로 돈을 벌 것을 제안한 것이다. 이런 엉뚱한 계획이 세워진 데에는 스트립쇼를 본 여성들이 자신들의 배우자를 멸시하는 광경을 지켜본 가즈의 울컥함도 한몫했다. 즉, 자본으로부터 거세당한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남성성의 과시에서 찾으려 한 것이다.

당연하게도 영화는 우여곡절 끝에 그들이 성공리에 스트립쇼를 마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일상을 박탈당한 이가 삶의 끈을 부여잡을 수 있는 다른 무언가로 – 예술, 스포츠, 이 영화에서는 스트립쇼 –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는 설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비슷한 설정으로 Brassed Off, Billy Eliot, 그리고 서두에 언급한 The Commitments가 떠오른다. 감동의 무게도 비슷하게 둔중하다.

코미디라는 장르가 당의정의 역할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야기의 전제조건이나 전개과정이 실제 삶에서 벌어진다면 이건 굉장히 심각한 상황이다. 해고당한 일군의 노동자가 알랭드보통이 이야기한 “지위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의 일환이, 기껏 스트립쇼라는 사회적으로 백안시되는 노동행위였다는 사실은 희극적이라기보다 오히려 비극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많은 사람들이 운집한 쇼무대에서 주인공의 아내들이 남편들의 모습에 흥분하는 상황을 통해 지위에 대한 불안의 해소(흥행성공을 인한 물질적 보상)와 남성성의 회복이라는 극대화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물론 제작진도 당연히 알고 있겠지만 이런 상황은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거세된 노동자로서의 남성성은 회복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반쪽의 성공이었을 뿐이다.

21세기 자본주의. 이러한 거세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가즈와 데이브처럼 스트립쇼를 통해 뽕도 따고 임도 보는 운 좋은 노동자는 그리 많지 않다. 지금도 노동자 김진숙은 한진중공업의 대량해고에 맞서 크레인에서 고공농성 중이고, 자동차의 도시 디트로이트에서는 수많은 해고노동자가 식량보조카드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의 거세된 자존심은 무엇으로 극복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질문이다.

3 thoughts on “거세당한 노동자는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1. Rio

    조금 다른 접근을 해봅니다.

    ‘…노동하지 않는 노동자는 기계로부터 떨어져 나간 부속처럼 그 존재의의 자체를 부정 당하는 것이기에, … ‘

    떨어져 나가지 않은 부속품도 슬프지 않을까요. 직장을 가진 노동자의 삶이 비록 가정에서는 어느정도 남성 혹은 가장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는 있겠죠. 하지만 직장을 언제라도 잃을 수 있다는 불안, 직장 내에서 인격체로서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처사 등, 떨어져 나간 부속품도 붙어있는 부속품도 어디까지나 부속품일 뿐 인간을 소외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는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속에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둘의 차이가 있다면 급한 어려움과 조금 덜 급한 어려움이라는 차이 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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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시퍼렁어

    노동자는 일종의 상징인 셈이죠. 학자가 더이상 연구를 못하게 되는것도 거세고, 소설가가 더이상 글을 쓰지 못하게 되는것도 거세며, 날품팔이 하던 소년이 더이상 일을 못하게 되는것도 거세고, 이명박이 더이상 대통령을 못하는 것도 거세입니다.(엉?) 무게의 차이는 그다지 없다고 봐요 왜냐하면 한 인간이 서너가지의 자신의 ‘생식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니까 거세가 되면 당연히 동일한 상실감을 가지게 될겁니다. (나야 무성생식이니까. 어이) 천부인권이니 세계인권헌장이니 뭐니를 떠나 동물로서의 생존권리를 상실하게 되는게 자신의 능력을 떠나 제도적으로 강요된다는 점과 또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사회적 제제를 받게 된다는 점에서 … (이렇게 꼰대가 되어간다.) 거세되면 개체적 종말을 맞아야 합니다. 동물은 아직 지구를 컨트롤 할수 없어요 끄덕끄덕… 그게 조금 이르던 조금 느리던… 잔인한가요? 쩝 말은 안해도 다들 인정하니까 이렇게 사는거 아닌가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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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Pingback: seoulrain's me2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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