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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부가 받아온 돈은 누구의 돈인가?

일본 수상으로서 아베 수상은 위안부로서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고 치유할 수 없는 육체적 및 정신적 피해를 입어 고통 받는 모든 여성들에 대한 진지한 사죄와 유감을 다시 한 번 표했다. 한편으로 일본은 위안부 이슈 등을 포함하여 일본과 남한 간의 자산이나 청구권과 관련한 이슈들은 1965년 한일청구권 및 경제협력협정에서 완전하고도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입장을 견지했다.[Announcement by Foreign Ministers of Japan and South Korea on the Issue of “Comfort Women”]

아베가 박근혜 대통령과 통화하면서 말한 내용이라고 한다. 요컨대 아베는 일본 수상으로서 “일본군이 관여한(with an involvement of the Japanese military authorities)” 성노예 제도에 대해서 “책임을 통감하(is painfully aware of responsibilities)”지만 이번에 주는 10억 엔은 기부금이지 배상금이 아니고 그런 배상은 이미 1965년에 완료했다는 주장을 또다시 반복한 것이다. 그렇다면 민간의 청구권이 이미 1965년에 완료됐다는 일본의 주장은 타당한 주장인가?

올해 88살의 이근목 할아버지. 22살이던 1943년 일본 미쯔비시 조선소에 끌려가 해방될 때까지 돌덩이를 날랐습니다. 임금을 절반 밖에 받지 못했지만 조선소도, 일본 정부도 보상해주지 않았습니다. 지난 1965년 한일협정을 맺어 강제점령에 대한 보상금을 우리 정부에 지급했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 등 강제징용 피해자 100명은 보상금으로 설립됐던 포스코, 당시 포항제철을 상대로 위자료를 지급하라며 소송을 냈습니다.[“강제징용 배상, 도의적 책임”]

하지만 할아버지는 패소했다. 법원은 “포스코 때문에 강제징용자들이 보상금을 못 받았다고 보긴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입장은 일본정부의 입장과 명백하게 배치된다. 비슷한 맥락에서 한국 법원은 2013년 7월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과 미쓰비시중공업이 35년간의 일제강점기에 끌려가 강제노동을 한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그렇다면 우리 행정부의 수장은 아베의 말에 어떻게 반응했을까? 인용한 글에선 그 반응은 적지 않았다.

드디어 1969년 12월 韓日간에 종합제철에 관한 기본협약이 체결되어 건설에 착수하게 되었다. 韓日 국교정상화 때 양국간에 합의된 청구권 및 對韓차관 공여액은 무상자금 3억 달러, 유상자금 3억 달러, 상업차관 3억 달러 이상으로서 무상 및 유상자금 각 3억 달러에 대해서는 항일독립유공자보상, 對日민간청구권보상, 평화선철폐에 따른 어민보상 등 국민적 요구가 방대했다. 朴대통령은 국민적 반발이 적지 않을 것을 각오하면서 낭비보다는 건설이라는 견지에서 종합제철건설에 상당한 액수를 투자하는 대영단을 내렸다.[김정렴, 한국경제정책30년사, 중앙일보사, pp138~139]

한편, 박정희 정부의 경제관료였던 김정렴 씨는 이근목 씨가 포스코에 위자료 지급 소송을 낸 정황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정부가 받은 돈에 대해 “국민적 요구가 방대”했음을 증언했다. 그런데 박정희 씨는 그 돈을 종합제철건설에 투자하는 “대영단”을 내렸다. 스텝이 꼬이는 구간이다. 당시 관료가 그런 뉘앙스로 증언했고 협정문에도 일본의 주장이 타당해보일 수도 있는 문구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한국법원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 현 대통령의 생각이 궁금하다.

제2조 1.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에 샌프런시스코우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 (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포항제철 건립의 자금조달에 관하여

식민지와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난 약소국 남한은 – 또는 적어도 그 당시의 위정자들은 – 하나의 꿈이 있었다. 그것은 ‘산업의 쌀’이라는 철을 생산하는 제철소를 갖는 것. 특히 철강생산 능력이 북한에 크게 뒤떨어진 남한은, 이승만 정권 이래 지속적으로 제철소 건립을 추진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드디어 제철소 건립이 가시화된 것은 1966년 이었다.

그해 미국, 독일, 영국, 이탈리아 등 4개 국가와 이들 나라의 7개 철강업체로 구성된 대한국제철차관단(KISA : 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이 정식으로 발족되었다. KISA의 합의사항은 한국에 종합제출 건설을 위해 차관단이 1억 달러, 한국이 2천5백만 달러를 출자하여 1967년 봄까지 공장을 착공하도록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 공염불이었다. KISA와 남한과의 합의각서에는 자금 조달시기, 배분율, 책임소재 등에 대한 명시가 없었다. 이 때문에 사업성이 미진하거나 자국 및 자사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을 경우 언제든지 발뺌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실제로 그러했다. 이 난국을 타개한 것은 포철사장 박태준 씨였다.

