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패러다임

제러미 리프킨의 『한계비용 제로 사회』 斷想

소위 “미래학자”들의 저서는 별로 읽지 않는 편이다. 취향의 문제이기도 하고 선입견의 문제이기도 한 것 같다. 암튼 최근 피치 못할 사정(!)으로 유명한 제러미 리프킨의 ‘한계비용 제로 사회’라는 책을 일부분 읽었다. 읽었던 서문과 일부 챕터를 요약하자면 기술의 상상을 초월한 발전으로 한계비용이 제로에 가까워지고 이로 인해 “전반적인 최적의 복지”가 이루어지면 다가올 미래는 “협력적 공유사회(collaborative commons)”로 발전할 것이라는 긍정적 세계관에 대한 개론과 각론이랄 수 있다.

그의 이념적 지형은 거칠게 보자면 ‘위험하지 않은 反자본주의자’ 정도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에 자본주의가 추동하는 기술발전에 따라 “한계비용의 제로化”되는 모순이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반체제적이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위해 오스카르 랑게와 같은 맑시스트의 분석이나 케인스의 예언을 인용한다. 그런 한편 자본주의라는 패러다임은 협력적 공유사회가 되도 한동안 존속할 것이라고 유보적 입장을 취한다는 점에서 위험한 사고의 소유자는 아니다.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은 토마스 쿤의 유명한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빌려온 개념이다. 쿤이 패러다임을 처음 쓴 것은 아니지만, 그로 인해 그 단어는 가장 유명해졌다. 패러다임은 “함께 작용하며 통일되고 통합적인 세계관을 확립하는 신념 및 가정 체계로서 설득력이 높고 저항할 수 없는 까닭에 실제 상황 그 자체나 마찬가지로 여겨지는 것”이라 풀이되는 개념이다. 그런 면에서 순응적이고 긍정적인 개념이다. 칼 맑스가 자본주의를 “이데올로기”라 부르며 그것을 일종의 ‘허위의식’이라 부른 것과는 다른 자세다.

이런 점만 봐도 기득권이 제러미 리프킨을 불온시할 이유는 전혀 없다. 오히려 리프킨은 한계비용이 줄어들면서 기존 자본가의 이윤이 줄어들 상황을 염려하면서 로렌스 서머스의 보고서를 인용하며 “일정한 비율로 수익이 증가하는 조건하에 상품이 생산되는 .. 일시적인 독점 권한과 이윤이 민간 사업체에 이러한 혁신에 참여하도록 이끄는 보상이 될 것”이라며 이윤 확보의 로드맵까지 제시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공유경제”, “협력적 공유사회”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탈정치화될 수 있는 논리를 제공한 셈이다.

내가 보기에 그의 이론의 가장 허술한 점은 “한계비용 제로化”를 협력적 공유사회로 가는 키워드로 여긴다는 점이다. 한계비용은 고정비가 일정한 단기적 생산 상황에서 재화나 서비스가 한 단위 늘어날 때마다 추가되는 비용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생산이 늘어날수록 한계노동생산성이 떨어지며 이에 따라 한계비용은 증가한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가 되며 정보재 등은 한계비용이 0에 가까워지는 상황이 연출되며, 리프킨은 이런 상황에 환호하고 있다. 하지만 장기상황에서는 한계비용 이외에 평균비용이 증가할 것이다.

즉, 현재 정보재와 같은 재화의 한계비용이 제로에 가까운 것은 이미 광범위하게 재정이나 투자로 깔아놓은 각종 물적인 인프라스트럭처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장기적으로 이 고정자본은 갱신되어야 한다. 이미 자본주의 황금기에 깔린 미국 등 서구사회의 인프라는 그 생애주기 막바지에 놓여 있어 대규모 갱신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러한 투입비용을 감안한다면 단순히 소프트웨어 다운로드 속도가 빠른 정황만 가지고 한계비용 제로 사회를 외칠 일인지 모르겠다. 그런 정보재에 대한 불평등한 상황은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또 하나 그의 이론은 “최적의 복지” 로드맵이 눈에 띄지 않는다. 얼론 머스크가 북한의 핵보다 더 위험한 것이 인공지능이라고 했다는데, 그들이 인간의 웬만한 모든 종류의 노동을 빼앗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재산이 자산과 소득에서 절대 다수 얻어지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의 종말은 소득의 종말을 의미하기에 일부 벤처캐피탈리스트는 ‘기본소득’을 주장한다. 하지만 리프킨은 “소유주와 노동자의 낡은 패러다임이 무너지고 있다”(215p)고 말할 뿐이다. 노동자는 여전히 당장 돈이라는 “낡은 패러다임”이 필요한데?

* 짧은 독서로 거칠게 쓴 글이니 혹시 내가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의견주시기 바랍니다.

