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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퇴근 2시간을 전차에서 허비하게 되면 가정생활에도 문제가”

나의 사견으로는 출퇴근 2시간을 전차에서 허비하게 되면 가정생활에도 문제가 생기는 등 좋지 않으며, 30분이 좋을 듯하다. (중략) 현재 경성시가지계획의 목표 인구는 110만이며, 인천은 20만이다. 여기에 이번에 결정한 구역(경인시가지계획구역) 목표 인구 약 100만, 경성 북부와 동부 방면에 신설할 주택도시에 목표 인구를 약 70만으로 하여, 합계 300만을 수용할 계획이다.[1939년 10월 21일 市街地計劃委員會速記錄 / 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 염복규 지음, 이데아, 2016년, p360에서 재인용]

일본이 우리를 강점하던 시절, 총독부의 제5회 시가지계획위원회에서 총독부 기사 야마오카 케이스케가 했던 발언의 일부다. 1919년 처음으로 『도시계획법』을 제정하여 “도시계획”이란 개념을 자기네 도시공간에 적용한 일본이 이 개념을 한국 땅에도 적용하였고, 상기 인용한 발언은 이러한 공간계획을 도시에서 더 확장하여 일종의 지역계획 내지는 광역계획의 개념으로 접근한 “경인시가지계획”의 사례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각각의 도시는 훨씬 많은 인구가 살고 있어 계획이 소박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지만, 당시로서는 매일신보라는 신문에 “경인 메트로포리쓰 환상곡”이라는 제목의 2면에 걸친 특집기사를 낼만큼 오히려 약간은 무모한 광역도시권 계획에 가까웠다. 흥미로운 점은 인구와 함께 통근시간의 기준치를 제시한 것인데 이를 통해 공간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는 잣대가 된다는 점에서 유용한 기준치일 것이다.


『매일신보』 “경인 메트로포리쓰 환상곡”

야마오카는 “출퇴근 2시간을 전차에서 허비하게 되면 가정생활에도 문제가 생긴다”고 단언하였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아도 이는 타당한 발언이다. 그때보다 노동시간은 어느 정도 줄었을 것이라 가정한다해도 출퇴근에 2시간을 허비하게 되면 소위 “저녁 있는 삶”을 누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경인 메트로폴리스에서는 이것이 현실이다. 서울의 직장인의 출퇴근 시간은 134.7분으로 2시간이 넘는다.

우리나라 직장인의 하루 평균 출퇴근 시간이 약 100분(1시간 40분)이 넘는 것으로 조사됐다. 서울에 사는 직장인의 경우에는 2시간이 넘었다. 17일 취업포털 잡코리아에 따르면 남녀 직장인 820명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하루 출퇴근 소요시간이 평균 101.1분인 것으로 조사됐다. 출근 시간은 48.1분, 퇴근 시간은 53분으로 나타났다. 서울 거주 직장인의 경우 이 시간이 134.7분으로 가장 길었다. 이어 기타 지역 118.8분, 경기도 거주 직장인 113.4분 순이었다.[직장인 평균 출퇴근 시간 101분… 서울은 2시간 넘어, 2017년 7월 17일, 조선일보]

이런 시간낭비를 줄이는 방법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첫째, 교통 인프라스트럭처의 확충이다. 현재 GTX 등 여러 교통계획이 입안되어 있기는 하지만, 재정문제 등 여러 사유로 인하여 추진이 지지부진하다. 좀 더 장기적인 프로세스로는 위성도시가 아우르는 광역도시권이랄지 용도지역을 분할하여 교통을 유발시키는 조닝(zoning)과 같은 계획기법에 대한 반성으로 직주근접 내지는 복합개발을 늘려나가는 방식이 있다.

공간계획이 아닌 대안으로는 노동시간 단축이나 재택근무와 같은 노동을 재배치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이런 대안은 노자 간의 협약이나 노동시간 단축 법안 제정 등의 방법이 있으나 장기적인 효과로 귀결될 것이기에 결국 정부 차원에서는 공간계획의 방법으로 푸는 것이 현실적일 것이다. 문제는 새 정부는 인프라 예산을 대폭 축소했다는 점이다. 인프라가 “건설족”의 먹거리이기도 하지만, 복지이기도 하다는 사실에서 우려되는 대목이다.

