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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이 우경화된 것이 아니다

국민들이 우경화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념의 부재 속에 표류하고 있는 것이다. 그 와중에 가장 먼저 이념적인 공격을 시작한 쪽은 한나라당을 비롯한 보수진영이다. 진짜로 그렇게 믿는 것인지 몰라도 – 김규항 씨는 그들이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 보수진영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부터 줄그어놓고 ‘좌파’로 규정해버렸다. 한 권영길 후보쯤부터 그어야 그나마 제대로 된 선긋기인데 하여튼 그들은 그렇게 한국의 정치적 지형도를 나름 완성하였다.

재밌는 것이 소위 민주세력들도 선거 때만 되면 보수진영이 그어놓은 이 테두리에 상당히 의존했다는 점이다. 보수진영을 ‘우파’라고 규정하기보다는 ‘부정부패’ 진영이라고 매도하고 나머지 다양한 이념적 분파들을 제멋대로 ‘진보개혁세력’ 내지는 ‘반부패진영’ 내지는 ‘민주화 세력’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는 수구세력의 부정부패 정치, 심지어는 ‘파쇼’ 정치를 막기 위해 ‘단일대오로 뭉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깃발 아래 모이지 않으면 ‘거짓 민주세력’으로 규정하겠다는 망발도 서슴지 않았다.

어쨌든 보수진영과 ‘자칭’ 민주화 세력이 규정하는 이념적 지형도로 보면 거의 60%가 넘는 유권자들이 ‘우파’를 지지한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이념구도를 나눈 이들의 기준으로 보면 사회는 크게 우경화된 셈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에 별로 동의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민주화 세력 VS 근대화 세력’, ‘좌파 VS 우파’, ‘반부패 세력 VS 부정부패세력’ 등 다양한 타이틀매치가 열리건 말건 애초에 유권자들은 정당정치의 진정한 이념정립이 없는 상태에서 투표를 치러야 했던 것이라고 본다. (늘 그래왔지만) 이번 선거 역시 ‘우파’건 ‘좌파’건 상대방의 정책에 대해 이념적 비판을 한 적도 없고 할 의지도 별로 없어보였던 선거였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이명박 후보가 장 초반에 내세운 대운하, 금산분리 철폐에 대해서 그나마 잠깐 대립각이 세워지는 듯 했던 적도 있다. 하지만 BBK 쓰나미가 곧 이런 이슈들을 몽땅 쓸어버렸다. 더구나 이념적 쟁점의 핵이라 할 수 있는 한미FTA는 애당초 선거이슈에서 멀찌감치 밀려나있었다. 주요 후보들이 모두 한미FTA에 찬성하는 통에 말이다. 결국 ‘민주화 세력’의 대표 주자를 자처한 정동영 후보 측은 오매불망 김경준 씨만 바라보았고 그 결과는 오늘 참패로 드러났다.

정동영 후보 혼자만을 탓하고 싶지 않다. 진성 ‘좌파’ 진영의 무기력도 한 몫 한 셈이니 말이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으로 이번 선거가 정책과 이념의 승부가 되지 못한 것은 사실 두 개의 주요정당의 이념적 색채가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언뜻 교육정책, 대북관, 역사관, 또는 대언론관 등에서 불일치를 보이는 듯한 두 정당은 이미 거시 경제적 가치에 있어서는 신자유주의로 대표되는 자유무역 맹신주의, 친기업적인 동시에 반노동적인 마인드, 건설정책을 통한 경기부양 등의 큰 줄기에 있어서는 크게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극단적으로 말해 이번 선거는 초콜릿 싫어하고 딸기 좋아하는 유권자에게 “하얀색 초콜릿 먹을래 검은색 초콜릿 먹을래” 하고 권한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물론 자신이 아직 딸기를 좋아하는지 모르는 유권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또한 진정 서민을 위한 정치를 꿈꾸는 깨끗한 정치세력이 자신의 진가를 그러한 유권자들에게 알려야 할 과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물론 유권자들도 노력해야 할 것이다. 자신이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어떻게 하면 그 음식을 맛볼 수 있는지 정도는 공부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