“과학혁명의 구조”를 읽으며 드는 상념

위기에 처한 패러다임으로부터 정상과학의 새로운 전통이 태동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에로의 이행은 옛 패러다임의 명료화나 확장에 의해서 성취되는 과정, 즉 누적적 과정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그러한 변화는 오히려 새로운 기반에 근거해서 그 분야를 다시 세우는 것으로서, 그 분야 패러다임의 많은 방법과 응용은 물론이고, 가장 기본적인 이론적 일반화조차도 변화시키는 재건 사업이다. 그 이행 시기에는 옛 패러다임과 새 패러다임에 의해서 풀릴 수 있는 문제들이 크게 중복될 것이나, 그렇다고 해서 결코 완전히 중복되지는 않을 것이다. [중략] 최근에 통찰력 깊은 어느 과학사학자는 패러다임 변화에 의한 과학의 재편성에서의 고전적 사례를 고찰하면서, 그런 변화는 “지팡이의 다른 쪽 끝을 집어 올리는 것”으로서, 그것은 “똑같은 자료 더미를 이전처럼 다루되 그것들에 종전과는 다른 테두리를 부여함으로써 각각의 자료들을 새로운 관련 체계 속에 놓이도록 하는 것이 포함되는 과정이라고 묘사한 바 있다.[토머스 S. 쿤 지음, 김명자/홍성욱 옮김, 과학혁명의 구조, 2013, 까치, p175]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표현은 토머스 S. 쿤을 모르는 이들조차도 즐겨 쓰는 표현이다. 주로 쓰는 이들은 기존 여당을 물리치고 새로 권력자가 된 야당 지도자랄지, 회사가 위기에 빠졌거나 혹은 직원들이 너무 나태하다고 생각하는 기업 경영인이다. “처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라고 주문한 어떤 유명한 재벌 총수도 당시 “패러다임의 전환”이란 표현을 적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이 표현이 풍기는 뉘앙스를 염두에 두고 했던 말일 것이다.

인용한 부분은 저자가 이 “패러다임의 전환”이 가지는 의미를 핵심적으로 서술한 부분이다. 저자의 의미 해석에 따르면 “한 동안 연구자들의 커뮤니티에 모델의 문제점과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과학적 성취”를 의미하는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과정은 ▲ 누적적인 과정과는 거리가 멀며 ▲ 풀릴 수 있는 문제가 중복될 수는 있으나 완전히 같지는 않을 것인데, 그 이유는 ▲ 지팡이의 다른 쪽 끝을 집어 올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패러다임의 전환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 쓰이는 코페르니쿠스 혁명 이전의 천문학계를 지배했던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는 고대의 체계 중에서 가장 자연에 잘 들어맞는 이론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행성에 대한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 예측은 코페르니쿠스의 것만큼이나 잘 들어맞아 그 계산법은 오늘날까지도 쓰이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프톨레마이오스의 패러다임이 옳다는 증거는 아닌 것이다. 지팡이의 다른 끝을 들어 올린 것이니 말이다.

스스로를 일종의 사회“과학”으로 여기고 있을 경제학계에도 물론 이러한 패러다임이 존재한다. 크게 보아 아담 스미스, 칼 맑스, 존 메이나드 케인즈, 밀턴 프리드만과 같은 경제학자들이 기존 패러다임을 파괴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세운 이들일 것이다. 다만 경제학계가 다른 과학계와 다른 점은 그러한 패러다임이 한 시대를 압도할 수는 있어도, 과학의 패러다임이 그러한 것처럼 이전의 패러다임을 폐기시킬 수 있을 정도는 아니라는 점이다.

과학에서는 이론의 발전과 더불어 관찰도구의 발전도 병행한다. 연구는 제반 변수들이 제거된 순도 높은 환경에서 이루어진다. 그렇기에 기존 패러다임이 새로운 변칙현상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자명해진다면 폐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경제학에서 한 패러다임이 다른 패러다임을 폐기시킬 정도의 파괴력이 없는 이유는 이러한 순도 높은 환경의 조성이 어렵다는 이유일 것이다. 더 중요하게 경제는 정치적 의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정치적 의지를 지니고 있는 집단, 특히 경제적 사익을 추구하고자 하는 동기가 강한 집단이 권력을 갖게 되면 그들은 대개 그러한 사익에 복무할 자세가 되어 있는 관변학자를 동원해 과학으로 둔갑한 경제이론으로 그들의 사익추구를 정당한 공익적 행위, 심지어는 자연의 이치에 부합하는 행위로 둔갑시키고는 한다. 대표적인 것이 부자가 잘 살아야 빈자도 잘 살게 된다는, 그들 스스로도 믿지 않는 “적하이론(trickle-down theory)”일 것이다.

즉, 경제학이라는 “과학”을 연구하는 이들이 유념해야 할 점은 그들이 관찰하는 환경은 자연과학에서의 그것처럼 순도 높은 환경이 아니며, 많은 비합리적인 인간들이 – 또는 연구를 진행하는 본인조차도 – 그 환경 안에 들어가 행동한다는 점일 것이다. 자연과학은 그래도 때가 되면 자신이 지팡이의 다른 쪽 끝을 잡고 있었음을 인정하겠지만, 경제학에서는 오히려 지팡이를 잡은 적도 없는 이들조차도 지팡이가 자기 것이라고 우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