대일청구권 자금을 포철 1기 건설에 투입하자는 박태준의 절묘한 아이디어는 확인하나마나 현실성을 담보했다. 3억 달러의 무상자금만 해도 1966년부터 10년간에 걸쳐 지급하도록 되어 있으니 아직 절반은 남았을 터, 대외경제협력기금(유상자금) 2억 달러에서도 여유가 있을 터. [중략] ‘하와이 구상’을 서둘러 실현하려면 장애 하나를 넘어야 했다. 양국 정부가 농림수산업 발전을 위해 사용한다고 합의해둔 자금의 용처를 바꾸는 것. 먼저 박정희의 허락을 받아야 하고 일본 내각을 설득해야 했다.[세계최고의 철강인 박태준, 이대환, 2004년, 현암사, pp273~274]

박태준 씨가 자금조달로 어려움을 겪을 당시 머리를 식히러 찾은 하와이에서 떠올랐다는 이 아이디어 덕분에 자금조달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고, 결국 남한 경제사에 큰 획을 그은 포항제철의 건설은 본 궤도에 접어들게 된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박태준 씨가 사용한 자금이 결국 “농림수산업 발전을 위해 사용한다고 합의해둔 자금”이었다는 점이다.

“농림수산업의 발전”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당시 일본의 통산상 오히라의 말을 빌리자면 “경제원칙 상 산업화의 첫 단계는 농업자립화이므로, 남한은 비료공장, 농기계공장을 세워 농업부터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원칙이 옳건 그르건 간에 결국 당시 대한중석의 사장 지위였던 박태준 씨는 일개 기업인으로 대일청구권의 용도를 바꾼 셈이다.

드디어 1969년 12월 韓日간에 종합제철에 관한 기본협약이 체결되어 건설에 착수하게 되었다. 韓日 국교정상화 때 양국간에 합의된 청구권 및 對韓차관 공여액은 무상자금 3억 달러, 유상자금 3억 달러, 상업차관 3억 달러 이상으로서 무상 및 유상자금 각 3억 달러에 대해서는 항일독립유공자보상, 對日민간청구권보상, 평화선철폐에 따른 어민보상 등 국민적 요구가 방대했다. 朴대통령은 국민적 반발이 적지 않을 것을 각오하면서 낭비보다는 건설이라는 견지에서 종합제철건설에 상당한 액수를 투자하는 대영단을 내렸다.[김정렴, 한국경제정책30년사, 중앙일보사,  pp138~139]

당시 재무부/상공부 장관을 역임한 김정렴 씨의 진술은 또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즉, 남한이 일본과의 국교를 정상화하면서 받아낸 각종 자금은 “농수산업의 발전”뿐만 아니라 일제(日帝)시대로 인해 고통 받은 이들과 국교정상화로 피해를 입는 이들의 청구권이기도 했다. 하지만 박정희는 이런 보상을 “낭비”로 보고 종합제철 건설에 투자하는 “대영단”을 내린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은 남한경제의 주요특징의 하나로 지적되고 있는 요소투입 주도 성장모델의 한 단면이다. 일단 외자(外資)든 내자(內資)든 – 거의 외자였지만 – 동원하여 정권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업에 집중 투자함으로써 의식적으로 해당산업을 육성하는 것, 자유시장 경제원리와 별로 맞지 않는 이 방법을 박정희가 채택하였고 포철이 그 대표사례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의 작가 장하준 씨는 이러한 국가주도형 자본주의 모델에 대해 긍정적인 편이다(또는 적어도 그 존재의의를 부정하지 않는다). 나 역시 이러한 의식적인 경제정책이 가지는 함의에 공감한다. 만약 당시 경제관료들이 ‘남한은 농업국가가 적당하다’는 국제사회의 충고(?)를 받아들였으면 어떻게 되었을지는 눈에 선하다.

문제는 경제근간이 자본주의인 사회에서 그 요소투입 모델이 성공한 이후다. 이후 포철에서 만든 철로 농기계를 만들어 농업 발전에 기여한 정황은 있었겠으나 포철이 창출한 잉여로 항일독립유공자나 위안부들의 뒷바라지를 해주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것은 악덕기업이어서가 아니라 주주의 이익 – 또는 노동자의 이익 역시 – 을 반하는 짓이었기 때문이다.

일견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런 자본주의의 기업원리를 고수하려 한다면 애초에 자금용도가 제철소 건립을 위한 상업차관이 아니었던 – 어찌 보면 일제로 인해 피해 입은 국민 모두의 것인 – 배상금을 쓰지 않았어야 할 일이다. 그래야만이 포철이 투입과 산출이 자본주의 경제원리에 그대로 부합하는 기업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중도 실용주의’ 노선?