제러미 리프킨의 『한계비용 제로 사회』 斷想

소위 “미래학자”들의 저서는 별로 읽지 않는 편이다. 취향의 문제이기도 하고 선입견의 문제이기도 한 것 같다. 암튼 최근 피치 못할 사정(!)으로 유명한 제러미 리프킨의 ‘한계비용 제로 사회’라는 책을 일부분 읽었다. 읽었던 서문과 일부 챕터를 요약하자면 기술의 상상을 초월한 발전으로 한계비용이 제로에 가까워지고 이로 인해 “전반적인 최적의 복지”가 이루어지면 다가올 미래는 “협력적 공유사회(collaborative commons)”로 발전할 것이라는 긍정적 세계관에 대한 개론과 각론이랄 수 있다.

그의 이념적 지형은 거칠게 보자면 ‘위험하지 않은 反자본주의자’ 정도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에 자본주의가 추동하는 기술발전에 따라 “한계비용의 제로化”되는 모순이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반체제적이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위해 오스카르 랑게와 같은 맑시스트의 분석이나 케인스의 예언을 인용한다. 그런 한편 자본주의라는 패러다임은 협력적 공유사회가 되도 한동안 존속할 것이라고 유보적 입장을 취한다는 점에서 위험한 사고의 소유자는 아니다.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은 토마스 쿤의 유명한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빌려온 개념이다. 쿤이 패러다임을 처음 쓴 것은 아니지만, 그로 인해 그 단어는 가장 유명해졌다. 패러다임은 “함께 작용하며 통일되고 통합적인 세계관을 확립하는 신념 및 가정 체계로서 설득력이 높고 저항할 수 없는 까닭에 실제 상황 그 자체나 마찬가지로 여겨지는 것”이라 풀이되는 개념이다. 그런 면에서 순응적이고 긍정적인 개념이다. 칼 맑스가 자본주의를 “이데올로기”라 부르며 그것을 일종의 ‘허위의식’이라 부른 것과는 다른 자세다.

이런 점만 봐도 기득권이 제러미 리프킨을 불온시할 이유는 전혀 없다. 오히려 리프킨은 한계비용이 줄어들면서 기존 자본가의 이윤이 줄어들 상황을 염려하면서 로렌스 서머스의 보고서를 인용하며 “일정한 비율로 수익이 증가하는 조건하에 상품이 생산되는 .. 일시적인 독점 권한과 이윤이 민간 사업체에 이러한 혁신에 참여하도록 이끄는 보상이 될 것”이라며 이윤 확보의 로드맵까지 제시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공유경제”, “협력적 공유사회”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탈정치화될 수 있는 논리를 제공한 셈이다.

내가 보기에 그의 이론의 가장 허술한 점은 “한계비용 제로化”를 협력적 공유사회로 가는 키워드로 여긴다는 점이다. 한계비용은 고정비가 일정한 단기적 생산 상황에서 재화나 서비스가 한 단위 늘어날 때마다 추가되는 비용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생산이 늘어날수록 한계노동생산성이 떨어지며 이에 따라 한계비용은 증가한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가 되며 정보재 등은 한계비용이 0에 가까워지는 상황이 연출되며, 리프킨은 이런 상황에 환호하고 있다. 하지만 장기상황에서는 한계비용 이외에 평균비용이 증가할 것이다.

즉, 현재 정보재와 같은 재화의 한계비용이 제로에 가까운 것은 이미 광범위하게 재정이나 투자로 깔아놓은 각종 물적인 인프라스트럭처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장기적으로 이 고정자본은 갱신되어야 한다. 이미 자본주의 황금기에 깔린 미국 등 서구사회의 인프라는 그 생애주기 막바지에 놓여 있어 대규모 갱신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러한 투입비용을 감안한다면 단순히 소프트웨어 다운로드 속도가 빠른 정황만 가지고 한계비용 제로 사회를 외칠 일인지 모르겠다. 그런 정보재에 대한 불평등한 상황은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또 하나 그의 이론은 “최적의 복지” 로드맵이 눈에 띄지 않는다. 얼론 머스크가 북한의 핵보다 더 위험한 것이 인공지능이라고 했다는데, 그들이 인간의 웬만한 모든 종류의 노동을 빼앗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재산이 자산과 소득에서 절대 다수 얻어지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의 종말은 소득의 종말을 의미하기에 일부 벤처캐피탈리스트는 ‘기본소득’을 주장한다. 하지만 리프킨은 “소유주와 노동자의 낡은 패러다임이 무너지고 있다”(215p)고 말할 뿐이다. 노동자는 여전히 당장 돈이라는 “낡은 패러다임”이 필요한데?

