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책

슬슬 한해를 마무리할 시간이 왔다. 오늘 ‘올해의 뫄뫄’ 시리즈를 써볼까 하고 에버노트를 뒤적거리다보니 올해는 개인적으로 나름 참 많은 일이 있었던 해다. 또한 사회적으로도 참 많은 일이 벌어졌던 – 그리고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 해이기도 하다. 많은 사건이 비극이었지만, 그 와중에 그러한 비극을 계기로 화해와 상처 회복의 단초가 마련되기도 했다. 그러한 양면성이 인생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누구도 언제나 행복할 수 없고 누구도 언제나 불행하지만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책을 읽는 순간만은 행복하거나 최소한 불행을 잠시 잊는 순간이 아니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紅樓夢

올해는 조설근의 소설 홍루몽을(내가 읽은 것은 나남에서 발간한 총 여섯 권짜리) 다 읽은 해다. 작가의 반자전적 소설이라는 설이 유력한 이 걸작은 주된 줄거리는 한 귀족 집안의 자녀인 가보옥과 임대옥과의 사랑 이야기이지만, 그 안에는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진지한 질문이 담겨져 있다. 또한 작가 스스로가 겪었을 귀족의 풍습에 대한 치밀한 묘사를 통해 우리는 봉건사회의 계급구조를 들여다볼 수도 있다. 이 소설을 “페미니스트 소설”이라 이름붙이는 것은 과잉해석이겠지만, 대부분 여성이 주인공이고 그들의 주체성이 살아있다는 점에서 웬만한 현대소설보다 페미니즘 적이라는 것도 매력요소다.

The Catcher In The Rye

여태 한 대여섯 번은 읽은 것 같은데 올해는 특히 홀덴이 방황하는 주요무대인 뉴욕을 다녀와서 읽었다는 점에서 더 맛깔스러운 독서가 됐다는 점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해 보았다. 즉, 홀덴이 기차를 타고 뉴욕의 펜스테이션에 도착해서 센트랄파크 및 웨스트사이드 등으로 헤매는 동선이 내가 뉴욕에서 헤맸던 동선이기에, 영화화도 되지 않은 이 작품에 비주얼을 가미해주어 더 실감나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다. 한편 트위터에서 화제가 되었던 “원문에서의 head가 ‘머리’냐 ‘귀두’냐”란 논란도 다시 곱씹어 볼 수 있었던 계기가 됐다. 귀두로 해석한 번역가는 음란마귀가 씐 것 같다.

스트레스테스트 / 정면돌파 / 대마불사

2008년 금융위기를 다룬 책은 여러 권이 있겠지만, 올해에는 이 세권의 책으로 어느 정도 당시의 정황을 되짚어 볼 수 있었다. 앞의 두 권은 금융위기 속의 출연진인 – 그리고 서로 앙숙인 – 티모시 가이트너와 쉴라 베어가 쓴 회고록이다. 그렇기에 둘의 주장이 엇갈리는 장면에서 서로의 주장을 비교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대마불사는 뉴욕타임스의 컬럼니스트이기도 한 작가 앤드류 로스 소킨(Andrew Ross Sorkin)이 쓴 책이다. 작가의 시점에서 각 주요국면의 정황을 치밀하게 조명했다는 점에서 앞서의 두 권이 비어있는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좋은 참고서다. 암튼 대단한 사건이었다.

콜레스테롤 수치에 속지마라

특이하게 건강에 관한 책을 골라봤다. 조니 바우덴(Jonny Bowden)과 스테판 시나트라(Stephen Sinatra)의 공저다. 개인적으로 LDL수치와 총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아서 빌려본 책인데 의외의 내공을 느끼고 숙독했던 기억이 난다. 요점은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을수록 심장질환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가설”은 현대의학의 신화이자 상술일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해박한 지식을 통해 콜레스테롤, 인슐린 등 우리 귀에 익숙하지만 정작 그 의미를 잘 모르는 것들에 대해 상세하게 알려준다. 작가의 주장은 굉장히 논란이 많은 주제이기 때문에 독자로서 이를 유의하며 다른 주장과 비교하여 읽어야 할 것이다.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읽다

빵과 자본론이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주제가 한데 만난 책이다. 질풍노도의 삶을 살던 저자는 어느 날 빵을 배워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는데 학자이신 아버지가 문득 자본론을 읽어보라고 해서 그 책을 읽으며 제빵업자로서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다는 개인적 경험을 적은 것인데 엉뚱해 보이면서도 읽다보면 고개를 끄덕거리게 된다. 결국 저자는 자신의 경제주체로서의 역할을 자본론에서 이상적인 경제단위로 설정한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한편 맑스가 자본론에서 엉터리로 만들어진 빵이 얼마나 나쁜지 설명하는 부분도 있으니 의외로 빵과 자본론은 어울리는 주제다.

(장수의 악몽) 노후파산

NHK 스페셜 제작팀이 실제로 노후파산의 위기에 있거나 이미 파산한 노인들을 심층 취재하여 만든 책이다. 올해 일본에 갔을 때 유난히 노인층이 많이 눈에 띄어서 일본사회의 노령화를 실감하였던 바,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러한 노인층이 세계 최고의 선진국인 일본에서조차 어떻게 삶의 파행을 겪게 되는 지를 실감하게 됐다는 점에서 충격적이었다. 이러한 비극적인 삶은 단순히 문학 속의 소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 시스템이 해결해야 할 절체절명의 과제다. 올해는 특히 전 세계적으로 기본소득 등 그러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졌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한편 이 책을 읽고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보면 충격이 배가 된다.

문 앞의 야만인

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뭔지 아리송하게 만드는 제목의 이 책은 M&A에 관한 고전이다. RJR내비스코라는 미국의 거대기업의 합병과 LBO를 둘러싸고 월스트리트의 쟁쟁한 플레이어들이 어떻게 합종연횡을 하며 사투를 벌이는 지가 번역본 900페이지가 넘는 회고록을 통해 소상히 담겨져 있다. 그래서 해당 분야의 종사자들에게나 문외한에게나 좋은 참고서가 될 수 있다. 아직 3분 2 정도 밖에 진도를 나가지 못했지만, 굳이 ‘올해의 책’으로 선정한 이유가 이것이다. 특히 투자은행 업계에 종사하고 있다면 어떻게 딜소싱이 이루어지는지, 주선은행이란 어떤 의미인지, 협상이란 무엇인지 등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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