박 대통령이 3개월마다 정기적으로 주재하는 회의 중의 하나가 내각 기획조정실의 국가기본운영회계에 대한 분기별 심사분석회의이다. 내각 기획조정실은 국무총리 직속기관으로 행정부 또는 국무총리 소속 여러 기관의 장기, 중기, 단기 기획의 조정 및 예산편성의 기준인 행정부기본운영계획의 목표와 방침을 결정하고 조정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중략]
3개월마다 하는 심사분석 보고에는 국영기업체도 심사분석 대상에 포함되었으며 배석하고 있는 평가교수들의 평가비평도 받았다. 한국 경제는 민간 사기업체제이지만 민간자본이 약하여 1960~1970년대를 통해 볼 때, 의회민주주의이면서도 사회주의적 경제체제를 가지고 있던 인도만큼 산업자산 중 공공기업체가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중략]
경제학에서나 경영학에서 비능률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공기업, 즉 국영기업이 우리나라의 경우 ‘정부 주요사업의 분기별 심사분석’의 엄격한 심사분석 덕분으로 능률을 올릴 수밖에 없었고, 다른 나라의 경우에 비해서도 비교적 효율적으로 운영되었다.[아 박정희, 김정렴 지음, 중앙M&B, 1997년, p102]

반공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박정희 정권이 실상은 소위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지향하던 현실 사회주의까지는 아니더라도 국가주도의 자원동원 체제에 경도해있었음을 알려주는 증언이다. 저자 김정렴은 박 정권 시절 재무부 장관과 비서실장을 역임한 인물이니 서술내용이나 당시 상황에 대한 그의 분석의 신뢰도는 매우 높다.

인용문을 간단히 요약해보면 박 정권은 ‘약한 민간자본 ->  국영기업 설립 -> 엄격한 심사분석 -> 효율성 증대’라는 실질적으로 사회주의 계획경제나 다름없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현실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이, 특히 트로츠키 진영의 경우 과거 사회주의 블록을 “국가자본주의 체제”나 다름없다고 비아냥거렸는데 박 정권에게도 해당되는 소리다.

실제로 그는 대한민국이라는 주식회사를 운영하는 CEO나 다름없다. 인용한 행태는 일반 사기업에서와 똑같은 모습이다. 주류 경제학자들은 시장을 저해하는 계획경제를 혐오하지만 사실은 사기업 단위에서는 완연한 ‘계획경제’ 체제다. 그리고 박정희는 그러한 계획경제를 사기업이 약한 시절 스스로 계획경제를 주도하는 CEO역할을 한 것이다.

한편 이러한 유사 사회주의적 성향을 보였던 – 그것도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면서 –  나라가 우리나라 뿐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전후 신생 자본주의 국가는 앞서 인용문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민간자본이 약했기 때문에 – 즉 본원적 축적이 없었기에 – 상당수 국가 동원 체제를 통하여 산업을 육성하는 전략을 구사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러한 행태가 그 행동주체들이 ‘현실 사회주의’나 ‘계획경제’ 체제를 궁극적 지향점으로 상정하고 취한 행동은 아니다. 장하준 교수의 말마따나 자본주의 체제의 “공기업은 자본주의의 폐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발전의 시동을 걸기 위해 사용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요즘 누가 유행시키려 하는 ‘중도 실용주의’ 노선 쯤 되겠다.

여하튼 신자유주의 시대에 접어들며 이른바 ‘민간의 창의와 효율’을 도모한다는 취지하에 수많은 공기업이 민영화되었다. 공기업은 비효율과 낭비의 온상으로 낙인찍혔다. 그러나 그런 마타도어도 금융위기를 맞아 별로 호소력 있게 들리지는 않는다. 완전한 사기업 AIG나 RBS가 상상을 초월한 ‘낭비’를 일삼다가 국유화된 세상이 왔으니까.

8.3 사채동결 조치 略史

  1. 1965년 9월 정부는 인플레 방지 수단으로 대출금리(어음은행할인율)를 연 16%에서 연 24%로 인상(주1)
  2. 1971년 수출촉진을 위해 환율을 18% 절하하여 차관기업체들 원리금상환부담 가중
  3. 1971년 8월 15일 닉슨 미대통령, 달러방위를 주요 골자로 하는 긴급경제조치 발표
  4. 1970년대 초반 명동과 소공동을 중심으로 1백개의 대규모 사채중개소 존재
  5. 1971년 6월 전경련 김용완 회장, 박정희 대통령에게 사채 탕감책, 감세 등의 조치 건의
  6. 1971년 7월 정부는 차관기업체 부실을 막기 위해 1백억원의 특별지원자금 배정 결정(주2)
  7. 1971년 7월 전경련 김용완 회장 미흡한 조치라며 보다 강력한 조치 요구
  8. 1971년 7월 박정희 대통령, 김정렴 비서실장에게 사채대책 마련 지시
  9. 1971년 9월 박정희 대통령, 경제과학심의회의에 금융정상화에 관한 연구지시
  10. 1971년 11월 사채동결을 골간으로 하는 긴급조치의 구상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 득
  11. ~ 1972년 6월 긴급조치를 발표하기 위한 제반작업 진행
  12. 1972년 8월 2일 밤 사채동결과 관련된 긴급조치 청와대 임시국무회의에서 의결공포
  13. 1972년 8월 3일 자정을 기해 시행