* 짧은 독서로 거칠게 쓴 글이니 혹시 내가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의견주시기 바랍니다.

인프라스트럭처에 대한 레옹 왈라스의 잘못된 견해, 그리고 잡념

우리는 첫 번째 범주 속에 토지를 넣는다. 사설 또는 공공의 공원과 정원으로 꾸며진 토지, 나무 및 온갖 종류의 식물·과일·채소·곡식·사료 등을 인간과 동물의 식량으로 산출하는 땅, 주택이나 공공건물·농막·공장·작업실이나 창고 등이 건설된 토지, 교통로로 사용되는 토지, 거리·도로·광장·운하·철도 등이 그것이다. [중략] 토지는 <자연적> 자본이며, 인공적이거나 생산된 자본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사용에 의해서 파손되지 않고 사고에 의해서 소멸되지 않는 <비소모성> 자본이다.[레옹 왈라스 지음, 심상필 옮김, 순수경제학 사회적 富에 관한 이론, 민음사, 1996년, pp 200~202]

저명한 경제학자 슘페터가 “현대경제학의 마그나카르타”라고 칭송했다고 알려져 있는 레옹 왈라스의 ‘순수경제학’ 중 일부다. 인용한 부분은 소위 “생산의 3요소”로 알려진 토지, 노동, 자본 중 토지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다. 책 소개에 따르면 이 책은 “오로지 자유경쟁과 자유주의 경제만이 부를 증진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쓰인 책이다. 저자는 그 자유경쟁에서 생산의 3요소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부를 증진시킬 수 있는 것인가에 관해 설명하기 위해 우선 개별 요소들의 특성과 사례를 나열하고 있는 것이다.

위 부분을 인용한 이유는 적어도 이 부분의 묘사만 보면 왈라스는 “거리·도로·광장·운하·철도 등” 이른바 인프라스트럭처를 “자연적 자본”이라 칭하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왈라스는 심지어 인프라스트럭처를 “인공적이거나 생산된 자본이 아니”라고 묘사하고 있다. 대량생산·대량소비 이전의 시대의 토지에 반(半)자연적으로 형성된 길이라면 모를까 나열한 인프라스트럭처가 인공적인 자본이 아니라고 간주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란 생각이 든다. 이 책이 출판된 해가 1874년이란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즉, 이 오류는 한 세기 전에 나온 애덤 스미드의 ‘국부론’이 인프라스트럭처의 개념을 비교적 정확하게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스미드는 인프라스트럭처를 “공공시설(public works)”라 칭하고 국가가 그 시설을 관장하는 것이 “상업일반의 촉진에 유리”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에 반해 왈라스는 인프라스트럭처를 자연적이고 소멸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는 그가 토지, 노동, 자본 중에서 자본을 ‘동산(動産) 자본’으로 범주화하면서 인프라스트럭처를 부동산으로 분류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

한편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에서의 인프라스트럭처의 일반적인 통념을 보자면 묘하게도 오히려 스미드의 의견보다는 왈라스의 의견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즉, 인프라스트럭처는 상업일반의 촉진을 위해 의식적으로 구축해야 한다기보다는, 일종의 주어진 환경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인프라스트럭처가 대규모로 구축되던 시기가 자본주의 고도 성장기에 집중되어 있고 그 내구 연한이 비교적 길기 때문이랄 수 있다. 하지만 최근 인프라스트럭처의 건설수요는 제3세계뿐만 아니라 발달한 서구권에서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인프라스트럭처는 결구 “파손되지 않거나 소멸되지 않는 자본”이 아니다. 기술과 제도의 발전에 따라 인프라스트럭처의 형태나 효율이 좀 더 스마트해질 수는 있을지언정 전국적인 세계적인 규모의 경제행위가 거스를 수 없는 추세인 한에는 인프라스트럭처는 개보수되거나 새로이 건설되어야 한다. 그리고 향후 10~20년 사이에 경제개발의 정도와 상관없이 인프라스트럭처 건설에 대한 거대한 사이클적 수요가 발생할 것으로 관측된다. 이 경우 비용과 운영의 부담주체는 누구로 해야 할 것인가가 새로운 갈등의 씨앗이 될 것이다.

