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중도 실용주의’ 노선?

박 대통령이 3개월마다 정기적으로 주재하는 회의 중의 하나가 내각 기획조정실의 국가기본운영회계에 대한 분기별 심사분석회의이다. 내각 기획조정실은 국무총리 직속기관으로 행정부 또는 국무총리 소속 여러 기관의 장기, 중기, 단기 기획의 조정 및 예산편성의 기준인 행정부기본운영계획의 목표와 방침을 결정하고 조정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중략]
3개월마다 하는 심사분석 보고에는 국영기업체도 심사분석 대상에 포함되었으며 배석하고 있는 평가교수들의 평가비평도 받았다. 한국 경제는 민간 사기업체제이지만 민간자본이 약하여 1960~1970년대를 통해 볼 때, 의회민주주의이면서도 사회주의적 경제체제를 가지고 있던 인도만큼 산업자산 중 공공기업체가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중략]
경제학에서나 경영학에서 비능률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공기업, 즉 국영기업이 우리나라의 경우 ‘정부 주요사업의 분기별 심사분석’의 엄격한 심사분석 덕분으로 능률을 올릴 수밖에 없었고, 다른 나라의 경우에 비해서도 비교적 효율적으로 운영되었다.[아 박정희, 김정렴 지음, 중앙M&B, 1997년, p102]

반공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박정희 정권이 실상은 소위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지향하던 현실 사회주의까지는 아니더라도 국가주도의 자원동원 체제에 경도해있었음을 알려주는 증언이다. 저자 김정렴은 박 정권 시절 재무부 장관과 비서실장을 역임한 인물이니 서술내용이나 당시 상황에 대한 그의 분석의 신뢰도는 매우 높다.

인용문을 간단히 요약해보면 박 정권은 ‘약한 민간자본 ->  국영기업 설립 -> 엄격한 심사분석 -> 효율성 증대’라는 실질적으로 사회주의 계획경제나 다름없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현실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이, 특히 트로츠키 진영의 경우 과거 사회주의 블록을 “국가자본주의 체제”나 다름없다고 비아냥거렸는데 박 정권에게도 해당되는 소리다.

실제로 그는 대한민국이라는 주식회사를 운영하는 CEO나 다름없다. 인용한 행태는 일반 사기업에서와 똑같은 모습이다. 주류 경제학자들은 시장을 저해하는 계획경제를 혐오하지만 사실은 사기업 단위에서는 완연한 ‘계획경제’ 체제다. 그리고 박정희는 그러한 계획경제를 사기업이 약한 시절 스스로 계획경제를 주도하는 CEO역할을 한 것이다.

한편 이러한 유사 사회주의적 성향을 보였던 – 그것도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면서 –  나라가 우리나라 뿐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전후 신생 자본주의 국가는 앞서 인용문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민간자본이 약했기 때문에 – 즉 본원적 축적이 없었기에 – 상당수 국가 동원 체제를 통하여 산업을 육성하는 전략을 구사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러한 행태가 그 행동주체들이 ‘현실 사회주의’나 ‘계획경제’ 체제를 궁극적 지향점으로 상정하고 취한 행동은 아니다. 장하준 교수의 말마따나 자본주의 체제의 “공기업은 자본주의의 폐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발전의 시동을 걸기 위해 사용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요즘 누가 유행시키려 하는 ‘중도 실용주의’ 노선 쯤 되겠다.

여하튼 신자유주의 시대에 접어들며 이른바 ‘민간의 창의와 효율’을 도모한다는 취지하에 수많은 공기업이 민영화되었다. 공기업은 비효율과 낭비의 온상으로 낙인찍혔다. 그러나 그런 마타도어도 금융위기를 맞아 별로 호소력 있게 들리지는 않는다. 완전한 사기업 AIG나 RBS가 상상을 초월한 ‘낭비’를 일삼다가 국유화된 세상이 왔으니까.

4 thoughts on “박정희의 ‘중도 실용주의’ 노선?

  1. 자작나무

    FOOG님. 오랜만에 댓글 남깁니다. 일전에 장하준 교수 책에서 외환위기 원인으로 흔히 지목하는 관치경제에 대해, 문제는 官治가 아니라 책임지는 官이 없어져 버린 상황이었다는 내용을 읽은 기억이 나네요. 생각의 중심을 잡는데 유용한 내용이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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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키다링

    우와 70년대 우리나라 경제는 사회주의와 아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나보네요. 사회주의하면 정말정말 이를 싫어하는 어른들이 많은데, 실상은 비슷했다니! 많이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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