이 조치의 결과

  • 이 조치로 기업의 사채이자부담 일시에 약 3분의 1로 경감
  • 사채 또는 은행으로부터의 단기고리 대출금을 장기저리대출금으로 전환
  • 1천억원~1천8백억원 규모로 예측되던 사채규모 3천4백56억원으로 신고됨(통화량의 80%)
  • 과점주주가 사채권자인, 이른바 위장사채가 총 신고사채의 3분의 1인 1천1백37억원

김정렴, 한국경제정책30년사(중앙일보사)에서 재구성

한마디로 엄청난 조치였다. 해방후 우익정부가 기업들에게 남한식 본원적 축적이라 할 수 있는 적산불하, 원조물자 지원 등 막대한 혜택을 주었음에도 우리나라 기업은 자기자본보다 타인자본, 특히 사채 의존도가 높아 재무구조가 취약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제지표 현실화, 세계경제 둔화 등으로 인해 자본위기가 심화되자 사채시장 동결이라는 초유의 조치를 통해 돌파한 것이다. 정책결정자들 입장에서는 그 불가피성에 대해 강변하고 있으나 결국 기업에게는 엄청난 특혜였다. 이후 이들이 경제정의를 실현하겠다고 취한 조치는 기업공개 촉진과 종업원지주제 도입이었다. 그 특혜의 정도를 고려해볼 때에 기업들을 사회화하였어도 불만이 있을 수 없는 조치였음에도 말이다.

(주1) 반면 예금금리는 1년 만기 정기예금 이자율을 연 15%에서 연30% 인상하여 逆금리

(주2) 1970년말 통화량 3천65억원

박정희式 경제개발계획의 기원에 대하여

얼마 전에 이에 관해서 좋은 분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 것이 좋은 계기가 되어 최근 이에 관해 이런저런 서적을 다시 뒤져보고 있다. 여하튼 오늘 구독하는 경제관련 뉴스레터를 읽다보니 경제개발계획에 대한 글이 눈에 띄어 여기에 몇 자 옮겨 둔다.

그러나 1961년 군사혁명으로 사정은 급변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빈곤퇴치를 혁명공약으로 내세우고 자본주의를 지도이념으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2~1966)을 수립했다. 5개년계획 수립은 당시 최고회의 자문위원이던 서울대 박희범 교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강의 기적, 바탕은 경제개발 5개년계획, 김적교 한양대 명예교수]

이에 관해 박정희 정권에서 재무부 장관과 상공부 장관 등을 역임한 김정렴씨는 그의 회고록에서 아래와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朴교수의 참여설이 기사화된 후 신문에는 産業開發公社 아이디어는 국가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이며 이는 민주자본주의가 아니라는 모략적 낭설이 일부 유포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낭설은 朴교수가 서울大商大에서 後進國開發論을 강의할 때 제2차대전 후 독립하면서 사회주의型 사회건설을 표방한 印度의 의회가 1956년 公共事業과 重化學工業 등 중요산업의 國有國營과 모든 기업에 대한 ‘産業免許制度’의 전면적 실시를 주요골자로 하는 ‘産業定策決議’를 채택하고 1956년에 시작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부터 실천에 들어간 것을 호의적으로 소개논평한 바 있었기 때문에 생긴 오해로 짐작되었다.[김정렴, 한국경제정책30년사, p93, 중앙일보사]

김정렴씨의 같은 책에 보면 박희범 교수는 실제로 박정희 정권의 통화개혁 등에도 – 비록 김정렴씨에 따르면 박교수의 안이 채택되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 깊이 관여하는 등 새로운 정부의 경제정책에 여러모로 관여한 것으로 판단된다. 한 자연인의 사상적 선호가 전체 정부의 경제정책과 일맥상통하는 것은 아닐뿐더러 김정렴씨도 – 체재 내 인사인 한계도 있겠으나 – 박정희 정권의 산업개발공사 등 경제에 관한 구상이 국가자본주의 사고방식이 오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러함에도 막 탄생한 정권의 경제정책에 깊이 관여한 이의 가치관이 어떠한 가를 살펴보는 것도 그 정권의 사상적 기조를 파악하는 데 나름 의의가 있을 것 같아 여기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