인도 은행들의 부실자산 급증 상황에 대하여


출처 : Dealogic Project Finance Review(1H 2012)

이런 인도의 상황과 관련하여 한 가지 특이점이 있다. 위의 표는 최근 5년간 전 세계 민간투자사업(PPP, Public Private Partnership)의 지역별 추이다. PPP는 정부에서 필요한 인프라시설을 건설할 때 민간의 자금을 빌리는 방식으로 통상 경제성장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하지만 재정이 부족할 때 쓰는 방식이다. 즉, PPP방식으로 투자를 하면 단기적으로는 단기적으로 재정도 건전해지고 경제성장률도 올라간다. 표를 보면 인도의 PPP 활용도는 워낙 압도적이어서 Dealogic이 아시아와 별개로 떼놓았을 정도다. 경제성장 여력이 있던 2008년까지 미미하던 인도의 PPP투자는 2011년에 이르러서는 압도적으로 증가한다. 역시 경제성장률을 위해 인프라 투자를 주도했던 중국이 재정을 활용한 것과 달리 인도는 민간자본을 이용했고, 이는 결국 미래의 빚으로 이연된다는 점에서 인도의 경제상황은 생각보다 더 위험할지도 모른다.[인도경제의 관전 포인트 하나]

이 블로그에 2년 전에 위와 같은 글을 쓴 적이 있다. 아래 인용한 월스트리트저널의 최근 기사를 보면 이런 우려가 벌써 현실화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하는 내용이 있다. 즉, 경제침체에 직면한 인도정부는 인프라스트럭처를 포함한 다섯 개 부문에 국영은행을 동원하여 대출을 집중하였다. 이런 대출방식은 주로 PPP 등을 활용한 기업대출 방식이었을 것이다. 즉, 인도 정부는 이런 시장조성에 민영화 – 정확하게는 시장화 – 방식을 선호하였고 국제 금융기관이 아닌 손쉬운 국내 국영은행을 투자자로 끌어들인 것으로 보인다.

인도 은행들의 부실대출은 대개 인프라스트럭처와 산업개발에 집중된 2008년에서 2010년까지의 방만한 기업대출의 유산이다. 2008년 금융위기로 촉발된 세계 경기침체의 효과가 인도에도 미치면서 성장은 지체되고 업계의 대형 계획도 어려움을 겪었다. [중략] 이 나라의 중앙은행의 추산에 따르면 광산, 철강 생산, 섬유, 인프라스트럭처, 그리고 항공 등 다섯 개 부문은 인도의 전체 은행 대출의 4분의 1에 달하고 부실 자산의 2분의 1에 달한다. 정부 보고서에 따르면 인도 은행 자산의 70%를 들고 있는 국영은행들은 2014년 현재 전체 부실 대출의 거의 90%를 들고 있어서 가장 고통 받고 있는 기업들이다. [중략] 대출 사태의 중심에 있는 대규모 인프라스트럭처 프로젝트가 건설한 이들에게 대출을 제대로 되갚을 수 있는지에 대한 심각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사람들은 일단 운영에 들어가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어요. 난 그런 논리가 의문스럽습니다.” 피치 레이팅스의 인도 계열사인 인디아 레이팅스의 임원인 Ananda Bhoumik의 말이다.[Bad Loans Impede India’s Economic Growth]

어느 나라나 경제가 어려우면 인위적으로 경제성장률을 높일 수 있는 카드로 인프라스트럭처 투자를 선호한다. 내 글에 언급했던 중국이 그러했고 4대강 사업을 밀어붙인 MB정부가 그러했다. 다만 두 정부는 아직 여유가 있는 예산을 활용한 재정지출 방식으로 사업을 추진했다. 1 2 하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 인도 정부는 PPP방식 등 인프라스트럭처의 시장화로 투자를 주도하였고 불과 5년이 흐른 지금 이들 대출은 빠르게 부실화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정부 주도의 양적성장 일변도의 경제정책이 부작용을 빚은 전형적 사례다.

사실 모든 인프라스트럭처 투자가 그렇게 빨리 부실화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특히나 인프라스트럭처의 시장화는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투자 과정에서 다양한 주체가 자산실사와 사업타당성 분석 과정을 통해 의사결정을 보다 엄밀하게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방식임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인도에서의 그 과정은 주된 시장참여자가 국내 국영은행이었다는 점에서 부조리한 관치의 냄새가 난다. 결국 인도의 시장화는 시장화의 장점도 살리지 못한 채 금융권만 부실화시키는 이중의 패착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대체투자, 인프라스트럭처, 공익성 등에 관한 단상

“대체투자(Alternative Investment)” 시장은 전통적인 투자시장인 주식, 채권 등과 달리 Private Equity, 부동산, 인프라스트럭처 사업, 원자재 등에 투자하는 시장을 말한다. 이 시장은 전통적인 투자시장의 계속되는 낮은 수익에 대한 피난처가 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100개의 가장 큰 규모의 대체 펀드 그룹의 자산은 지난 해 6% 성장한 3조3천억 달러에 달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중 가장 핫한 투자자들이 바로 연기금들이란 점이다.

연기금들은 가장 큰 100개의 펀드 하우스에 투자한 돈 중 1조3천억 달러를 구성하며 대체 자산 매니저들에게 있어서 자본의 가장 중요한 원천으로 남아 있다. 대체 펀드 산업에게 연기금 자금의 중요성은 줄어들지 않을 것 같다고 Rajan 씨는 믿고 있다. 그는 유럽 연기금의 약 4분의 1이상이 현재 적자의 현금흐름이며 전후의 가장 큰 규모의 베이비부머들이 은퇴함에 따라 다음 5년 동안 이 숫자는 두 배 더 악화될 것이라고 지적했다.[Pension funds seek ‘sweet spot’ in alternatives]

대체투자 시장은 1980~90년대 이후 금융의 세계화, 국유 인프라스트럭처의 민영화 추세, M&A 시장이 성장 등과 맞물려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왔다. 하지만 여전히 “전통적” 투자 시장에 비해서는 규모가 작았지만 그 규모가 날로 늘어나서 인용기사의 말미에도 나오듯이 앞으로 “대체가 주류가 되는” 시절이 올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러한 성장세에 가장 큰 기여를 하고 있는 집단이 각국의 연기금인데 이는 개인적으로 참 흥미로운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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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acuated Highway 401 Color” by Kenny Louie. Licensed under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즉, 대체투자, 특히 인프라스트럭처와 같은 전통적으로 국가가 공급하던 소위 “공공재”가 시장화되면서 그 투자자로 다시 공공의 돈이라 할 수 있는 연기금이 참여하는 현상은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국면의 사회적 투자행태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전에도 한번 쓴 적이 있듯이 인프라스트럭처의 소비자로서의 공공과 투자자로서의 공공 간의 긴장관계를 낳기도 한다. 소위 “공익성”에 대한 새로운 고민이 필요한 지점이다.

앞으로 대체투자 시장이 정말 주류가 되고 국경간 지역간 투자와 소비가 이렇게 다양한 주체로 나누어지다 보면 경제학자 또는 사회학자들은 이러한 새로운 갈등관계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에 대한 숙제를 떠안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국민연금이 미국에 투자한 도로 사업이 미국정부에 의해 “공익성”이라는 이름하에 – 한국인이 보기에 – 부당하게 몰수당한 정황이 있을 경우 한국의 좌파 경제학자는 어떤 해석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인가?

인프라스트럭처에 관해 존재했던 “사회적 합의”

최근 서울시의 지하철9호선 민간투자사업이 “자금재조달”을 통해 금융비용을 크게 낮추고 요금도 현행을 유지하는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하는 변경 실시협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몇 달 전 민간사업자가 “기습적으로” 지하철 요금을 인상하려던 계획을 서울시가 저지하면서 빚어졌던 갈등이 일단락됐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이 과정에서 “시민의 발”을 민간사업자의 횡포로부터 지키는 수문장 역할을 하는 정치적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민영화”라는 키워드는 오늘날 진보-보수 논쟁에서 핵심적인 키워드로 등장하였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계속 진행되어 온 국유기업의 민간매각, 그리고 전통적으로 국가가 담당하였던 것으로 알려진 인프라스트럭처의 – 또는 사회간접자본 – 민영화, 즉 민간투자사업은 이전 세대가 겪어왔던 것과는 또 다른 경험을 안겨주면서 갈등의 요인이 되고 있다. 앞서 예로 든 지하철을 둘러싼 市정부와 민간사업자의 갈등이 대표적 사례다.

하지만 통념과 달리 민간투자사업이 문명세계에 있어 전혀 새로운 풍경인 것은 아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아직 국가의 정체성이나 공권력이 형성되지 않았던 시기에는 오히려 민간이 오늘날 “인프라스트럭처”라 말하는 대부분의 것을 만들었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인프라스트럭처”라 칭할만한 정도의 시설이 등장하는 시기와 장소는 아무래도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싹을 틔우는 중세 이후의 시기의 선진국, 예를 들면 영국과 같은 나라에서다.

대량생산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영국의 자본가들은 생산지, 공장, 그리고 시장을 잇는 데 필요한 운하나 도로를 직접 건설하거나 국가가 건설하여줄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미 이 당시에 도로와 같은 인프라스트럭처가 민간 사업자에 의해 건설되고 요금을 징수하는 방식이 도입된다. 영국에는 이미 13세기 초반부터 포도세(鋪道稅, Pavage) 제도가 있었는데 민간이 도로를 건설하여도 통행자들에게 요금을 징수할 수 있었다.

이러한 민간도로가 본격화된 것은 17세기부터다. 당시엔 “유료도로 위탁업자(turnpike trusts)”가 국가의 양허권을 얻어 자신이 만든 도로에 차단기와 담을 설치하고 지나다니는 이들에게 통행료를 받았다. 오늘 날의 도로 민간투자사업의 사업방식과 별로 다르지 않다. 요금수준은 도로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수준으로 한정했지만 때로는 폭리도 있었던 모양으로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두 배 이상의 요금을 받고 있다”고 꾸짖을 정도다.

이러한 민간도로는 이후 18세기 들어 국가가 직접 간선도로를 짓기 시작하고 레베카 폭동 등 요금에 대한 저항이 거세지면서 – 다만 이 폭동은 자연재해와 학정 등 일반적으로 열악한 인민의 삶에 대한 저항이었다 – 19세기 이후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특이한 것은 민간도로의 쇠퇴에 아담 스미스를 비롯한 고전적 자유주의 경제학자의 역할도 컸다는 점이다. 이들이 민간도로의 통행료를 자유무역의 걸림돌, 즉 관세로 보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자들에게는 당연한 이치인 것처럼 여겨지는 인프라스트럭처에 대한 민간의 사업권이 실은 고전적 자유주의 경제학자에게는 불편한 풍경이었던 셈이다.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적지 않은 지면을 할애하여 “공공시설(public works)”은 국가에 의해 관장되는 것이 바람직한데, 영국정부에게 이미 프랑스와 중국은 그렇게 하고 있다고 훈계하기도 한다. 아담 스미스가 이런 주장을 하는 이유는 “상업 일반의 촉진에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도 도로, 철도, 운하 등이 없이 상업 일반의 발전은 상상할 수 없었다. 오늘 날에는 이와 더불어 통신, 발전 등의 인프라스트럭처가 제대로 갖춰져야 상업 일반의 발전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 인프라스트럭처들이 민영화 등을 통해 시장가격化 된다면 그것은 과거 자유무역을 가로막았던 관세처럼 상업, 나아가 산업 일반의 발전을 저해할 것이기에 고전경제학은 인프라스트럭처의 국가 관리를 지지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인프라스트럭처의 민영화가 전례 없이 진행된 요즘에도 국가는 여전히 산업과 가계의 인프라스트럭처 소비에 대해 차별적인 정책을 취하며 산업의 발전을 돕는다. 전기, 철도 등 주요 시설의 이용요금은 민영화 여부와 상관없이 가계보다 산업이 더 적은 비용을 지불한다. 이쯤 되면 결국 인프라스트럭처를 둘러싼 논의에 관리주체로 인한 정당성 논의도 필요하지만 그 소비의 차별에 대한 정당성 논의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산업에 대한 특혜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산업이 그만큼 세수에 책임을 진다는 명분이다. 하지만 기업들이 초국적으로 활동하며 특정국에서 누리는 이익에 상응하는 대가를 회피한다는 비판도 높다. 또는 세수에 있어서도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2013년 1~6월까지 우리나라의 법인세 실적은 25.6조원인데 소득세 22.8조원을 약간 넘는 수준이다.1 사실상 가계 부담인 부가세 27.9조원을 감안하면 그 비중은 더 낮아진다.

하버드의 경제학자에서 의원으로 변신한 엘리쟈베스 워렌은 저 유명한 가정집에서의 연설에서 기업이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국가가 배려하는 배경에는 그들이 상응하는 사회적 책임을 진다는, 일종의 사회적 합의가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비록 그 합의는 서명이 된 합의서가 존재하지는 않지만 많은 이들이 그것을 전제로 경제활동을 하였거나 또는 자신의 사상을 펼쳤을 것이다. 지금은 일상적으로 무시되고 있는 그 합의.